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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재] 아는 사람이 죽었다. (7) 2016/08/16 PM 10:33


 아버지는 딱 두번 내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사실 한번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한번은 내가 신교대 수료 후 연대에서 대기할 때 드렸던 전화 중 수화기 너머에서 목 메인 목소리를 내가 지레짐작한 것 뿐이니까.


 할아버지의 유해를 무덤에 안치하는 날, 부고를 접하고 모여서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하게 담소를 나누던 친척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높여 흐느꼈다. 큰 고모였는지 둘째 큰아버지였는지...소리와 함께 전염된 슬픔에 이내 모두가 눈물 흘렸다.


 그곳에서 아버지 역시 아직 땅속에 들어가지 않은 관을 부여잡고 서럽게 우셨던 기억이 선명하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별 다른 감정이 들지않던 나는 그 광경을 보자 울게되었다.



 내 기억 속 할아버지는 결코 좋은사람은 아니다. 눈을 감기 10년 전부터 노환으로 인한 하반신 마비로 정신마저 무너지셨는지


 툭하면 할머니나 주변 친척들에게 꼬장을 피워대기 일쑤였고, 노인 특유의 비린내를 질색하던 내 동년배 친척들에게 자꾸 병수발을 들게 했다.


 한창 놀고만 싶던 나이에 할아버지는 자연 기피대상이 되었다.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노인이 되면 다시 어려진다'는 말의 의미를 찾았다.



 아버지는 보기 드문 효자였다. 아버지는 가난과 불우함 속에서 살아왔다. 처음으로 찾은 자신의 재능을 뽐내기 위한 미술대회를 가기위해


 왕복 네 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야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먹고 사는 데에 도움도 안되는 대회에 나가는 아버지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친구들과 학교를 마친 뒤 놀려고 하면 어느 새 와있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주시한다. 별 수 없이 아버지는 따라가 농삿일을 돕는다.


 아버지는 형제들 중 유일한 고교 졸업자다. 중 고등학교 등록비 이야기를 꺼낼 때 할아버지는 어디까지 널 키워줘야하냐며 타박했다.


 이에 아버지는 스스로 등록비를 벌어가며 힘들게 학교를 졸업했다. 


 노동운동을 하시던 아버지가 옥살이를 할 때 조차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는 함흥차사였다.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어째서 '효자'인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의 가족이 겪은 극심한 가난은 이해하나 그 속에서 아버지가 느꼈을 부모님의 '사랑'은 아버지의 일화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차라리 일종의 푸념이었다. 시대의 야박함과 부모에 대한 서운함이 서려있는.


 그런데도 아버지는 명절이면 다른 형제들보다 하루 먼저가서 하루 늦게오고, 생활비도 더 보내고, 무슨 일만 생기면 할아버지 할머니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하곤 했다. 썩은 나무처럼 스러져가는 할아버지의 병든 몸을 부여잡고 물기어린 눈을 애써 감추셨다. 할아버지가 가지말라고 한 마지막 유언을


지키지 않고 집에 오자마자 부고가 전해지니 역시 자리를 지켰어야 했다고 한탄하셨다.


 비록 아버지가 종전의 유교적 + 가부장적 사상을 깊이 내면화했다지만, 오로지 그런 모종의 율령 하나로 '사랑할 구석이 보이지 않는' 부친을 극진히


모시는 건 내 가치관으로서는 이해 이전에 하는 것 조차 불가능한,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던 것이다.


 다만 아버지와 할아버지 사이에 있는 모든 시간을 내가 오롯이 알 수 없기에, 그 장막 뒤에 내가 모르는 애정어린 유대가 있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어쨌든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울었다.


 이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과연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수십 차례 생각해봤지만 고민할 것도 사실 없었다.


 여태 구경도 못해봤을 정도로 많은 물이 눈에서 흐를 거라는 것만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많은 죽음이 내 인생사를 방문했다. 노쇠한 이들의 부고가 속속들이 들려왔고, 가끔은 젊은 지인의 부고가 들려왔다.


 개중 내가 가깝다 여기는 이들은 없었기에, 나는 형식적인 조문만을 했을 따름이다. 눈물은 물론 아껴뒀다.



 어제는 대학교에서 알게 된 누나의 부고를 접했다.


 신입생 시절, 자신이 3년만에 보는 동향 사람이라고 줄기차게 밥을 사주셨다. 코드도 나름 잘맞았다.


 묘하게도 남녀의 감정은 들지 않았었다. 서로 농담따먹기를 하거나 가끔 인생상담을 하는 좋은 친구사이였다.


 새 여자친구는 대체 언제쯤 볼 수 있냐며 타박하는 집요함은 좀 귀찮았지만, 남자친구가 있는 처지에도


 독수공방하는 내가 불쌍하다고 계속 밖으로 끌어내서 놀아준게 참 고마웠다.


 술을 생리적으로 마시지 못하는 날 위해 그 좋아하는 술도 접고 카페에서 만나줬다. 


 나라는 놈에게 뭔 가치가 있는지, 계속 관심을 가져주면서 관계를 이어줬던 것이 참 고마웠다.


 때문에 술을 못마시는 내가 원망스럽다. 술김에라도 고맙다고 했어야하는데. 



 분명 죽었다는 이야기는 귓구멍으로 들어오는데, 그게 정보로 변환이 안되었다.


 왜 죽었지? 사고란다. 왜 죽었지? 차가 인도로 벗어나서 쳤단다. 왜 죽었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단다. 왜? 왜?


 인지부조화라는 것의 참의미를 어제서야 깨달았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화사하게 웃던 누나의 표정이 계속 아른거린다.


 10월에 한다던 결혼식은 참석도 구경도 공염불이 되었다. 그 때 가서 하려던 고맙다는 말을 받아줄 사람은 없다.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예비 신랑이었던 남자가 상주를 대신해서 서고 있었다. 얼마나 운건지 안그래도 넙대대한 얼굴이 축구장만하다.


 서로 모르는 사이라 그냥 인사만 나누고, 해맑게 웃는 누나의 사진과 마주했다.


 건너방에서 누군의 것인지 모를 곡소리가 들려온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그 느낌이


 방구석에서 양복을 찾아입고, 지하철을 타고 예식장을 스마트폰으로 찾아가고, 부조금 성명을 적을 때까지도,


 인화된 누나의 얼굴을 볼 때도 사라지지 않는다. 절을 올리고, 밥을 먹고, 선잠을 잔 뒤 발인을 지켜볼 때도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싶을 정도로 멍하니 있기만 했다. 집에 와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쭉 그런 상태였다.


 결국 나는 울지 않았다. 



 문득 이게 참 이상하다고 느꼈다. 왜 난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울었는가? 그리고 왜 누나의 죽음에는 울지 못했는가?


 난 결코 누나의 죽음이 할아버지의 죽음보다 가볍다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쪽이 내겐 훨씬 중요한 죽음이다.


 누나의 유해가 묻히는  순간을 봐야 울까? 내 지인들이 누나를 위해 울 때야 나는 비로소 울 수 있을까?


 눈물을 흘리는 게 애도에 필연적으로 따라가야 하는걸까? 아니라면 대체 눈물은 왜 제멋대로 떄를 가려서 나오는 걸까?


 누나의 죽음이 내 감정을 하나도 격양시키지 못했다는 건가? 그만큼 고인의 존재가 심리적으로 가벼이 여겨졌다는 건가?


 또 내 가까운 누군가가 죽었을 때 나는 이럴 것인가? 이걸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그 떄 눈물을 흘리면 또 차이는 무엇일까?


 누나는 죽었고, 그리워할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내 감정의 진의를 파헤치고 있는 내 자신이 혐오스럽다.


 글로나마 정리하니 그나마 덜 혼란한 것 같다.



 정말 더럽게 불쾌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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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2    친구신청

토닥토닥

공허의 전효성♡    친구신청

힘내세요....

Gosam_    친구신청

글만 읽어도 저도 슬퍼지네요..

Sandwitch    친구신청

아직 눈으로 봐도 믿기질 않아서 그래요. 실감이 안나니 감정도 느껴지질 않죠.

어느 순간 감정이 폭발하실꺼에요. 너무 본인을 탓하지는 말아요 ㅠ

화링a    친구신청

부모의 죽음에 흐르는 눈물에 뭐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제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아들 하나 낳아보겠다고 먼저 딸 둘 낳으시고 40살에 가까운 나이에 저를 낳으신 우리 부모님
뼛속까지 시골사람에 제일 첫째 아들로 농사짖고 소키우는 집안일 하시느라 제대로 학교도 못 다니셔서 최종학력 초졸이신 울 아버지
그덕에 그 아래 남동생 2, 여동생 2 좋은 학교 좋은 직업 갖으셔서 항상 우리 아버지께 고마워하신 삼촌, 고모들..

저랑 저희 아버지랑 나이가 거의 40년 차이가 납니다. 제가 지금 30대 중반이구요.
저희 아버지 작년 말에 돌아가셨어요. 12월 28일에.. 3일장을 치르고 화장터에서 유골을 받아보니 12월 31일이더라구요.

흔히 말하는 못배운 사람, 답답한 사람, 고집쟁이, 술 꾼 이정도 수식어가 저희 아버지셨어요.
저 사춘기때도 그랬고 한참 사회생활할때 이런저런 일로 많이 부딪히기도 했구요.

그런다고 날 낳아주신 우리 아버지가 바뀌는것도 아니고
내가 살아오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해주신분이 바뀌는게 아니죠.

본문에 할아버지처럼 오랜기간 고생하시지는 않으셨는데.
생각보다 빨리 하늘나라에 가시는 바람에 뭘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더라구요.

정신없이 장례를 치뤘고 연초 연휴, 회사 경조휴가로 꽤 긴 시간동안 멍 하니 집에 있다가
다시 회사에 출근하고 나서야 조금 실감이 나더라구요.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가도 아버지가 없으신게..

생각나는데로 좀 끄적여 봤습니다.
할아버지 상때 아버지가 흘리신 눈물에는 여러가지 감정이 있었을꺼라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나봐요.

바다별*    친구신청

조용히 읽고만 갑니다. 건강하세요.

환관    친구신청

주변사람이 죽으면 감정정리가 잘안되던데 시간 지나면 차츰 정리되더라구요.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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