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촌동생이 자소서 교정을 부탁했다. 글줄로 밥 벌어먹기 요원해진 시대에 국문과 출신은 가끔씩 이런 데에 요긴하게 쓰인다.
물리치료과에 수시로 지원하고자 작성한 자소서는 문장에 있어서만은 유독 뿔난 시어머니처럼 깐깐해지는 내겐 견디기 힘든 수준의 졸문이었지만
눈은 프로게이머이나 손은 범인의 그것인 게이머와도 같은 나의 글쓰기 소양 탓에 주저없이 찔러대기도 저어되는 것이 여간 씁쓸한 게 아녔다.
사건, 경험은 그럭저럭 잘 늘어놨지만 결정적으로 네가 느낀 바가 글에 없다. 라고 정리해서 의견을 건네주자 사촌동생은 그게 너무 힘들더라며 내게 한숨섞인 푸념을 전했다. 불현듯 고작 대학교 자소서에 목을 메는 사촌동생의 처지가 가당찮고 웃겼으나 이내 내 과거가 떠오르자 비웃기 힘들었다.
나 역시 그 시절에는 학업에 대한 노력과는 별개로 별 대단치도 않은 대학간판을 이름표에 붙이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였고, 고민했기에 사촌동생도 그런 문제로 앓는 중이구나 싶어 이내 측은해졌다. 문득 두 가지 잡상이 떠오르는 와중에 다시 고쳐서 가져온다는 사촌동생과의 톡을 종료.
2.
새삼 내가 사촌동생과 같은 문제로 벼라별 민폐를 다 끼칠 때 함함해주던 어른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19년의 학업이 정산되는 수능은 지배체제의
같잖은 환술로 이 땅의 모든 학생들에게 주박을 씌우고 있다지만, 실상 그렇게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후의 인생을 결정짓는 것은 수능점수가 아닌 수능과 관련된 자신의 선택이다. 정시냐 수시냐, a대학이나 b대학이냐, c과냐 d과냐, 다 때려치고 공무원이냐 군대냐, 거기서, 혹은 그 이후에서 본격적인 인생행보가 정해진다고 여기는 터라 점수가 뭔 소용이냐는 패기넘치는 고딩 때의 생각이 여전히 유효함을 느끼고 아직 덜컸구나 싶기도 하다. 당장 내가 사촌동생과 대화를 나누며 순간 내면에서 치고나온 가소롭다는 비웃음이야말로 가소롭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촌동생보다 더 멀리 걸어왔고 그렇기에 고3의 시기 이후에도 역정일로임을 알아 그런 고민을 순간적으로 어린 치기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건 일견 합당하기에 내가 의지했던 어른들에게 새삼 경탄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수능만이 지상과제인 양 시선을 고정시킨 채 주변에 방귀 살포를 해대던 나를 일말의 티도 내지않고 묵묵히 지켜보고 응원해줬으니.
3.
정시로 학교를 간 나는 수시쪽을 잘 모르지만, 이번에 자소서 질문 내용을 보니 대충 내가 씨름하는 취업 자소서랑 어느 정도 궤를 같이 한다. 물론 난이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문장을 통해 십수년 간 정련된 나의 가치관을 드러내야하고, 응당 그것은 질문자의 인재관에 부합해야만 한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제된 가치관은 다시 쉬이 변하기 힘든데 출제자의 틀에 맞춰서 그것을 찍어내려면 달궈서 녹이고 형틀에 부어 굳히는 번거롭고도 요란한 작업을 거쳐야하며, 그것이 설사 문장에 한해서일지라도 지난한 작업이다. '너희들의 취향에 맞는 알맹이 실한 나'를 함축한 문장이란 걸 연성하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 여전히 이걸 고민하는 나의 모습 역시 나보다 인생역정을 더 겪은 누군가에게는 우습게 보일 수 있겠다. 재밌는 일이다.
해줬던 기억이 있네요. 정말 열심히 고민했던 문제가 시간이 지나거나 이미 지나온 사람들에게 아무렇지 않을 일로 보인다는게,
참 기분 묘한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