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루릴. 일어나요!”
곤한 단잠을 깨우는 소리에 리타는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을 비볐다. 그녀는 힘겹게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엄청나게 지끈거리는 머리가 그녀를 반겼다.
“아아.”
간밤에 달린 덕에 숙취가 상당하다. 누군가 머리를 종 밑에 옮겨두고 연신 종을 쳐대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머리만 아프고 속은 괜찮다는 사실이다.
“이루릴!”
다시 한 번 큰 소리가 들렸다. 리타가 고개를 돌려보니 네리아가 이루릴을 흔들고 있었다.
“뭐 해요?”
네리아가 울상인 얼굴로 돌아보았다.
“리타. 이루릴이 일어날 생각을 안 해요.”
“이루릴이?”
리타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 균형감각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다행히 바닥과 인사하는 일은 없었다. 이루릴의 침대로 가자 이루릴은 안 그래도 새하얀 얼굴을 더 창백하게 만들어서 자고 있었다. 아니, 죽어 있다고 봐야 했다.
정말로 아주 느리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보이지 않았다면 영락없이 시체로 착각할 판이다. 꼼짝도 안하고 누운 자세 그대로 그녀는 천천히 숨만 쉬었다.
“처음엔 죽은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잘 수가 있지?”
“엘프잖아요.”
“……”
“일단 억지로 목욕이라도 시키는 게 좋겠네요. 카피는…… 저 상태로는 무리겠군요.”
리타는 침대에 웜링 상태로 뻗어있는 카피를 보며 말했다. 드래곤이니까 숙취는 사람만큼 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네리아와 리타는 꼼짝도 않고 누워있는 이루릴을 억지로 일으켰다. 아직 그녀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냥 제가 업는 게 낫겠어요.”
리타와 네리아가 양 쪽으로 이루릴을 부축하자 키가 작은 네리아에게로 이루릴이 쏠렸다. 네리아는 울상을 지으며 리타가 이루릴을 업도록 도와주었다. 가장 덩치가 큰 리타는 손쉽게 이루릴을 업었다.
그녀들은 방문을 열고 욕탕으로 바로 향했다. 네리아와 리타는 낑낑거리며 이루릴을 벗기고 탕 안에 집어넣었다.
약 한 시간가량 지나자 간신히 이루릴은 상태를 회복했다. 그녀는 따뜻한 물과 찬물을 번갈에 쐬면서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평상시처럼 깔끔한 모습은 아니었다.
살짝 다크서클이 낀 얼굴로 이루릴은 욕탕을 나왔다. 어떠한 경우에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이번만큼은 피곤을 숨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방으로 올라간 그녀는 준비를 마치고 짐을 챙겨 내려왔다.
식당에는 이미 남자들이 내려와 있었다. 후치와 샌슨은 이루릴을 저렇게 만든 드래곤의 숨결이 얼마나 대단한 술인지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그리고 리타를 향해 지긋이 시선을 보냈다.
“…… 미안.”
세상에 주정뱅이는 두 가지 부류가 있고, 리타는 주사를 기억하는 쪽이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샌슨과 후치에게 사과했다.
“다음부터는 술 좀 줄여요.”
“…… 응.”
“주사도 적당히 부리고.”
“…… 그래.”
“남자도 그만 찾고.”
“……”
리타는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푹 숙였다. 샌슨과 후치는 간밤에 시달린 게 꽤 끔찍했는지 리타의 그런 모습에도 싸늘한 시선만 보낼 뿐이었다.
칼은 그들의 모습에서 간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허허 웃으며 술 한잔에 쓰러지길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루릴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일행의 앞에 섰다.
“이 주 후에 뵐게요.”
“조심하세요. 그리고 부탁 하나 할게요. 조심하세요.”
“후훗. 네.”
이루릴은 후치의 농담에 방긋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일행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카피도 제미니의 모습을 하고 내려와 있었기에 그녀와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리타는 이루릴을 가볍게 껴안으며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우리 같이 꼭 머리하러 가요.”
“그래요, 리타.”
레너스 시를 빠져나오며 했었던 약속을 떠올리며 그녀들은 웃었다. 품에서 리타를 놓으며 이루릴은 마지막 남은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손을 내밀었지만 운차이는 본체만체했다. 네리아가 눈에 쌍심지를 켰지만 오히려 이루릴이 고개를 꾸벅이며 사과했다.
“아, 불쾌하게 해드려 죄송해요.”
일행과 인사를 마친 이루릴은 그걸로 끝내지 않고 말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난생 처음 접하는 상황에 일행은 그저 미소만 지은 채 구경했다.
이루릴은 말들에게도 하나하나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성질머리가 나쁜 에보니 나이트호크 조차도 그녀가 쓰다듬을 땐 얌전하게 있었다. 이루릴은 마지막으로 래셔널 셀렉션과 인사를 나누고 일행에게로 돌아왔다.
그녀는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귓가에 햇살을 받으며 석양까지 행복한 여행을.”
“웃으며 떠나갔던 것처럼 미소를 띠고 돌아와 마침내 평안하기를.”
그랑엘베르의 인사. 칼이 일행을 대표해서 대답했다.
이루릴은 몸을 돌려 바이서스 임펠의 거리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태양을 향해 나아가듯이, 예정된 파멸을 받아들이며 천천히 다가가는 것처럼. 불에 타올라 사라져버리듯 그녀는 흐릿해져갔다.
리타는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띵한 머리가 웅웅 울려댔다.
칼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우리도 가볼까?”
“칼 아저씨. 난 뭐 좀 알아보러 가볼게요.”
“지금 옷을 고르러 가는데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센스 없는 시골 남자들이 부끄럽지 않게 도와주신 대가로 옷 한 벌쯤은 선물하는 게 어렵지 않지요.”
“헤에. 부끄러운 말씀을 하시네. 됐어요. 어차피 왕궁에 가실 거 아닌가요? 적당히 깔끔하게만 입으면 돼요. 남자들은 여자들하고 달리 무조건 깔끔한 게 최고니까요.”
“그렇습니까?”
“나머진 리타에게 맡기세요.”
그때 리타가 네리아를 불렀다.
“네리아. 그러면 계속 거리를 돌아다닐 건가요?”
“그럴 건데요. 왜요?”
“혹시 위험한 일인가요?”
“어…… 가능성이 있긴 있지만 그렇게 위험하진 않을 거예요.”
“흠. 그러면 카피랑 같이 다니지 않겠어요? 카피 혼자만 여관에 있으면 심심할 테니까요.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충분히 도움이 될 거고요.”
“아, 그거 괜찮네요. 이 기회에 카피에게 세상 구경을 듬뿍 시켜주겠어요.”
“와아! 좋다 해요!”
영락없이 여관에서 시간만 때울 거라 생각하던 카피는 반색했다. 네리아도 카피와 같이 돌아다니게 되어 잘 되었다는 듯 웃었다. 리타와 같이 말을 타고 있던 카피는 에보니 나이트호크에 올라탔다. 에보니 나이트호크가 워낙 크기 때문에 여성 두 명을 태워도 전혀 문제없어 보였다.
“그럼 나중에 봐요.”
네리아는 손을 흔들며 에보니 나이트호크를 걷게 했다. 카피도 일행에게 손을 붕붕 흔들어 주었다. 리타가 동생을 보내는 언니의 마음으로 그녀들을 배웅했다. 그녀들이 멀어지고 나자 칼이 남은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끼리 옷을 고르러 가야겠군.”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집에 가려면 도대체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 거죠?”
후치의 질문에 칼이 빙그레 웃었다.
“아까 네리아 양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일종의 급사일세. 정식으로 예를 갖춰 파견된 사절단이 아니기 때문에 복식을 규격대로 갖출 필요는 없는 셈이지. 무례하지 않도록 깔끔하게만 입으면 된다네.”
“그 무례의 정도가 애매한 거라고요.”
투덜대는 후치를 데리고 일행은 옷 집으로 향했다. 옷 집은 상당히 규모가 컸다. 그야말로 옷의 산이었다. 후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옷들을 훑었다.
칼의 말대로 일행은 각자 옷을 골랐다. 칼은 원래부터 점잖은 옷이었기에 회색망토 하나만 고르고 후치는 아래위로 검은 색 옷을 맞추었다. 검은색만큼 깔끔하게 보이는 색도 없다는 게 그의 단순한 지론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샌슨이다. 그의 무지막지한 근육 때문에 좀체 맞는 옷이 없었다. 어쩌다가 사이즈가 맞는 옷이 보이면 어김없이 모험가용으로 상당히 간단하게 제작된 것들뿐이었다. 결국 샌슨은 셔츠 위에다 망토를 걸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홀로 남게 된 리타는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전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걸까요?”
칼이 선선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스마인타그 양.”
“그럼 저는 그냥 이대로 하겠어요. 하드레더만 벗으면 되겠죠.”
리타의 복장은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레깅스팬츠를 입고 그 위에 검은 망토를 걸친 것이었다. 겉보기엔 별 다른 문제가 없어보였다. 하지만 후치가 턱을 괴며 말했다.
“리타. 어제 그 셔츠에다 맥주 쏟은 거 아니에요? 말랐다고 해도 냄새날 텐데. 그리고 바지도 레깅스 위에 짧은 팬츠만 입은 거니까 아무래도 정중한 걸로 갈아입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런가?”
“국왕 전하에게 리타의 각선미를 어필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에요.”
리타는 피식 웃으면서 옷의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듯 몸을 빙글 돌려서 후치를 바라보았다.
“넌 옷 다 골랐지?”
“네.”
“그러면 카피 옷이나 골라줘.”
“카피요?”
“계속 같은 옷만 입혀 놓을 수 없잖아. 그리고 카피가 안 입으면 나중에 제미니가 입을 수 있겠지.”
“아!”
후치가 손뼉을 짝 쳤다. 지금 카피는 제미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카피가 입을 수 있는 옷이라면 제미니도 꼭 맞게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제미니가 선물을 받고 좋아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때 칼이 한마디 했다.
“우리는 지금 전하를 알현하러 가는 길일세. 그 길에 짐을 들고 갈 수야 없지 않겠는가? 선물은 나중에 고르는 게 좋겠네.”
“윽. 그러네요.”
후치는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돌아섰다. 지금 살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선물할 수 있도록 옷이나 봐두려는 심산이었다.
리타는 볼을 긁적이며 자신의 옷을 골라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그녀는 탈의실에서 나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도 너무 짧네요.”
리타는 주인에게 바지를 내밀었다. 그녀의 사기적인 다리 길이 때문에 몸에 맞는 여성용 바지가 없었다. 남성용 바지나 늘어나는 재질의 레깅스는 있었지만, 모두 착용하기에는 부적절했다.
망토만 걸치고 있는 샌슨이 짧게 말했다.
“그럼 그냥 치마를 입어.”
“국왕 전하께 가는데 치마를 입어도 될까? 어떤가요, 칼?”
리타는 칼을 돌아보았다. 칼은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더니 대답했다.
“글쎄요. 저도 여성의 복장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어서 확답을 드리진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과한 복장만 아니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군요.”
리타는 무릎위로 올라오는 원피스를 들었다가 살며시 내려놓았다. 그녀는 여성용 옷들을 주섬주섬 살피다가 검은색의 긴 원피스를 꺼냈다. 얼핏 드레스로 보일 정도로 격식은 갖추었지만 드레스에 비해 심플했다.
“이걸로 한 번 입어봐야겠네요.”
그러자 칼이 점잖게 말렸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닐 것 같군요.”
“어째서죠?”
“…… 노출이 과할 것 같습니다.”
리타는 어리둥절하며 옷을 내려다보았다. 치마의 길이는 충분히 길고 가슴도 깊게 패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후치와 샌슨은 칼이 말린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옷은 몸에 고스란히 달라붙는 재질이었다. 단순히 드러내고 안 드러내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리타는 아쉬워하며 그 옷도 내려놓았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리타는 상의와 이어지는 형태의 치마를 골랐다.
“이걸 그냥 덧입으면 되겠어요.”
허리까지만 감싸고 가슴은 드러내는 형태의 옷으로 블라우스를 안에 입은 상태에서 위에 걸치는 형태였다. 치마 길이는 일반인이라면 발목 위까지 덮을 정도였지만 리타가 입으니 무릎 아래정도에 머물렀다. 그래도 안에 레깅스를 입은 덕에 맨살이 드러나지 않아 그런대로 보기엔 괜찮았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괜찮을 거 같군요.”
리타는 실크와 혼방된 셔츠를 추가로 골라서 탈의실로 들어갔다. 다시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조금 전보단 나아보였다. 치마가 허리만 감싸는 바람에 가슴이 강조되긴 했으나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었다.
일행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맞는 바지가 없어서 치마를 골라야 하다니, 슬프다면 슬픈 일이다.
그리고 일행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 리타가 고른 치마가 어떤 계열의 옷인지 알아차렸다.
일행이 모두 복장을 갖추자 운차이가 싸늘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번쩍번쩍하는군. 이제 날 진상할 준비가 다 된 건가?”
샌슨이 시원스레 말했다.
“네가 무단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와 그 따위 쓰레기 같은 짓을 할 때부터 너에게 배정되었던 장소로 데려갈 준비가 끝난 거다. 억울하다는 식으로 말하진 마.”
“…… 별로 할 말은 없다.”
“그럼 가지.”
*
후치는 궁성의 웅장한 위용을 보면서 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상하네요. 국왕의 궁전이라면 그냥 아름답게만 만들어도 될 텐데, 왜 이렇게 전투용 성처럼 만들어뒀죠? 우리 영주님 성보다 더 전투적이네요?”
“루트에리노 대왕은 뼛속까지 무골이었으니까. 핸드레이크가 그것 때문에 골치가 많이 아팠다더군.”
그리고 리타와 샌슨은 궁선을 보면서 전략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샌슨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바이서스 임펠이야. 외성이 뚫려도 곧장 궁성이 함락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계산을 해서 만들어뒀어. 궁성만으로도 충분히 몇 배의 병력을 상대로 농성이 가능할 거야.”
“도개교를 내성에 설치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궁성 자체도 방어하기 용이한 구조로 되어 있고.”
“그렇지? 이 정도의 해자를 건너서 저 높은 석벽을 넘으려면 상당한 희생을 치러야 할 거야.”
“성내로 식량과 식수만 제대로 공급된다면 난공불락일 것 같은데.”
“그렇지만 사실 힘들지. 방위에 힘쓰다 보니 외부와 연결되는 길은 거의 차단되다 시피 돼있어. 거기다가 뒤쪽 산맥에서 장거리 포격을 가해 올 경우에는 아무래도 취약하겠군.”
“궁성이 완공되던 시절에는 마법에 의한 포격이 주를 이뤘으니까. 투석기나 노포의 발전이 지금 같지 않았지.”
“그것 외에도 저쪽 측면은……”
칼과 후치는 어느새 도성 침공 작전을 세우고 있던 이들을 향해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이야기를 멈추고 칼은 궁성의 입구로 향했다. 경비병들이 제지했으나 칼이 간단히 신분을 증명하자 금방 통과할 수 있었다. 그들이 안으로 보고를 했기에 일행을 마중 나온 이가 있었다.
반백의 머릿결과 잘 어울리는 반백의 수염을 갖춘 장년이었다. 그는 젊은이들 못지않은 당당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일행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궁성 수비 대장 조나단 아프나이델입니다. 귀하들은?”
그의 이름에 샌슨과 후치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같은 이름을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유약한 마법사와 눈앞의 궁성 수비 대장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어울리지 않아서 그저 머릿속으로 의문만 표했다.
칼은 덤덤하게 서류를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조나단 아프나이델은 서류를 빠르게 읽었다.
“헬턴트 영지의 전권 대리인이라. 그렇군. 아무르타트라는 블랙 드래곤 때문에 할슈타일 가의 캇셀프라임을 요청한 그 영지군요?”
“그렇습니다.”
“따라오시죠. 보고는 먼저 국왕 전하께 드려야 하니까.”
후치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칼의 말대로 국왕의 드래곤이라는 이유만으로 금방 접견할 수 있게 되었다. 일행의 말은 다른 수비 대원이 맡아서 마구간으로 데려갔고, 일행은 조나단 아프나이델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성의 마당으로 들어서니 그나마 왕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원은 상당히 잘 꾸며져 있었다. 특히 우거진 초목들 사이로 활짝 핀 꽃들이 몹시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칼을 제외한 일행은 놀라서 정원을 바라보았다. 낙엽도 떨어지는 이 계절에 꽃이 피어 있다니!
그러나 조나단 아프나이델은 묵묵히 걸어갔고, 일행은 궁금증을 속으로 삭히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때 칼이 입을 열었다.
“혹시 궁성에 감옥이 있습니까? 어떻게든 감금할만한 시설이면 됩니다.”
갑작스런 말에 조나단 아프나이델이 의아함을 표했다.
“무엇 때문이십니까?”
“저희가 호송해 온 인물은 자이펀의 간첩입니다.”
조나단이 놀라며 운차이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는 포박된 상태로 끌려와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저자가?”
“그렇습니다.”
“아, 그럼 저자의 신병을 일단 구속해 두겠습니다.”
조나단은 금방 수비대원을 불러 운차이를 끌고 가게 했다. 일행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름대로 정이 들었던 건지 아쉬움에 입이 조금 씁쓸했다.
운차이는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일행은 다시 걸어서 본성 입구까지 도달했다. 조나단은 거기까지만 안내했고, 그 이후로는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이라는 사람이 안내했다. 그는 일행을 응접실에 데려가 앉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궁성의 응접실은 과연 달라도 달랐다. 헬턴트 성에도 응접실이 있지만, 도저히 같은 용도의 방이라고 생각하기조차 힘들었다. 그 정도로 응접실의 규모가 달랐다.
새하얀 벽이나 장식 삼아 걸려있는 방패와 검, 그리고 감히 앉기 황송할 정도로 푹신하고 화려한 소파.
앉아서 응접실을 구경하고 있는데 시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뭘 드시겠냐며 일행에게 물었다. 그런데 일행은 그녀의 복장에 집중했다.
시녀는 일행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자 다시 물었다.
“뭘 드시겠습니까?”
“맥주 있어요?”
샌슨이 무의식중에 대답했다. 후치는 얼굴을 감싸쥐었다.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전하를 알현하러 오신 손님들 아니신가요? 술을 드시고 알현하실 생각이십니까?”
“아, 아차! 실수. 물이나 주세요.”
시녀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치는 주스를 부탁했고 칼과 리타는 커피를 주문했다. 후치가 순간 그들에게 존경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시녀가 응접실에서 나가자 일행은 리타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옷이다. 리타가 소파에 기대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이거 시녀복이었네.”
“…… 괜찮겠어요?”
“시녀라고 하지 뭐.”
“국왕에게 거짓말하면 모독죄 성립 되는 거 아닌가요?”
“음. 그러면 칼에게 지금 이 자리에서 헬턴트 전권 대리인의 이름으로 날 헬턴트 성의 시녀로 임명해 달라고 하면 되겠지.”
시덥잖은 소리를 하고 있으니 시녀가 금방 마실 것들을 들고 왔다. 후치는 과연 왕성의 주스는 얼마나 황공한 맛이 날지 고민하며 그것을 마셨다. 샌슨은 너무 긴장한 것인지 물을 바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반면 리타와 칼은 전혀 긴장하지 않은 모양인지 여유로운 자세로 커피를 한 모금씩 삼켰다.
시간이 계속 흘렀다. 처음에는 긴장이 몸을 지배하는 바람에 어색해도 괜찮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이 풀리며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후치는 샌슨을 보며 경거망동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컵을 저렇게 빙글빙글 돌리는 건 하지 말아야지.
이윽고 트왈리전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일행에게 말했다.
“절 따라오십시오.”
복도는 상당히 위압적이었다. 리타는 설마 투기장의 복도보다 더한 복도가 있을 거라 생각지 않았는데, 지금 이 순간 그 생각을 고쳐야 했다. 거기다 바닥에 깔린 카펫은 너무 푹신해서 바닥을 디디는지, 구름을 디디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들은 곧 어떤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트왈리전이 노크했다.
“들어와요.”
안에서 젊은 목소리가 들리자 트왈리전은 옆으로 물러섰다. 칼이 방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일행도 그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아무래도 서재 같았다. 사방은 벽 대신 책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는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한 쪽에는 책상이 있었다. 빛이 들어올 만한 창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밝았다. 천장에 달린 컨티뉴얼 라이트가 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책상 귀퉁이에 한 남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심플한 셔츠에 간단한 바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잿빛 머리칼을 흔들며 책을 접었다. 그리고 일행을 바라보았다.
일행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멀거니 서 있었다. 그 남자도 일행을 바라보기만 했고, 한 동안 그 상태가 유지되었다. 그러다 남자가 자기 머리를 딱 쳤다.
“아, 실례. 거기들 앉으시죠. 미안해요.”
그의 말에 일행은 소파에 엉거주춤 앉았다. 다만 리타는 제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그녀는 덤덤한 시선으로 남자를 보고 있었다.
그는 일행 맞은편의 소파 귀퉁이에 앉았다.
“날 만나러 오셨다고요?”
순간 칼은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후다닥 일어났다.
“저, 전하. 에, 처음 뵙겠습니, 아, 아냐.”
천하의 칼이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모습에 후치는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남자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 어, 그럼 의미가 없어요.”
“예?”
“여러분들을 서재로 불러들인 의미가 없잖아요.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려 했는데.”
남자는 그의 말대로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일행은 돌이라도 삼킨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이 나라의 국왕, 닐시언 바이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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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제군. 나는 메이드 복이 좋다.
...
그럼,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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