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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3. 뿌리깊은 나무 (8) (2) 2015/01/06 AM 12:07


*








일행은 아침식사를 마친 후 영지에 들어가기로 했다. 에델린은 그 결정에 고마워했지만 애초부터 일행도 그러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조화를 따르는 이루릴이나 한 신의 힘만이 지상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칼도 그렇지만, 후치와 샌슨도 단순히 이상이 있는 땅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당연한 인간의 마음을 따랐다.



에델린도 일행과 같이 들어가기로 했기에 구름을 부르지 않았다. 뱀파이어가 방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병의 진행은 위험하지만, 어제 겪었듯이 그 뱀파이어는 상당히 성가신 존재였다.



후치는 제미니를 몰며 일행의 앞으로 나섰다.



“가요!”



“…… 그렇지 않아도 가려고 했네. 그런데 자넨 너무 흥분하는 것 같은데?”



“갚아줄 게 있으니까! 그 뱀파이어, 내게 번개를 날렸어, 갚아주겠어요!”



샌슨은 날뛰는 후치에게 슬며시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하지만 그 덕택에 아름다우신 프리스티스의 무릎에서 잠들 수 있지 않았냐?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세상에, 리타의 그걸……”



“죽일 거야!”



몸을 날리는 후치를 샌슨은 여유롭게 피해냈다. 리타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서두르면 좋겠군요. 그녀에게 갚아줄 건 후치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어차피 지금은 낮이라 가더라도 만날 수 없을 테죠. 빨리 세이크리드 랜드를 해제할 수 있다면, 만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렇겠군요.”



이루릴이 리타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였다. 그녀는 리타가 왼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쳐다보았다.



리타는 오른손과 왼손에 각각 반지를 하나씩 끼고 있었다. 왼손에 낀 반지는 상당히 고위급의 아이템이다. 그냥 보고는 알 수 없지만 직접 사용하는 것을 본다면 누구라도 군침을 흘릴 법하다.



“어제 그 여자가 리타의 반지를 보고 놀라지 않았었나요?”



“그랬었죠.”



“괜찮다면 어떤 반지인지 말해줄 수 있겠어요?”



리타는 반지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헬턴트에 남아서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을 마법사가 생각난다.



“전에 말한 대로 고향에 있는 마법사에게 받은 것입니다. 저도 반지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단순히 뛰어난 아이템이라서 노린 게 아닐까요?”



이루릴은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뛰어난 마법 아이템이라고 그렇게 행동한다는 게 이상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 여자는 처음부터 반지만을 노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리타에게 무엇인가 반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했지요. 반지 자체에 어떤 사연이 있거나, 반지의 원 주인과 연관된 게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반지를 준 마법사는 본인이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타이번 말씀입니까?”



칼이 가까이 말을 몰아왔다. 그는 헬턴트에서 타이번에게 자신의 집을 제공해 주었다. 칼이라면 리타가 타이번을 파악한 이상으로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예, 뱀파이어와 타이번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타이번도 결코 평범하다고 할만한 마법사는 아니었으니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루릴은 마법사의 이름을 12인의 다리에서 들었던 기억이 났다. 다리의 제작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마법사였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고향에 계신 마법사 말이군요.”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삐를 다시 잡고서 대답했다.



“맞습니다, 세레니얼 양. 그 분은 제가 겪은 동안 절대로 악인은 아닌 것 같은 인상이었습니다만, 마법사라는 부류가 절대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이들이지요. 더군다나 상당히 많은 경험을 가진 것 같았습니다.”



“경험…… 이군요.”



“스마인타그 양?”



“아니, 아닙니다. 타이번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잠시 생각났을 뿐입니다. 여하튼 그 뱀파이어는 타이번 때문에 이 반지를 노린다고 할 수 있겠네요.”



“꼭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반지 자체에 사연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섣부른 결론을 지양하자는 말이었지만, 그런 칼도 상당부분 리타의 생각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가 보았을 때도 뱀파이어는 반지 자체보다는 그에 얽매인 어떤 것을 노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칼은 리타의 오른손에 껴진 반지에 눈이 갔다. 드래곤이 섬세하게 각인되어있는 반지다.



“전에 스마인타그 양께서는 시청에서 할슈타일 가문인 척 연기하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오른손에 끼신 반지는 그때 그 반지입니까?”



“맞습니다.”



“안목이 낮은 제가 보기에도 할슈타일 가문의 반지로 보입니다.”



리타는 칼이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아채고는 살짝 웃었다.



“어째서 그런 물건을 들고 있는지가 몹시 궁금하신 얼굴이군요.”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리타는 오른손을 들어서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작렬하는 태양빛에 드래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빛을 비춘다. 리타는 칼에게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칼은 어떻게 추리하고 있나요?”



“글쎄요. 저 같은 소인이 어떻게 짧은 식견으로 어림짐작한 것을 쉬이 털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괜히 진실 앞에서 부끄러워질 뿐이지요.”



“후훗. 음흉한 소리는 그만 하시지요. 칼을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 그런 겸양은 내숭밖에 안 됩니다.”



리타는 칼이 일부러 답을 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안에서는 수많은 가능성들이 검토되어 몇 가지 결론이 나 있다는 것도 안다. 리타가 인정하는 그의 능력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문제를 관통하는 통찰력이다.



칼은 의뭉스럽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한낱 촌부를 과대평가 하시는군요. 캇셀프라임의 라자가 주었다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하더라도 가문의 반지가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알고 있겠지요. 외인에게 함부로 반지를 주진 않았을 겁니다. 더욱이 아이가 어른이 낄만한 반지를 가지고 있을 리는 없지요. 캇셀프라임이 직접 인간 가문의 물건을 전해주지도 않았을 테고요. 그렇다면 전의 여행에서 구하신 것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그런 것 치고는 할슈타일 가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게 없으셔서 짐작하기 어렵더군요.”



“정보가 너무 없다?”



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답을 추리하기엔 단서가 부족합니다. 그러니 이만 답을 알려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정도의 추리만 해도 훌륭해요. 그리고 그렇게 추리하는 동안 남은 다른 가능성을 염두해 두시고 계시겠지요?”



리타의 날카로운 눈빛에 칼은 못 당하겠다는 듯 대답했다.



“원래부터 가지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그제서야 리타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칼은 허허 웃었고 이루릴은 이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리타는 할슈타일 가문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드래곤의 각인이 꽤 생생하게 느껴진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입니다. 여행을 떠나는 날 지금의 부모님께 받았지만요.”



“그러면 이제까지는 모르고 계셨단 말입니까?”



“알고 있었다면 지난번 여행이 꽤 단축되었을 겁니다.”



칼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머릿속으로는 많은 생각이 오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리타에게 실례가 될만한 것도 꽤 많았기 때문에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리타는 그런 칼을 알듯말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루릴은 리타에게 방금 대화에 대해서 질문했고, 리타는 칼에게와는 달리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그때 후치와 샌슨의 목소리가 일행의 귀로 들려왔다.



“저거 아지랑이 같은데?”



“아지랑이 맞아.”



“……”



일행의 앞에는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이 대지를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 가을 중에 아지랑이라니. 후치는 안 그래도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볕에 아찔했는데, 이제는 정신이 이상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몹시 더워진 날씨에 칼은 점잖게 소매만 걷어 올렸지만, 후치와 샌슨은 겉옷을 벗고 속옷위에 바로 하드레더를 걸쳤다. 리타는 하드레더의 끈을 풀어서 걸쳐놓은 형태로 셔츠의 앞섬을 풀어헤쳤다. 이루릴도 재킷을 벗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세 개나 풀어버렸다.



후치는 자꾸만 멍하게 그녀들의 앙가슴에 시선이 가는 자신을 채찍질 했으나 본능을 거부하지 못했다. 샌슨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지만, 정작 샌슨은 제일 앞서 있는 바람에 뒤에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후치는 후다닥 샌슨의 옆으로 갔다. 리타는 더위 때문인지 달아오른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녀는 이루릴이 옷깃을 잡고 펄럭이는 것을 보며 말했다.



“이루릴도 더위를 느끼나요?”



“네, 이곳은 법칙이 무시되는 곳이니까요.”



“그렇군요. 조화가 이루어질 수 없겠네요.”



날씨와 조화를 이루는 엘프라지만, 조화가 없는 곳인 만큼 더위를 느끼게 된다. 엘프는 날씨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 그들이 온도를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영지의 입구가 나타났다. 어제 뱀파이어가 막고 서있던 위치가 보이자 에델린이 일행을 불러 세웠다. 그녀는 기도에 들어갔고 일행의 주위로 20큐빗 가량의 투명한 막이 생겼다.



후치는 이마에 흐른 땀을 훔치며 말했다.



“후아, 이제 좀 살겠네요.”



“이제 다른 신의 힘은 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감사합니다. 에델린.”



에델린은 큼직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후치는 지난밤보다는 퍽 자연스럽게 마주 웃어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이크리드 랜드의 찌는 듯한 더위도 문제였지만, 그를 가장 괴롭게 했던 것은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림자가 전혀 없는 일행의 얼굴은 마치 가면 같은 느낌을 주었기에 끔찍했다. 에델린이 보호막을 쳐주면서 더위도 가시고 그림자가 생겨서 후치는 그야말로 살 것 같아졌다.



리타는 에델린에게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그런데, 이 막을 벗어나면 위험한 거 아닌가요?”



“맞아요. 이건 다음을 위한 준비 행위일 뿐이에요. 여러분 개개인에게 축복을 걸어드리기 위해서지요.”



“미리 걸고 오면 되는 거 아니었나요?”



“……”



에델린은 대답을 피한 채 일행에게 축복을 걸기 시작했다. 그녀의 거대한 손이 빛으로 물들더니 일행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에델브로이의 이름으로 그대를 축복합니다.’



축복의 효과는 특별히 느껴지지 않았다. 리타는 빛이 살짝살짝 반사되는 투명한 막을 보면서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축복의 효과도 이 보호막과 동일할 테니 말이다.



에델린은 이루릴만 빼고 모두에게 축복을 내렸다. 이루릴은 엘프로 그랑엘베르의 총애를 받는다. 그녀 자신이 이미 신의 축복을 받은 상태라는 말이다. 그것은 신이 없지만, 오직 헬카네스의 힘만 가진 뱀파이어도 마찬가지다. 뱀파이어는 따지자면 헬카네스의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태양은 헬카네스의 힘이잖아요? 어째서 뱀파이어는 그 밑에서 돌아다닐 수 없는 걸까요?”



“그건 뱀파이어라는 종족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하네. 태양은 헬카네스의 힘이지만 빛은 유피넬의 힘이니까. 모든 만물을 단 하나의 기준으로 명확하게 나눈다는 건 힘든 일이지.”



“요컨대 빛 때문에 뱀파이어는 힘을 쓸 수 없다는 건가요?”



“그러네. 열 보다는 빛이 문제인 것이지.”



“그러면 달빛이나 별빛이 있는 밤에는 어째서 돌아다니는 거죠?”



“자네는 달과 별은 직접 바라볼 수 있으면서, 어째서 태양은 직접 바라보지 않는 건가?”



“세기의 문제라는 것이군요. 알겠어요. 그보다 사람들이 아무도 안 보이네요.”



마을의 안으로 들어왔지만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샌슨과 후치는 입에 손을 가져다 대며 외쳤다.



“이봐요! 누구 없어요!”



“여기 멋진 총각이 둘이나 있으니 고개를 내밀어……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칼. 할 수 없군. 여기 멋진 총각이 셋이나 있으니 고개를 내밀어 봐요!”



“네드발 군…… 그만둬 주게.”



“여기 어여쁜 아가씨도 셋이나 있어요!”



“스마인타그 양……”



퍽 요란하게 떠들었지만 고개를 내미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건물 안에 있을까 싶어서 안에도 샅샅이 뒤졌지만 마찬가지였다. 분명 병마가 엄습했을 터인데 시체조차 없다니 이상한 노릇이다. 칼은 잠시 고민하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 질병이라. 가능성이 높은 장소는 신전이나 성, 공회당 같은 건물이겠지. 그런 곳에서 병자들을 수용했을 거야.”



“그럼, 큰 건물들을 찾아보면 되겠군요.”



“그렇지. 퍼시발 군. 혹시 지도에 영지 내부의 건물도 표시되어 있는가?”



“표시는 되어 있습니다만, 글로 개략적인 위치만 나와 있습니다.”



“그 정도면 괜찮네.”



샌슨은 곧장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보았다. 날이 몹시 화창하기에 어제처럼 코를 박고 볼 필요는 없었다. 샌슨은 재빠르게 건물 위치를 확인하고 지도를 덮었다.



“어지럽게 설명이 되어있군요. 영지 중심부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병자들을 수용했다면 제일 접근성이 좋은 곳에 수용할 테니까요. 그리고 대게 큰 건물들도 다 영지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일행은 감탄한 눈으로 샌슨을 쳐다보았다. 샌슨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몰았다.



가는 동안 까마귀들이 일행의 주위를 맴돌았다. 지붕이나 처마 끝에 앉아서 일행을 가만히 주시했다. 가끔 기분 나쁜 울음소리도 낸다. 후치는 고함을 치면서 쫓으려고 했지만 그놈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리타는 이루릴에게 넌지시 물었다.



“까마귀도 뱀파이어를 따랐었죠. 저게 사역마일 가능성이 있습니까?”



“가능성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패밀리어는 소수이지만, 어제 그 여자는 박쥐떼를 조종했어요. 드래곤 피어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지배하였다면, 그건 이미 패밀리어와 다를 바가 없지요. 완전한 패밀리어의 개념이 아니더라도 까마귀를 통해 우리를 감시할 가능성은 있네요.”



“그렇군요.”



리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에 내려앉은 까마귀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요사스러운 붉은 빛을 내는 눈을 가진 까마귀를 발견했다. 다른 까마귀들 보다 몸집이 더 커 보이는 놈은 흉흉한 눈빛으로 일행을 주시했다.



리타는 아스화리탈의 머리 위에서 까마귀들을 노려보고 있는 카피를 불렀다.



“카피. 저 까마귀만 처리할 수 있나요?”



“문제없다 에요.”



카피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안 그래도 거슬린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녀는 브레스를 쏘는 것처럼 붉은 눈의 까마귀를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그녀의 앞에 냉기가 모여 들었다. 그러나 브레스와 달리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기다란 얼음의 창이 만들어졌다. 그것이 완전한 형체를 갖추었을 때, 카피는 포효했고 창은 사라지듯 날아갔다.







별로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주시하고 있던 이루릴과 리타도 겨우 눈으로 쫓을 만큼 빠르게 날아간 얼음의 창은 그대로 까마귀의 상반신을 날려버렸다. 까마귀가 있던 자리에는 힘없이 쓰러지는 다리만 남아 있었다.



“그거 꽤 위험한 기술이네요.”



“헤헤, 힘이 많이 들어가서 잘 안 쓰는 거다 해요. 그냥 싸울 땐 브레스가 훨씬 효율적이다 해요.



“고마워요, 카피.”



카피는 리타가 머리를 쓰다듬자 눈을 감으며 기분 좋은 듯한 소리를 내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 있던 에델린은 리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리타, 어째서 까마귀를 죽인 건가요? 당신이 했으니 분명 아무런 이유가 없진 않을 테지요?”



“뱀파이어에게 타격을 줘야 하니까요.”



“네?”



리타는 에델린의 노란 눈이 동그랗게 떠진 것을 보고 자신이 또 앞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차분히 머리를 정리한 다음 말했다.



“이루릴은 마법을 익혔으니 바로 이해했지만, 에델린에게는 생소한 개념이겠네요. 패밀리어는 일반적으로 주인이 되는 마법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패밀리어가 타격을 받으면 마법사도 타격을 받게 되는 셈이지요.”



“아, 그래서 까마귀를?”



“네. 통상적이지 않은 개념의 뱀파이어지만, 마법은 어차피 그 근원을 같이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일반적인 경우처럼 큰 타격은 아니라도 어느 정도의 타격은 입혔겠지요."



에델린은 그녀의 육중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어제 박쥐가 습격했을 때, 박쥐를 처리해도 그 여자는 타격을 입지 않았어요.”



리타는 주변을 가리켰다. 처마와 지붕에 들러붙어 있던 까마귀들은 여전했지만, 그것들은 일행을 계속 주시하진 않았다. 날아가는 놈도 있었고 저마다의 방향을 보거나, 단지 움직이는 일행을 주시할 뿐이다.



“핵심이 되는 수장격인 패밀리어만 직접적인 지배 하에 두고, 다른 것들을 그 하위의 단순 명령만 듣게 하는 방식이지요. 아마 어제 박쥐떼들 중에서 공격하지 않고 뒤에 있는 박쥐가 있었을 겁니다.”



에델린은 완전히 납득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리타가 갑자기 까마귀를 죽여 놀랐었다. 불쾌하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리타가 그 이유만으로 생명을 해칠 인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응?”



샌슨이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우물 뒤에, 꼬마인가?”



일행은 바로 우물로 시선을 향했다. 무엇인가 조그마한 게 우물 뒤로 후다닥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후치와 샌슨은 서로 마주본 다음 후치가 앞을 향해 말했다.



“이봐, 거기 누구니? 우린 널 해치지 않아.”



바로 반응은 없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우물 뒤에서 머리가 조금씩 나타났다. 퇴색된 금발머리를 가진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 아이였다. 원래는 귀여웠을 것 같은 얼굴이지만 지금은 그림자가 없어, 마치 인형처럼 보였다.



소녀는 쭈뼛거리며 우물 옆으로 나왔지만 일행 쪽으로 오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골목으로 도망갈 것처럼 자세를 취하며 일행을 경계하는 눈치다. 칼은 그 모습을 보더니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얘야, 안심하렴. 이 마을에 병이 돌고 있지? 우리는 그것을 고치러 온 사람이야.”



그 말을 듣자 소녀는 황급히 일행을 돌아보았다. 칼은 소녀에게 다가가려고 했으나, 그가 한걸음 옮길 때마다 소녀는 두걸음 뒤로 물러났다.



칼이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후치가 우물가에 다가가더니 두레박을 들었다. 그리고 소녀에게 잘 보라는 듯이 두레박을 가리켰다. 소녀가 자신을 쳐다보자 후치는 두레박을 우물 속에 넣었다가 바로 건져 올렸다. 그리고 소녀가 들고 왔을 거라 짐작하는 물통에 쏟아 부었다.



그러자 소녀의 얼굴에 경계의 빛이 조금이나마 누그러들었다. 후치는 한 번 더 물을 길었고 물통에는 물이 가득 찼다. 후치는 최대한 착한 사람처럼 보이게 웃었다.



“내가 들어다줄게. 어디로 가면 되지?”



“신전.”



“알았어. 난 후치야. 넌?”



“슈.”



“슈? 좋은 이름이야. 예쁘구나. 예절도 밝고. 저기 잘 되지도 않는 미소를 짓느라 애쓰는 아저씨는 칼이야. 그리고 저기 먹성 좋게 생긴 입을 가진 아저씨는 샌슨이야.”



칼과 샌슨은 허허 웃었고 슈도 간신히 미소 비슷하게 표정을 지었다. 슈의 시선은 그들에게서 이내 옆에 있는 이루릴과 리타에게 향했다. 슈는 이루릴을 보고 눈이 커졌다.



이루릴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루릴. 그리고 이 쪽은……”



“리타.”



리타는 짧게 이름만 말했고 슈는 큼직한 그녀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리타는 겁줄 생각이 없었기에 아이들 용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녀로서도 얼굴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은 당혹스러운 존재였다.



슈는 리타와 이루릴을 보자 얼굴이 환해졌다. 앞선 남자들은 어쩐지 경계심이 일었지만, 엘프와 미녀는 아이의 경계심을 낮추었다. 이루릴은 방긋 웃으면서 슈에게 다가갔고 슈도 한걸음씩 그녀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루릴은 허리를 굽혀 슈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슈, 내가 안아줄까?”



슈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루릴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슈는 정말 아무런 경계심 없이 이루릴의 목을 끌어안았다. 순수한 아이이기에 엘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엘프가 조화롭기에 아직 어린 아이에게도 조화를 이루는지는 알 수 없었다.



슈는 이루릴에게 안겨서 풀어진 표정이 되었다가, 일행의 가장 뒤쪽에 있는 에델린을 발견했다. 에델린은 후드를 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거대한 체구는 눈에 확연히 띌 수밖에 없었다.



이루릴은 슈를 안은 채 에델린에게 걸어갔고 후치의 눈은 불안한 빛을 띄었다. 리타는 그런 후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후치가 돌아본 리타의 얼굴은 안심하라는 듯이 평온해 보였다.



이루릴은 놀라서 눈이 커진 슈를 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슈, 여기는 에델린. 우리를 도와서 병을 고치러 온 아주 착한 트롤이란다. 사람들의 병을 잘 고치는 아주 강한 프리스티스니까 겁먹지 마렴.”



“트롤?”



슈는 입을 헤 벌리며 멍하니 에델린을 바라보았다. 에델린은 고민하다가 후드를 천천히 벗으면서 말했다.



“안녕, 슈. 반갑구나.”



슈는 그 목소리에 놀랐지만, 드러난 에델린의 얼굴에 더 놀랐다. 그녀의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흐를 정도였다. 그런 그녀를 이루릴이 섬세하게 보듬으며 등을 어루만졌다.



“검 먹을 필요 없단다. 신께서 이 마을의 병을 고치라고 보내 주신 분이야. 슈가 싫어하면 에델린도 싫어할 거란다.”



이루릴의 토닥거림은 마치 엄마가 어린 아이를 안아 재우는 것처럼 편안했다. 보고 있는 후치는 마치 그가 안긴 것같은 나른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다 꿈이 생각나는 바람에 삽시간에 얼굴을 붉혔지만.



슈는 이루릴에게 감화된 것인지 놀람으로 굳어버린 얼굴이 점차 풀렸다. 에델린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으며 가만히 슈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슈는 에델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델린은 이루릴을 향해 약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루릴은 슈를 안을 때와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에델린은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럽게 슈를 안았다. 그녀의 작은 몸은 불안함에 떠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에델린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에델린에게 안겨 올라가자 지상과의 높이에 놀라는 듯 하더니 이내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에델린은 그녀의 감화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아이가 안긴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당황한 표정은 이내 안락하고 부드럽게 바뀌었다.



후치는 리타를 돌아보며 말했다.



“난 솔직히 이루릴이 에델린을 바로 소개할 줄 알았어요.”



리타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사람이 얼마나 외모의 영향을 받는지 알게 되었어. 다른 종족의 기준을 알게 됨으로서 자신의 기준만이 존재치 않는 다는 것을 깨달은 거지. 엘프는 현명한 종족이야. 다른 기준을 부정하지 않고 수용해버려.”



“조화의 엘프답네요.”



리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훈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에델린과 그녀를 올려다보며 비슷한 표정을 짓는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더 없이 훈훈한 광경이지만 리타는 입이 쓴 것을 느꼈다.



오직 스스로 조화로울 뿐인 엘프는 조화롭지 않는 존재와의 조화를 이루고자 했다. 그것은 인간에 의한 변화이며, 그 변화를 엘프는 받아들였다.



변해버린 종족을 본다는 것은 언제나 입맛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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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9장이군요. 끊기 애매한 위치다보니 길어졌습니다.

원래라면 매일 이정도 분량씩 적으려고 하는데 어렵네요.

그럼,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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