정신자살
작가 : 도진기
출판 : 들녘
발매 : 2011.07.04.
판사님의 은밀한 취미생활, <정신자살>
1년 전 실종된 아내, ‘한다미’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길영인’은 자살을 생각하지만 무서워서 자살을 실행하지는 못한다. 그러던 와중, 그는 ‘정신자살연구소’라는 수상한 곳과 접촉하게 되고 육신의 고통 없이 정신만 죽여준다는 연구 소장의 말을 듣고 정신자살 시술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아내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는커녕, 그는 아내에 대해 더욱 집착하게 되고, 결국 아내의 실종에 ‘태정우’라는 남자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동시에 다른 장소, 가평의 어느 팬션에서 ‘고진’은 어느 살인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경찰은 피해자 ‘천나영’을 죽이고 도망친 범인 남편 ‘태정우’를 쫒지만 고진은 이 사건에는 다른 내막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개인적인 조사 끝에 이 사건에 길영인이라는 인물이 관련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아내의 실종과, 정신자살 연구소, 숨겨진 사건들의 내막.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 내린 결론은 무엇일까?
<정신자살> 줄거리
저는 한국 미스터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는 굳이 손이 안 간다는 점이죠. 제 독서 취향은 일본 미스터리에 가깝지만 영미 쪽, 고전추리소설 중에서도 재밌는 작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게다가 판타지나 로맨스가 주축이 되는 우리나라 장르소설의 환경에서 미스터리는 그 작품 수가 상당히 부족한 편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대체제가 많고 작품 수는 턱없이 적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좀 더 직접적인 이유인데, 막 미스터리에 빠졌을 무렵 큰맘 먹고 지른 ‘한국 추리소설 걸작선’이 너무 재미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추리’, ‘걸작’선인데, ‘추리’가 아닌 작품도 있을 뿐더러 ‘걸작’은 더욱 드물었죠. 물론 재미라는 것에 개인차는 있겠지만, 기대했던 만큼 실망도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의 한국추리소설걸작선... 1권, 2권 권당 만 오천원씩이나 하지만 제 값은 못하는 것 같다.
도진기 작가의 본업은 특이하게도 지방법원 부장판사입니다. 판사와 작가 둘 중에 한 가지도 이루기 힘든 것을 도진기 작가는 둘 다 이루었죠. 이 점도 대단한데, 작품의 퀄리티도 훌륭한 편입니다. 제가 도진기 작가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한국 추리소설 걸작선’ 중 그의 데뷔작 <선택>인데, 1권과 2권, 수많은 단편 중에 가장 재밌었던 단편이었습니다.
이후 몇 년이 지나 저는 우연히 ‘미스테리아’라는 추리소설 전문잡지에서 그의 또 다른 단편을 보게 됩니다. <구석의 노인>이라는 이름의 단편은 법정의 진실공방 속, 방청객의 노인이 의외의 통찰을 보인다는 내용으로, 에마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을 오마주한 느낌의 단편이었습니다. 이 역시 꽤 제 취향에 맞아서 언젠가 도진기 작가의 작품을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에마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
미스테리아 1권에 실린 도진기 작가의 <구석의 노인>, 이름과 스토리 구성이 비슷한 것을 보면 오마주가 아닐까?
그 결심 끝에 찾게 된 것이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입니다.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는 작년 5월 27일에 출간된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로 벌써 5번째 작품이 나오는 꽤 오래된 시리즈인데요.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고진’은 어느 날 갑자기 판사직을 내던지고 변호사가 된 후 사무실도 차리지 않고 법정에도 나가지 않으며 오직 뒷길에서 들어오는 의뢰만 받아들여 ‘어둠의 변호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특이한 캐릭터입니다.
도진기 작가의 작품을 전부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작가 본인이 판사이기 때문일까요? 도진기 작가의 작품 속에는 항상 ‘법의 한계’에 대해 다룹니다. 하지만 특히 이 고진이라는 캐릭터는 그 ‘법의 한계’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무기 삼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데 사용합니다.
<역전재판 시리즈>로 비유하자면 고진은 왼쪽의 나루호도보다는 오른쪽의 나루호도와 가깝다.
꽤나 책이 두껍습니다만, 분량은 그리 문제 되지 않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처럼, 문체가 간결하고 대사위주의 진행이라 술술 읽힙니다. 전개도 빠른 편이구요. 또 다른 400페이지 대 소설보다 유난히 두껍기도 해서, “어? 벌써 이만큼 읽었어?” 하며 읽어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초반을 제외한 전개가 ‘범인은 누구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머릿속에 계속 물음표를 그려가며 읽어갈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다음페이지를 읽게 하는 것’인데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역할만큼은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반전도 좋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가 뿌려놓은 복선이 모두 이어지는 순간, 즉 인물의 내막이 드러나는 순간이 오는데, 적어도 엔딩을 제외하면 두 번은 놀랐던 것 같습니다.(엔딩은 다른 의미로 놀랐지만.) 반면에 엔딩은 극히 호불호가 갈립니다. 한마디로 추리소설스럽지 않은 ‘괴기엔딩’이라고 해두죠.
엔딩은 아야츠지 유키토의 단편집 <프릭스>가 생각났다. X무 위키에선 이것을 에도가와 란포의 영향이라고 하기도...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었던 소설이기에 몇 가지 아쉬운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우선, 반전을 위해 무리하게 이야기를 엮어놓은 느낌이 납니다. 작품 속의 모리아티 역인 ‘이탁오’박사가 그 반증인데. 작품 속에서 내내 정신 분석과 심리학 쪽 박사처럼 보이다가, 나중에는 ‘불법 외과 시술(?)’도 합니다. 반전의 임팩트 때문에 다소 중화되었지만, 등장인물 중 ‘신재인’의 이력은 너무 우연성이 짙다고 생각합니다.
또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2011년도에 나온 작품답지 않게 너무 클래식하다는 점입니다. 주인공 측 인물인 고진, 이유현, 류경아는 각각 변호사, 형사, 술집마담인데 이 인물구도는 마치 노린 것처럼 고전 하드보일드 탐정물의 흔히 나오는 인물구도입니다. 하지만 현대에 변호사와 형사, 술집마담이 하하호소 웃으며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 장면은 너무 작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고진의 오글거리는 드립 역시 작품에서 마이너스가 되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고진 아재, 제발 여자 앞에서 이상한 드립 좀 치지마!
총평
-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는 국내 미스터리 입문으로는 손색없는 작품이다.
-도진기 작가의 작품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테마는 법의 한계, 그리고 클래식의 현대적 해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자살>은 너무 고전스럽지만은 않다.
written by Te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