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이야! 화이트 드래곤이다! 우와, 멋있어!"
"흥, 달밤에 뱀 밟았을 때의 네 얼굴만큼이나 창백하군 그래?"
"후치 네드발! 너! 그 말 하지 말라고 그랬지?"
갈색 머리 소년, 후치는 피식 웃었다. 그 옆에 있던 태양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펄쩍 뛰었다. 소녀는 누
가 들었을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후치를 노려보았다.
후치는 그런 소녀에게 조금 전과 다른 미소를 잠깐 지어보였을 뿐, 금방 딴청을 피운다. 그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던
소녀는 그의 태도가 마땅찮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린다.
“저것 봐! 후치, 저기, 저 애가 드래곤 라자인가봐!”
소녀의 손가락을 따라 후치의 시선이 향했다.
화이트 드래곤.
정확히 말하면 얼음으로 조각해놓은 듯한 새하얀 드래곤 옆에서, 역시나 새하얀 말을 타고 있는 소년이 보인다. 백마
에 흰 망토라니…… 후치는 콧방귀를 뀌었다.
"드래곤 라자야 드래곤에게 잡혀 먹힐 염려는 없겠지만 저 말은 정말 불쌍하군."
"응?"
"웬만한 배짱이 아니면 드래곤 옆에서 저렇게 나란히 걷기 힘들걸."
"어머? 그렇구나."
"어쩌겠어. 자기가 하얗게 태어난 잘못이지. 그러니까 화이트 드래곤 옆에서 혹시 절 잡아드시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라고 묻는 눈으로 걸어야 되는 것이고."
"하하. 후치. 말을 너무 재미있게 하네."
"말은 그다지 맛없는데.“
후치의 말에 소녀는 허리를 꺾으며 웃었으나, 그 옆에 있던 사람은 얼굴에 자그마한 웃음기조차 떠올리지 않고 덤덤
히 말했다. 석양을 녹여놓은 것 같은 붉은 머리의 소녀와 대조되게, 그 옆에 선 사람은 밤을 그대로 담아 놓은 듯한 칠
흑 같은 흑발을 가진 여성이었다.
후치는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드래곤은 그저 먹을 수 있다는 사실과, 말은 그저 먹힐 수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거 같은데요?”
흑발의 여성은 탐스러운 머리를 조금 흩날렸다. 간단히 말해 드래곤과 말에게 향해있던 얼굴을 후치에게로 돌렸다.
“말고기는 꽤 질긴데다 고기 냄새가 심해. 사람만 해도 맛있는 걸 더 찾기 마련인데, 드래곤이 과연 자기가 먹어오던
소를 놔두고 그런 말을 굳이 먹을 필요가 있을까? 집에 가면 맛있고 푸짐한 저녁이 차려져 있음에도, 길거리의 소탈한
음식을 먹을 사람은 없겠지.”
“둘 다 먹을 사람도 있는…… 으악!”
자기에게 향한 손가락을 소녀는 맛있는 저녁이라고 여겼다. 아그작!
“제미니,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탈나잖니.”
“아악! 제미니이! 미안! 내가 잘못했어!”
붉은 머리의 소녀, 제미니는 그녀를 가볍게 말리는(그러나 결코 말리는 느낌은 들지 않는)말에 식사를 포기했다.
“흥.”
손가락을 부여잡고 눈물을 찔끔 보이며 후치는 이 앙큼한 계집애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그
를 보는 날카로운 눈길에 금방 종언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눈길의 주인은 살짝 웃었다. 날카로웠던 눈매는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고,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미모는 꽤
빛났다.
“말이 보는 드래곤과 드래곤이 보는 말의 차이겠지? 그게 어느 말이고 어느 드래곤이고 간에 말이지.”
후치는 자신의 은유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기쁨과 그 속내를 모두 보인 듯한 부끄러움 중 어느 감정을 더 중시해
야 할까 고민해야했다.
화이트 드래곤을 귀족으로 바꾸고 백마를 평민으로 바꾸면 바로 그들의 신세를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은연중에
그의 은유를 알아맞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무래도 이야기에 나오는 악덕 영주와는 거리가 꽤 먼 영주님을 가진 덕이다. 그 예로 제미니는 ‘지
금 너희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모르겠으니,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라는 자세를 관철했다.
화이트 드래곤에게 온 신경을 다해 집중하겠다는 태도를 보이던 제미니는 앞이 잘 안 보이는지 까치발을 들었다. 잠
깐 후치와 여성의 말에 관심을 두는 사이에 그들이 차지했던 시야는 다른 사람들에게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후치는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제미니의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깜짝 놀란 제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후치를 바라보
았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제미니."
그리고 제미니를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렸다. 제미니는 그녀의 머리색과 통일이라도 시도하듯 얼굴색을 붉게 물들였으
나, 결코 내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 있던 흑발여성을 조금 불안한 눈으로 내려다보았으나, 마주보는
눈길이 호를 그리고 있음에 더욱 얼굴을 발갛게 만들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좀 잘 보이냐?"
“으, 응.”
짧은 대답. 민망함에 적응하는 약간의 시간이 지났다.
“그러고보니 저 드래곤 라자는 10살도 안되어 보이네?"
"쳇. 드래곤 라자는 나이와 상관없어. 드래곤이 보기엔 5살 꼬마든 80살 현자든 모두 어린애로 보이니까."
후치의 말에 주위의 어른들을 그에게 놀란 눈길을 보내었고, 갑자기 시선의 집중을 받게 된 제미니는 어쩔 줄 몰라했
다. 극복했던 민망함은 더 큰 시련이 되어 찾아왔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그녀는 몸을 꿈틀거렸다.
후치는 생각했다. ‘가지가지 하네.’
그는 주위에 신경 쓰지 않고 앞의 광장만을 바라보았다. 제미니도, 그 옆의 여성과 주위의 어른들도 다시 광장으로 시
선을 향했다.
어쨌든 장관이었다.
화이트 드래곤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사람은 익숙한 것에 대해서 그 크기를 쉽게 짐작할 수 있지
만, 이렇듯 상식을 뛰어넘는 크기는 짐작은커녕 압도당할 뿐이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몇 백 큐빗은 되어 보였다. 걷고
있느라 날개는 접고 있었지만 분명 몸과 황금비율을 이루는 어마어마한 크기이리라.
꽤 먼 거리를 이동했을 텐데도 목은 꼿꼿했고 발걸음은 그 몸과 어울리지 않게 우아했다. 마치 창공을 질주하는 움직
임과 같이 그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리고 후치가 생각하기에 1,000셀을 받고 서라고 해도 단호하게 거절할 만한 자리, 즉 드래곤의 바로 옆에는 백마에
올라탄 소년이 같이 걷고 있었다.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몸에 비해 소년 주변의 것들은 너무 컸다. 옷도, 망토
도, 타고 가는 말도, 당연하겠지만 옆에 있는 드래곤조차도.
그 뒤로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병사들이 대열을 맞춰 오고 있었다. 라자를 호위해온 병사들인 것 같았는데, 그들은 라
자가 탄 말과 달리 드래곤과 붙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드래곤과 라자가 군중의 앞을 지나갈 때, 마치 맞추기라도 한 듯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시골마을에 이
렇게 큰 소리를 지를 정도로 사람이 많았는지 의아할 정도다.
"드래곤 라자 할슈타일 만세!"
"할슈타일 만세!"
소년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자 더욱 고개를 숙여 머리 전체를 옷깃 속에 파묻어버릴 태세였다. 후치는 열 살
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만세를 보내는 상황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라리 무병장수하라고 하시지.
"위대한 드래곤 캇셀프라임 만세!"
"캇셀프라임 만세!"
마을사람들은 드래곤과 라자의 이름을 열심히 외쳤다. 사실 그들은 라자나 드래곤의 이름 따윈 알지 못한다. 성에서
나온 바람잡이들이 외치면 그걸 마을 사람들이 따라 외치는 형태였다.
"아무르타트들 반드시 무찌르십시오!"
"아무르타트를 무찔러요!"
순간 후치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것은 소년에게서만 나타나는 일은 아니었다. 군중들은 병사들이 보기에 섬뜩할
정도로 분노와 증오를 마음껏 분출했다. 라자와 드래곤의 이름은 모를지라도 그 이름만큼은 절대 잊을 수 없다.
그들은 이때만큼은 진심을 가득 담아 목이 터져라 외쳤다. 후치조차도 팔을 휘두르며 거칠게 외쳤다.
"빌어먹을, 아무르타트를 죽여버려요! 그 새끼를 박살내!"
후치가 흥분하는 바람에 제미니는 하마터면 떨어질 뻔 하였다. 제미니는 기겁해서 후치의 머리칼을 쥐어뜯었고, 그는
퍼뜩 정신이 들어서 제미니를 붙잡았다. 흑발의 여성도 어느새 손을 뻗어 제미니가 떨어지지 않게 받치고 있었다.
“어, 미안해. 제미니.”
“내려줘!”
“조심해. 제미니가 다치면 너만 손해야.”
“무슨 소리에요?”
“첫날밤은 제대로 보내야지.”
아직까지 소년의 머리칼을 붙잡고 내려달라고 떼쓰던 제미니와 그녀를 조심스레 내리려던 후치는 동시에 여성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둘의 시선이 말하는 바는 명확히 ‘헛소리 하지마.’였지만, 입으로 튀어나온 건 제미니 뿐이었다.
“언니!”
흑발의 여성은 약간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이 어린 커플은 보는 이로 하여금 흐뭇함을 유발하지만 동시에 장난기도
유발한다.
“얼굴이 붉어진 건 사실은 긍정하는데 부끄러워서 그런거니, 사실은 부정이 아닌데 쑥스러워서 그런거니?”
“어?”
“둘 다 아니거든요!”
역시 후치가 제미니 보단 똑똑하다. 그러니까 같이 놀리는 맛이 더해진다. 둘 다 멍청하다거나 둘 다 똑똑하면 같은 반
응일 뿐이니까.
“하하. 적당히 보다가 오렴.”
후치와 제미니가 서로 내가 왜 이런 덜떨어진 애랑 연관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하는 현장에서 여성은 빠
져나가기로 했다. 제미니가 의아하게 쳐다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언니, 더 안보고 가?”
“해야 할 게 많아. 마을이 이렇게 외지인이 왔는데 잘못해서 흠이라도 보일 순 없잖니. 거기다 곧 일손도 부족하게 될
텐데 미리 대비해놔야지.”
“일손이 왜?”
“제미니 이 멍청아.(여기서 후치는 한 번 차였다.) 드래곤이 왔으니 곧 아무르타트 정벌군이 출진하지 않겠어?”
“어? 우리 마을에서도 가는 거야?”
“사실 싸움은 드래곤끼리 이뤄질 거야. 그렇다고 해도 아무르타트를 따르는 몬스터들을 상대하거나 거기까지 가는 길
안내 할 사람은 필요하겠지. 그리고 아무리 정벌군의 중심이 드래곤과 같이 온 기사들이라지만, 우리 마을에서 손놓고
있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문제기도 해.”
“헤에?”
“호오.”
두 여성은 감탄의 시선을 후치에게 보냈다. 거기에 내포된 의미는 상반되었지만.
꼭 예의라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마을에서 정벌군에 참여하는 사람은 꽤 될 것이다. 그것도 자원으로.
하지만 여성은 자신의 추측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그녀의 여동생을 그 사실을 알 필요가 없었고, 후
치는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소년이다.
그녀는 가벼운 동작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군중이 꽤 모인 광장이었지만 그녀에겐 별 영향이 없는 듯 여유롭고 우아
한 동작이었다.
“그러니 이만 가볼게.”
“예, 들어가요.”
“나중에 봐, 언니.”
가볍게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하던 여성은 문득 생각난 듯 웃었다.
“아, 후치.”
“응?”
“제미니 너무 늦게까지 데리고 있지마. 하긴 마음만 먹으면 시간 같은 건 상관없나?”
“아악. 리타!”
“하하하.”
때마침 드래곤이 광장을 지날 때쯤, 드리워진 햇볕이 그림자를 만들어 여성을 감쌌다. 거대한 드래곤의 그림자안에 녹
아든 칠흑처럼 검은 여성은 석양을 등지고 걸었다.
--------------------------------------------------------------------------
한 십년전쯤에 DR을 읽다가 떠오른것을 최근에 문득 떠올리고 시놉시스를 짜 보았습니다.
연재사이트에 올리기엔 아직 쓴 용량이 부족하고 시놉시스가 제대로 구축이 안되어서 마이피에만 실험용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