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타는 눈을 날카롭게 하며 타이번을 노려보았다.
“어떤 의미지요?”
“자네의 대답은 마치 엘프나 요정이 할만한 것일세. 수명이 정해진 존재가 할 만한 말은 아니지. 필멸자는 수명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기 때문에 남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잘 하지 않아. 자기 자신의 행동조차도 스스로가 납득해야 행하는 게 인간일세.”
“사람도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을 통틀어 말씀하시는 건 성급한 일반화인 것 같습니다.”
“그럼 묻겠네. 자네가 레어에 가려는 것은 드래곤의 말이라서 그런 것인가, 캇셀프라임의 말이라서 그런 것인가?”
“……”
“당연히 자네는 후자겠지. 드래곤의 말이라는 건 자네에게 별로 중요치 않은 사실이야. 자네에게 큰 인상을 남긴 캇셀프라임이 말했기 때문에 그곳에 가려는 것이 아닌가? 사람은 그 정도의 이유로 움직이는 경우는 없다네. 그런 자는 바보거나 영웅이겠지.”
사람 사이에서 이유를 듣지 않고 말하는 것을 듣는 관계는 수많은 세월이 축척되었거나 보이지 않는 힘의 강제에 의해 이루어진다. 타이번이 말하는 바를 리타는 이해했다. 그녀는 자기자신에게 납득이라도 시키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부분은 불멸자처럼 생각하기에 나타난 것이었어요.”
“꼭 그렇지만은 않네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고 해두세.”
리타는 팔짱을 끼며 턱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진다. 타이번의 말처럼 그녀는 시간에 대해서 관대했고, 다른 사람들처럼 그것에 쫓기지 않았다. 개인의 특성이라고 생각한 부분은 필멸자가 아닌 불멸자의 특성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캇셀프라임의 레어에 간다는 제가 이상한 거네요.”
“그래서 캇셀프라임은 자네를 레어에 초대했을 수도 있지. 추측이지만 자네가 그녀에게 큰 인상을 받은 것처럼 자네도 그녀에게 큰 인상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네.”
“…… 짐작 가는 게 있긴 합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모험을 결정할 정도의 인상이니 강렬했음은 두말할 필요 없다. 단순히 디트리히의 생명만을 위한 게 아니라 왜 그녀에게 카피가 왔는지 알 것 같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몰라도 캇셀프라임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본 느낌이 들었다.
타이번은 볼 수 없지만 고뇌에 빠져든 여성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다.
“분위기도 풀 겸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나?”
리타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뒤늦게 ‘네’라고 대답했다.
“나는 젊을 적에 제자 한 놈을 키운 적이 있다네. 꽤 영특한 놈이었어. 스승보다 나았지. 큐어 드렁큰을 가르치니 술까지 함께 배운 녀석이야. 하루는 그놈이랑 실험을 하고 있었네. 정확히 말하자면 얼렁뚱땅 청소를 시킨 것이지만, 실수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실패입니다.”
보이지 않는 타이번이 노려보아야 어쩌겠는가. 타이번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커흠. 여하튼 제자에게 실험인 척 속여서 쓸모없는 것들을 정리하는데 키메라가 하나 탄생해 버렸네. 우리는 완벽한 키메라에 매달리고 있었고, 그것은 태어나자마자 자기가 완벽한 키메라라고 단언했지.”
“꽤 괴짜셨군요.”
“자네의 솔직한 점은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참아주게. 어쨌든 그 완성된 키메라는 자신의 짝을 원했지.”
“짝?”
“반쪽 말일세. 처음엔 욕망을 인지했고 나중엔 협박했지. 완벽한 자신과 자신의 완벽한 짝으로 세상을 완벽한 자식들로 채우고자 했어. 불행이도 그놈은 세상을 멸망시키고도 남을만해서 단순히 없애버릴 수는 없었지. 우리는 일단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네.”
리타는 흥미가 이는지 고민하던 자세를 풀고 타이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어. 그게 무엇인지 짐작하겠는가?”
“재료의 문제, 윤리적 문제, 제조의 문제, 관념적 문제, 세계 평화적 문제, 새로운 종족 출현 가능성의 문제, 사회 체계의 변화 문제, 기준의 재정립……”
“그만!”
리타는 접었다가 다시 펴기 시작한 손가락을 살며시 내리며 웃었다. 타이번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후치가 그렇게 말했으면 계속 해보라고 관조했을 텐데, 자네는 정말로 계속 문제를 제시할 것 같아서 무섭군.”
“잘 생각하셨어요.”
“흠. 여하튼 그건 바로 성별의 문제였네.”
“남자였나 보죠?”
타이번의 입이 벌어졌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하나?”
“타이번의 반응을 보니 맞네요.”
“……”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거 같으니 계속 이야기해 보시겠어요?”
“그러지. 자네는 아주 쉽게 맞췄지만 제자와 나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네. 외관상으로 판단하기는 쉽지 않았고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도 쉽지 않았지.”
“직접 물어보는 방법이 있지 않나요?”
“우리도 멍청하진 않았네. 그리고 그 결과 키메라까지 우리들 사이에 끼어서 고민하게 되었지. 그 지겹도록 완벽한 놈도 자기 성별은 모르더구만.”
“큭, 크흡.”
“웃어도 되네. 내가 생각해도 그 모습은 웃음을 참기 힘들어.”
리타는 입을 가린 채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카피가 무릎위에서 잠들어 있는 바람에 완전히 크게 웃진 못했지만, 타이번에게 웃음소리가 들리기엔 충분했다. 실례인줄은 알지만 리타는 뭐가 달려있니 없니로 마법사 둘이 진지한 토론을 하는 가운데 머리를 들이밀고 앉은 키메라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타이번은 리타의 웃음소리가 줄어들기를 기다리다 말을 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조력자가 한 명 등장했지. 그녀는 키메라가 남자라고 말해주더군. 그러자 키메라는 여자를 만들어주길 제대로 원했고, 우리는 다시 여자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네. 여자라곤 모르는 두 남자 마법사와 방금 자신의 성정체성을 알게 된 키메라가 말이야. 그리고 어떻게 되었겠나?”
“어떻게 되든 재밌게 되었을 거 같아요.”
“맞아. 그놈은 여성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지었네. 그런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모순덩어리가 존재해선 안 된다고 말이야. 그리고 자신의 존재 목적은 세상 모든 암컷들의 말살로 바뀌었다고 선언했지.”
“프하하하!”
“그렇게 폭주하던 그놈은 우리의 조력자를 다시 한 번 만났어. 그리고 그녀에게 한마디를 듣고 자살했네.”
“하하, 큽. 뭐라고 들은 거죠?”
“너 사실 계집애야.”
“아하하하! 하하하하핫!”
리타는 이번에는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덕분에 잠들어 있던 카피가 놀라서 졸린 눈을 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리타는 침대에 드러눕다시피 하며 배를 잡고 한참을 웃었다.
“퍽 재밌는 이야기지?”
“아, 풉. 네, 그러네요.”
리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흐트러진 옷매무세를 바로하고 놀란 카피를 안심시키며 다시 타이번을 바라보았다. 그는 부끄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임에도 회상 속에서 행복을 찾은 듯 평온해 보인다.
“나는 이 마을에 와서 자네를 보았지. 처음부터 왠지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 그리고 지금은 그 키메라가 생각나는구만.”
“제가 노처녀라는 말씀을 돌려서 하시는군요.”
“뭣?”
“저는 그렇게까지 이성을 욕망하지 않아요. 그리고 지레 겁먹고 남성 혐오 따위도 가지지 않고 있어요.”
“…… 적어도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들은 것 같아서 고맙네. 이젠 키메라 말고도 그 공주님까지 생각나게 해주는군.”
“공주님?”
“그런 사람이 있었네. 우리의 조력자였지.”
타이번은 천진난만하게 웃던 소악마를 떠올렸다. 이미 과거의 사람이지만 꽤 재밌던 추억을 선사해 주었다. 리타는 타이번이 자연스럽게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단서가 너무 작아서 포기했다. 타이번 정도의 실력이라면 궁성과 연이 닿아서 진짜 공주도 볼 수 있었을 거라는 정도만 추측했다.
“제 어떤 점 때문에 그들이 생각나셨나요?”
“말했잖은가. 키메라는 자기의 성별을 몰랐다고. 그놈은 똑똑했지만 텅 비어 있었어. 스스로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놈이었지.”
리타는 떠올랐던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타이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타이번의 하얀 눈동자도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타이번은 천천히 그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자네는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어.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불멸자로 여길 만큼 큰 것이야. 대화하다보면 내가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중인지 종종 헷갈릴 정도로 자네는 사람의 관점에서 벗어나 있을 때가 많다네. 다른 종족을 이해하고자 하는 나조차도 가끔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말일세. 물론 나는 그거에 항상 매달려 있기에 또 갇혀있는 패러독스를 겪으니 다른 누구에게나 느낄 때가 있지만, 자네는 그 정도가 아니었어.”
“……”
“처음 느낀 이질감은 자네의 기척이 사람 같지 않다는 이유였네. 말 그대로 기척 자체가 그런 느낌을 주었지. 그리고 자네와 대화하면서 느낀 이질감은 먼저 느낀 것과 다른 종류였네. 먼저가 물리적 이질감이라 한다면 지금은 관념적 이질감이야. 자네는 드래곤 라자에 대해서 실컷 불만을 토해냈지. 그리고 발러와 여상스럽게 이야기했네. 그 힘으로만 제압할 수 있는 놈을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자네의 사고가 나에게 이질감을 선사해. 퍽 신기한 경험이야. 사람에게서 드래곤을 대할 때와 같은 느낌을 받다니 말이야.”
“드래곤?”
“엘프라고 보기에 자네는 조화롭지 못하네. 자신의 근본부터 혼란스러워 하는 자이지. 요정은 그 생김새부터 다르지만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네. 드워프, 하플링, 오크 다 마찬가지네. 자네는 그들이라고 보기엔 비슷한 점보다 다른 점이 너무 많아.”
“왜 인간은 없죠?”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
“어느 종족에 가장 가깝냐고 묻는다면 인간이라고 대답하겠어. 하지만 정말 인간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겠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리타의 얼굴은 힘이 없었다. 그녀 자신도 어렴풋이 느끼며 지금 입 밖으로 꺼내는 말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안다. 알고 있음에도 부정하듯이 억지로 내뱉는 말이다.
“자네가 정말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세. 자네의 사고, 즉 생각을 논하는 것이지. 그리고 그것은 인간과 드래곤이 섞여 있는 모습이라고 느꼈네. 캇셀프라임을 보고 인간화된 드래곤이라고 했었지? 자네는 드래곤화된 인간처럼 보인다네.”
“드래곤…… 인간……”
“드래곤이 라자를 변화시킨다면 자네처럼 될 것이라고 보네. 물론 드래곤의 현명함과 위대함을 사람이 모두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겠지. 처음에는 무턱대고 드래곤의 모든 모습을 닮아갈 거야. 자네는 좋든 나쁘든 드래곤과 같은 눈높이를 보였어. 아마도 그 정도의 상태라고 생각하네만, 확실히 인간의 틀을 자주 뛰어넘었지. 드래곤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던 그 모습을 자네가 보인 것이네.”
“하지만 저는 캇셀프라임을 제외하고서는 드래곤과의 접점이 없습니다.”
“꼭 직접 만나야만 영향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지 않는가. 나는 자네가 어떤 연이 닿아서 그 시야를 얻었으리라 생각하네. 정말 타고나길 그렇게 했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자네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만들어 냈을 수도 있고. 하지만 나로서는 후천적인 변화 쪽이길 바란다네.”
“그건 아닐 겁니다.”
리타는 입술이 타는 느낌을 받으며 말했다. 타이번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표정을 짓는다. 뭔가 느긋하게 기다리는 자세다. 그는 처음 대화를 임할 때부터 교묘하게 그녀가 대답을 내놓도록 했다. 리타는 야속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말을 속으로 삼키진 않았다.
“제 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게 기분이 나쁘다는 느낌이군요. 아마도 당신은 추측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자신을 잃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부정하진 않겠네.”
“칼보고 음험하다고 말할 분은 못되십니다.”
“껄껄. 그것도 부정하진 않아.”
“제 이야기를 해드려야겠군요. 그리 길진 않습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을 수도 있겠죠.”
타이번은 완전히 듣는 자세를 취했다. 정말 눈이 안 보이는 게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그는 정확하게 리타를 보고 있었다. 리타는 계속 입을 닫고 싶은 자신을 억누르며 말했다.
“저는 어린시절의 기억이 없습니다. 친부모님은 몬스터의 습격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 한 분만 계셨다고 들었고, 그 외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기억을 하는 순간부터 저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저보고 드래곤이 느껴진다고 하셨나요? 그때의 저는 전혀 혼자서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남들과 다르고 간신히 남들에게서 텅 빈 자신을 채워 넣기에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채워지지 않았어요. 본능은 홀로 있고자 했지만 비어버린 속은 채워주길 원했고 내면의 갈등은 심화되었죠.”
“저런.”
“……”
“미안하군. 계속하게.”
“그때는 비어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갈구만 있을 뿐이지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할지 몰랐으니까요. 그게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겨우 성인이 될 쯤에야 깨달았어요. 그리고 여행을 떠났죠.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서 무엇인가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짐작하시겠지만, 지금 보시는 대로죠. 발러에게 몸을 바치면서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어요. 그 결과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와 변한 것이 있다면 조급함을 버렸다는 것뿐이네요.”
“잘 들었네.”
타이번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리타는 전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의 태도로 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만족하시나 보군요.”
“그렇다네. 예상대로군. 자네가 캇셀프라임과 그 라자에게 끌린 이유를 알겠어.”
리타는 혼자만 속을 보인 것 같아서 어떻게든 타이번을 파헤쳐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번의 말은 뒤늦게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
리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무엇이죠?”
“우선 캇셀프라임은 자네가 난생 처음 접하는 유형의 존재다. 자네는 본능적으로 변화를 거부하면서 살았기에 캇셀프라임같이 다가오는 존재가 주는 충격은 대단했겠지. 그들은 홀로 완전하기에 불완전을 완전으로 바꿀 기회로 보였을 거야.”
“……”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캇셀프라임과는 분명 뭔가가 다른 게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부족할지언정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리타는 잠자코 있었다.
“타인의 심층심리를 내가 짐작하고 떠든다는 게 퍽 웃기지. 간단히 끝내야겠군. 흠, 어디까지나 추측이네. 자네의 잃은 기억이 아마도 자네의 자아형성에 가장 큰 원인이 된 거야. 자네도 알고 나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지. 그리고 기억을 잃었기에 텅 비어버린 속을 남에게서 채우려 하는 것은 당연하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이 채우는 것이지, 남을 통해서 채우는 게 아냐. 이것만은 이렇게 밖에 말해 줄 수가 없겠군. 세월이라거나 경험이라는 시간을 동반하는 단어를 거쳐야만 이해할 수 있을 걸세.”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디트리히는, 그 아이는 어떻죠?”
“아아, 그건 퍽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네. 캇셀프라임이 자네의 비인간적인 면을 뜻한다면, 드래곤 라자는 반대지. 다른 사람에게 들었네만 그 아이는 자네를 어머니로 착각했다고 하더구만.”
“제미니가 그럴 수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자네는 어머니의 대역이 되었나?”
“아닙니다.”
“그럴 테지. 하지만 자네는 그 아이를 놓치지 못했을 걸세. 계속 품고 있었을 거야. 친근함을 표시하는 아이를 무시하지 못했다는 게 아니야. 사실을 자네가 원했던 거지. 인간이 주는 따스함을, 변화의 폭력이 가져다주는 행복함을 거부할 수 없었을 거야.”
“…… 이해했습니다.”
리타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렴풋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디트리히를 안고 있음으로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오히려 자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오히려 그녀가 그의 온기에 이끌렸다. 리타는 그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기로 했다. 그들을 떠올릴 때 마다 슬퍼지는 것은 자신의 온기를 잃기 때문이었다.
“그렇군요. 나는 디트리히를……”
타이번이 흐릿하게 보인다. 리타는 타이번을 또렷하게 보기 위해서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자 따뜻한 무엇인가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진다. 멍하게 손을 들어 그것을 만져보았다. 축축하다. 손가락으로 더듬듯 눈가를 만져본다. 눈에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들어보니 물방울이 맺혀있다.
“나는 캇셀프라임과 디트리히가 보고 싶어요.”
말이 떨리면서 나온다. 양 손을 들어 천천히 얼굴을 감싼다. 무엇인가 목 안에서 솟구쳐 오르려고 한다. 이것을 입 밖으로 토해낸다면 가슴 아픈 아우성이 되겠지.
아아, 이것이 운다는 것이구나.
왜 캇셀프라임과 디트리히에게 그토록 매달렸는지 알겠다. 그들이 계속 그녀의 마음을 잡고 놓아주지 않은 이유도, 타이번이 짐작조차 못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본능도, 이제 알 것 같다.
잃는다는 감정을 제대로 느껴보는 것은 처음이다. 누군가 죽었을 때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녀와 정말 가깝다고 할 사람 중에 누구도 죽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런 상실감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울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리타를 타이번은 가만히 기다렸다. 그는 장님이지만 이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를 질책할 정도로 젊진 않지만 그렇다고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만히 성장통을 겪는 아이가 우는 곁을 지켰다.
카피는 큰 눈을 치켜뜨며 얼굴을 가리고 있는 리타를 올려다보았다. 손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그녀의 몸을 적신다. 카피는 우는 친구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친구에게 비볐다. 아마도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생각했다.
어느덧 석양은 저버렸고 서늘한 밤의 기운이 방안을 맴돈다. 먼저 떠오른 루미너스가 은은한 빛을 뿌리나 방 안을 태양처럼 비추지는 못한다. 여성이 흘리는 눈물이 달빛을 머금어 오묘하게 빛을 낼 뿐이다. 밤의 정취는 방안의 적막을 섬세하게 보듬는다.
리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눈 가에 붉은 기가 남아있고 두 눈은 부었다. 그녀는 셔츠의 소매로 조심스레 눈 가를 닦았다.
“타이번이 장님인 게 다행이네요.”
“예끼. 장님이 아니더라도 그런 것은 충분히 못 본 척 할 수 있네.”
“타이번은 나쁘다에요. 리타를 울렸다해요.”
“미안하네. 정중하게 사과하겠네. 이 늙은이를 용서해 주겠는가?”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리타, 나쁘지 않다해요?”
“나쁘지 않아요.”
리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면서 살포시 미소지었다. 그리고 손으로 조심스레 카피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걱정이 가득한 눈이 여전히 리타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거 정말 몹쓸 늙은이가 된 기분이로군.”
“신경 쓰지 마세요, 타이번. 의도하신 건 맞겠지만 우는 것은 제 몫이었어요.”
“아가씨가 그렇게 말하면 더 죄책감에 빠지는 것이 남자지. 잠시만 기다려 보게.”
타이번은 소파 옆에 놓였던 그의 가방을 열고 뒤지기 시작했다. 눈이 안보이기에 손의 감각만으로 찾아야 해서 그는 오랫동안 뒤적거렸다. 한참을 그러더니 그는 작은 반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사죄의 선물이네.”
리타는 손을 들어 그가 내미는 반지를 받았다. 그것은 투박한 금속 반지였는데 안에는 빼곡히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이 마법사들의 언어인 룬어라는 것을 깨달은 리타는 타이번을 쳐다보았다.
“후치에게 준 것처럼 무식한 물건은 아니야. 좀 편하게 마법 쓰려고 연구하다가 만든 건데, 작은 크기로는 그게 한계더군. 반지 크기는 착용하는 사람에 맞게 조정되니까 아무데나 편한데 끼면 돼.”
리타는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왼손에 끼었다. 타이번의 말처럼 리타의 가는 손가락에 비해 큰 편이었던 반지는 끼는 순간 그녀의 손가락에 알맞게 줄어들었다.
“그거 끼고 한번 마나 볼을 만들어봐. 쏘진 말고.”
쏜다는 표현에 의아함을 가지면서 그녀는 타이번의 말을 따랐다. 그녀는 실내인 것을 감안해 조심스럽게 왼손으로 소량의 마나를 모아서 마나 볼을 구현했다.
“아?”
그녀의 손 위에 형성된 것은 금빛의 길쭉한 물체였다. 끝은 가늘고 뾰족하며 길게 이어지다가 다른 끝은 조금 커졌다. 그것은 어설프게나마 화살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는 리타에게 타이번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나만 운용하면 자동으로 매직 미사일을 구현해주는 장치일세. 캐스팅이 필요 없고 아침에 메모라이즈 할 필요도 없지. 자네의 마나 볼은 비효율의 극치니까 매직 미사일을 쓴다면 훨씬 효율이 좋아질 거야. 그리 강력한 마법은 아니지만 자네처럼 능숙하게 마나를 운용하는 게 가능하다면 훌륭하게 쓸 수 있겠지.”
“너무 과분한 선물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어봤자 눈이 이래서 제대로 써먹지도 못해. 지금은 디텍팅이나 소환이 훨씬 더 쓰기 편하니까 그냥 가져. 나보다는 자네가 가지는 게 그 반지에게도 좋은 일이겠지.”
“알겠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리타는 마나를 멈춰 매직미사일을 없애며 타이번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손에 낀 반지를 만져보았다. 마법 물품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지만, 이 물건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질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리고 대충 하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물건을 고작 울린 대가라고 주는 타이번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뭐 더 줄건 없으니까 그렇게 바라보지 말게.”
“보이시지도 않는 분께서.”
“안보여도 자네가 날 뚫어져라 보는 것쯤은 예상할 수 있네.”
“부정하고 싶지만 사실이니까 그러진 못하겠네요. 더 줄건 없으시다니 그만 쳐다보겠습니다.”
“하하하. 알겠네. 그럼 자네, 이제 어쩔 건가?”
그만 보겠다고 했지만 그런 말을 하면 쳐다볼 수밖에 없다. 리타는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무엇을 말인가요?”
“자신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했으니 행동으로 옮겨야 하지 않겠나? 마침 레어를 찾아 떠나겠다고 말한 참이기도 하지 않는가.”
리타는 그제서야 이해한 듯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그렇군요. 조만간 떠나야겠습니다. 조수 자리는 이만 내려놔야겠군요.”
“뭘 내려놔. 애초에 내 조수는 후치였어. 자네는 일을 같이 하는 동료였던 거고. 그러니 나에게서 임금도 안 받지 않았나?”
리타는 후치가 돈을 받을 때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녀는 타이번에게 놀림 받으면서 임금을 안 받겠다고 했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출발은 되도록 빠른 게 좋겠군.”
“왜죠?”
“칼 일행을 따라잡으려면 서둘러야지.”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묻겠습니다. 왜죠?”
타이번은 씨익 웃었다.
“그들과 같이 다니는 게 자네가 자신을 찾는 것에 큰 도움이 될 걸세. 칼은 음험하지만 현명하고 샌슨은 무식하지만 정직하지. 내 조수놈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건방지기만 하지만. 어쨌든 그들과 같이 여행을 하면서 끝날 쯤에 북해로 향해보게. 그 동안 분명 새로 얻는 것들이 많을 거야.”
“현명한 사람은 현명한 연장자의 말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지요. 알겠습니다. 내일이라도 바로 출발해야겠네요.”
둘의 대화는 일반적인 대화에서 필요로 하는 과정이 많이 생략되어도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공통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고 상대방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이야기는 종종 그렇게 진행된다.
“그렇게 빨리 출발 할 수 있겠는가?”
“여행에 필요한 도구는 거의 가지고 있습니다. 모아둔 돈도 꽤 되고요. 말은 성에서 구하든가 레너스 시에서 구하면 되겠죠.”
남은 건 사람들과의 인사 정도다. 친부모와 그녀를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고리인 그것을 적어도 지금 가족에게는 제대로 행해야겠지.
리타의 검은 눈은 별빛을 머금은 밤하늘처럼 빛났다. 타이번은 오로지 하얗기만 한 눈으로 그녀의 검은 빛을 담아냈다. 리타는 대화가 끝나가는 것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다.
“지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사실은 마지막이라고 느끼네. 왠지 자네와는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구만.”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지금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게 현명하겠지요.”
“답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답해주지.”
타이번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소파에 앉아있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이웃집 할아버지가 세상모르는 아이에게 질문을 들으려는 것 같다. 리타는 꽤 진지한 자세임에도 그는 여상스럽기만 하다. 목에서부터 뺨까지 뒤덮은 문신과 새하얀 눈동자가 유난히 눈에 띈다.
리타는 숨을 한번 들이 마셨다. 단숨에 그의 정체를 묻고 싶었지만 그것은 아무 추리도 없다는 것의 반증이기에 할 수 없다. 더욱이 그는 거짓말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는 할 수 있어 보인다. 그녀는 단지 짐작하는 바만 물었다.
“당신은 불멸자입니까?”
타이번의 하얀 눈이 가늘어졌다. 입은 사정없이 뒤틀리고 새하얀 치아가 드러난다. 리타는 그것이 어떤 표정인지 잘 알고 있다.
타이번의 입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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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님의 단편을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키메라'의 내용입니다.
안 읽으신 분들이라면 오버 더 호라이즌이나 인터넷을 조금만 뒤지시면 찾으실 수 있으니 한번 읽어보세요.
대마법사 핸드레이크와 솔로처가 벌이는 콩트 대마당이 퍽 유쾌합니다.
며칠전부터 ch1은 다 써놓고 퇴고중인데, 이상하거나 설정 오류가 몇개 눈에 띄더군요. ch2구상하는 것도 빠듯한 마당에 ㅠㅠ
열심히 머리 굴려봐야겠네요. 내일 ch1 마지막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좋은밤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