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인저에게 호위를 요청하는 건 어떨까요?”
샌슨이 멀어져가는 레인저를 바라보며 말했다.
닐 드루카를 왼편으로 끼고 수도까지 이어지는 메드라인 고개에는 여행객들의 편의와 안전을 위해 레인저가 파견되어 있었다. 세상에는 발 달린 목표는 레인저에게, 발 없는 목표는 도둑에게 추격을 부탁하란 말이 있다. 그만큼 레인저들은 사람들의 믿음을 받는 존재였다.
칼이 의아해하며 샌슨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나, 퍼시발 군?”
“운차이는 적국의 포로입니다. 그러니 레인저들의 호위를 받으며 수도로 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칼은 레인저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우리들만으로도 운차이 씨의 호송에는 차질이 없지 않은가? 레인저들도 자신의 임무가 있을 터인데, 괜히 우리끼리 할 수 있는 일에 인력을 할애하도록 할 순 없지. 그리고 그들의 임무는 국왕께서 정하는 것이라 우리 마음대로 요청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네.”
“그래도 전범의 호송인데……”
“우리 인원으로 호송이 힘들 것 같은가?”
칼은 다른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고, 샌슨은 순순히 납득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가죠. 어차피 거의 다 왔고, 우리에게도 무서운 감시자들이 있으니까요.”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을 가진 엘프가 있고, 빙계 마법을 사용하며 마음대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드래곤의 분신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제쳐두더라도 그 둘을 따돌리고 도망가는 건 어지간한 은신의 전문가라도 힘들 것이다.
샌슨의 뒤꽁무니를 따르고 있던 운차이의 얼굴은 영 말이 아니었다. 바이서스 임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도망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 되었다. 반드시 그리되진 않겠지만 교수대에 목이 걸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운차이의 얼굴을 본 샌슨이 말했다.
“이봐. 혹시 도망가더라도 이 근처에서라면 바로 체포될 테니, 차라리 얌전히 호송당하는 게 정상참작의 기회가 많을 거야.”
“생각해줘서 아주 고맙군.”
“뭐, 천만에.”
바드득 이를 가는 운차이를 무시하며 샌슨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정비된 길이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몬스터가 출몰할 걱정도 없는 편안한 여행길이다.
일행은 느긋하게 말을 몰아 메드라인 고개를 넘었다. 고개를 넘어 평지에 내려서도 보이는 건 넓디넓은 평야뿐이었다. 후치는 목을 길게 빼서 멀찍이 바라보았다.
“아직 바이서스 임펠은 안 보이네.”
“조금만 더 가면 돼. 진짜로 얼마 안 남았어.”
“흐응, 그래요? 리타는 지난번에 여행할 때 이 길로 갔었나요?”
리타는 말없이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했다. 칼은 쾌청한 가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샌슨에게 말했다.
“곧 황혼이 내리겠는데. 퍼시발 군. 바이서스 임펠까지의 거리는 어떻게 되는가?”
“에, 전속력으로 달리면 오늘 밤 중엔 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하루를 더 손해 볼 필요는 없겠군.”
리타는 약간은 우수에 젖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밤에 도착이라…… 좋네.”
샌슨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이제 달려보자! 오늘 밤 안에는 바이서스 임펠에 도착하고 내일부터 우리의 임무를 시작하는 거지.”
그는 기세 좋게 말을 출발시키려고 했지만, 곧장 이어지는 이루릴의 말에 말을 박차지 못했다.
“그럼…… 오늘이 여러분과 마지막으로 함께 하는 길이겠군요.”
“아, 이루릴은 델하파로 간다고 했었죠?”
“네. 그곳에서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샌슨이 뜨악하며 후치를 향해 재빨리 말했다.
“어, 후, 후치. 좀 피곤하지 않아? 천천히 갈까?”
후치는 어이없다는 시선을 던졌고 칼은 그만 고개를 돌리며 웃어버렸다. 이루릴이 바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편안한 여행이었는데요? 전 빨리 좀 씻었으면 좋겠어요. 괜찮다면 오늘 중 여관에……”
“예! 물론입니다. 출발!”
이번엔 리타까지 킥킥거리며 웃었다.
“바이서스 임펠에는 밤에 도착하는 게 더 좋을 거야.”
“왜 밤에 도착하는 게 좋은데요?”
“가보면 알아.”
리타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지 그저 웃기만 했다. 후치는 머리를 긁적이다 말을 박찼다. 벌서 출발해버린 샌슨과 그 뒤를 죽어라 따라가는 운차이가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좋아. 그럼 우리도 달리자, 아스화리탈.”
“자! 에보니 나이트호크. 첫 번째 질주다. 잘해보자! 이랴!”
리타와 네리아도 말의 배를 박차서 그들을 따랐다. 엄청난 크기의 에보니 나이트호크에는 네리아와 카피가 같이 타고 있었다. 네리아는 미녀와 같이 말을 타지 않는다는 주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라무스 다리 위에서처럼 리타가 설득하자 얌전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에보니 나이트호크는 덩치에 어울리는 롱 스트라이더의 걸음걸이로 죽죽 앞으로 나아갔다. 바람을 앞지를 것처럼 아찔한 속도였다. 네리아와 카피는 비명 비슷한 탄성을 질렀다.
“우와! 너, 눈물나게, 잘 달린다!”
"꺄하하하! 신난다 해요! 달려라 에요!“
붉은 머리를 가진 그녀들은 마치 자매처럼 달라붙어서 소리를 질렀다. 키가 작고 마른편인 네리아와 도담한 몸매를 가지고 있는 제미니의 모습을 한 카피는 꽤나 어울렸다.
일곱 개의 그림자가 뻗어 오는 붉은 빛에서 도망치는 것처럼 질주했다.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 아래로 새빨갛게 타오르는 평야가 그들을 환영했다. 석양을 등진 이들의 앞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그들은 그림자가 모습을 흐릴 때까지 달렸다.
해는 금방 떨어졌고 일행은 속도를 늦췄다. 석양을 등진 사람은 떠오르는 달을 볼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동쪽 지평선 위로 고개를 내미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달이 영롱하게 빛을 뿜어냈다.
“셀레나와 루미너스가 동시에 뜨네?”
“그러네요. 좋은 걸 볼 수 있겠어요.”
리타는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마침내 완전히 떠오른 달을 바라보았다. 똑같은 크기의 보름달이다.
그것들은 일행에게 길을 안내하듯 밝은 빛을 뿌렸고, 일행은 달빛을 가르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달이 밝다고 한들 태양에 비할 순 없다. 태양은 세상을 비추고 달은 길을 비추며, 별은 보는 자를 비춘다. 은은한 월광 아래 어둠에 잠든 지평선 위로 환하게 빛나는 도시가 보였다.
샌슨은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이서스 임펠이야. 드디어 도착이군.”
검은 물감만 있다면 그려낼 수 있는 밤의 정경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한 곳이다. 휘어지는 갈색산맥을 두른 이 나라의 도성은 굉장한 빛을 뿜어냈다. 후치는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입을 벌렸다.
“어떻게 저렇게 밝은 거지?”
후치와 같이 말머리를 향하고 있던 네리아가 그의 궁금증에 답해줬다.
“마법사들이 많아서 그래.”
“마법사?”
“바이서스 임펠에는 빛의 탑이라는 마법사 길드가 있거든. 그리고 저 도시 길에는 밤마다 곳곳에 마법적인 불빛이 켜져. 그래서 밤에도 아무런 등불 없이 돌아다닐 수 있어.”
“와아!”
순수하게 탄성을 터트리는 후치의 옆으로 칼이 다가섰다. 리타와 네리아를 제외한 일행은 밤의 바이서스 임펠을 처음 보았다. 멀리서 환하게 반짝이는 도심의 모습은 그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일행은 속도를 늦춰 화려한 불빛의 도시를 감상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바이서스 임펠을 감싸고 도는 임펠 리버에 이르렀다. 임펠 리버에는 커다란 아치형의 석조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열 명이라도 동시에 걸어갈 수 있을 듯한 큰 다리 양쪽으로 초소가 서 있었다.
초소 위에도 정체 모를 것이 불빛을 내고 있어 후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루릴이 말했다.
“컨티뉴얼 라이트군요. 초소 건물에까지 저런 마법을 쓰다니, 대단하네요.”
무슨 마법인가 보다. 후치는 신기한 광경에 약간은 상기된 얼굴로 이루릴을 돌아보았다.
“그래요? 그럼 낮에도 빛나는 건가요?”
“그렇겠죠. 낮에는 덮어두든가 하나 봅니다.”
“헤에.”
계속 빛나는 불이라니. 아무리 마법이라도 참 신기하다. 그리고 그런 것을 초소에 설치해두는 수도의 모습은 헬턴트 소년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초소 밑에는 경비병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화려한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잘 손질된 하프 플레이트 메일을 완벽히 갖추고 있으며 가슴에는 바이서스의 상징인 붉은 독수리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머리에는 멋진 깃털 장식의 투구와 허리에는 화려한 롱소드가 자리했다.
샌슨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나니 자신의 장비가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헬턴트 경비대장의 복장은 그저 셔츠 위에 하드레더를 비롯한 기본적인 방어구만을 갖추는 것이니,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만다.
일행이 다가서자 경비병들이 앞으로 나서며 일행을 멈춰 세웠다.
“바이서스 임펠에 들어가려 합니까?”
칼이 일행을 대표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야심한 밤이라 조사가 필요합니다. 신분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칼은 짐 속에서 서류를 꺼내 보여주었고, 경비대원은 환하게 빛나는 컨티뉴얼 라이트의 불빛 아래서 그것을 빠르게 읽었다.
“헬턴트 영지의 전권 대리인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국왕님을 알현키 위해 왔습니다.”
“수행인원이 좀 독특하군요?”
“여기 엘프분은 저희 여행 동료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훌륭한 헬턴트의 시민들이지요.”
경비병은 빙긋 웃으며 서류를 돌려주었다. 그가 일행을 향해 독특하다고 표현하는 건 결코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샌슨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제각각의 특징이 워낙 뚜렷해서 수행원으로 보긴 무리가 있었다. 후치가 조그맣게 혀를 찼다.
“알겠습니다. 옥새는 확실하군요. 국왕의 봉신으로서 당신과 당신의 수행원들의 통행권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엘프는 우리 국왕님의 친우로서 바이서스의 모든 땅을 마음대로 지나실 수 있습니다. 통과하십시오.”
엘프는 종족만으로도 일종의 통행증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이루릴은 경비병에게 별다른 질문을 받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일행은 다시 출발했다. 샌슨은 초소에서 멀어지자 주눅든 모습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게 진짜 경비대원이야…… 굉장해.”
“그럼 넌 가짜 경비대원이야?”
리타의 농담에 샌슨은 시무룩한 미소를 지었다. 칼이 농담삼아 말했다.
“진짜 경비대원 같다는 건 갑옷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안의 인물인가?”
“칼. 칼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런 갑옷을 입고 저렇게 경쾌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전사로서 존경스럽군요.”
리타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아는 한, 사람 중에서 저 오거만큼 강한 전사는 드물다. 그는 헬턴트에서만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지표를 정확히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대로 귀여워서 리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면 이루릴은 샌슨을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대단할 것 없어요. 샌슨이 훨씬 강해요.”
“이런…… 과찬의 말씀을.”
그러자 네리아도 거들었다.
“이런, 샌슨아, 샌슨아! 저 갑옷에는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어 대단히 가벼운 거란다. 넌 갑옷 볼 줄도 모르면서 그러니?”
“어? 너 그거 어떻게 알아?”
“저런 갑옷 입은 사람과 사귄 적이 있거든.”
“그래? 흐음…… 그래도 대단해. 그런 귀한 갑옷을 입었다는 것이 말이야.”
그때 리타가 네리아를 확 돌아보았다. 그녀는 에보니 나이트호크에게 가까이 붙으며 말했다.
“네리아. 그 사람은 어떻게 사귄 거죠?”
“네?”
네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리타를 바라보았다. 리타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과 교제할 수 있나요? 어떤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요? 아니면 네리아만의 특별한 기술이 있다든가……”
“어…… 리타? 그게 왜 궁금한데요?”
리타는 계속 진지한 얼굴로 마치 농담처럼 말했다.
“어머니께서 이번에는 꼭 허우대 멀쩡한 신랑감을 구해 오라고 하셨거든요. 안 그러면 또 시집가라고 성화를 부리실 테니, 으으.”
아버지와 제미니는 그녀의 여행에 선뜻 찬성했지만, 어머니는 반드시 신랑감을 구해 와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떠나려는 그녀와의 마지막 인사 때도 눈물을 보이는 대신 진짜로 안 구해오면 집에 안 들이겠다는 협박을 했었다.
네리아는 어이없는 얼굴로 리타를 바라봤다. 하지만 리타는 진지했다.
“솔직히 마음에 드는 남성이 없기도 없지만, 만약 그런 남자가 눈에 띄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책으로 이것저것 읽긴 했는데, 정말 그런 것으로 사람을 유혹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뭘 그런 걸 책으로 읽어요. 그냥 감으로 딱 아는 건데. 리타도 남자 사귀어 본 적 있을 거 아니에요?”
“없어요.”
리타는 당당하게, 그러나 볼을 살짝 붉힌 채 대답했다. 네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뭐라고요? 그런 얼굴에 그런 몸매를 가지고 아직 남자를 못 사겨봤다고요? 그쪽 동네 남자들은 청년이 되면 다 장님이 되는 병이라도 걸렸어요? 하긴 저 샌슨을 보면 그럴 거 같긴 하네.”
샌슨은 임펠 리버와 바이서스 임펠의 성벽에 시선을 빼앗겨 네리아의 말을 듣지 못했다. 네리아는 킥킥거리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리타를 향해 강의하듯 말했다.
“남자란 원래 단순한 동물이라서 조금만 관심 있는 척 해주면 알아서 넘어오게 되어있단 말이죠. 대놓고 유혹하는 건 오히려 남자가 거부감을 가지게 돼요. 그저 아주 살짝 잘 대해준다거나 남들과 다르게 대하면 대부분은 착각에 빠지죠. 그러다 남자가 호의를 가진다 싶으면, 또 관심 없는 척해서 남자가 안달나게 만들어요. 적당히 예쁜 여성이 관심을 가져주면 싫어할 남자는 없고, 또 그런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닌 것처럼 행동하면 미칠 것 같아지죠. 그러면 그때부턴 나밖에 생각하지 못해요. 그렇게 빠져든다 싶으면 무관심에 지치지 않게 가끔 잘해주면서 거리를 점점 좁혀나가는 거죠. 그러면 그 남자는 고백하지 않고는 못 배길걸요?”
“잠깐, 그거 다시 한번만 말해 봐요. 받아 적게.”
리타는 자신의 짐을 뒤적거려 종이와 펜을 꺼내려고 했다. 네리아는 재미난 표정을 지으면서 리타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주었다.
후치는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들의 엄청난 대화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만은 저러지 않겠지, 제미니?’
그는 고개를 들어 샌슨처럼 바이서스 임펠의 경관을 구경했다. 다리 난간에 컨티뉴얼 라이트가 걸려 있는지 은은한 빛이 비쳐 나와 다리를 밝혔다. 아치형으로 생긴 다리인지라 흡사 무지개를 밟고 건너는 기분이 들었다.
컴컴한 밤중이라 은은한 불빛도 멋지게 보이고, 그 불빛을 받아 반작이는 검은 강물도 아름다웠다. 그는 왜 리타가 밤에 도착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정말 밤에 와서 다행이다.
다리를 다 건너니 엄청난 규모의 성벽이 그를 맞이했다. 과연 돌을 어떻게 저렇게 쌓을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다. 그는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젖혀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정체 모를 불빛이 반짝거리는 게 밤하늘의 정취와 어울려 몽환적인 기분이 든다.
성벽만큼이나 거대한 성문으로 길은 이어졌는데, 밤인지라 그 문은 닫혀 있었다. 20큐빗 정도는 돼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성문에 입이 떡 벌어진다. 그 성문 옆으로 작은 문이 나 있었고, 사람들은 그곳으로 왕래하는 중이었다.
문을 통과해서 바이서스 임펠로 들어서니 휘황찬란한 빛이 그를 반겼다.
“우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쫙 뻗은 넓은 대로 양쪽으로 30큐빗마다 규칙적으로 불이 들어오는 막대기가 세워져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모양에 절로 시선이 그것으로 향했다.
그것이 비추는 대로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신기했다. 만약 밖에서 들어오지 않았다면 지금이 밤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다.
사람들은 가볍고 밝은 계열의 옷을 모두 입고 있었다. 간혹 갑옷을 입은 이들도 보였지만 마찬가지로 밝은 색이어서 대단히 화려해 보였다. 남자들은 모두 망토를 둘렀고, 그 옆에는 아리따운 옷을 입은 처녀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리타는 네리아 스승의 강의를 빼곡히 종이에 적고서는 뿌듯한 마음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행색을 보고 오늘이 어떤 날인지 생각해냈다.
“오늘은 트윈문의 축제가 있는 날이군요.”
“트윈문의 축제요?”
“오늘은 두 보름달이 동시에 떴지?”
“그거야 가끔 그러지 않나요?”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지. 이곳이 수도로 정해지게 된 날이니까 말이야.”
후치가 잔뜩 궁금하단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리타는 자세한 설명을 해줄 마음이 없어 보였고, 후치의 시선은 칼에게로 향했다. 칼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드발 군. 오늘은 초대 바이서스 임펠의 시장이자 루트리에노 대왕의 셋째 왕자이신 세류델헨 왕자가 이 땅에 수도를 정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네. 전설에 따르면, 세류델헨 왕자는 루트리에노 대왕의 명령을 받고 수도로 정할 땅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두 개의 보름달이 동시에 지평선에 떠오를 때 독수리와 영광의 신, 아샤스를 만나셨네. 그리고 아샤스의 명령으로 이 땅을 수도로 정했지. 그래서 바이서스 임펠에서는 그 날을 기려 축제를 가진다네.”
리타는 그에 설명을 덧붙였다.
“전설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핸드레이크가 조언해 줬다고 해.”
“핸드레이크가요?”
“루트리에노 대왕과 사이가 갈라진 핸드레이크가 어째서 수도를 정할 때 도움을 주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어? 사이가 갈라지다니?”
“그 이상은 나도 잘 몰라.”
리타는 입을 딱 다물었고, 후치는 다시 칼에게 시선을 보내봤으나 칼도 모르는 눈치였다. 혹시나 싶어 이루릴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미소만 지어줄 뿐이었다.
후치는 뭐 어떠냐 싶어서 모른 채 넘어가기로 했다. 그는 오고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말을 몰았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지나다니지만 모두 화려해서 왠지 주눅이 든다. 거기다 계속 흘깃흘깃 쳐다보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들은 일행 모두가 아니라 일행의 여자들만 보고 있었다.
“오, 맙소사…… 엘프인가?”
“저 말 좀 봐! 저 여자, 저런 말을 탔어!”
“와아…… 엄청난데? 이건, 이건 정말……”
뭐가 엄청나냐고 물어보고 싶다. 리타를 보면서 침을 흘릴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있는 남자들을 보며 후치는 혀를 찼다. 괜히 헬턴트의 여신님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지.
일행의 세 여성, 아니 정확히는 네 여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넋이 나갈 정도였다.
흑단같이 곱고 긴 검은 머리에 장대 불빛이 흘러내렸다. 따각따각. 말의 움직임에 맞춰 가볍게 흔들리는 머리는 그 어떤 천 보다도 아름답게 반짝였다. 흰 얼굴과 대비되는 검고 큰 눈망울은 순수한 빛으로 흘러 넘쳤고 아리따운 얼굴은 무엇보다도 돋보였다. 잘 뻗은 몸매와 그것을 강조하듯 딱 달라붙은 가죽바지는 그 어떤 드레스보다도 아름다웠다.
리타는 이루릴처럼 고운 머리는 아니지만, 이리저리 뻗친 머리를 한번 묶어 내리고 있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날카롭게 뻗은 눈매 위로 내뻗은 속눈썹은 아찔할 정도로 길었다. 뚜렷한 코와 옅은 미소를 띄고 있는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뤄 새하얀 피부에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큰 키와 검은색으로 통일된 복장에 두른 망토가 인상적으로 빛나서 아름다우면서도 멋진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그 옆의 네리아는 남자들도 못 탈 것 같은 엄청난 흑마를 타고 있었다. 늘씬한 몸매는 에보니 나이트호크에 대비되어 더욱 가녀려 보였지만, 생기 넘치는 얼굴과 불빛에 타오르는 붉은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당당하게 걸어간다. 그녀의 분위기 자체만으로도 이곳의 남자들은 압도당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네리아와 같이 타고 있는 제미니. 의 모습을 한 카피. 네리아와 같은 붉은 머리라서 그런지 그녀의 머리가 한층 아름답게 보였다. 마른 네리아와 달리 도담한 몸매에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지만, 도시의 경관에 넋을 잃고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순수한 모습은 청초한 매력을 자아냈다. 카피를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후치는 이게 인기 있는 여자친구를 둔 연인의 마음일까 생각하며 가슴에 힘을 주고 허리를 폈다. 왠지 그가 당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일행이 주목을 받은 탓인지 대로는 훨씬 조용해 졌다. 후치는 그 남자들과 같이 나온 아가씨들이 불쌍해 킥킥거렸다.
“킥킥킥.”
후치와는 반대로 잔뜩 주눅들어있던 샌슨이 그를 돌아보았다.
“왜 웃어?”
“아가씨들이 불쌍해서.”
“불쌍하다니?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들인데.”
“주위를 자세히 봐. 지금 남자들은 그 아름다운 모습에 전혀 눈길을 보내고 있지 않아.”
샌슨이 주위를 둘러보니, 과연 남자들은 모두 넋을 잃고 일행의 여성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지 머리를 기울였다.
“이상하네. 이루릴은 아름답지만 화려한 옷은 아닌데. 게다가 아가씨 답지 않게 말까지 타고……”
“어이구, 오거야! 주위를 봐. 모두 화려한 옷에 인형처럼 생긴 아가씨들뿐이잖아. 하지만 이루릴이나 리타, 네리아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보여주는 거라고.”
“그러냐? 후우, 어렵다.”
“쯧. 그러면 내가 하나 더 가르쳐 줄까?”
“응?”
후치는 장난스런 웃음을 머금었다.
“여기 수도의 아가씨들은 말이야. 샌슨 같은 완전 오거형의 전사는 처음 보는 것이거든? 장식용의 갑옷을 걸친 샌님들이 아니라, 방금 트롤 목이라도 하나 치고 온 듯한 광폭해 보이는 남자는 처음 본단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대답은 필요 없었다.
움츠러든 샌슨의 허리는 당장 곧게 펴지며 그는 성벽 같은 가슴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그는 사나운 눈길로 지긋이 아래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샌슨은 제일 앞서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곧장 아가씨들의 시선을 받았다. 그것에 자극을 받았는지 샌슨의 태도는 더 거침없어졌다. 뒤에 가던 일행은 그런 샌슨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진짜 몇몇 아가씨들은 숨이 멎을 듯한 얼굴로 거친 황야의 야성을 풍기는 사나이, 샌슨 퍼시발을 바라보았다. 후치는 세상은 넓고 사람의 취향은 다양하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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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근래는 햇빛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루종일 이글 적다 저글 적다 요글 적다, 글만 적다가 시간이 다 가네요.
댓글 남겨주시는 분들, 모두 사랑합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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