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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3. 뿌리깊은 나무 (20) (1) 2015/02/11 AM 12:57


*








“이건……”



칼은 손에 들린 종이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몹시 침중한 표정으로 일행을 바라보았다. 일행은 자이펀어로 적힌 종이에 어떤 내용이 있기에 점잖은 칼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했다.



뱀파이어가 흘리고 간 가방에는 보고서가 들어있었다. 자이펀 어를 아는 이는 리타와 칼 밖에 없었는데, 리타는 완전히 넋을 놓고 있었기에 보고서는 칼의 손에 들렸다. 칼은 그것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곧 그의 표정은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다 읽은 지금은 분노와 우울함이 뒤섞여서 나타났다.



“어떤 내용인가요?”



이루릴의 질문에 칼은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하나도 웃는다는 느낌이 안 드는 미소다.



“인간의 부끄러운 일면을 보여드리는군요.”



칼은 본인이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씁쓸한 어조였다. 그는 고개를 한 번 휘휘 젓더니 그것을 마저 읽었다.



“세이크리드 랜드 조장에 관한 실험 보고서.”



일행은 모두 흠칫했다. 그것은 일행에게 다시 붙들린 간첩들도 마찬가지였다. 칼은 간첩들을 향해 그로서는 최대한의 경멸을 담은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내용은 저희가 겪은 일들에 관한 것입니다. 다만, 확실하게 계획이 짜여져 있었군요. 일부러 자이펀이 의심받지 않도록 사우스 그레이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시골 마을로 장소를 정했습니다.”



누군가의 이가 바드득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장소를 정한 다음에 유소년기 아동의 정신? 이건, 번역에 조금 자신이 없군. 어쨌든 유소년기 아동의 무엇을 사용하여 제례? 제사, 의식? 의식이 맞겠군. 의식을 진행…… 영지민의 90%이상이 질병에 감염되었습니다.”



칼의 말은 천천히 이어졌다. 그는 종이를 휘적휘적 넘기며 마저 읽었다.



종래의 독약을 타던 수법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다. 부작용으로는 언데드가 발생한다. 구름이 껴서 태양빛이 내리쬐지 못하면 질병의 진행속도가 느려진다. 모험가들이 찾아왔고(그것은 일행에 관한 것이라며 넘겼다.) 부작용을 발견했으며, 이후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 우려한다.



간단히 말해 그런 내용이었다. 보고서는 거기서 끝났다. 일행이 갑자기 쳐들어왔기 때문인지 끝까지 적히지 않았다.



칼의 말을 다 들은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간첩들을 노려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뻔뻔하기 짝이 없던 운차이라 불린 인간은 일행의 시선을 싸늘하게 받았다.



칼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눈을 하였다.



“운차이 발탄씨라고 하셨소?”



운차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운차이라고 부르시오.”



“그럼, 운차이씨.”



칼은 운차이를 부르며 그에게 다가갔다. 운차이와 다른 간첩들은 다시 포박당해 바닥에 앉혀진 상태였다. 일행은 칼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콰악!



강렬한 소리가 울렸다. 후치는 입을 떡 벌렸고, 샌슨은 그보다는 더 크게 벌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순해서 헬턴트 남자가 맞을까 고민을 종종 하게 만드는 칼이 운차이의 턱을 그대로 걷어 차버린 것이다.



칼이 몸을 잘 안 쓴다지만 그래도 건장한 남성이다. 운차이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발목이 조금 쑤시는군.”



칼은 침착하게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행이 벙 쪄있는 가운데 칼은 몸을 일으키고 있는 운차이에게 말했다.



“운차이씨. 당신은 이 보고서에 대한 증인으로 우리와 같이 가 주셔야 겠소.”



운차이는 바로 앉으며 옆으로 침을 뱉었다. 입이 터진 것인지 붉은 침이 나왔다.



“나만 끌고 갈 셈이오?”



“우리 일행에는 손이 그리 많지 않으니 말이오.”



“……”



운차이는 마음대로 하란 태도를 취했다. 사방이 그를 향해 적의를 불태우는 사람들로 가득한 마당에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다. 그를 노려보는 시선들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싸늘하게 마주보기까지 한다.



펠레일은 팔짱을 낀 상태로 생각에 몰두해있었다. 그는 짧게 신음소리를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흠, 이제 아이들을 납치한 이유가 납득이 되는군요.”



정신을 잃고 있던 아이들은 동굴이 무너졌을 때 일행이 깨우자 곧 정신을 차렸다. 뱀파이어가 사라졌기 때문인지, 세이크리드 랜드가 해제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좋은 일이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면 일행만으로 50여명의 아이들을 모두 옮길 수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발로 도망쳐 나왔다.



펠레일은 아이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얌전한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눈이 날카로워졌다.



“아이들이 가진 전신앙을 이용한 것 같습니다. 아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정신이 제물로 사용되었군요. 마법에서도 가장 터부시되는 것으로 신의 힘을 불러내었습니다. 마력과 신력의 조화를 이룬 것은 훌륭하지만, 그걸로 이런 짓거리를 벌이다니 어이가 없군요.”



펠레일은 고개를 한차례 휘저었다. 그는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래서 코다슈씨는 아이들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어요. 전신앙이 바쳐졌으니까. 제물로 바쳐지고 의식이 이루어진 이상 다시 되돌려 받지 못합니다. 대가로 지불된 것은 그것으로 끝이에요.”



그의 말은 몹시 우울했기에 사람들은 덩달아 우울해졌다. 칼잡이들은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후치는 그나마 어리다는 특권을 내세워 질문했다.



“전신앙이 뭔가요?”



“성숙한 신앙으로 발달하기 이전의 신앙이야.”



대답은 펠레일이 아닌, 뒤에서 들려왔다.



후치가 눈을 돌린 곳에는 주정뱅이의 긴 그림자마냥 휘청거리며 걸어오는 리타가 있었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리타?”



“아니, 안 괜…… 아니, 괜찮아.”



“무슨 소리에요?”



“괜찮아.”



리타는 후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후치의 불만스러운 시선을 무시하며 펠레일을 보았다. 펠레일의 얼굴은 보고서를 보고 나서의 칼 만큼이나 핼쑥해져 있었다.



“전신앙이 이미 제물로 바쳐졌다면, 저 아이들은 평생 동안 신앙을 가지기 못하겠군요.”



“그렇게 되겠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후치가 머리에 얹혀진 리타의 손을 치우며 물었다.



“전신앙이라는 게 제물로 바쳐진 대가가 신앙을 못 가지는 것뿐인가요?”



고작 그건 뿐이라면, 그렇게 큰일도 아닐 것이다. 후치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앙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없다고 해도 얼마든지 잘 사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펠레일은 잔뜩 먹구름 낀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치 군, 전신앙이라는 것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닙니다. 신앙은 간단히 말해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인들도 신앙과 믿음의 경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아이들은 대부분이 일치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는 전신앙은 그저 주변 환경에 대한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으음.”



짧은 신음만 흘릴 뿐, 추임새는 넣지 않았다.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거니와 그는 펠레일의 설명을 이해하기에 바빴다.



펠레일은 팔짱을 풀며 한숨을 내쉬고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측은함이 가득했다.



“저 아이들은 이제 신앙을 가지지 못할 뿐더러, 남을 믿지도 못하게 됩니다.”



“뭐라고요?”



잠자코 있으려고 했지만, 그만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부릅뜬 후치의 눈을 보며 펠레일은 서글픈 목소리를 냈다.



“단순하게 신에 대한 믿음만 가지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믿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기에 그들을 자라면서 회의적이 될 가능성이 높겠죠. 무엇도 믿지 않고 신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부모나 친구들 조차도요.”



“맙소사.”



“나처럼 되는 거지.”



“리타?”



자조적인 목소리에 후치는 리타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후치는 그 웃음이 리타와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느껴졌다. 그녀는 조롱하는 어조로 말했다.



“아무도 못 믿어. 내가 거부하는 게 아냐. 본능적으로 믿질 못해. 남들의 호의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속으로 계산부터 하게 돼.”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그게 싫으면 아애 남을 거절하게 되지.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줄 필요도 없으니까. 남과 나와의 단절을 추구하게 돼버려. 그러고 나면 마지막은 비참하지. 스스로도 못 믿게 되어버리거든.”



리타의 시선은 낮게 깔려서 땅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갑작스레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누구도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들은 리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샌슨 만큼은 애잔한 표정으로 리타를 보았다.



그는 두터운 손으로 리타의 어깨를 감쌌다. 언제나 꼿꼿하게 홀로 서있던 친구가 가벼운 손놀림만으로 그에게 기대 버린다. 샌슨은 리타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말로 풀어낼 재주가 없다고 스스로 여기는 사람이다. 거기다 말이 필요치 않은 상황이라는 것도 존재하는 법이다.



리타는 샌슨의 팔에 이끌려 그에게 머리를 기댔다. 그녀의 시선은 아이들을 향했다.



“나는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났어. 그들이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 주었기에, 지금처럼 그나마 반쪽짜리 행세라도 할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저 아이들은 그렇게 자라날 수 있을까? 스스로조차 믿지 못한다는 건, 경험해보진 않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이야.”



자존심. 아니, 그보다는 자존감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일평생 자존감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전신앙을 잃는다는 것은 그토록 무서운 일이었다.



후치는 아이들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를 짓누르는 어떤 감정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리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왜 아이들에게서 자신을 보았을까?



후치에게 리타는 소꿉친구의 언니이자, 친누나 같은 존재였다. 어릴 때는 다가가기 힘들었다는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어린 그를 좋아해주지도 않고, 그가 장난을 치더라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관심을 주지도 않았고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자주 보았지만, 거의 완벽한 타인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다 그가 머리가 조금 클 무렵에 그녀는 변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라 무엇이 변했다고 딱 짚을 수 있는 것은 그와 관련된 일 뿐이었다. 다른 것을 제쳐두더라도, 이제까지 완벽히 그어두었던 선을 지워버렸다. 그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샌슨은 아마도 리타를 더 어릴 때부터 봐왔으니, 그보다 느끼는 게 더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리타를 말없이 위로할 수 있는 것이겠지.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믿음이 없이 자랐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믿음이 없이 자라갈 아이들을 보면서, 그녀 같다고 말을 했을 거다. 그녀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리타가 지금 보이는 태도는 이상하다. 그녀는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서 그녀의 과거를 보았다고 해서 저런 분위기를 만들 사람이 아닌 것이다. 후치가 의아하게 리타를 쳐다보았지만, 역시 답은 해주지 않는다.



펠레일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일행은 모두 입에 자물쇠를 걸어 잠그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둘러보며 샌슨이 리타를 놓으며 박수를 쳤다. 주의가 모아지는 것을 보며 그가 씨익 웃었다.



“자, 일단 신전으로 돌아갑시다. 아침부터 계속 움직였더니 배가 고파지네요.”



“샌슨은 계속 안 움직여도 배고프잖아?”



“그러니 계속 움직인 지금은 더 고프지 않겠냐?”



후치의 농담에 웃으며 받아치는 샌슨을 보며 사람들은 작게 웃을 수 있었다. 여러 일에 무거워진 분위기는 조금 가벼워졌다. 그들은 샌슨의 말처럼 아이들을 챙겨 신전으로 가기 위해서 움직였다.



하지만 좀체 일행은 신전으로 향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상하게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아이들은 곧 돌아간다는 사실에 들떠있었다. 그네들은 서로 도란도란 떠들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만드는 광경에 어른들은 까끌해지는 입안을 느꼈다.



왜 굳이 신전으로 가지 않은 채 이런 야외에서 이야기를 나눴는지, 괜히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어째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납치당해 영지의 일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신전은 현실을 일깨워주는 장소다.








*








살아남은 이들은 어찌되었든 과거를 뒤로하고 내일을 생각한다. 가족을 발견한 아이들은 그들의 품에 안겨들었다. 방금 있었던 모험을 즐겁게 떠들면서 이야기하고 웃음꽃을 피운다. 하지만.



“엄마? 아빠?”



후치는 신전 안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가족이 보이지 않자 일행에게 그들의 행방을 물었다. 후치는 입을 열려는 이루릴을 가까스로 막으면서 말했다.



“얘들아! 엄마 아빠는 잠깐 여행 가신 거야!”



아이들은 금세 후치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부모가 언제 돌아올지 물었다. 후치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멀리 가셔서 오래 걸릴 거라 말했다.



“으흑!”



사만다는 참지 못하고 기성을 지르며 신전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이들은 후치의 말을 믿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할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다른 일행의 마음은 더 없이 무거웠다.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야 그렇다지만, 그보다 조금 큰 아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전 구석에서 움츠리고 있었다. 의욕도 희망도 없다는 듯, 무력한 모습이다. 그리고 애들을 달래는 후치를 향해 싸늘한 조소의 시선을 보냈다.



후치는 가슴이 아리면서도, 자기에게 들러붙어 가족들이 언제 돌아오는지 묻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했다. 사실은 죽은 거라고, 도저히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그때 누군가 부엌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에델린과 리타였다.



에델린은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렸다.



“얘들아, 배고프지 않니?”



트롤 프리스티스라는 신기함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당장의 배고픔에는 당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후치는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만들어 주겠다며 부엌으로 달려갔다.



후치와 지나치며 걸어 나온 리타는 와인을 한 병 들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신전의 구석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아이들과 환자들을 돌보기 바빴다. 그래서 돌볼 사람은 자기 자신 밖에 없는 사람들은 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리타는 그런 자리에 이미 여럿 자리 잡은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기둥에 기대앉았다. 그녀는 병 채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지금 그녀의 곁에는 카피도 없었다. 카피는 오늘 힘을 쓴 게 과했는지 금방 골아 떨어졌다. 리타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복잡한 머리에 술기운이 확 올라온다. 술은 좋아하지만 잘 마시지는 못하는 체질 때문에, 그녀는 금방 취해버린다. 취할 수 있어서 술은 좋은 법이기에, 리타는 본인의 체질을 싫어하지 않았다.



리타는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붉은 병 너머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여러 쌍의 눈들이 보인다. 그녀는 병을 내렸다.



“마실래?”



“…… 아뇨.”



아이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답했다. 리타는 피식 웃으면서 병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너희는 가족이 없는 모양이지?”



“……”



섬세함이나 배려 따위는 전혀 가미되지 않은 직설적인 말에 아이들은 울컥했다.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어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있었다. 죽음을 알고는 있다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어린 나이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의 앞에 리타는 주저앉았다. 술기운에 약간 상기된 볼이 불그스름하다. 그녀는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이들 중 그나마 큰 사내아이는 훌쩍임을 참아내며 그녀에게 쏘아 붙였다.



“그래요. 우리 가족들은 다 죽었어요.”



“후…… 그래.”



“아무도 없다고요! 우리한테 신경 쓰는 사람도! 우리를 환영해주는 사람도!”



꼭 쥔 두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외치는 목소리에는 격렬함이 담겨있다.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제대로 잡을 수 없다는 게 느껴진다.



리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한숨을 내쉬고, 입을 몇 번이나 벙긋벙긋한 다음에야, 그녀는 간신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잠깐, 누나 이야기 좀 할까?”



훌쩍이는 소리가 계속해서 귀를 괴롭힌다. 리타는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현실에 대한 원망, 어설픈 거짓말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눈망울이 그녀를 향해있다.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몰라. 듣기로는 나를 낳다가 돌아 가셨다고 했어.”



아이들에게서 동요가 일었다. 리타는 계속 말했다.



“아버지는 내가 8살 때, 몬스터들의 습격에 죽었지. 그리고 나는 그때의 충격으로 8살 이전의 기억이 없어. 결국, 아버지도 어머니도 전혀 기억하지 못해.”



“지, 진짜에요?”



“그래.”



리타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술병은 기둥 옆으로 치워놓은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아이들의 앞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 좋지 않다고 그랬었다. 아쉽지만 참기로 했다.



“그래서 너희를 이해한다거나 위로하려고 하는 건 아니야.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지금 너희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아이들은 리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리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서, 어떤 울림이 있었기에 별다른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리타는 입을 열려다가 다시 닫았다.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모습을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뭘 하고 싶은 걸까?



어울리지 않게 아이들을 위로하려고 하는 걸까? 그들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기에 도와주고 싶어서? 어떻게 사람 흉내라도 내보고 싶어서 다른 이들처럼 동정하려고 하나?



아니, 자조는 그만두자. 결국 자신은 아이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을 뿐이다. 그녀는 그저 내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라도 하려고 한 게 전부다. 슬픔은 자기 자신이 딛고 일어나야 할 문제다. 더욱이 전신앙을 잃은 이들이라면, 남의 말은 중요치 않다.



그러니 우선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오는 대로 해보기로 했다.



“너희는 세상이 원망스럽니?”



아이들은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너희에게만 이런 일이 생겼을까, 남들은 행복하게 사는데, 왜 나만 이럴까? 그렇게 생각이 들어?”



조금 움직임은 작아졌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서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모양이다.



“…… 솔직히 말해서 너희는 재수가 없어. 나도 그렇고.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는 다는 게 결코 좋은 경험은 아니잖아?”



아이들이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하는 말은 그만큼 직설적이고, 그래서 듣기에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리타는 머리를 긁었다. 예쁜 그녀의 얼굴이 곤란함과 답답함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으, 그건 뭐랄까, 음…… 그건, 너희 잘못이 아니야.”



몇 번 더듬은 끝에 말했다.



“나라서 그런 불행을 겪은 것도 아니고. 내가 남들이 보기에 불쌍하고 동정할만한 건 맞지만, 그게 나 때문에 된 건 아니니까. 어, 음……”



한 번 목을 가다듬고, 자연스럽게 웃었다.



“너희는 잘못한 게 없어. 자기를 미워하지 마.”



‘나는 그게 힘들었지만.’ 이라는 사족은 붙이지 않았다. 리타는 입을 다물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아이들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리타의 말은 논리적이지도 않았고,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도 아니었다. 저 이상한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은 게 정상이다.



그러다 작은 여자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바닥에 다리를 펴고 앉아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전념되기 쉽다.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아이들도 목에서 울컥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냉정한 척, 원망하는 척 하려고 해보아도, 결국 눈물이 흐른다. 가슴 깊숙한 곳에 있는 슬픔이 튀어나와버린다.



리타는 와인 병을 잡아 기울였다. 붉은 빛이 쪼르륵 흘러내린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잃었다는 사실 자체를 잃어버린 그녀. 겨우 생각해 낸 아버지의 얼굴은 오히려 그녀를 흔들어댄다. 기댈 곳이 없어 서로에게까지 기대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자신을 기둥에 기댄다.



“기댈 곳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이들도 그녀도, 운명이라는 얄궂은 신들의 장난에서 똑바로 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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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상궁상열매를 먹었다 합니다.

캐릭터를 잡아도 그걸 표현해 낸다는 게 정말 어렵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낍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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