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하군요.”
에델린은 리타의 가슴에 올려둔 손을 거두었다. 그녀가 꺼림칙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자 사람들은 걱정이 앞섰다. 샌슨이 리타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문제가 있는 겁니까?”
“예, 어제도 느꼈지만 리타가 아픈 이유는 질병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에델린은 바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옆에 있는 사만다를 쳐다보았다. 무릎을 꿇고 있음에도 눈높이가 비슷했다. 사만다는 에델린의 시선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료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어, 어째서 그런 거죠, 사만다?”
“진정하게나, 네드발 군.”
칼은 후치의 어깨를 잡았다. 돌아보는 후치의 눈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바라보는 칼의 눈도 걱정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투덜댔다.
“리타가 어제 아팠던 건 말끔하게 치료했었잖아요. 거기다 오늘은 에델린의 축복을 받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왜 또 쓰러지는 거죠?”
에델린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다가 무릎에 얹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리타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알 수 없어요. 확실한 건 리타가 이렇게 쓰러진 게 질병에 의한 것이 아니란 거예요. 크레틴 씨께 테페리가 응해주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지 싶어요. 신성력으로는 치료해봐야 소용없으니까요. 어제 치료했던 것도 그때 말씀드렸다시피 육체만 활성화 시켰을 뿐이었어요. 병이라든가 아픈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었거든요.”
칼은 피로에 지쳤음에도 골똘히 생각했다.
“음, 하긴 에델린 양에게 축복을 받은 우리는 지금 이렇게 멀쩡하지. 스마인타그 양만 이상이 생긴다는 건, 적어도 질병에 의해서는 아닌 것 같네.”
“그럼 뭘까요, 칼?”
“글쎄…… 에델린 양께서는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에델린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옆에 있는 사만다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질병이 아니라는 짐작만 할 뿐입니다. 아마 어제 리타가 아팠던 것도 질병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녀가 나아진 이유는 단지 영지에서 멀어진데다 몸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칼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루릴을 돌아보았다.
“그렇군요. 그럼, 세레니얼양은 어떠십니까?”
이루릴은 리타의 옆에서 그녀의 손을 쥐고 있었다. 이따금 인상을 쓰며 안색이 나빠 보이는 리타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그녀는 칼을 보지 않은 상태로 대답했다.
“인간은 신력과 마력을 어우르지 못한다고 알고 있어요. 리타는 직접은 아니지만 마법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마나를 다뤄요. 그 때문에 신력이 넘치는 이 땅에서 괴로워하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리타는 저의 신성치료를 아무 문제없이 잘 받았어요. 축복을 내릴 때도 거부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고요.”
펠레일이 에델린의 의견에 의문을 표했다.
“그건 이상하군요. 아무리 약하더라도 마력과 신력의 합은 사람이 버틸 수 없습니다. 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세레니얼 님의 말씀대로라면 리타씨는 마법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신성력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를 제가 여러 번 회복시켰습니다. 회복에 따른 후유증은 없었어요. 이번처럼 리타가 괴로워하는 모습은 처음 봐요.”
펠레일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는 마법학에 대한 이론이 머릿속으로 떠올랐지만, 환자를 앞에 두고 떠들 수 없는지라 참았다.
이루릴은 턱에 손을 가져다 댄 채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녀는 계속 리타의 손을 붙잡고 있었는데,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마력과 신력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신력의 문제일 수 있겠군요.”
“융합이 아닌 수용입니까?”
“예. 게덴이라는 신의 힘이 직접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이크리드 랜드라는 이 곳의 특수성 때문에, 일정 이상의 신력을 접하게 되어서 나타나는 문제일 수 있겠군요. 신의 힘에 의한 질병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 그저 과한 신력에 의한 거부 반응…… 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리타의 몸에 열이 나는 게 그에 따른 신열일 수도 있습니다.”
펠레일은 결국 참지 못하고 반박했다.
“그럴 리가요. 원래부터 이 세상은 신의 힘이 펼쳐진 곳입니다. 다신이 아닌 유일신이 되었다고 해서 유일신의 힘만을 받을지언정 총량의 변화는 오히려 줄어듭니다. 신력에 대한 거부반응이 인다면 그 전부터 문제가 되었어야 합니다.”
“그건 일반이라고 가정할 경우의 이야기가 아닌가요? 만약 리타가 어떤 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기본적인 가정 자체가 무너질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범주를 넘는다는 건, 탑의 마스터들조차도 불가능이라 보는 사례입니다. 하나의 종을 뛰어넘어 종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드래곤 로드의 시절부터 알려져 왔습니다. 그것이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한 강제적 변화라고 하더라도, 그 변화가 일어날 일은 지극히 가능성이 낮습니다.”
“페어리 퀸은 다른 이의 혼을 요정화 시킬 수 있습니다. 요정화라는 수단이 아니더라도 어떤 강대한 이의 저주나 힘에 노출 되어 본래의 고유성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지요.”
후치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칼잡이들은 모두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듣고 있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후치는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칼은 논쟁을 중단시키며 일행에게 말했다.
“마땅한 원인을 찾아낼 수 없으니 이야기는 그쯤 하도록 하시지요. 다들 지쳤으니 내일 어떻게 할지 계획을 짜고 휴식을 취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거보다 내일 아침이 되면 바로 탐색에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찾고 싶지만…… 그럴 수 있는 분은 없을 것 같군요.”
다들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쓴웃음을 지으며 후치와 샌슨을 보았다.
“퍼시발 군, 네드발 군. 힘 좀 남았는가?”
“시킬 일이 뭐죠?”
“신전 주위를 경계해야 할 것 같아. 밤이 되어서 헬카네스의 기운은 사그라들었지만, 대신 다른 위협이 닥칠지도 모르니.”
“뱀파이어 말이죠?”
터커 일행이 놀란 눈이 되었다.
“저, 뱀파이어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칼은 졸린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어제, 아무것도 모른 채 영지에 들어오려고 하다가 만났습니다. 저희를 돌려보내려고 하더군요. 밤에는 에델린을 습격하기도 했고.”
“습격이요?”
“먹구름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저희 뒤를 쫓은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갑자기 습격해 오더군요.”
“그러셨군요.”
“그래서 말인데, 그 뱀파이어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습니까?”
터커는 잠시 생각해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잘 모릅니다. 이곳에 들어온 첫날밤에 습격해 오던데, 그 때 펠레일이 너무 힘을 써 버리는 바람에 저희도 질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시체를 소각할 때도 공격해 오더군요. 낮이었는데…… 그, 사만다가 먹구름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맞아, 사만다? 응. 글. 그 다음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영지를 침입하는 사람들에게 적의가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소.”
“오늘 밤에도 틀림없이 다시 올 것 같네요. 우리는 그녀의 앞마당에 고이 들어와 있는 셈이니까요.”
대화가 끝나고 일행들은 각자 할 일을 챙겼다. 이루릴과 펠레일은 아침 메모라이즈를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에델린은 완전히 지쳐서 도저히 어떤 일을 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따라 누웠다. 사만다는 기력이 남아서 칼과 함께 조금 더 사람들을 돌보기로 했다.
후치와 샌슨은 칼의 말에 따라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사만다가 후치를 붙들었다.
“왜요, 사만다?”
“넌 저기 누님을 간호해 드리렴. 경비는 듬직한 남자들에게 부탁하고.”
“듬직? 누가요?”
후치는 손을 눈 위로 올려 찾는 시늉을 하였다. 샌슨은 피식 웃으며 그의 정수리를 한 대 치고 지나갔다. 터커와 크라일도 따라 웃으며, 샌슨을 따라 정수리를 한 대씩 치며 밖으로 나갔다.
“으윽. 나 같은 미소년에게 손을 대는 건 범죄라고.”
“미소년? 누가?”
“여기 있어요.”
사만다는 후치가 했던 자세를 흉내 냈다. 후치는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켰지만 사만다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러다 둘은 웃음을 한 차례 터트렸다.
후치는 사만다의 말에 따라 얌전히 리타의 옆에 앉았다. 만약 밖에 위험이 닥친다 싶으면 그때 나가도 된다. 그리고 지난밤에 그가 쓰러진 동안 간호해준 은혜를 갚기에 좋은 기회다.
자신도 무릎베개를 해주는 게 좋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후치는 리타의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예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인상을 쓰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역시 예쁜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제일 어울리는 법이다.
후치의 손길이 얼굴에 닿자 리타는 눈을 꿈틀거렸다.
“으음……”
“어? 정신이 들어요, 리타?”
리타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흐릿하던 시야에 초점이 잡히며, 그녀를 걱정스레 보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여, 여긴 어디? 나는 누구?”
“…… 농담할 정신이 있는 걸 보니 괜찮은 모양이군요.”
“후훗. 아, 아야…… 으, 웃기만 해도 머리가 울리네.”
리타는 격렬한 숙취보다 한 단계 더 지끈거리는 머리에 신음소리를 냈다. 후치는 눈뜨자마자 농담부터 하는 누나를 보며 한숨을 쉬다가 찬물에 수건을 담갔다가 짜서 그녀의 이마에 얹어 주었다. 찬 수건이 기분 좋은지 리타는 빙그레 웃었다.
“기분은 좀 괜찮아요?”
“아니.”
“솔직함이 항상 미덕이 되진 않아요. 그래도 지금은 솔직한 게 낫지만요. 가만있어 봐요. 다른 사람들 불러올게요.”
리타는 일어서려는 후치의 바지를 잡았다. 후치는 스르륵 내려가는 바지를 황급히 추슬렀다. 그의 시선은 리타에게 무슨 짓이냐고 따지는 의미가 분명히 드러났다.
“그냥 이대로 있어. 다른 사람들도 쉬게 해줘야지. 그리고 누가 온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어, 깨어 있었어요?”
“아니. 하지만 에델린에게 축복을 받고도 아픈걸 보면 신성력으로 해결 될 문제는 아니겠지. 사만다도 마찬가지일 테고. 이루릴이나 칼이 도울 수 있다면 진즉에 돕지 않았겠어?”
후치는 리타의 옆에 앉으며 놀라워했다.
“정말 아픈 거 맞아요? 아픈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한데요?”
“내 고통에 대한 의심은 불만이지만, 상황에 대한 추론이 타당하니 넘어가 주겠어. 아프다곤 해도 이정도의 판단력은 있다고.”
“점점 더 믿기 어려워졌어.”
리타는 누운 채로 고개만 후치에게로 돌리며 살포시 웃었다.
“후후. 마음대로 생각해.”
“마음대로 생각해서 간호해 드리죠.”
리타는 힘없는 손을 올려서 후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다. 그런데 지금 밤 아니야?”
“맞아요.”
“그러면 뱀파이어가 습격해 올 텐데, 대비는 해 뒀어? 하긴 샌슨이 없는 걸 보면 밖에서 지키고 있나 보네. 넌 안 나갔니?”
“사만다가 리타를 돌보라고 해서요. 어제 받은 은혜도 좀 갚을 겸.”
리타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녀는 후치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살짝 홍조를 띄었다. 그러다 이내 평소와 다름없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가슴을 만지게 해준 은혜?”
“아, 그, 저, 그, 그건 아니에요!”
후치는 손발을 휘저으며 전력을 다해 부정했다. 일이 많이 벌어져서 잊고 있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 아무리 가족 같은 누나라지만, 아니, 가족 같아서 더 민망하다. 자기 누나의 가슴을 주물럭대는 동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버버 거리는 후치를 바라보며 리타는 애써 웃었다.
“그래, 알았어. 잘 부탁할게.”
“아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후치는 한숨을 내쉬며 리타의 이마에 놓인 수건을 뒤집어 주었다. 리타는 그런 후치의 손을 붙잡아서 볼에 가져다 대었다. 후치는 그녀의 행동에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네 손, 차가워서 기분 좋아.”
후치의 손은 찬물에 수건을 담갔다 짜느라 시원해진 상태였다. 후치는 리타가 시원한 것을 찾는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물에 적신 수건 더 줄까요? 그걸로 좀 닦을래요?”
“아니, 이대로 그냥 손댄 채로 있어줘.”
후치는 붉어지는 볼을 긁적이며 엉거주춤한 자세를 유지했다. 환자가 기분 좋다고 하는데 손을 빼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리타의 볼에 닿은 손은 금방 체온으로 따뜻해졌다. 리타는 반대손을 요구했고, 후치는 순종적으로 내밀었다. 리타는 그 손을 반대쪽 볼에 가져다대며 시원함을 만끽했다.
후치가 어색해 하는 것을 보면서 리타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몸을 후치 쪽으로 돌리며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몸도 끈적거려서 닦고 싶은데, 닦아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래?”
후치는 즉답했다.
“전력을 다해서 기절해 드리죠.”
“기뻐서?”
“마음대로 생각해요. 도망친다는 선택지도 있어요.”
“매정한 남자네. 이 누나는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단다.”
“저도 순진한 동생을 놀리는 누나 밑에서 큰 적은 없거든요?”
후치는 냉담하게 말하며 그녀가 잡고 있는 손을 빼냈다. 리타가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후치는 리타가 몸을 움직이느라 이마에서 떨어진 수건을 주워들고 찬물에 담갔다. 그리고 다시 리타를 바로 눕힌 다음 이마에 얹어주었다.
리타는 얌전히 누워서 후치의 간호를 받았다. 그와 평범하게 대화를 주고받긴 했지만, 실상은 가만히 누워있기조차 힘겨웠다. 몸은 열이 나는 탓인지 땀이 흘러 끈적이는 데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머리는 머리대로 두통이 심해서 차라리 기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후치가 지속적으로 차가운 수건을 머리에 올려줘서 견딜만했다.
후치와 리타는 오랜만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주로 리타가 제미니를 소재로 후치를 놀리는 것이었지만, 둘의 대화는 퍽 재밌었다.
자기 가슴을 만지면서 꿈에서는 제미니를 보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추궁에 후치가 사실은 이루릴이었다고 말해야 하는지 고민할 무렵,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다!”
샌슨의 목소리였다. 곧이어 늑대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후치는 황급히 리타를 내려다보았고 리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갔다 올게요. 괜히 움직이지 마요.”
리타는 대답하지 않고 생긋 웃었다. 후치는 미심쩍은 눈빛을 접으며 바스타드를 챙겨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리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옆에서 움직이는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나요, 이루릴?”
“예. 리타도 일어났나 보군요. 괜찮나요?”
“아니오. 여전히 아픕니다.”
“그렇군요. 푹 쉬도록 해요.”
이루릴은 몸을 일으키며 그녀의 무장을 챙겼다. 밖에서 들리는 늑대의 울음소리와 전사들의 기합소리가 꽤 시끄러웠다. 귀가 밝은 엘프로서는 제대로 잠을 자기 힘들었을 것이다.
“내일 메모라이즈 할 수 있겠어요?”
“이미 잠을 깼으니 어쩔 수 없지요. 지금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진 않네요.”
“알았어요. 몸조심해요.”
이루릴도 신전 밖으로 나갔다. 신전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일행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칼과 에델린은 정말 죽은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깊게 잠들어 있었다. 사만다와 펠레일도 회복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이 정도의 소란에는 일어나지 않았다.
리타는 가만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밖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스스로의 안전을 남에게 맡긴 적이 없다. 분담이라면 해보았지만 완전히 신뢰로서 맡긴 적은 전무했다. 자신의 일을 홀로 해내지 않는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파서 아무것도 못한다. 일행은 그녀와 신전 안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확실하게 밝혀지지도 않은 뱀파이어와 싸우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이렇게 누워있기 밖에 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
예상외로 기분이 나쁘다거나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남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편안하게 다가왔다. 그녀가 신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그 편안함이 그녀를 당혹케 만들었다.
다만 그녀는 다른 마음이 생겼다.
자신의 안전을 의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움직이려는 생각이 든다. 마을에 있었을 때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과거의 여행에서도 이런 적은 없었다. 이건 타이번이 말했던 칼 일행과의 동행 때문에 생긴 변화일까? 그 노마법사는 도대체 무엇을 꿰뚫어 보았을까?
리타는 걱정이 주를 이뤄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밖에선 기합과 울음소리가 들리고 있다. 꽤 긴박한 분위기다.
그녀는 고민했다. 이대로 누워있어도 되는 걸까?
결론은 빨리 내려졌다. 그녀의 몸 상태로 움직여봐야 짐밖에 안 된다. 지금은 얌전히 누워있는 게 그들에게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누워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리타는 몸을 뒤집었다. 일어서려고 힘을 주었지만 일부러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방법을 바꿔 벽까지 기어갔다. 그리고 벽을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휘청거리는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억지로 한 걸음씩 입구로 향한다. 갓난아이가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힘의 분배와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며 걸었다.
그녀는 간신히 문에 다가섰다. 그녀가 문을 조금 열어젖히자 밖의 상황이 한 눈에 들어왔다.
늑대들은 수를 바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쓰러진 늑대가 제법 되어 보이는 데도 여전히 사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샌슨의 주위에 쓰러진 늑대의 시체는 타오르고 있었다. 은도금이 된 그의 롱소드를 생각해 본다면 늑대는 언데드같다.
샌슨은 화려한 검무를 추고 있었다. 춤을 추는 것처럼 막힘이 없이 유려하게 이어지는 동작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힘은 성인 남성의 몸통보다 두터운 늑대를 일격에 가를 정도로 강인하다.
후치는 OPG의 힘을 이용한 일자무식. 본인 스스로 붙인 기술 이름이라는데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그녀가 가르쳐주었던 원심력을 이용한 기술을 쓰며 늑대를 베어낸다.
크라일은 왼손으로 늑대들을 쳐내며 오른손에 든 팔치온으로 일격을 먹였다. 꽤나 호쾌한 전술이다. 터커는 핼버드를 휘둘렀는데, 그것은 위력적이었지만 재빠른 늑대를 상대하기에는 지나치게 컸다. 그래서인지 빈틈이 많이 생겼고, 근처에 있는 후치가 도와주고 있었다.
이루릴은 그녀의 이미지처럼 날렵하고 가볍게 움직였다. 에스터크와 망고슈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늑대의 힘줄이나 급소를 정확히 공격한다. 리타에게 여유가 있었다면 감탄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눠볼 법한 모습이었다.
리타는 잘 싸우는 그들의 모습에 자신이 괜히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불안해서 그녀는 이렇게 꼴사납게 기어 나왔을까?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녀의 상심은 급박한 후치의 목소리에 깨졌다.
“터커! 조심해요!”
“으아앗!”
터커는 그의 등에 달라붙은 늑대를 떼어내기 위해서 발버둥쳤다. 하지만 늑대가 단단히 물었는지 빙글빙글 도는 와중에도 늑대는 떨어지지 않았다. 후치는 그런 늑대의 발을 잡더니 그대로 휘둘러버렸다.
터커를 물고 있던 이빨이 한순간에 뽑히며 늑대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낼 정도로 빠르게 날아갔다. 그리고 나무에 부딪치며 엄청난 소리와 함께 나무를 쓰러트렸다.
콰쾅!
속이 썩은 나무는 몇 그루가 쓰러졌다. 엄청난 소리에 늑대들은 움찔하며 행동을 멈췄다. 그러다 한 놈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기 시작하자 다른 놈들도 그 놈을 따라 도망쳤다.
놀란 터커에게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후치를 보며 리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그녀의 시야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썩은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붉은 눈. 낮에 죽였던 까마귀다.
“늑대들이 소란을 피워 혼란스러울 때 마법으로 공격할 생각이었군요?”
이루릴이 허공을 향해 말했다. 메시지 마법이다. 그녀는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뱀파이어를 발견하였다.
“꼭 그렇게 해야 될까요? 난 당신을 용서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요.”
일행은 이루릴의 마법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당황한 눈을 하였다. 이루릴은 이야기를 듣는지 입을 다물었다가 슬픈 눈빛으로 답했다.
“그건 안 돼요. 내가 준비하고 있어요.”
무엇을 준비한다는 소릴까? 뱀파이어가 마법으로 공격할 거라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도 마법을 준비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루릴이 마법을 메모라이즈 해두긴 했어도 준비할 시간이 있었나?
리타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루릴의 말.
“그럴까요? 시험해 보겠어요?”
리타는 급히 까마귀를 보았다. 까마귀의 시선은 확실히 이루릴을 향해 있었다. 그렇다면 이루릴의 거짓말이 들킬 가능성이 있다.
리타는 왼손을 문 밖으로 뻗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마나를 움직였다. 간신히 손끝에 일반적인 크기의 매직미사일이 완성되었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어지러웠지만 리타는 인상을 쓰면서도 자세를 유지했다. 그녀는 제대로 조준할 틈도 없이 매직미사일을 발사했다.
멀리서 불길이 솟구쳤다.
이루릴은 그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정령술을 이용해 불꽃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매직미사일이 까마귀가 앉아 있던 나무를 직격했다. 까마귀는 다급하게 날아오르느라 이루릴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리타는 그것을 확인하고 힘없이 웃었다.
이루릴은 소곤거리듯 낮게 말했다.
“다음번엔 어디를 칠까요?”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았고, 잠시 후에 몸을 돌렸다.
“갔어요. 거짓말을…… 리타?”
이루릴의 놀란 목소리에 후치는 후다닥 신전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싸우느라 입구가 열린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살짝 열린 입구 사이로 검은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린 채 쓰러진 여성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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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병약 미소녀 리타입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상관없겠죠.
그럼,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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