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에 돌아온 리타는 바로 짐을 꾸렸다. 하기로 결정한 일 앞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취미는 없다. 그녀는 예전에 사용했던 도구들을 찬찬히 챙겼으며 제미니는 부산스러운 그녀의 행동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언니, 여행이라도 가는 거야?”
“응.”
짧은 대답으로 제미니를 굳게 만든 리타는 계속해서 짐을 챙겼다. 전에 사용하던 것들은 몇 년 동안 내버려둬서 못 쓰게 된 것들이 꽤 있다. 내일 새로 사야할 거 같으니 새벽에 출발하기는 무리일 것 같다.
“엄마!”
청각을 통해 입수한 정보를 뇌에서 처리하기까지 시간을 꽤 소모한 제미니는 뒤늦게 어머니를 외치며 방을 나갔다. 리타는 피식 웃으며 잠시 짐을 정리하는 것을 멈추고 제미니를 따라 나갔다. 제미니는 부엌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달라붙어서 뭐라 말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놀란 눈으로 리타를 쳐다보았다.
“여행을 간다고? 그게 무슨 소리니?”
“말 그대로에요. 그리고 잠시 이야기를 드릴게 있으니 앉으시겠어요?”
리타는 그렇게 말하며 이미 아버지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놀란 어머니와 달리 여행이란 말을 듣고도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다만 그는 손질하고 있던 도구를 손에서 떨어트렸다가 발등을 찍히고 발을 동동 구를 뿐이다.
“꽤 놀라셨나 보군요.”
“누구라도 그럴걸! 아이고, 내 발.”
“하여간 칠칠치 못한 건 애비나 자식이나 똑같아. 좀 조심하지 그랬슈. 딸내미가 시집간다면 놀라서 돌아가실 양반이네.”
“그럴 리가 있나. 그놈부터 요절을 내고 죽어야지.”
“하이고.”
스마인타그 여사는 그녀의 남편에게 한심하단 시선을 던지며 테이블에 앉았다. 제미니는 상황을 살피듯 두리번거리다 남들을 따르는 게 가장 좋다고 판단하고 테이블에 착석했다. 때 아닌 스마인타그 가족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리타는 세 사람의 시선을 느끼면서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며칠 전에 샌슨에게 같이 여행을 가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어머어머어머나.”
제미니는 볼을 붉히며 양손으로 볼을 감싸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니는 리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명확히 파악했기 때문에 제미니를 진정시켰다.
“좀 가만히 있으렴, 젬.”
“아, 엄마! 젬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시끄러, 이것아. 그리고 당신도 그 흉흉한 거 내려놔요.”
아내의 말에 남편은 손에 든 날카로운 도구로 어떻게 하면 오거를 잡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리타는 왜 가족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때는 이유가 있어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란 소리니?”
“네, 설명을 드리기 위해서 보여드릴게 있으니 놀라지 말아주세요.”
“그게 뭔데, 언니야?”
리타는 카피를 불렀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서 새하얀 카피의 얼굴이 삐죽하고 튀어 나왔다. 그녀는 큰 눈망울을 깜박거리며 얼빠진 표정을 짓는 스마인타그 가의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에요.”
카피는 리타의 어깨를 타고 넘어와 테이블까지 기어갔다. 그리고 리타의 바로 앞자리에서 자세를 바로하며 앉은 자세를 취했다. 마치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뜬다.
“귀여워!”
“드래곤?”
“마, 말을 한다!”
순서대로 제미니, 어머니, 아버지의 말이다.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카피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미니는 한층 더 눈을 빛내며 카피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고, 아버지는 의자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몸을 뒤로 뺐다.
“소개하죠. 마을에 왔던 화이트 드래곤, 캇셀프라임이 남긴 분신입니다.”
“카피라고 한다에요.”
“언니, 뭐야 이거? 엄청 귀여워! 말도 해! 목소리도 귀여워!”
“리타, 이 사람 좀 무섭다에요.”
리타는 카피의 바로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반짝이는 제미니의 이마를 살포시 밀어냈다. 카피는 그녀를 위협하던 빨간 머리의 인간이 멀어지자 안도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제미니쪽에서 몸을 돌려 앉았다.
“토라진 거야? 어머어머, 귀엽기도 해라.”
제미니는 그 모습까지 마음에 드는지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카피를 바라보았다. 리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제미니는 내버려두고 말해야겠군요. 보시다시피 캇셀프라임이 저에게 부탁을 하기위해 분신을 보냈습니다. 부탁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여행을 떠나야겠습니다. 그리고 타이번과 상담했는데, 그는 제가 원하는 것을 여행을 통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타이번이라면 그 마법사님 말이냐?”
리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고 어머니가 걱정스레 물어보았다.
“급한 일이니? 위험한 일은 아니고?”
“급한 일은 아닙니다. 위험하냐를 묻는다면 어떨지 확실히 말하기 힘드네요.”
“네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거니?”
“네. 캇셀프라임은 명확히 저에게 카피를 보냈습니다. 아마도 카피는 다른 사람을 안내하진 않을 겁니다. 오로지 저만 가능한 일이죠.”
“부탁이라는 건 거부할 수도 있는 거잖니. 거기다 네가 그 드래곤이랑 어떤 관계가 있어서 그런 부탁을 받아?”
“캇셀프라임의 드래곤 라자와 친해졌거든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부탁은 제가 하고 싶어요. 말씀드렸다시피 제 잃어버린 기억에 관련된 일일지도 몰라요. 지난번에 여행갈 때처럼 무모한 짓은 안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시킬 일을 하지 말고서 그렇게 말해라. 걱정은 잔뜩 시키는 게 걱정하지 말라고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그러네요.”
리타는 어머니께 생긋 웃어보였다. 어머니는 안타까움이 잔뜩 담긴 시선으로 리타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는 드래곤의 부탁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어여쁜 딸이 고생할 것 같아 걱정이 될 뿐이다.
제미니는 카피를 관찰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는 계속 고민하는 표정으로 잔뜩 인상을 쓰고 있고 어머니는 안심이 되지 않는지 얼굴에 걱정이 한 가득이다. 리타는 오랜 시간 동안 계속 보아왔던 가정의 모습이 어쩐지 따뜻하게 보였다.
“우선 칼 일행을 쫒아갈 생각입니다. 칼은 여행한지 오래되었고 후치와 샌슨은 초행이니 제 경험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들이 자금을 마련하는 것을 돕고 나서 캇셀프라임의 부탁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서두르는 거예요.”
“그 캇셀프라임이라는 드래곤의 부탁부터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니니?”
“기한을 두지 않은 부탁이니 안 그래도 괜찮을 거 같아요. 그리고 부탁을 들어주러 가는 길은 수도까지 가야하니까 이왕이면 동행하는 게 좋겠죠. 어머니 말씀대로 여자 혼자서 여행하는 것보단 일행이 있으면 좋으니까요.”
“꼭 그들과 같이 갈 필요는 없잖니. 좀 천천히 출발해서 여유 있게 드래곤의 부탁만 해결하는 게 더 좋지 않니?”
“잡혀간 사람들이 걱정됩니다. 샌슨의 제의는 아버지와 타이번의 일이 있었고 이 집에 있는 게 좋아서 거절했습니다만, 사실 핑계였어요.”
“리타야……”
“여보, 그만해.”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말렸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주고서는 리타를 바라보았다. 제미니는 분위기가 진지해지자 카피를 보는 것을 멈추고 리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아! 그래서 언니가 계속 정신이 팔려있었구나.”
“응?”
리타는 의아하게 제미니를 쳐다보았다. 제미니는 씨익 웃으면서 손뼉을 쳤다.
“정벌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언니는 이상했는걸. 평소보다 얼이 나갔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어제 후치가 출발하고 나서는 더 심했잖아.”
“내가 그랬니?”
“응. 난 처음에 정벌군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낀 건가 생각했었거든.”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데?”
“아쉽게도 형부를 보는 건 더 뒤로 미뤄지겠다는 생각?”
리타는 실없는 소리라며 웃었으나 제미니는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언니는 뭘 계속 찾는 느낌이었어. 언니 어릴 때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그런…… 우음, 말이 꼬이네.”
리타는 제미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붉은 머리가 그녀의 손아래서 기분 좋게 스쳐지나간다.
“잘 보고 있었는걸. 나는 모르는데 내 주변 사람들은 다 내가 이상한 걸 알아차리네.”
“엄마나 아빠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걸?”
“작은 딸처럼 말썽은 안 피우니 뒤늦게 사춘기가 온 걸까 생각한 정도야.”
“암, 우리 딸들이 이상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그러려니 했지.”
“아빠……”
제미니는 분위기를 파악 못하는 아버지를 째려보았다. 날카로운 작은 딸의 시선을 받자 아버지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리타는 가족들의 말에 볼을 긁적거렸다.
“걱정 끼쳐드려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앞으로 더 걱정 끼칠 것 같은데, 이건 또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뭐, 건강하게만 있다면 그게 제일 훌륭한 사과가 아니겠냐.”
“그래, 남편감까지 하나 데려오면 더 좋겠고.”
“나는 선물 사주면 돼.”
“하하. 어떻게 가족이 다 원하는 게 달라요?”
가족들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동안 훈훈한 분위기가 지나가고 리타는 말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허리는 괜찮아 지셨나요? 숲에 나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런 걱정 하지 마라. 어차피 원래 내가 혼자 해야 할 일이었어. 네가 오지랖이 넓어서 아비 일을 도운 거잖니. 큰 딸의 효도로는 충분하니까 신경 안 써도 된다.”
“이 양반 허리는 진즉에 나았는데, 너 때문에 농땡이 부린 거야. 걱정해 줄 필요 없다.”
아버지는 당신이 나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지만 어머니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단숨에 쳐진 아버지는 쓸쓸한 가장의 모습을 연출하며 힘없이 말했다.
“이 집에서 그나마 내 걱정해주는 우리 딸 없으면, 이 아빠는 어찌 살꼬?”
“괜찮아요, 아버지. 원래부터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았는걸요.”
리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아버지는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로 테이블 위에 쓰러져 인생을 곱씹었다. 자식새끼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건 불변의 진리인 것 같다.
남편이 그러거나 말거나 어머니는 리타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리타야. 그러면 내일 출발할거니?”
“예, 그러려고 해요. 어제 아침에 말 타고 출발했으니까 따라잡으려면 꽤 서둘러야겠죠. 새로 사야 될 물건도 좀 있고요.”
“말은 어떻게 할 거냐?”
“우선 성에 요청해 볼 생각입니다. 구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 된다면 레너스시 까지는 열심히 발을 놀려야겠지요.”
“오넬에게 들었는데 이번 정벌군의 여파로 주인 없는 말이 몇 마리 생겼다는구나. 별 일 없으면 말을 구하는데 어려움은 없을 거다.”
오넬은 헬턴트성 마굿간의 말지기다. 아버지는 얼마 전 마을에서 만났던 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몇 년 전부터 해왔던 일이 쓸모없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지만 내일 리타가 직접 경험하는 게 더 놀랄 거라고 생각하며 겨우 참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여행 준비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고 리타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그들의 행동과 물음에서 애정이 묻어난다.
어머니는 아무래도 걱정이 떨쳐지지 않는지 거의 울상이 되어 리타의 손을 붙잡았다. 리타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손을 맞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지난번에 혼자 떠났을 때도 아무 탈 없이 돌아왔잖아요. 이번에는 일행도 생길 테니 괜찮을 거예요.”
“아휴…… 네가 쉽게 다칠 아이는 아니니 걱정은 안한다만……”
“어머니가 그러시면 떠나는 제 발걸음이 무거워져요.”
“엄마는 그렇게라도 너를 잡았으면 좋겠구나.”
“어머니.”
리타는 어머니의 손이 불안함에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떻게 어머니를 안심시켜야 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기만 하였다.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여보, 너무 그러지 마. 원래 자식은 성장하면 부모 품을 떠나는 법이잖아.”
“그런 말은 애 시집갈 때나 하세요. 당신은 내가 왜 이러는 지도 모르고……”
“왜 당신 맘을 모르겠어? 나도 항상 그 생각을 달고 다는 사람인데.”
아버지는 따뜻한 눈으로 어머니와 리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리타는 그저 조용히 부모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품에 힘없이 기대었다.
어릴 때부터 리타는 어느날 홀연히 떠나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언젠가 그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렇기에 예전에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도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다행이 그 여행에선 리타가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더욱이 그때처럼 간절함이 없다는 게 더 걱정된다.
예전에 리타는 어떤 것에 대한 갈구가 여실히 느껴졌기 때문에, 떠나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은 너무 강렬했다. 그러나 지금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비록 조금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전 같은 불안함은 없다. 어딘지 미련이 없고 애착이 없는 그 모습은 도리어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런 리타를 이대로 떠나보내면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그녀를 계속 붙들고자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도 어머니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내처럼 리타를 붙잡지 않았다. 대신 꽤 오래전 헤어진 친구를 떠올렸다.
“이 여편네가 나이를 먹더니 노파심이 늘어서 그러는 거야. 네가 이해하렴.”
어머니는 남편을 흘겨봤지만 따지진 않았다.
“그건 그렇고 헤어지는 마당이니, 이 이야기를 꺼낼 때가 온 것 같구나. 언제까지고 안할 수는 없겠지. 이제 그 녀석도 이해해줄 거야.”
리타는 본능적으로 아버지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그녀는 도리로서 듣고 싶지 않았지만, 과거에 대한 갈망은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옭아맸다.
“그 얼굴을 보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하나 보구나.”
“예……”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너로서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는다고 너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바뀔 거라 생각하진 않겠지?”
리타는 어설프게 웃으려다가 포기했다. 그녀의 가족이나 친구에게 연기는 빤히 들통 나버린다. 그녀의 아버지, 스마인타그씨의 눈이 아련한 빛을 띈다.
“당신, 미안하지만 술 좀 갖다 줘.”
어머니는 잠시 남편을 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에서 술병을 찾은 그녀는 잔을 들고 와서 남편과 큰 딸의 앞에 놔두었다. 제미니가 애처롭게 어머니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버지는 잔에 술을 따라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이제까지 너에게 친부에 대해 이야기 안 해준 것에 대해 사과하마. 네가 안 물어본 탓도 있지만, 그건 네 아버지와 나와의 약속 때문이다. 그 녀석과 나는 만약 둘 중 누가 먼저 죽는다면, 남은 한 쪽이 그 아이를 키워주기로 약속했지. 본래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완전히 자기 자식으로 삼기로 했어. 그리고 그 아이가 아직 기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아이가 아니라면,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약속했지. 너는 나이가 있었지만 아무것도 기억 못했기 때문에 그 녀석과의 약속을 따라서 새로 이름을 짓고 우리의 딸로 키웠다.”
“그랬군요.”
리타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친부에 대한 이야기는 인사를 잘 했다는 것 외에는 들은 게 없었다. 당연히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이상하게도 감정의 동요가 일지 않는다.
아버지는 스스로의 과거에 취해 술을 안주삼아 이야기를 계속했다.
“네 앞에서 계속 이름도 없이 그 녀석이라고 부르자니 미안해지는구나. 네 아버지는 나이젤이라는 이름이었다. 언젠가 한번 술김에 말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뭐 상관없나. 여하튼 나이젤은 아직 네가 갓난아기일 때 이 마을에 왔다. 아내와 사별하고 원래 살던 곳을 떠나서 한적한 시골을 찾아 왔다고 했지. 아내와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는다고 했어. 그땐 몬스터의 침략이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기에 살기에 큰 지장은 없었지. 허우대 멀쩡하게 생긴데다 도시물 먹은 놈이 왔다고 그 땐 난리였다.”
“어유, 그 정도가 아니었지. 나이젤씨가 얼마나 잘 생겼었는데. 거기다 인상도 서글서글하고 붙임성도 좋은데다 매너까지 좋았어. 그 때 네 어머니가 되길 희망하는 마을 처녀들이 줄을 섰었단다.”
“헷! 그 얼굴만 말쑥한 놈이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고백을 받을 때마다 부인을 아직 잊지 못한다면서 거절했고, 그게 다른 처자들의 마음에 더 불을 지핀 모양이더라고. 네 아버지가 로맨티스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마을 구성원이 꽤 달라졌을걸.”
“애 앞에 두고 뭔 소리에요.”
“아, 그런가? 미안해. 여하튼 그 녀석은 마을에 잘 적응했어. 부인 말처럼 성격 좋은 놈이었으니까 텃세 부리던 녀석들도 금세 마음을 풀었지. 술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주제에 술자리에 잘 어울려서 당시 총각이던 나나 다른 놈들과 자주 마셨어.”
“이 양반처럼 주사도 안 부렸지. 술 취하면 잘 웃고 쾌활해지기만 했어. 얼마나 좋아. 너도 나이젤씨 같은 남자를 만나야 해.”
“어흠, 그렇게 의기투합하다 보니까 어느새 꽤 친해졌더군. 그러고 내가 네 엄마 만나서 결혼할 때 쯤, 그 약속을 했어. 그때부터 점점 몬스터의 습격이 늘어났거든. 마을이 불안에 빠지면서 다들 서로의 유언을 교환하던 분위기였으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지. 그리고 여느날과 다름없이 술 한잔 걸치고 취해서 마을에 순회인사를 돌고 집에 돌아가던 게…… 그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들이켰다. 그 때 그 모습이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정말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돌아갔기에 오히려 반복된 인상으로 기억에 남는다. 큰 키에 말쑥한 모습으로 밝게 손을 흔들던 모습이 아련하다.
아버지는 한잔으로는 속이 채워지지 않는지 다시 한 잔을 채웠다. 그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술을 계속 입에 가져갔다.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어받았다.
“그날 밤 몬스터의 습격이 있었고 마을에선 경비대가 큰 피해 없이 격퇴했어. 하지만 몬스터의 예상 침입로는 너와 네 아버지가 살던 집이 있는 곳이었지. 사람들은 설마 하는 마음을 안고 그 집으로 향했지만, 집은 거의 파괴된 후였어. 나이젤씨가 그날 입고 있던 옷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바닥엔 핏자국이 흥건했지. 그리고 집의 지하실을 열어보니 네가 있었단다. 넋이 나간 상태로 말이야.”
어머니는 나이젤의 죽음을 보고 그랬다고 말해야 하나 망설였다. 아무리 감정이 무딘 큰 딸이라지만, 그 앞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언급 할 순 없었다. 그러자 술을 입에 들이 붓던 아버지가 나섰다.
“당신이 이야기할 부분은 아니야. 그때 널 발견한 게 나였다. 당시는 자경단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앞장서서 찾아갔지. 모습은 끔찍했다. 네 엄마가 말한 그대로였어. 우리는 망연자실하게 있는데, 문득 나이젤의 집에 갔을 때 술을 보관해두는 지하창고가 생각났지. 그곳을 열어보니 네가 쓰러져 있었단다.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기에 우리는 마을로 너를 데려왔지. 그리고 네가 깨어났을 때부터는 네가 기억하는 그대로란다.”
“아무 기억도 하지 못했죠.”
“그래. 우리는 네가 아버지의 죽음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아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어. 사실 그렇기에 네 앞에서 나이젤의 이야기를 안 한 것도 있단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이야기를 해 줄까 했지만, 어쩐지 너는 계속 불안해 보였기에 이야기를 하기 망설였어.”
“괜찮습니다.”
리타는 활짝 웃었다. 본인들에게도 어려운 이야기일 텐데 숨김없이 말해준 사실이 감사하다. 나이젤이라고 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보다는, 이 스마인타그씨와 그 부인이 그녀에게 있어 진짜 부모다. 리타는 감사함과 미안함이 공존하는 마음에 괜히 볼을 긁었다. 그리고 제미니가 관심을 보이는 술잔을 낚아채서 입에 가져갔다.
나이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동안 담아둔 게 많았는지 아버지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어머니는 남편에게 핀잔을 주기도 하고 이야기에 끼어들기도 하며 나이젤을 같이 추억했다. 제미니는 그녀가 기억도 못할 시절의 일이지만 재미있는 내용에 흠뻑 빠져들었고, 리타와 카피는 비슷하게 눈을 깜빡이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렇게 스마인타그가는 평소와 다름없이 웃기도 하고 소리도 치면서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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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타는 아침 일찍 성에 들렸다. 먼저 하멜 집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니, 꽤 예전부터 아버지가 리타가 언제든지 탈 수 있도록 말을 준비해 놓았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떠나갈지도 모르는 딸을 위해 남몰래 준비한 것이다. 말지기 오넬에게서 건네받은 말은 그녀의 머리색을 닮아 새까만 갈기를 가지고 있었다. 리타는 아버지의 마음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말은 꽤 사나워 보이는 놈이었으나 리타는 무리 없이 말을 길들일 수 있었다. 살기는 꽤나 유용하다. 오넬은 말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했고, 잠시 고민하던 리타는 어제 들었던 이야기에서 하나를 발췌해서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녀의 옛 성이다. 리타라는 그녀의 이름은 그녀의 원래 성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성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경비대에 들렀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그녀는 마을로 말을 몰았다. 대장간에 들릴까 고민했지만 경비대와 같은 사태를 겪을 것 같았기에 필요한 물품만 구매하고 그곳에서만 인사했다. 떠나는 마당에 고백이라도 해야 한다며 들러붙는 남자들은 그녀로서도 대항하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리타는 마을을 빠져나가는 대로에 말을 멈추고 집으로 시선을 향했다. 멀리 숲에 가려 보이지도 않지만, 그녀의 오랜 추억이 어디에 집이 있는지 명확히 가르쳐 주었다. 자신의 과거를 알고도 여전히 가족으로서 대해준 고마운 사람들이 저 곳에 있다. 리타는 말 위에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리타는 말머리를 동쪽으로 향했다.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던 카피가 작은 얼굴을 밖으로 빼꼼 내밀었다. 마주보는 햇살이 꽤나 눈부시다.
아침의 태양은 이미 고개를 완전히 들고 있다. 뜨겁다. 아직 햇살보다는 밤의 기운을 더 머금은 시무니안을 따라 바람이 차갑다. 후치와 칼과 샌슨은 이 햇살을 받고 이 바람을 느끼며 달려갔겠지.
“달릴까?”
리타는 기분 좋게 말했다. 듣는 이라곤 드래곤의 분신 하나와 사람의 말을 모르는 말 한 마리뿐이다. 카피는 기분 좋게 울었고 말도 이히힝 소리를 낸다.
말을 천천히 몰아간다. 정면에서 마주보는 햇살로 인해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다. 긴 그림자는 말의 걸음에 맞춰 한 걸음씩 계속 따라온다. 리타는 아래를 보고 하늘을 보고 앞을 보았다. 뒤는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앞으로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있다. 기분 좋은 햇살이 황금빛 도로를 깔아주었다. 차가운 바람이 어서 가라고 재촉한다. 달리지 않는 다면 예의가 아니겠지.
리타는 말의 배를 박찼다. 주위의 풍경이 재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한다. 리타의 높은 목소리가 평원을 울린다.
“가자! 속도를 높여, 그림자를 떨쳐버리자! 아스화리탈!”
끊임없이 추격하는 그림자와 경주라도 하듯 한 마리의 말은 평원을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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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마새에서 아스화리탈을 처음 봤을때 생각한 겁니다. 얘도 리타구나.
이렇게 리타도 헬턴트에서 떠났습니다.
ch2 시놉시스는 거의 따 짜진 상태인데 아직 하나도 적질 않아서 내일 바로 올릴 수 있을진 모르겠네요.
그럼 좋은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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