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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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객석 칼럼] 마이클 잭슨 (3) 21세기 떠난 마지막 황제 (1) 2014/06/04 AM 08:49
20세기 클래식 (마이클 잭슨 편) - 월간 '객석' 칼럼
마이클 잭슨 (3) 21세기를 열어두고 떠난 마지막 황제
글 하종욱(음악 칼럼니스트)
2014-03-01 | 지면 발행 ( 2014년 3월호 )



마이클 잭슨의 후기작인 ‘History’ ‘Invincible’,
그리고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를 살펴본다

마이클 잭슨의 이야기 ‘History’


1993년 아동 성추행 사건이 법정 외 합의로 마무리되는 동안에도, 마이클 잭슨을 향한 의혹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법정에서의 판정을 피하고 합의를 했다는 것 자체가 본인의 혐의를 인정하고 축소하고자 했던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아동 성추행범이라는 주홍글씨를 떨쳐내지 못했다. 결국 마이클 잭슨의 ‘Dangerous’ 월드 투어는 엄청난 손실을 안은 채 중단되어야만 했다.
1995년에 발표된 마이클 잭슨의 여섯 번째 솔로 앨범 ‘History’는 2년여간 자신을 짓누르던 의혹에 대한 강한 반발과 함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음악적으로 응집된 작품이었다. 제작사 소니뮤직은 앨범을 위해 홍보비만 3천만 달러를 투입하는 공을 들였고, 유럽에 마이클 잭슨의 거대한 동상을 세우면서까지 실추된 위상을 재건하고자 애썼다. 2장의 CD로 구성된 앨범은 전작의 기념비적인 성공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미국보다 유럽에서 특별히 더 인기를 끌었다. 그 덕분에 앨범 판매 수익은 오히려 ‘Bad’를 뛰어넘어 ‘Thriller’에 버금가는 역대 앨범 판매 순위 2위를 기록하는 성공으로 귀결되었다.
앨범 재킷에 각인된 표제인 ‘History’는 마이클 잭슨 그의 이야기, 그의 역사라는 의미를 중의적으로 담은 것이었다. 그는 앨범을 통해 자신이 뜻하는 가치와 주장을 직설적으로 토해냈다. 곡마다 새겨넣은 의미와 메시지는 광범위했으며 또한 뚜렷했다. 정치와 이념의 문제, 인종에 대한 편견 타파, 환경 문제의 중요성 부각, 미디어의 폭력성 비판,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의 호소 등 그에게 있어 음악은 오락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신념을 전달하는 것으로 변모했다. 전작 ‘Dangerous’까지만 해도 순수함과 희망으로 가득했던 청년 마이클 잭슨은 아동 성추행 사건에서 비롯된 미디어의 거친 공세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회의와 분노가 강하게 드러났다. ‘You Are Not Alone’은 앨범의 수록곡 중 유일한 빌보드 넘버원 히트곡인데,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등극한 최초의 곡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앨범은 전작과 비교하여 음악적인 면에서도 강력한 변화가 표출되었다. 타이틀 곡 ‘History’의 뮤직비디오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크게 반영된 장엄한 심포니와 합창으로 시작해 강렬한 록큰롤의 비트감을 거쳐 마이클 잭슨 특유의 미성과 아이들의 합창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추모, 훼손당한 화합과 평화에 대한 호소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말미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과 최초의 달 착륙 우주항공사 닐 암스트롱의 격언을 담아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켰다. ‘They Don’t Care About Us’는 미국 사회의 병폐 중에서도 인종 차별의 문제를 강도 높게 비판함으로써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Childhood’는 잃어버린 유년 시절의 아픔을 노래한 곡이었으며, ‘Stranger In Moscow’는 환호하는 대중들의 뒤편에서 느끼는 자신의 고독과 상실감을 써내려간 그의 일기였다.
‘History’의 월드 투어에는 3년 전 중단된 ‘Dangerous’ 월드 투어의 아쉬움을 극복하기 위한 혼신의 노력과 열정이 투입되었다. 1996년 9월 7일을 시작으로 이듬해 10월 15일에 마감된 13개월의 대장정 동안 5개 대륙, 36개국, 56개 도시, 82회의 공연이 성대하게 펼쳐졌다. 총 450만 명의 관중이 관람한 역대 최대 규모의 콘서트 투어였다. 1996년 10월 11일·13일 있었던 한국에서의 첫 내한 공연도 그 일환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1999년에도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내한 공연을 다녀갔다.





비운의 역작 ‘Invincible’
1997년, 마이클 잭슨은 기존의 댄스 히트곡들을 모아 재편집한 ‘Blood On The Dance Floor’를 발표했다. 전작에 담지 못했던 미발표 신곡 5곡을 포함한 그의 리믹스 앨범은 여러 가지 논란을 딛고 총 1,100만 장으로 리믹스 앨범 사상 최고의 판매고를 올렸다. 그의 음악 속에 절로 흐르는 리듬과 그루브의 향연을 극대화시킨 이 앨범은 마이클 잭슨이 지배했던 20세기를 갈무리하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기 위한 전환과 정리의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Blood On The Dance Floor’를 발표한 지 4년 후, 정규 앨범으로는 ‘History’ 이후 6년이 경과한 2001년, 마이클 잭슨은 통산 여섯 번째 솔로 정규 앨범인 ‘Invincible’을 발표했다.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 되고 마는 이 앨범은 그의 명성에 오점과 상처를 남겼던 ‘비운’의 작품이었다. 여기서 ‘비운’이라는 평가는 마이클 잭슨의 솔로 정규 앨범으로서는 최저의 판매량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저조한 판매량이란 전 세계 8백만 장에 해당하는 양으로, 오직 마이클 잭슨에게만 허용되는 표현이었다. 6년여의 준비 기간 동안 마이클 잭슨은 21세기라는 새로운 환경을 선도할 실험적이고 의욕적인 모험을 감행했다. 앨범의 제작 라인을 쇄신하고 다양한 프로듀서 라인을 가동시켰다. 당시 24세 천재 프로듀서 로드니 저킨스를 전면에 등용하고, ‘Dangerous’ 이후부터 퀸시 존스를 대신한 프로듀서 테디 라일리도 동행했다. 그 밖에 R&B 보컬리스트 베이비페이스와 소울 보컬리스트 R. 켈리와의 공동 프로듀싱으로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흡수하고자 했다. 애초에 이 앨범은 1999년과 2000년의 전환점에 발매될 계획이었으나 1년이 지연되었다. 소니뮤직은 밀레니엄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 시즌에 앨범을 발표하기 위해 마이클 잭슨을 재촉했으나, 그는 그때도 여전히 녹음실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제작비 2천만 달러를 투자한 제작사의 조바심은 결국 마이클 잭슨과 소니뮤직의 사장 토미 모톨라 간의 불화로 이어졌다. 소니는 손익분기점인 7백만 장 이상의 판매량에 도달하지 못하면 마이클 잭슨이 제작비 전액을 환불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이에 마이클 잭슨은 이 앨범이 소니뮤직에서의 마지막 작업이 될 것이라고 대응하면서 감정적으로 맞부딪혔다. 이에 소니뮤직은 예정된 싱글 곡의 발매도 취소해버리고 3개월 만에 홍보·마케팅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마이클 잭슨은 앨범의 흥행 실패를 소니뮤직의 의도적인 홍보·마케팅 축소 때문이었다고 지적하며, 이를 지시한 사장 토미 모톨라를 ‘악마’ ‘인종차별주의자’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결국 앨범의 실패 뒤 마이클 잭슨과 대립했던 토미 모톨라는 해임되고 말았다.
저조한 판매량과 마케팅 실패를 둘러싼 공방, 평단의 엇갈리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Invincible’은 마이클 잭슨의 앨범 중 가장 다채롭고 풍성한 음악적 내용으로 충만한 역작임에 분명하다. 앨범을 위해 100여 곡의 후보곡을 준비했다는 소문과 수록곡 ‘Butterflies’의 완결을 위해 200번 이상의 녹음을 시도했던 사례는 그가 이 앨범에 쏟았던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짐작케 했다. 강렬한 기타 솔로를 덧입힌 ‘Privacy’에서 그는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파파라치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고, 인더스트리얼 록과 힙합을 배합한 ‘2,000 Watts’에서는 역동적인 보컬 에너지를 쏟아냈다. 베이비페이스의 달달한 R&B 스타일을 잘 소화해낸 ‘You Are My Life’와 어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는 ‘The Lost Children’은 마이클 잭슨 특유의 미성과 부드러움을 빛내주는 곡이다. 절친한 동료인 배우 크리스 터커와의 대화로 시작되는 ‘You Rock My World’에서는 짜임새 있는 구성과 열정적인 가창이 돋보였다.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산타나와 흥겹게 어울린 라틴 스타일의 ‘Whatever Happens’도 앨범의 다채로운 면면을 채우며 감상의 포인트가 되어주었다.



‘This Is It’ 황제의 죽음
불운은 계속되었다. 제작사 소니뮤직과의 불화, 그리고 혼신의 역작 ‘Invincible’의 흥행 실패 후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왕국 네버랜드에 칩거했다. 그러던 2003년, 두 번째 아동성추행 파문이 터졌다. 사건의 발단은 영국의 저널리스트 마틴 배셔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속 영상 때문이었다. 언제나 피해자의 입장에서 진실을 오도당했던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일상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는 배셔의 의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배셔는 마이클 잭슨이 보내준 신의를 버리고 개빈 아르비조라는 소년과의 우정을 악의적으로 편집해 잭슨을 다시 한 번 아동 성추행 의혹 속으로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마이클 잭슨의 혐의를 부인했던 소년의 부모는 돌연 입장을 바꾸고 그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1993년의 악몽을 진두지휘했던 담당검사 톰 스네던이 10년 뒤 또다시 이 사건을 맡았다. 잭슨은 1995년 작 앨범 ‘History’의 수록곡 ‘D.S’를 통해 톰 스네던을 직접적으로 비난한 바 있다. 톰과의 질긴 악연 덕분에 마이클 잭슨은 고소와 강제 수색, 체포영장 발부에도 모자라 수갑까지 차고 연행되는 굴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법정은 배심원 만장일치로 마이클 잭슨에게 무혐의 판정을 선고했지만 매스컴의 부정적인 보도와 아동성애자에 대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두 차례의 아동 성추행 소송을 거치는 동안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와 위신은 추락했다. 결국 마이클 잭슨은 네버랜드를 떠났고 두 번 다시 자신의 드림랜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2001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와 ‘Invincible’의 발매 이후, 마이클 잭슨은 기나긴 침묵에 들어갔다. 그러던 그가 다시 활동 재개를 선언한 것은 두 번째 아동성추행 사건 이후 6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2009년 3월 5일, 마이클 잭슨은 런던 O2 아레나 극장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전 세계 투어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랫동안 그의 재기를 기다려왔던 팬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애초 10회의 공연은 50회로 확대되었다. ‘This Is It’이라고 명명된 이 투어는 예매가 시작된 지 4시간 만에 매진되면서 ‘최단 시간에 매진된 콘서트’라는 새로운 기록을 추가했다. 마이클 잭슨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3D 특수효과를 비롯해 무대기술·의상·안무·백댄서와 코러스 선발을 직접 준비하는 열의를 바쳤다. 그러나 마이클 잭슨은 끝내 이 무대에 서지 못했다. 런던에서의 콘서트를 20일도 남겨두지 않은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은 영원한 수면에 빠져버렸다. 약물과다 투약에 의한 사망이었다. 평소 불면증에 시달리던 마이클 잭슨을 6주간 치료했던 주치의는 진정제의 일종인 프로로폴을 매일 밤 정맥 주사로 투약했는데, 사건 당일 새벽에는 정신안정제 발륨을 투약했고, 그럼에도 계속 잠을 이루지 못하자 로라제팜과 미다졸람, 프로포폴을 반복적으로 투약하여 마이클 잭슨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은 전 세계를 비통에 빠지게 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마이클 잭슨의 열한 살 난 딸 패리스 잭슨은 “최고의 아빠였다. 너무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라며 울먹였다. 그의 장례식이 있던 날 일반인 조문객의 접수는 2시간도 안되어 5억 명에 이르렀으며, 장례식 중계는 미국 내에서만 3천만여 명이 시청했다. 그의 생전 히트곡으로 빌보드 차트 상위 10위권이 장식되는 특별한 추모가 더해졌다. 그의 삶을 가로막던 아동 성추행사건 의혹도 비로소 해소되었다. 1993년 첫 번째 아동성추행 사건의 당사자인 조던 챈들러는 보상금을 노린 아버지의 강요로 인해 거짓 진술을 했다고 밝히며 마이클 잭슨에게 용서를 구했다. 마이클 잭슨을 상습적인 아동 성추행범·성형중독증 환자라고 공격했던 언론도 ‘팝의 황제’가 남겨놓은 위대한 문화유산과 음악성에 대한 온당한 평가와 이에 걸맞은 감사를 전했다. 마이클 잭슨의 사후에 발매된 두 장의 정규 앨범 ‘This Is It’과 ‘Michael’에는 미발표 신곡을 담아 그를 추억하는 팬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태양의 서커스단은 마이클 잭슨의 춤과 노래를 부활시킨 ‘Michael Jackson Immortal World Tour’를 통해 20세기의 가장 빛나는 대중음악의 유산을 전달해주고 있다.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모든 음악의 저작권을 포함하여 비틀스·마돈나·비욘세·에미넴에 이르기까지 총 9만 8천여 곡의 저작권을 단독으로 혹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 여기에는 부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의 아버지 엘비스 프레슬리의 넘버원 송이 포함되어 있다. 음원 수익금을 포함한 천문학적 금액의 유산은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신탁기금을 통해 관리하며 상당 부분이 마이클 잭슨이 설립하고 후원했던 자선단체에 기부될 것이라고 한다.
사실 필자는 이 글을 준비하기 전까지만 해도 마이클 잭슨의 위대함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의 음악과 함께했던 청소년기부터, 그를 그저 ‘춤 잘 추는 엔터테이너’의 이미지 속에만 가둬놓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마이클 잭슨의 음악이 들린다. 그가 남겨놓은 거대한 유행과 경향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것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를 뒤늦게 느낀다. 드뷔시·코플런드·차이콥스키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달빛’, 그리고 프로코피예프의 ‘피터와 늑대’를 몇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듣고 노래했다는 마이클 잭슨의 숨은 면목도 알게 되었다. 지난 세 달간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쉼 없이 듣고 그가 남긴 빛나는 공연과 뮤직비디오를 보며 새삼스레 감탄하고 더불어 감사했다. 그의 죽음 뒤에 세계 각국의 도시에서 펼쳐진 플래시 몹을 보면서 마이클 잭슨이 남긴 유산이 영원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마이클 잭슨은 20세기를 너머 21세기 대중음악의 항로를 열어주었다. 그의 음악과 춤, 공연과 영상은 대중음악과 대중문화의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고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예술인 ‘고전’의 영역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진정한 ‘팝의 황제’였다.

글 하종욱 사진 소니뮤직

출처: http://www.gaeksuk.com/atl/view.asp?a_id=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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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은 노래를 잘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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