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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에 떠올라 조금씩 기울어지는 시기는 달궈진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꽤 푸근한 날씨가 된다. 가을이라고는 해도 말을 타고 맞이하는 바람은 그렇게 차갑지 않다. 산길을 달리는 것도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속도가 느린 것도 있지만, 결국 달리는 건 사람이 아닌 말이기 때문이다. 달리는 말 위가 아니라면 그렇게 허리와 골반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일행은 울긋불긋하게 물들기 시작하는 나뭇잎들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을 맞으며 달렸다.
리타가 고집을 피워 출발하긴 했지만 일행은 그녀의 건강을 생각해서 빠른 속도를 내지 않았다. 산맥을 통과하기 위한 숲길이기도 했기에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진행했다. 그렇다 보니 이제까지의 여정 중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느긋함을 만끽하며 여행다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후치는 한창 감상적이 되어서 기울어가는 태양을 보며 뒤에 남겨두고 떠나온 대마법사와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 위대한 마법사는 전설상의 핸드레이크도 해내지 못할 일을 하고 있겠지. 감히 자신은 흉내조차 내기 힘든 일을 그는 기꺼이 맞이해서 훌륭히 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후치는 비릿한 냄새를 맡고 인상을 찌푸렸다. 약하게 느껴져서 착각인가 싶었지만 샌슨과 이루릴이 반응하는 것을 보니 착각이 아닌 모양이다.
샌슨은 말을 느리게 하며 미간을 좁혔다.
“피 냄새가 나는데?”
이루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사람과 다른 것을 구분하실 수 있나요?”
“완전히 구별할 수는 없지만, 이 냄새는 사람과는 확연히 달라요. 이건 몬스터의 피 냄새입니다.”
“몬스터요?”
“네. 사람이나 유사인종보다 훨씬 비릿함이 강하죠.”
샌슨은 눈을 감고 후각에 주의를 기울였다. 잠시 냄새를 추적해보던 그는 다시 눈을 뜨며 전방을 주시했다.
“길 앞에서 나는군요.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지금 격전을 벌이는 중은 아닐테지만, 혹시 모르니 주의하면서 가지요.”
샌슨의 말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샌슨은 말을 다시 출발시켰고 일행은 그 뒤를 뒤따르며 주변을 경계했다. 환자인 리타는 일행의 가운데에 위치했고 그녀를 둘러싸듯이 진형을 구축한채로 일행은 나아갔다.
그러길 얼마 지나지 않아 참혹한 시체 한 구가 길 위에 널브러진 것을 발견했다.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시체의 허리 위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거기다 하체도 이리저리 찢겨지고 터져나가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샌슨은 하체만 남은 시체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곤 말했다.
“코볼트의 시체 같군요. 단체로 행동하는 녀석들인데 하나만 이렇게 동떨어져 있다니 이상합니다.”
“뭐, 뭐가 어떻게 했길레 시체가 저렇지?”
후치는 올라오는 역한 구역질을 간신히 참아내며 말했다. 확 진해진 피 냄새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시체의 모습에 속이 메스껍다. 이루릴과 칼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네리아는 아애 고개를 돌려버렸다. 다만 리타는 살짝 주름만 잡을 뿐 덤덤한 눈길로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커다란 몬스터가 물어뜯었어. 검이나 병장기에 잘렸다면 저것보다는 훨씬 깔끔하게 분리되어야 하는데, 저 시체는 힘만으로 잡아 뜯어놨네. 그러려면 엄청난 턱 힘을 가진 몬스터여야 하는데, 흠……”
“이 상황에서 잘도 그렇게 보내요, 리타?”
“내 수많은 매력 포인트 중에 하나지, 후치.”
“별로 매력 포인트라고 생각진 않지만 도움이 된다는 점에선 높게 사주도록 하죠. 그래서 뭐가 이렇게 해놓은 거죠?”
“매력 포인트로 쳐주면 이야기 해주지.”
후치는 이 상황에서도 장난을 치고 싶냐는 눈초리를 보냈다. 다른 이들의 시선도 있었기에 리타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순순히 그들이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아마도 와이번일 거야.”
“와이번?”
“그래. 드래곤과도 닮은 그것들은 엄청난 몸집을 자랑하지. 오크나 고블린, 코볼트 같은 것은 그냥 발로 채가서 물어뜯어 먹어버려. 사람도 예외는 아니지. 어쨌든 길이만 해도 15큐빗이 넘는 놈인데다 그에 어울리게 이빨이 큼지막하고 턱 힘도 무지막지해.”
후치가 시체를 바라보니 확실히 뭔가에 물어뜯긴 느낌이 들었다. 왠지 그 장면이 상상이 되어서 후치는 몸에 소름이 확 돋았다.
“그, 그럼 엄청 위험한 거 아니에요?”
“그건 아냐.”
“어째서죠?”
리타는 여전히 무심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여기 홀로 떨어져 있는 걸로 봐서는 이곳에서 사냥을 한 게 아니거든. 샌슨의 말처럼 코볼트를 단체생활을 하는 몬스터야. 어지간한 성인 남성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약한 놈들이니까, 보통 무리를 이뤄서 다니지. 그만큼 와이번이나 다른 포식자 몬스터들에겐 만만한 놈이기도 하고. 와이번은 무리를 이루고 있던 코볼트 중에 한 마리를 낚아챘을 거야. 아마도 발톱이 아니라 입으로 그런 것 같네. 그렇게 물고 날면서 씹는 와중에 반항하는 놈을 기절시키기 위해 이리저리 흔들었겠지. 와이번 정도의 힘이라면 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몸을 양분할 수 있었을 거야. 그런고로 상체는 지금 와이번의 입 안, 아니, 배 안에 있을 것 같고, 하체는 와이번이 비행하는 와중에 이곳에 떨어트린 거겠지. 배가 찼는지 다시 가져가려고 하진 않은 모양이야. 상태를 봐서 바로 죽은 건 아닌 모양이니까.”
꽤 긴 말인데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내용임에도 리타는 태연했다. 오히려 듣는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며 시체를 보았다. 자세한 설명이 시체에게 벌어졌던 일을 상상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후치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물었다.
“그럼 와이번이 근처에 있는 건 아니란 소리죠?”
“확답하긴 힘들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지. 적어도 대로라는 건 사람이 많이 이용하는 길인데다, 이 곳의 지리적 위치는 수도에 가까워. 그 말은 자주 몬스터를 토벌한다는 이야기지. 와이번 같은 위험종은 그만큼 희귀하니까 이 근처에서 둥지를 틀고 있진 않을 거야.”
“으음……”
안심이 안 되는지 후치는 불안한 얼굴이었다. 다만 그 뿐이었다. 후치 나이대의 보통 소년이라면 시체를 본 것만으로도 패닉을 일으키거나 트라우마가 되기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후치는 헬턴트에서 나고 자란 소년이다. 일반적이라는 기준에는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성장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 예로 일행 중에서 가장 역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네리아였다. 강인한 그녀지만 이렇게 단순한 충격에는 약한 모양이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 말했다.
“어서 지나가요! 더 있기 싫어요.”
샌슨은 주위를 둘러보며 동의했다.
“그래야겠어. 이미 시체의 피 냄새가 널리 퍼졌겠지. 그러면 냄새에 꼬여드는 놈들이 꽤 있을 거야. 이대로 있다가는 몬스터를 만날지도 몰라. 갑시다.”
샌슨이 그렇게 말하자 계속 참혹한 시체와 같이 있기가 고역이었던 일행은 동의를 표하며 황급히 말을 몰았다. 무엇보다 피 냄새에 꼬이는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리타는 네리아에게 기대어 엎드린 채로 옆에 달리는 이루릴을 바라보았다. 흑발이 가늘고 아름다운 엘프는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을 궤적으로 남기며 말을 몰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이루릴.”
“네?”
뭐가 다행일까?
“…… 아니에요.”
대답과 함께 고개를 돌린 리타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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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한 생각에 말을 몰았지만 생각보다 해가 빨리 떨어지는 바람에 일행은 급한 대로 분지 끄트머리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더 다니다가는 완전히 해가져서 숲에서 고립될 가능성이 있었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건 현명한 여행자로서는 지양해야할 행위다.
일행은 말에서 내려 적당히 둘러앉았다. 칼은 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밤이 되면…… 사방의 몬스터가 다 몰려들 수 있는 지형이구만. 주위의 산등성이가 모조리 몰려 있는데. 산 속에 있는 평지니까, 어쩔 수 없겠지.”
리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아닙니다, 스마인타그 양. 스마인타그 양께서 우리 일행의 목적을 확실히 일깨워 주셨습니다. 오히려 불편함을 감수하시고 여정에 나선 덕분에 일정이 지체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역시 칼은 좋은 사람이에요.”
리타는 미소 지었고 칼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 리타를 보더니 샌슨이 넌지시 물었다.
“너 몸은 괜찮아졌냐?”
“응. 시간이 지나니 확실히 나아진 거 같아.”
하지만 샌슨은 대답을 듣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나이를 먹더니 내숭을 떠는 날이 다 있네.”
“응?”
“솔직히 말해봐. 너 본 게 20년은 넘어가는 친구를 속여먹으려고 하지 말고.”
“…… 별로 안 좋아.”
“불을 피워야겠군.”
샌슨은 바로 몸을 돌렸다. 그는 무표정으로 숨기려고 드는 리타의 얼굴에 드러난 피로를 파악했었다.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왔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말을 탄다는 것은 무리였다. 리타는 실제로도 꽤 피로한 상태였는데 샌슨이 바로 알아본 것이다.
칼은 불을 피우는 게 걱정이 되는 표정이었지만 리타를 위한 일이었기에 그를 제지하진 않았다. 지형 상 불을 피우는 것은 여기 먹잇감이 있다고 몬스터들에게 광고하는 꼴이다. 그저 바이서스의 레인저와 토벌대가 착실하게 그들의 임무를 수행해 주었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샌슨은 자기를 향해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 후치를 잡아끌고 장작을 만들러 갔다. 큼지막한 나무를 몸통 박치기로 쓰러트리는 후치를 보고서는 네리아가 탄성을 질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보던 리타는 무식하다는 순수한 감상을 말했다.
후치는 쓰러트린 나무에 도끼를 대고 그 위를 주먹으로 내려치는 방식으로 금방 장작을 만들었다. 네리아가 감탄한 얼굴로 후치에게 질문했다.
“너 사람 아니지?”
“들켰군요. 그건 당신과 나만의 비밀로 남겨둬요.”
후치의 진지한 얼굴을 보면서 네리아는 키득거렸다. 샌슨은 칼의 근처에 앉으며 말했다.
“울타리라도 세울까요?”
칼의 표정에 걱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 질문에 칼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 퍼시발 군. 갈색 산맥의 몬스터 분포는 어떠한가?”
샌슨은 항상 들고 다니던 여정의 길잡이이자 그에게 있어 성서와도 같은 왕실 지리원 편찬의 책을 꺼내들었다.
“어, 장난이 아니군요. 중부 대로가 지나는 부분에서는 꽤 자주 토벌이 있었지만 아직 미확인 몬스터들의 출몰이 확인되고 있답니다. 갈색 산맥이 워낙 넓어서 중간에 평야 지형이나 암석 지형, 언덕 지형 등 각양각색의 지형과 수종을 가지고 있어 여러 몬스터들에게 적절한 환경이랍니다. 우리가 지나는 길은 그래도 가장 짧은 길이지만, 말로는 2, 3일 정도 소요될 정도니까 얼마나 넓은지는 짐작이 가지요.”
“흐음. 자주 출몰하는 몬스터는?”
샌슨은 지리서를 몇 장 넘기더니 천천히 글자를 읽었다.
“화염의 창이라 불리는 이그누스 드래곤 크라드메서……”
“크억?”
후치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이루릴을 제외한 일행이 놀란 가운데 리타가 뚱하게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수면기잖아. 그건 빼야지.”
“말하려고 했어. 어, 이게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리타 말대로 수면기입니다. 그런데 수면기에 들어가기 전에 크라드메서의 드래곤 라자가 사망했다는군요. 그래서 발광하는 바람에 갈색 산맥과 미드 그레이드 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답니다. 그때는 굉장했다는데요? 결국 토벌은 꿈도 못 꾸다가 크라드메서가 수면기에 들어가서 겨우 파괴는 멈추었답니다.”
“당연히 미친 드래곤을 말릴 수 있는 존재는 없겠지. 핸드레이크라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 말이야. 그리고 드래곤 라자가 늙어서 죽진 않았겠군. 노환으로 죽으면 적어도 발광할 리는 없을 테니, 급사였겠어.”
“어? 리타, 뭐 좀 아는 거야?”
샌슨이 호기심이 동하는 반응을 보이자 칼이 헛기침을 했다.
“어흠, 지식의 습득은 기분 좋은 일이네만, 지금은 우리의 관심을 현실적인 위험이 될 수 있는 몬스터에 맞추어보세.”
샌슨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칼이 요구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예. 어, 그 외에 스톤 자이언트가 조금 발견되었고, 오거…… 이건 좀 의외군요. 어쨌든 발견은 되었답니다. 산능성을 따라 6부 능선쯤에 분포한다는데, 야생 동물을 사냥하는 모양입니다. 오거가 사냥할 게 있을지……”
그렇게 시작된 샌슨의 말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고, 그것을 듣는 일행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누군가 갈색 산맥을 몬스터의 보고로 삼기로 결심이라도 한 것인지, 정말 알 만한 몬스터의 이름은 죄다 거론되고 있었다. 일단 드래곤부터 이름이 등장했으니, 사실상 끝난 셈이긴 하다. 드래곤의 마력은 몬스터를 끌어 모으는 법이니까 말이다.
“…… 어쨌든 산이나 숲을 좋아하는 몬스터라면 없는 게 없을 정도랍니다.”
샌슨의 긴 말이 끝나고 나자 후치는 어이없어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런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샌슨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야! 이런 말이 적혀 있군요. [이것은 모두 생존자의 보고를 기반으로 한 것이므로 생존자를 남겨두지 않을 정도의 몬스터는 수록되지 않았음을 명심하도록. 조언하자면, 길에서 만나는 몬스터라면 그건 길을 가는 인간을 덮칠 만큼의 몬스터라는 점을 유념하여 항상 조심하라.] 고 적혀 있군요. 음,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 정도입니다.”
이번엔 운차이까지 핼쓱해진 얼굴이었다. 그만큼 샌슨이 말한 내용은 듣기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이루릴과 리타를 보며 후치는 그녀들의 심장은 혹시 철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실없는 생각을 했다.
후치는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보고는 양 팔을 안으며 샌슨에게 질문했다.
“그럼, 어쩌지?”
“뭐, 평소에 하던 대로 불침번 서면서 불이나 열심히 지피는 거지.”
“응?”
샌슨은 별로 근심할 게 없다는 투였다. 그가 너무 여상스럽게 말하자 후치는 자신의 고민이 쓰잘데기 없는 것인 것처럼 느껴졌다. 샌슨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약간은 무성의한 느낌이 들 정도로 말했다.
“울타리를 치면 불빛이 새어나가는 건 조금이나마 차단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날아오는 것은 못 막아. 하지만 숲이니까 날아오는 것은 상관없지. 그리고 땅 밑으로 기어 다니는 녀석들도 나무뿌리들 때문에 상관없어. 그래도 다가올 녀석들은 있겠지만, 밤에 돌아다니는 녀석들은 대게 불을 싫어해서 모닥불을 보고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우리는 네가 산더미처럼 쌓아둔 장작을 열심히 태우면 돼. 뭐가 올 줄 알아서 대비를 하냐?”
“오크라면?”
리타의 말에 샌슨이 돌아보았다. 모닥불이 그의 옆얼굴을 불그스름하게 달궈서 뜨거워 보인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대사는 여전히 평온하다.
“그 놈들이라면 불을 무서워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 놈들이 갑자기 똑똑해져서 기척을 죽이고 습격하진 못할 테니까, 그 경우도 그냥 불침번을 제대로 서는 수밖에 없지.”
리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엔 그녀의 옆에 있던 네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야, 샌슨. 그 책 얼마야? 정말 탐나는데.”
“이건 왕실 지리원에서 편찬해서 각 영지에 배포하는 책이야. 돈 주고 사는 물건은 아니지. 참, 넌 원래 돈 주고 물건 사지 않지?”
네리아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샌슨은 보통 배려를 잘 하는 친구지만 가끔가다 보면 섬세함과는 절교를 해버린 듯한 인상을 줄 때가 있다. 리타는 턱을 괴면서 이 둔감한 놈을 어떻게 해버릴까 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모르는 샌슨은 계속 네리아에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제 할 거 대충 끝났으니 저녁 먹으면서 네 이야기나 좀 듣자.”
“내 이야기?”
샌슨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 그리고 왜 우리한테 돈을 돌려주었지?”
이루릴을 제외한 일행이 일순간에 몸을 경직시켰다. 리타는 후치를 바라보았고 후치는 네리아를 바라보았다. 네리아는 누구에게도 시선을 두지 못한 채 모닥불로 회피했다.
네리아의 몰골을 보고도 샌슨은 일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마 이루릴은 하지 못했을 테지만, 어린 후치조차도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묻는 샌슨의 저의는 무엇일까?
샌슨은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 넣었다. 그는 몬스터의 종류를 열거할 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훔쳐갔기 때문에 다시 돌려줬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돼. 넌 분명 정보료로 그 돈을 써버렸다고 했어. 하지만 엉망이 된 상태로 다시 나타났지. 뭐, 그땐 솔직히 네 말을 듣고 이성이 나가는 바람에 제대로 생각해 볼 틈이 없었지만, 조금 진정하고 나니까 이상한 것들이 느껴지더라고.”
네리아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꼭 다물었다. 그건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샌슨은 계속 네리아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훔친 돈이라고 하면 나는 조금 슬플 거야. 길드에 일이 있었다곤 하더라도 떳떳하지 못한 돈이니까. 하지만 만약 그 이상의 일이 있었다고 한다면 나는 많이 슬플 거야.”
네리아의 얼굴이 장작불에 쬐였기 때문인지 붉어졌다.
샌슨은 능숙하게 손을 돌려서 장작을 완만한 동작으로 모닥불에 하나 더 집어넣었다. 이미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금방 휩싸여 나무는 붉은 빛을 태워 올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하기 힘들어. 하고 싶지도 않고. 가끔은 상처를 단순히 봉합하는 것보다는 헤집어 놓는 경우가 더 도움이 될 때가 있거든.”
네리아는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을 말해야 할지, 거짓을 말해야 할지……
그런 네리아를 보며 샌슨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뭐, 지금 당장 듣겠다고 추궁하는 건 아냐. 너도 힘들었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언젠가 말할 마음이 생기면 그때 털어놔도 돼. 왜 돈을 돌려주었는지도 나중에 말해도 되고.”
“그건…… 그건!”
“괜히 야밤에 감수성 예민해져서 고해성사 하듯이 뜸들이며 말하지 말고,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야기해.”
네리아의 벌어지는 입을 그는 간단히 닫아버렸다. 그리고 바보가 된 일행을 향해서 평상시처럼 활발하고 단순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계속 달렸더니 배고프네. 저녁이나 먹자. 후치, 도시락 꺼내.”
“어, 응.”
후치는 멍청하게 내놓은 대답과는 달리 재빠른 동작으로 일행의 도시락을 꺼내왔다. 그는 도시락을 바닥에 펼치며 샌슨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오거를 닮은 인간은 단순무식한 주제에 가끔가다 보면 사람을 훅 찔러 올 때가 있단 말이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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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 무비하며 동시에 비할 데 없는 지혜로움을 갖춘 전사이자 현자 샌슨 퍼시발
이라는데 초점을 맞춰서 써보았습니다.
사실 칼이 후치의 업적을 샌슨에게로 돌리거나 자신이 쓴 글을 샌슨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등의 일을 한 결과이긴 하지만.
순박한 시골 청년의 이미지 외에도 가끔 번뜩이는 면을 보여준 샌슨이라면 사실 네리아의 일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거든요.
뭐, 어디까지나 저의 해석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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