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셰익스피어의 희극「베니스의 상인」은 당대 희곡 중에서도 드물게 인종차별에 대한 뉘앙스가 드러난 작품이다. 허나 극 중 악역인 샤일록의 인물적 특징으로만 여겨져 ‘유대인적인’ 악함이라기보다는 악한 데다가 ‘유대인’인 그의 모습만이 묘사될 뿐이다. 때문에 샤일록에 대한 해석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할 수 있으나 오롯이 그의 인종적 특성을 조명하기에는 묘사의 정도가 약한 것이 사실이다. 허나 단순한 악역이라기에는 묘사에 대한 작가의 수고가 어느 정도 들어가 있고, 이는 결과적으로 샤일록이 받는 인종적 천대가 논의되게끔 해주었다.
본 패러디에서는 원작을 다소 여러 방향으로 비틀어보려 한다. 유대인 샤일록 흑인 샤일록으로, 양심적인 상인 안토니오는 오만한 노예상으로, 상속녀 포셔는 하녀 네리사와의 레즈비언적 사랑을 위해 사건으로 돈을 챙기려는 이기적 인물로 변화한다. 포셔는 네리사와의 도피를 위한 자금 마련의 일환으로 샤일록에게 거래를 제시하며, 이를 통해 샤일록은 법정에서 승리를 거둔다.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갈등에서는 탈식민주의적 글쓰기를 시도해 보았으며, 포셔와 샤일록의 모의를 통해 법정이라는 ‘구조’에서 패배당한 안토니오와, 궁극적인 ‘승리’를 얻지 못한 샤일록이라는 개인을 조명하려 한다.
5막 구성의 원작을 모두 서술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여기에는 총 네 토막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첫 번째로 안토니오가 친구 바사니오의 결혼 지참금 마련을 위해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려는 장면, 두 번째로 포셔가 네리사와 함께 법정을 조작할 것을 모의하는 장면, 세 번째로 법정이 열리기 전 포셔가 샤일록을 포섭하는 장면. 마지막으로 안토니오가 법정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장면이다.
등장인물
샤일록(Shylock) : 자유인, 고리대금업자
안토니오(Antonio) : 노예상인
바사니오(Bassanio): 안토니오의 친구. 포셔에게 청혼한다.
포셔(Portia): 벨몬트의 유산 상속녀
네리사(Nerissa) : 포셔의 하녀
살레리오(Salerio): 안토니오의 친구
그레시아노(Gratiano): 안토니오의 친구
공작 : 샤일록과 안토니오 사건의 재판관
코로스(Chorus) : 베니스의 고관들, 법정의 관리들, 간수, 하인들, 시종들
#1. 베니스, 샤일록 집 앞에 있는 광장
(무대에 바사니오와 샤일록이 등장)
샤일록 삼천 두카트라, 으음
바사니오 그렇소이다. 기한은 삼 개월이오.
샤일록 삼 개월이라, 으음.
바사니오 이미 말했듯이 보증은 안토니오가 설 것이오.
샤일록 호오, 그 안토니오가 보증을 선다? 으음.
바사니오 나를 도와주겠소? 청을 들어주겠소? 당장 답변을 해주시오.
샤일록 삼천 두카트를 삼 개월이라, 안토니오가 보증을 선다, 으음.
바사니오 어떻게 하시겠소?
샤일록 안토니오는 좋은 사람이오.
바사니오 나도 그렇지 않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소.
샤일록 아니, 아니, 아니,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그 작자가 보증인으로는 썩 괜찮다는 말이외다. 아시다시피 그의 전 재산은 지금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잖소? 트리폴리스로 배 한 척이 가고 있고, 또 한 척은 서인도로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거래소에서 들었소만 세 번째 상선은 맥시코로, 네 번째는 영국으로 가고 있으며, 그 밖에도 해외 각지로 그의 상품을 뿌려놓고 있단 말이오. 그런데 말야, 배는 널빤지에 불과하오. 선원들도 사람이오. 땅에는 산적, 바다에는 해적이 있소. 이것들이 날뛰고 있는데다가 파도는 치고 바람은 몰아치며 암초도 무시할 순 없소. (방백)하물며 그가 취급하는 상품은 그냥 물건이 아니지. 나와 같은 검은 피부를 가진 엄연한 인간을 사고팔다니! (다시 바사니오에게) 이런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 사람이면 괜찮겠소. 안토니오의 보증을 받고, 삼천 두카트를 빌려드리도록 하지.
바사니오 염려하지 마시오.
샤일록 나도 걱정을 뿌리치고 싶소. 안심하려면 심사숙고해봐야겠지. 안토니오를 만나서 얘기를 하고 싶소만, 만날 수 있소?
(안토니오 등장.)
바사니오 안토니오가 왔구려.
샤일록 (방백) 오만한 왕족같은 상판을 하고 있군! 나는 저 놈이 싫다. 사람을 사고팔기 때문이지. 그보다 더 싫은 것은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데에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 채 잘 나가는 상인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저놈은 오직 하얀 피부를 가진 인간만을 존중하고, 검은 피부를 가진 이들을 길에 차이는 돌덩이만도 못한 존재로 본다. 네놈의 약점을 한 번 잡았다 하면, 내가 핍박받는 이들의 대변자가 되어 원한을 풀 것이야. 나 또한 족쇄에 묶여있던 과거가 있으니. (안토니오에게 돌아서면서) 안녕하시오, 지금까지 당신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안토니오 샤일록, 나는 본래 당신네 같은 자유인들과는 거래하지 않는 주의인데, 내 친구의 급전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이번만은 내 관습을 깨도록 하지. (바사니오에게) 저 흑인에게 말했나, 자네가 필요한 돈을?
샤일록 들었소, 알다시피 삼천 두카트는 큰돈이오.
안토니오 어떤가, 샤일록. 빌려주겠는가?
샤일록 당신은, 내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고약한 짓이라고 거래처에서 날 비난했었소. 그뿐인가, 당신은 나를 미개인 주제에 백인 행세를 한다고 낮잡아 부르고, 내 피부색이 불길하다하여 이 몸 위에 침을 뱉었었지. 내가 합당하게 번 돈을 내 마음대로 이용한다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나는 언제나 어깨를 움츠리고 꾹 참아왔었소, 우리 조상님이 그러했고, 지금 나의 동포들이 그러듯. 그런 내게 당신이 이렇게 도움을 청하러 오셨소. 얼마나 우스운 일이오? 나한테 와서 기껏 한다는 말이 “샤일록, 돈 좀 빌려줘” 라고 아우성이니 말이지. 내게 가래침을 내뱉은 당신이, 현관에서 들개를 걷어차듯 내게 포악했던 당신이 돈을 빌려달라니 말이오. 내가 뭐라고 응답해야 하겠소?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떻소? “들개가 무슨 돈이 있소? 들개에게 삼천 두카트를 빌릴 수 있소?” 아니면 허리를 이렇게 구부리고 노예처럼 벌벌 떨면서 숨을 죽이고 기죽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까? “나으리께서는 지난 수요일 저에게 침을 뱉으셨고, 언젠가는 또 제게 발길질을 하셨고, 또 어느 때는 저를 들개라고 부르셨는데, 그 답례로 저는 거금을 나으리께 통용해 드리겠나이다.”
안토니오 나는 지금부터 너를 들개라고 부르겠다. 너에게 침을 뱉고 발길질도 할 것이다. 검둥이들은 본시 그리 다뤄야하고, 가증스런 자유인의 신분이라 해도 이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 돈을 빌려줄 바에는 원수에게 빌려준다고 생각하라, 그러면 계약이 파가되더라도 당당히 위약금을 받아갈 수 있을 테니.
샤일록 (방백) 눈과 귀마저 하얗게 꽉 막혀 있으니 스스로 뭐가 문제인지 깨닫질 못하는구나! 이렇게 되면 도리가 없다. (안토니오에게) 원수라니, 나는 이번 기회에 그대와 동등한 친구가 되어 우정을 나누고 싶어 한 소리를 곡해하진 마시오. 이참에 제 호의를 확실히 보여 드리도록 하지. 한 공증인에게 가서 도장만 찍으면 끝이오. 쉽지 않소?
안토니오 그게 끝인가?
샤일록 당신처럼 신용이 높은 사람이 계약을 파기할 거라고 생각은 않으니. 그러나 이것은 농담 삼아 하는 말인데, 증서에 기록된 대로 지정된 날짜에, 지정된 장소에서, 지정된 액수의 돈을 돌려주시지 않으면, 그 위약금 대신 당신의 살점 일 파운드를 주시기 바라며, 그 살점은 제가 좋아하는 부위에서 잘라내도록 허락해 주십사하는 것이오.
안토니오 야만인다운 조건이군. 허나 자네도 문명에서 배운 게 있으리라 생각하네. 그것은 친절함 그리고 자비 같은 인간의 미덕이겠지. 증서를 날인토록 하지.
바사니오 나 때문에 그런 증서에 날인하면 안 돼. 그렇게 할 바에야 지금처럼 궁색한대로 남아 있겠네.
안토니오 걱정 말게. 위약할 일은 없을 테니. 앞으로 두 달 안으로 증서에 기록돼 있는 액수의 아홉 배나 되는 돈이 돌아오게 되어 있어. 그 기간이면 한 달이나 여유가 있네.
샤일록 아아, 에슈이시여, 백인들은 다 이렇습니까! 스스로 가혹한 짓을 하니, 다른 선한 이의 생각도 의심하게 되었나 봅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보시오. 만약 약속이 파기될 때, 내가 그런 위약의 대가를 받아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인간의 몸에서 떼어 낸 일 파운드의 살점이 무슨 가치가 있겠냐는 말이오. 다른 동물의 고기보다 하등의 가치가 없소. 나는 단지 당신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우정을 베푼 것이오. 받을 생각이면 받고, 아니면 이만 작별이외다. 나를 오해하진 마시오.
안토니오 알겠다. 샤일록, 도장을 찍자.
샤일록 먼저 공증인에게로 가서 이 증서를 작성하도록 이르시오. 나는 지금 돈을 가지러 갈 터이니.
안토니오 부탁하지. (바사니오에게) 신기한 일이군. 저런 검둥이도 사람이 다 되었어.
바사니오 말은 그럴 듯해도 겉도 속도 까매서 의중을 알 수가 없군.
안토니오 걱정할 건 없다. 내 배가 약속 날짜보다 한 달 먼저 돌아오지 않는가. (두 사람 퇴장)
샤일록 살점에는 가치가 없다. 그건 사실이지. 허나 살과 함께 흐르는 붉은 피는 뜻하는 바가 많을 것이야. (미소 지으며 퇴장)
#2. 벨몬트, 포셔의 집 홀
(포셔에게 구애를 하기위해 바사니오가 상자를 고르러 떠났고, 뒤에 남겨진 포셔와 네리사, 네리사가 초조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포셔 네리사, 무엇을 그리 걱정하는 것이냐?
네리사 아시면서 물어 보시는군요, 잔인하신 마님. 방금 들어간 바사니오라는 이름의 저 청년은, 왠지 올바른 상자를 열 것 같아 겁이 납니다.
포셔 남작, 백작, 공작에 일국의 왕이 와서 상자를 고를 때에도 꿈쩍 않던 심지 굳은 소녀가 고작 베니스의 청년이 오니 긴장을 한단 말이냐? 기이한 일이로구나.
네리사 저도 무척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계속 당장에라도 저 문을 열고 당신의 초상화를 든 바사니오가 뛰어들 것만 같아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포셔 걱정마라 네리사. 혹여 그가 올바른 상자를 열어 내 초상화를 얻었다고 해도, 나는 그와 결혼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내게 있어 사랑은 너 하나면 충분하니.
네리사 마님, 저 역시 마님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나이다.
포셔 허나 불행히도 세상은 우리가 오롯이 살아가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운명의 장난인지 너와 나는 같은 여성의 몸으로 세상에 나왔구나. 허나 나는 우리가 남녀가 아님을 슬퍼하지 않는다. 단지 불편한 것은 세간의 눈이다.
네리사 그렇다면 마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되는 건가요?
포셔 아니, 그렇지 않단다 네리사. 우리는 영원히 함께 살 것이야. 다만, 내가 상속받은 유산은 세간에는 막대하다고 알려져 있을지 모르나, 실은 두 사람이 백년을 기약하기에 모자랄지도 모른다.
네리사 아하! 그렇다면 지금 구혼을 받아들이고 계신 건…….
포셔 우리들의 도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지. 허나 가진 부만큼의 지혜를 가진 남자들은 없는 모양이구나. 수많은 구혼자가 떨어져 나갔는데, 저런 볼품없는 청년이 올바른 상자를 선택하는 날엔-.
(바사니오, 환희에 찬 채로 등장. 손에는 포셔의 초상화가 들려있다.)
네리사 (포셔에게)아! 우려가 현실로 됐군요.
바사니오 포셔, 당신이 허락해 주신다면, 초상화에 적힌 이 문구대로 나는 사랑을 주고받으려 하오. 아름다운 포셔, 내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이 광경이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하면서 나는 넋을 잃고 서 있소. 당신이 확인해 주고, 서명해 주고, 확증을 줄 때까지는 믿을 수가 없소.
포셔 바사니오님, 저는 당신의 눈에 비치는 평범한 여자입니다. 간단히 말해, 저는 교양도 교육도 경험도 없는 여자입니다. 다만 다행한 일은 지금 시작해도 배움의 길이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더욱 다행한 것은 배워서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두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다행스런 일은 당신의 마음에 제 정성을 바쳐 당신에게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은 저의 주인이시고 지배자요, 왕이십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이 저택의 소유자이고, 하인들의 주인이고, 제 자신의 여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이 저택과 하인들, 저 자신도, 주인이시여, 당신 것이옵니다. 이 모든 것과 그리고 이 반지를 드립니다. 만약에 이것을 버린다거나 분실하거나 남에게 주거나 하면 당신의 사랑이 끝난 증거가 될 것입니다.
바사니오 이 반지가 제 손가락에서 사라지면 제 생명은 끝납니다. 그 때는 외치면서 말하세요. 바사니오는 죽었다!
네리사 (방백) 옳거니, 마님께선 분명 저 반지를 되찾으실 묘안이 있으실 거야. (두 남녀에게) 나리님과 부인이시여, 지금까지 옆에 서서 저희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는데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 때 살레리오와 그레시아노, 베니스의 시종 등장.)
바사니오 살레리오와 그레시아노가 아닌가, 잘 왔네. 이 집 주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네들을 환영할 권리가 있다면 말일세. (포셔에게) 당신이 좋다면, 내 고향 친구들을 환영하고 싶소.
포셔 제 인사를 드립니다. 전적으로 환영합니다.
살레리오 감사합니다. 실은 바사니오, 우리가 이곳까지 달려온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네. 이것을 받게.(편지를 전한다.) 안토니오의 안부를 전하네.
바사니오 얘기해 주게. 안토니오는 어떻게 되었나?
살레리오 마음의 병이, 병이 아니라면 병도 아니고, 마음은 별개이지만 건강하지 못하네. 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어.
(바사니오, 편지를 뜯어본다.)
포셔 (방백) 저 편지에는 심상치 않은 일이 적혀 있나보다. 바사니오의 얼굴이 핏기를 잃고 있어. 절친한 친구가 죽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대장부의 안색을 뒤바꿀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 있는 것인가? 호기심이 생기는 구나. (바사니오에게) 여보, 바사니오님, 저는 당신의 반쪽이지요. 그렇다면 그 편지가 당신을 괴롭히는 반절이라도 좋으니 제가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바사니오 아, 사랑스러운 포셔, 여기 씌어진 만큼 불쾌한 내용의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없소! 포셔, 당신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했을 때, 나는 정직하게 말한 적이 있어요. 내가 소유한 전재산은 혈관 속을 흐르는 피가 전부이고, 있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뿐이라고 말했지요. 물론 나는 진실을 말하고 싶었소. 하지만 포셔, 내가 빈털러리라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었소. 내가 한푼 없는 거지라고 말했을 때, 실은 빈털터리보다 더 궁한 거지였다고 말했어야 옳았소. 사연은 이렇소. 나는 어떤 친구로부터 돈을 빌렸어요. 그 돈은 그 친구가 원수로부터 빌린 돈이었소. 이 돈은 내가 이곳에 오기 위한 경비였다오. 이것이 그 친구의 편지요. 이 편지는 그 친구의 살점이요. 씌어진 문자 하나 하나는 상처가 입을 벌리고 토해 내는 핏덩이오. 살레리오, 이것이 사실인가? 그의 투자는 몽땅 물거품이 되었는가? 단 하나도 건질 수 없는 건가? 트리폴리스로, 멕시코로, 영국ㆍ리스본ㆍ바바리ㆍ인도 모든 곳으로 향한 노예선이 단 한 마리의 노예도 살리지 못했단 말인가?
살레리오 단 한 척도. 그런데 말야, 안토니오가 갚을 만한 현금이 있어 갚으려고 해도, 그 깜둥이 녀석은 그걸 받을 생각이 없는 모양일세. 비록 사람과 비슷한 형상이라고 해도 본성을 못 감추고 사람을 파멸시키는 데에 온 신경을 쏟는 놈의 모습은 성경에 등장하는 악마처럼 보이더군. 그놈은 공작님에게 이 나라에 자유가 있다면, 공정한 재판을 해 달라고 시커먼 혀를 놀리고 있는 모양이야. 수많은 상인들은 물론이고 공작 자신도, 고위직 고관들도 모두들 입을 모아 그놈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않으니, 그 악랄한 청원을 막을 길이 없다네.
포셔 곤경에 처한 사람은 당신의 친구 분이세요?
바사니오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지요. 이 세상에서 그토록 친절한 사람은 없을 것이오. 그토록 훌륭한 마음씨, 그토록 남을 위한 정성으로 가득 찬 사람은 없어요. 이탈리아 천지를 뒤져도, 고대 로마의 명예심을 그 사람만큼 지닌 사람은 없어.
포셔 그분이 그 흑인에게 빌린 돈은 얼마나 되죠?
바사니오 나를 위해 삼천 두카트를 빌렸소. (편지를 읽는다.) “바사니오, 내 배는 몽땅 난파당했네. 채권자들은 냉혹해지고 사태는 계속 악화되고 있네. 유태인에게 약속한 차용증서 기일도 지나갔네. 그 대가를 지불하고 나면 살아남기는 힘들어. 그러니 자네와 나 사이의 대차 관계도 소멸된다네. 다만, 내가 죽기 전에 자네를 한 번 보고 싶네. 이 일도 자네 형편에 따라 결정하게. 우정으로 오고 싶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 편지를 잊어버리게.” 오, 안토니오!
포셔 여보, 우선 빨리 친구 분에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바사니오 당신이 그래주니 바로 가리다. 하지만 곧 돌아오리다. (일동 퇴장.)
포셔 네리사, 어쩌면 저 남자는 우리에게 최고의 행운을 가져다주러 온 걸지도 모르겠구나. 급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아무도 모르게 우리는 베니스로 향해야 한다.
네리사 우리 모습을 보이지 않고요?
포셔 보여준다. 네리사, 우리는 변장을 하는 거야. 태어날 때 갖고 있지 않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우리 둘은 남자 옷을 입는 거야. 말할 때는 변성한 소년처럼 목소리를 내야 해. 종종걸음을 사내다운 당당한 걸음걸이로 바꾸고, 젊은 사람들이 자랑삼아 지껄이는 싸움 얘기도 하고, 거짓말도 능숙하게 할 참이야.
네리사 그렇다면, 남자 행세를 하는 겁니까?
포셔 저런! 그런 질문이 어딨어? 방금 떠난 인간들이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해! 마차를 타면 내 계획을 모두 얘기해 주마. 마차는 정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급히 서둘러. 오늘 우리는 이십 마일을 가야 한다. (두 사람 퇴장)
#3. 베니스, 샤일록의 집 안 마당
(잘 가꾸어진 정원을 거닐고 있는 샤일록, 그 앞으로 남자로 변장한 포셔와, 시종으로 변장한 네리사가 등장한다.)
샤일록 내일 법정에 출두할 법관이시구려. 대저 이 누추한 고리대금업자의 집에는 어인 일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소? 다만, 세기도 귀찮을 만큼 무수한 이들이 그랬듯 피고의 처벌에 선처를 구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시길. 제 결심은 다이아몬드만큼이나 견고하니.
포셔 당신의 그 비뚤어진 열정은 세간의 풍문을 들어 이미 익히 알고 있지. 그리고 나는 맹렬히 타오르는 불꽃에 물을 끼얹을 정도로 비뚤어진 이도 아니외다. 인간의 잣대와는 달리 법은 흑백을 가리지 않고, 오직 정의 아래 모든 것을 심판하니까.
샤일록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흡사 다니엘 명관의 재림을 보는 것 같군요.
포셔 이렇게 내가 그대를 남들의 눈을 피해서 온 이유는, 그대가 제시한 이 증거 때문일세.
샤일록 (포셔가 내민 증서를 읽으며) 원하는 부위에서 살점 일 파운드. 틀림없군요. 법 집행에 있어 문제가 될 소지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포셔 그대는 그 특출난 머리로 자유인의 신분을 얻었건만, 원수의 심장은 얻지 못하는구나. 보아라, 살점 일 파운드다. 법정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면, 증서에 명시된 대로 자네는 안토니오의 살점 일 파운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샤일록 예, 그것이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포셔 그러나, 무릇 사람의 살을 베면 피도 함께 흐르는 법이다. 설마 흑인들은 껍질 아래에 피가 흐르지 않나?
샤일록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허나 법관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알 것 같습니다. 현명하시기가 동방박사 못지않으십니다!
포셔 이대로 간다면, 살점을 베어가되 피는 흘리게 하지 말라는 억지스러운, 그러나 명시된 증서를 따른 지극히 정상적인 판결이 이루어진다. 그러면 자네는 원수의 살점을 얻지도 못할 뿐 더러, 베니스의 국민을 위협한 죄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또한 신분을 박탈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샤일록 그럼 저는 대체 어떡해야 합니까! 그걸 알려주시기 위해 오신 길 아닌가요?
포셔 그렇지. 허나 모든 일에는 자네도 잘 알 듯.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ㅡ.
샤일록 재물을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5천, 아니 만 두카트라도 저 백인 놈의 심장을 꺼낼 수 있다면 드리지요.
포셔 만 두카트라, 좋은 울림이군. 또한 노파심에 해두는 말인데, 아주 아주 만약에 안토니오의 재산이 기적적으로 돌아온다면-.
샤일록 그 역시 당신의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안토니오는 노예상입니다. 상품이 돌아올 일은 거의 없겠지만, 만약 돌아온다면 그들의 자유를 제가 돈으로 대체하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포셔 동의하네. 나 역시 힘에 부칠 정도로 많은 노예가 드글거리는 것은 싫으니.
샤일록 그럼 이걸로 내일 법정에서 제가 패소할 일은 없어진 거겠지요?
포셔 그렇다. 그대는 내일 법정에서 정의로운 승리를 거둘 것이다. 원수의 심장을 갖게 될 것이다. (둘의 웃음이 이어지다가 암전)
#4. 베니스, 법정
(공작, 고관들, 안토니오, 바사니오, 그레시아노, 기타 등장)
공작 안토니오는 출정했는가?
안토니오 대령했습니다. 공작님.
공작 그대에게는 참으로 안 된 일이지만, 그대의 상대자는 그 피부만큼이나 냉담한 인간인지라 자비심이란 티끌만큼도 없고, 동정심도 없소.
안토니오 제가 들은 바로는 그 인간의 잔혹한 행위를 누르기 위해 공작님께서 무척 애쓰셨다는데, 그 인간은 완고한 의지를 굽히지 않고, 비열하게도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증오의 화살을 겨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생은 인내로서 그 작자의 노여움에 맞설 것이며, 평온한 마음으로 그 인간의 잔악하고 포악한 행패를 참고 견딜까 합니다.
공작 그 자유인을 이 법정에 호출하라.
살레리오 문 앞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입정하고 있습니다.
(샤일록 등장)
공작 그 자리를 비워라. 나의 면전에 세우라. 샤일록,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만 세간에서는 이 재판이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 그대는 악의에 찬 태도를 보일 것이라 하는데, 나는 그대가 어느 시점이 이르면 뜻하지 않았던 역전을 감행해 기이한 잔인성보다는 자비와 연민의 정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지금 그대는 위약의 대가로서 이 상인의 살점 한 파운드를 청구하고 있으나 그런 위약의 대가를 면제해 주고, 인정과 사랑으로서 원금의 일부마저 면제해 주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상인이 최근에 입은 갖가지 손실은 우리의 동정을 사게 하는데, 그런 타격을 받으면 천하 호상(豪商)들도 쓰러지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가련한 모습을 보면 어떤 철심장도, 어떤 목석도, 완고한 터키 인도, 난폭한 타타르 인도 눈에 동정의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유인이여, 지금 우리는 그대의 관대한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샤일록 소인의 의사는 이미 공작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고향의 대지를 두고 맹세한 것처럼 약속대로 그 대가를 받아야겠습니다. 만일에 공작님께서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하신다면, 이 나라의 헌장과 자유는 손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왜 삼천 두카트의 돈을 받지 않고 일 파운드의 썩은 살점을 원하는가, 그 이유를 알고 싶으시겠죠. 말씀 드릴 수도 없고 드릴 생각도 없습니다만, 안토니오에 대해 품고 있는 증오와 혐오감 때문에 아무 이득도 없는 소송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답변입니다.
바사니오 그런 답변이 어디 있어. 그렇게 얼버무리면, 잔혹한 너의 짓거리가 변명될 줄 아나?
샤일록 나는 너의 비위에 맞는 답변을 해야 할 의무가 없다.
안토니오 바사니오, 네 상대는 흑인이다. 인간의 형을 취하고 있되 같은 인간의 위상에 놓을 수 없는 것. 인간 아닌 짐승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자네는 무엇이든 할 수 있네. 그러나 그 일은 그대에게 무엇 때문에 새끼 양을 잡아먹고 어미 양을 울리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고, 산에 자라는 소나무가 하늘의 돌풍에 흔들릴 때, 소나무에게 나무 꼭대기를 흔들지 말고 소리도 내지 말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아! 그러니 부탁이네. 어떤 제안도 하지 말고, 어떤 방법도 강구하지 말게. 다만 모든 일이 간단명료하게 처리되어 판결이 났으면 하는군.
바사니오 여봐, 삼천 두카트를 육천으로 갚겠다!
샤일록 그 육천 두카트 하나 하나가 여섯 개로 나눠지고, 나눠진 하나 하나가 일 두카트가 된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받지 않겠소. 나는 내 증서대로 받겠소이다!
공작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어떻게 신의 자비를 바랄 수 있는가?
샤일록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 재판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수많은 노예를 돈으로 사서 거느리면서, 그들을 당나귀ㆍ개ㆍ노새들처럼 비참하고 천한 일에 혹사하죠. 그들을 샀기 때문입니다. 어디 한 말씀 드려 볼까요? 노예들을 해방시켜 여러분의 상속녀와 결혼시키세요. 비지땀을 흘리도록 중노동을 시킨다는 것은 불쌍한 일이죠. 침대는 여러분과 똑같이 보드라운 것으로 하고, 식사도 여러분과 똑같은 것으로 대접하면 어때요? 그러면 여러분은 대답하겠지요. “노예는 나의 소유물이다.” 소인의 답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인이 요구하는 일 파운드의 살점은 비싼 값을 치르고 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져야 합니다. 소인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이 위대한 법률은 무용지물이 되겠죠. 베니스 법령은 아무런 구속력도 없는 것이 됩니다. 소인은 재판을 원합니다. 대답하세요, 답변이 무엇입니까?
공작 내 직권으로 이 법정을 폐정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소송의 판결을 위해 석학 벨라리오 박사에게 오늘 이 법정에 오시도록 부탁했다.
살레리오 공작님, 문전에 사환이 도착했습니다. 박사님의 편지를 갖고 파두아로부터 왔답니다.
공작 편지를 갖고 오게! 사환을 불러 들여라!
바사니오 용기를 내게! 안토니오! 힘을 내게! 저놈 검둥이에게 나의 살, 나의 피와 뼈를 주는 한이 있더라도 나 때문에 자네는 피 한 방울 흘릴 수 없어.
(샤일록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갈려고 꿇어 앉는다. 네리사가 법관 서기 복장을 하고 법정에 등장한다.)
공작 그대는 파두아의 벨라리오 박사로부터 왔는가?
네리사 그렇습니다. 공작님, 벨라리오 박사의 안부를 전합니다.
(네리사는 편지를 준다. 공작은 개봉하여 읽는다.)
바사니오 어찌하여 그대는 그토록 열심히 칼을 갈고 있소?
샤일록 저 파산자로부터 차용금 담보물을 잘라 내기 위해서지.
그레시아노 구두창이 아니라 네놈의 굳어 버린 영혼 밑바닥에 대고 갈아라. 그렇게 하면 칼이 한층 더 날카로워질 테니. 어떤 칼도, 심지어 사형 집행인의 도끼마저도 네놈의 칼끝 같은 증오심에 비하면 반도 못할 것이다. 네놈의 가슴은 어떤 애원이나 호소도 통하지 않는구나.
샤일록 통하지 않지. 당신의 혀로는 어림도 없다.
그레시아노 개자식, 지옥에나 떨어져라! 인간이 되지 못한 깜둥이에게 자유인의 신분을 준 법이 의심스럽구나. 너를 보고 있으면 내 신앙심마저 흔들린다. 신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겉도 속도 새카만 피조물을 만드셨는가! 어째서 검은 그릇에 피에 굶주린 탐욕스러운 늑대 같은 천성을 담아놓으셨는가!
샤일록 흥, 오늘 법정은 신께서 공평무사하심을 공표하는 것이고, 내 그릇에 피의 갈망을 안배한 것은 너희 백인들의 악행임을 알아두어라. 자넨 얼른 두뇌를 수리해야겠어, 안 그러면 영원히 고치지 못하게 돼. 나는 재판을 요구하오.
공작 벨라리오 박사로부터 온 편지를 보니 당 법정에 젊고 박식한 박사를 추천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출정하고 있는가?
네리사 네, 대령하고 있습니다. 재판장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작 반갑게 맞이하겠네. 여봐라, 서너 명이 가서 그분을 정중하게 모셔 오너라. 그 동안에 벨라리오의 편지를 법정에 출두한 모두에게 읽어 주어라.
서기 (읽는다) “공작님에게 말씀드립니다. 공작님의 서한을 받았습니다만 그 이후 곧 병상에 눕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때 이 편지를 전달하는 사자와 함께 로마의 젊은 학자 밸서저가 내방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자유인과 안토니오의 분쟁을 얘기해 주고, 우리는 함께 문헌 조사를 했습니다. 그는 나의 견해를 숙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행히도 나의 부탁을 받아들여 공작님의 요청도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그의 젊은 나이 때문에 그를 경시해서는 안 될 것이, 그는 나이에 비해 출중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서 나도 처음 보는 놀라움입니다. 그를 채용해 주시면 나의 찬사 이상으로 공작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포셔가 법학 박사 복장을 하고 손에 책을 들고 입장)
공작 아, 저기 그 젊은 박사가 오시는군. 손을 이리 주시오. 벨라리오 박사가 보낸 분이오?
포셔 그렇습니다.
공작 이 법정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리에 앉으십시오. (시종이 포셔를 공작 가까이에 있는 자리로 인도한다) 당 법정에서 심의중인 이 사건의 문제점이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 짐작되는데?
포셔 네, 그 사건에 관해서는 충분히 듣고 왔습니다. 그 흑인은 어딨습니까?
공작 안토니오, 샤일록, 두 사람은 앞으로 나서라.
포셔 그대가 샤일록인가?
샤일록 그렇습니다.
포셔 그대가 심리를 요구하는 이 소송은 기묘한 사건이지만 법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따라서 베니스 법정도 그대의 주장을 막을 수는 없소. 안토니오, 그대의 목숨은 이 사람 손아귀에 달려 있소.
안토니오 이 사람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포셔 이 증서를 인정합니까?
안토니오 인정합니다.
포셔 그렇다면 이 자유인이 자비를 베푸는 일만 남았다.
샤일록 그럴 의무가 있다면 그러겠습니다.
포셔 자비는 성격상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자비는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적시는 은혜로운 비와도 같다. 그 축복은 이중으로 내린다. 자비는 주는 자와 받는 자를 똑같이 축복해 주기 때문이지. 샤일록, 그대가 정의를 요구하는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샤일록, 정의만을 구하면, 인간은 누구나 단 한 사람도 구제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를 구하며 애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대의 정의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마지막 권고이며, 그대가 굽히지 않는다면 엄격한 베니스 법정은 저 노예상에게 부득이 불리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
샤일록 소인은 저 안토니오란 작자를 무척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노예상으로, 저와 같은 피부를 가진 이들을 잡아 대륙 각지에 노예로 파는 악독한 놈이죠. 제가 봐 온 저 백인은 피부색이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자비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 간악한 노예상에게 핍박받던 제 동족의 대리자요, 원한으로 벼려진 칼날입니다. 소인은 법을 원합니다. 증서대로 차용금 담보물을 원하는 바입니다.
포셔 그렇다면, 알겠다. 안토니오 자네는 가슴에 칼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네.
샤일록 아, 고결한 재판관이로구나! 훌륭한 젊은이로다!
포셔 법의 취지로 볼 때, 어느 모로 보나 이 증서에 명기되어 있는 차용금의 대가는 수령해야 되는 정당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저 상인의 살점 일 파운드는 자네 것이다. 당 법정은 그것을 인정하고, 국법이 그것을 주기로 한다.
안토니오 법관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현재 본 법정은 증서에 명기된 내용을 근거로 하여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포셔 그렇다.
안토니오 그렇다면, 저는 기꺼이 저 흑인에게 제 살점 일 파운드를 주겠나이다. 하지만, 제 기억으로는 증서에 “일 파운드의 살점”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도려낼 때 제 피가 한 방울이라도 흘러 버리면 그것은 계약 위반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저 간악한 검둥이의 토지를 비롯한 모든 재산이 베니스 국법에 따라 국고에 몰수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포셔 그 말이 옳다. 증서에 명시된 것이 오직 살점 일 파운드라면 그대의 논리는 성립된다. 허나 이 증서에는 “살점 일 파운드, 그리고 흐르는 피에는 제한이 없다”라고 똑똑히 쓰여 있다. 그렇기에 안타깝게도 그대의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바사니오 이건 날조다! 공작님, 저와 안토니오, 그리고 샤일록이 대화를 할 때 피에 관한 대화는 일절 없었고, 제 기억에도 공증인에게 문서를 작성할 때 저런 문구는 없었습니다!
공작 그게 사실인가, 공증인?
공증인 어떻게 기록이 된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나, 그 증서가 작성된 순간부터 오늘까지 조작의 여지가 없도록 보관해왔음은 사실입니다.
공작 혹시나 누군가 열람한 기록은 없는가?
공증인 없습니다. 단지 어제 법관님이 사건 판독을 위해 한 번 잠시 제 앞에서 열람하셨을 뿐입니다.
공작 그렇다면 증서가 조작되었을 여지는 없다. 안타깝게도, 저 증서에 기록된 내용은 사실인 것이다. 안토니오.
포셔 샤일록, 그대는 이 상인의 가슴에서 그 살점을 도려내어라.
샤일록 안토니오. 네 썩어 문드러진 살점은 몇 근이 된다 해도 닭고기만도 못한 가치를 지니지만, 너의 피는 다르다. 우리 검은자들의 피를 수탈해 축적한 부는 바다가 거두어 갔으니, 이는 신의 뜻이다. 그리고 신은 너의 생명을 취하도록 나를 인간 세상의 대리자로 임명하셨으니, 곱게 죽음을 맞으라.
바사니오 안토니오, 미안하네……. 미안하네…….
안토니오 이럴 순 없어……. 내가 이런 곳에서 죽음을 맞다니!
(샤일록, 안토니오에게 다가가 단검을 들어 내리 꽂는다. 비명과 함께 법정에 피가 흩뿌려지며, 무대가 점차로 어두워진다.) -■
베니스의 상인 원작을 제하고 당장 이 글만 놓고 보면 요 글에서는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 같이 느껴져서 괜시리 기분이 좋네용.
근데 안토니오는 예상치못하게 양쪽에서 딜을 받는 입장이라 불쌍하게 보이기도 하고 ㅋㅋㅋ.
헌데 여기서 다룬 원작의 부분은 원작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