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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객석 칼럼] 마이클 잭슨 (2) 20세기의 가장 밝은 별 (0) 2014/06/03 PM 05:41
20세기 클래식 (마이클 잭슨 편) - 월간 '객석' 칼럼
마이클 잭슨 (2) 20세기의 가장 밝은 별
글 하종욱(음악 칼럼니스트)
2014-02-01 | 지면 발행 ( 2014년 2월호 )

팝 음악의 역사를 바꾼 마이클 잭슨의 대표작 ‘Thriller’ ‘Bad’ ‘Dangerous’를 통해 그의 최전성기를 되짚어본다




팝 음악 역사상 최고의 앨범 ‘Thriller’
‘Off The Wall’을 통해 솔로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음을 세상에 입증한 마이클 잭슨의 다음 행로는 신중하고 또한 진중했다. 그 결과는 단순히 대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폭풍으로 맺어졌다. 1979년, 스물한 살 나이에 일약 가장 유망한 흑인 팝 아티스트로 부상했던 ‘Off The Wall’ 이후 3년 동안, 마이클 잭슨은 오직 다음 작품을 위해 집중하고 있었다. ‘Off The Wall’의 성공은 퀸시 존스의 풍부한 경륜과 소년의 티를 과감히 벗어내고 흑·백의 음악을 수용했던 마이클 잭슨의 용기가 더해져서 일구어낸, 결과물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퀸시 존스에게로 다가가 전작보다 더 열정적인 음악을 하고 싶다는 갈증을 피력했다. 그는 600만 장의 판매고로 만족하지 않았다. 진작부터 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앨범을 희망했다. 그 결과는 1982년 세상을 흔들었다. 팝 음악 역사상 최고의 앨범이라 선명하게 못 박을 수 있는 앨범 ‘Thriller’. ‘마이클 잭슨 개인의 음악 인생뿐만 아니라 팝 음악사의 변화를 이끈 분수령 같은 앨범이었다. 1982년 12월 1일 발매된 앨범은 무려 37주간 앨범 차트의 1위를 굳건히 지켰다. 이는 빌보드 차트가 생긴 이래 최장의 기록이었다. 9곡의 수록곡 중 7곡(‘Billie Jean’ ‘Beat It’ ‘Thiller’ ‘The Girl Is Mine’ ‘Wanna Be Startin' ‘Something’ ‘Human Nature’ ‘P.Y.T.’)이 빌보드 톱10에 진입하는 기록을 세웠다. 수록곡 9곡 모두가 빌보드 댄스 차트의 1위를 차지하는 진귀한 기록을 더했다.
미국레코드공업협회 RIAA의 공식 자료에 의한 통산 판매 기록은 2006년 11월까지 1억 4천만 장이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에 등재되었다. 1984년에 행해진 그래미상에서 앨범은 총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마이클 잭슨은 영화 ‘E.T.’ 사운드 트랙을 포함하여 총 8개 부문을 수상하는 초유의 기록을 만들어낸다. 마이클 잭슨의 독식으로 끝난 그해 그래미상 시상식이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Thriller’는 전 세계적으로 140여 개의 크고 작은 상을 수상하면서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음악이 되었다.
‘Thriller’의 성공은 음악 자체만의 혁신, 변화를 몰고 온 것이 아니었다. ‘Thriller’는 음악과 춤만 아니라 당시의 문화적 현상과 유행을 선도했다. 이를 통해 비틀스·롤링스톤스·레드제플린·엘튼 존으로 대변되는 영국의 팝 문화에 눌려 있던 미국의 대중문화는 1980년대를 기점으로 전 세계의 주류 대중음악으로 확산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양한 음악적 장르를 수용한 마이클 잭슨의 음악은 인종과 국가의 경계마저도 초월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또한 마이클 잭슨은 흑인 가수들이 미국 음악계 무대의 중심으로 진입할 수 있는 본격적인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마이클 잭슨 이전에도 훌륭한 실력을 갖춘 흑인 아티스트들은 많았지만, 그들은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자신의 능력을 제한 받고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의 폭발적인 성공과 함께 흑백의 음악적 장벽은 무너졌고, 흑인음악이 주류 음악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음반은 음반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았을 뿐 아니라 뮤직비디오라는 새로운 장르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Billie Jean’ ‘Beat It’ ‘Thriller’ 등의 뮤직비디오에 담긴 환상적인 영상미와 역동성은 ‘눈으로 보는 음악’의 영역을 만들어냈다.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The Making Of The Thriller’는 역사상 최다 판매고를 올린 뮤직비디오가 되었다. 더불어 마이클 잭슨 이전에는 흑인 음악가들의 뮤직비디오를 상영하지 않았던 MTV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뮤직비디오 역시 ‘Thriller’였다.



팝의 황제로 등극하다
앨범 ‘Thriller’를 통해서 마이클 잭슨은 팝의 황제가 되었다. 앨범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은 ‘Billie Jean’이었다. 장엄한 인트로의 분위기 뒤에 독특한 리듬감으로 변환되는 음악은 이 곡의 라이브에서 보였던 흰 장갑과 반짝이 의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충격적인 퍼포먼스로 각인되었던 ‘문워크’의 안무가 한데 엮어낸, 마술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꿈속에서 이 곡의 멜로디를 들었으며, 이내 잠에서 깨어 멜로디를 옮겨 적었다고 회상했다. 또 다른 넘버원 히트곡 ‘Beat It’ 역시 마이클 잭슨에 의해 만들어진 자작곡이었다. 록 기타리스트 에드워드 반 헤일런의 폭발적인 기타 리프와 강렬한 비트 위에서 마이클 잭슨의 폭발적인 가창이 어우러진 이 곡의 섬세한 진행으로 댄스 음악과 록 음악의 결합은 자연스레 그의 고유한 스타일이 되었다. 수록곡 ‘Human Nature’는 재즈의 거장 마일스 데이비스가 리메이크할 만큼, 아름다운 선율과 짜임새 있는 구성을 지닌, 숨은 명곡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Thriller’를 통해 팝의 황제로 부상하면서부터 그는 이전에는 누릴 수 없었던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1983년 10월에는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와 함께 부른 ‘Say Say Say’가 빌보드 넘버원에 등극했다. 1985년 마이클 잭슨은 에티오피아·수단의 어린이들이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가는 참상을 안타까워하며, ‘USA For Africa’라는 올스타 세션을 결성 ‘We Are The World’를 녹음했다. 마이클 잭슨은 선배 가수 라이오넬 리치와 함께 공동으로 작사·작곡을 했으며, 스티비 원더·밥 딜런·레이 찰스·폴 사이먼·브루스 스프링스틴·케니 로저스·티나 터너·다이애나 로스·신디 로퍼 등 21명의 미국 팝 음악의 명장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곡은 그해 미국 차트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의 음악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를 지배했다. 세계를 지배했다. 언제나 2위 브랜드였던 펩시 콜라가 두 차례 코카콜라의 판매고를 누른 해가 있었는데, 마이클 잭슨이 직접 광고에 기획·출연을 했던 1984년과 1986년이었다는 사실은 당대에 마이클 잭슨이 차지하는 어마어마한 인기와 위상을 확인시켜준 사례였다.



‘Bad’, 1980년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되다
1985년 ‘We Are The World’ 이후 마이클 잭슨은 ‘Thriller’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또 다른 폭풍을 구상하며 2년 반의 시간을 바쳤다. 1987년 8월에 발표된 ‘Bad’는 다시 한 번 전 세계를 마이클 잭슨의 열풍으로 휩싸이게 한 위대한 유산이었다. 이 앨범이 수확한 성공의 결과에 비견될 수 있는 앨범은 전작 ‘Thriller’밖에 없었다. 앨범 ‘Bad’는 예약 판매량 역대 최대(225만 장), 빌보드 넘버 원 히트곡 최다 배출(전체 수록곡 10곡 중 5곡, ‘I Just Can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Dirty Diana’ ‘Man In The Mirror’)을 기록했다.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25개국에서 넘버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통산 1억여 장의 판매고를 올린 ‘Bad’는 ‘Thriller’ 다음으로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앨범 ‘Bad’의 광적인 호응 뒤에 마이클 잭슨은 미뤄두었던 전 세계 투어의 닻을 올렸다. 전 세계 15개국, 총 123회의 월드 투어 여정에 올랐다. 일본에서부터 시작된 ‘The Bad World Tour’에 전 세계 400만 관중이 환호했다. 일본에서의 9회 공연 25만 장 티켓은 불과 1시간 만에 매진되었으며, 통산 1억 2천5백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리는 대역사를 저술했다. 영국에서 7만 5천 명의 최대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웸블리 구장에서도 8회 연속 매진을 기록했다. 결국 마이클 잭슨은 1989년 경제전문지 ‘포브스’ 지가 매해 선정하는 연예인 소득에서 사상 최고액인 1억 2천5백 달러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의 음악은 깊이와 넓이를 더하고 있었다. ‘Bad’ 앨범에는 자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피력하는 그의 철학과 세계관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전체 10곡 중 8곡을 자신의 작곡으로 채운 앨범에는 서정적인 선율과 시적인 가사가 잘 어우러진 ‘Man In The Mirror’, 강렬한 사운드와 폭발적 가창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Bad’, 여성 보컬리스트 시다 가렛과의 듀오로 소울과 팝, 록의 감성을 역동적으로 묶은 ‘I Just Can Stop Loving You’,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봐달라는 자기 고백의 메시지를 담은 ‘Leave Me Alone’ 등의 명곡을 순산했다.
1988년 4월,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성장과 음악 작업, 가족사를 담은 자서전 ‘Moonwalk’를 발표했으며, 이는 발간과 동시에 미국과 영국의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뒤이어 자신의 음악을 집대성한 뮤지컬 영화 ‘Moonwalker’에도 주연으로 참가했다.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가 삽입되어 하나의 온전한 스토리를 구성하는 이 영화는 음악과 춤, 혁신적인 특수 효과까지 더해져 대중들의 눈과 귀, 가슴을 사로잡았다. 이듬해 발표된 ‘Moonwalker’는 역대 가장 많이 팔린 홈비디오 테이프가 되었다. 1990년, 미국의 대통령 조지 부시는 마이클 잭슨을 백악관 만찬에 초대하며 그를 ‘1980년대 최고의 예술가’로 추대했으며, 미국의 저작권협회 BMI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빌린 공로상을 따로 만들어 수여하기도 했다.



위험한 성공 그리고 추락, ‘Dangerous’
1980년대는 마이클 잭슨의 명예가 독점하던, 독주하던 시대였다. 그는 여타의 모든 예술 영역을 포함하여 1980년대 최고의 예술가로 공인 받았지만, 여전히 내적으로는 여러 가지 콤플렉스와 결핍을 지닌 연약한 자아였다. 마이클 잭슨의 음악이 한층 고조되고 심화되는 과정에 있었던, 그러나 여러 가지 사건 사고로 그의 명예가 추락하는 시기였던 1990년대는 그의 솔로로서 네 번째 앨범이었던 ‘Dangerous’와 함께 개봉되었다.
1991년에 발표된 ‘Dangerous’는 마이클 잭슨의 신화를 공동 저술했던 퀸시 존스와의 결별로부터 전작과의 차별성을 드러냈다. 홀로서기를 한 마이클 잭슨은 역사·종교·인종·정치·사회적 문제를 부각시킨 주제 앨범의 성격을 지녔다. ‘Jam’에서는 인류가 직면한 복잡한 문제를 함께 풀어가자는 메시지를 담았으며, ‘Black Or White’에서는 인종 간의 갈등·차별을 쇄신하자라는 화합·공존의 주제어를 심어놓았다. ‘Why You Wanna Trip On Me’는 개인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언론에 대한 불쾌감을 토로했다. 그 밖에도 교육과 의료 문제·폭력·부랑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직접 쓴 가사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다소 무겁고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마이클 잭슨은 한층 다양한 음악적 수용과 진화된 음악적 기법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세련되게 표현해냈다.
앨범은 또다시 대성공이었다. 전체 수록곡 중 4곡이 빌보드 톱10에 진입했으며, ‘Black Or White’는 넘버원에 등극했다. 미국의 록 그룹 건스앤로지스의 기타리스트 슬래쉬의 강렬한 파열음이 동반된 기타 리프를 동반한 ‘Black Or White’는 팝·록·댄스·펑크·랩의 대중음악의 다양한 요소를 배합하면서 1990년대에 발매된 최다 판매의 싱글로 기록되었다. 앨범은 1991년 11월에 발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해 최다 판매고의 앨범이 되었으며, 미국에서만 7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Thriller’와 ‘Bad’의 천문학적 판매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1990년대에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 역사상 15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 마이클 잭슨이 등장할 때 토스터기에서 갑자기 뛰어오르는 듯한 연출 신으로 유명한 ‘Dangerous Tour’는 미국 전역은 물론 유럽·오스트레일리아·남미·아시아에 이르기까지 확장되며, 세계인에게 음악이 펼쳐낼 수 있는 궁극의 판타지를 선물했다. 미국의 케이블 방송국 HBO는 루마니아에서의 중계권으로만 2천만 달러를 지불하는 정성을 바쳤고, 이 공연은 미국 케이블 TV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21.4퍼센트)를 기록하는 보상으로 이어졌다.
1993년 마이클 잭슨이 출연한 오프라 윈프리 쇼의 생중계는 전 세계에서 9천만 명 이상이 시청했으며, 1993년 미국의 미식축구 슈퍼볼 하프타임 쇼에서는 1억 3천3백만 명 이상을 시청함으로써 슈퍼볼 하프타임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Dangerous Tour’가 절정에 이르렀던 1993년 그래미 시상식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지난 30년간 이어온 공로를 치하하며 35세의 마이클 잭슨에게 ‘Living Legend Award’를 선물했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1993년 마이클 잭슨은 남자아이를 성추행했다는 고발과 이로 인한 사회적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LA에서 알게 된 자동차 정비소 주인 에번 챈들러는 13세의 아들 조던 챈들러를 마이클 잭슨에게 소개하여 둘은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에번 챈들러는 마이클 잭슨이 자신의 아들을 성추행했다고 고소했으며, 마이클 잭슨은 경찰의 알몸수사를 받는 등 정신적 충격을 겪었다. 마이클 잭슨은 명예훼손으로 대응하고자 했으나, ‘Dangerous’의 월드 투어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2,330만 달러의 합의금을 지불하고 이를 무마했다. 마이클 잭슨의 합의는 곧 사실의 인정으로 여론화되었고, 소란스러웠던 법정 과정을 통해 마이클 잭슨의 신화도 순식간에 추락하고 말았다. 그는 아동 성추행범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울 수 없었고, 결국 ‘Dangerous’의 월드 투어도 중단되면서 약 1억 5천만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감내해야만 했다. 마이클 잭슨의 사후, 사건 당사자였던 조던 챈들러는 자신의 아버지가 보상금을 노리고 벌인 조작극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동 성추행 사건으로 빚어진 마이클 잭슨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추문과 의혹은 그가 대중과 매스컴에 대한 불신·공포·분노를 형성케 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이후 마이클 잭슨의 행로는 자신이 설립한 왕국 네버랜드에서의 칩거, 대중 및 매체와의 의사 불통으로 이어지며, 마이클 잭슨은 폐쇄된 성에 스스로를 감금하게 된다. 3편에서 계속.

글 하종욱 사진 소니뮤직

출처: http://www.gaeksuk.com/atl/view.asp?a_id=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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