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은 맥이 탁 풀려서 허탈하게 말했다.
“공주님이시군요……”
목숨은 이미 포기했는지 칼은 무릎을 꿇지도 않고 서있었다. 무릎을 꿇으려던 후치는 그런 칼의 모습에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샌슨과 리타도 가만히 서 있는 마당에 혼자만 무릎을 꿇긴 이상했다. 그리고 어차피 죽은 목숨인데 여기서 무릎을 꿇는다고 해봐야 사형방식의 변화만 있겠지.
데미 공주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정원수의 가지를 하나 쳐내고서 일행에게 다가왔다.
“당신은?”
“칼 헬턴트. 공주님의 오빠를 알현하고 가는 길입니다.”
“국왕 전하를 욕하시던데요?”
“욕먹어도 싸니까 욕했습니다.”
칼의 언사는 거침이 없었다. 후치의 얼굴은 그림을 그려도 될 정도로 새하얗게 질렸다. 샌슨은 그대로 뒤로 넘어져 기절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정작 데미 공주는 덤덤했다.
“왜죠?”
“공주님의 오빠는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일화를 재현하려고 했습니다. 저와 스마인타그양을 빗대어 말입니다. 그러나 저희에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속아 넘기려 했지요.”
칼의 말에 리타는 뭔가 깨달았다.
“그래서 저한테 왕성에 머물러달라고 끈덕지게 요청한 것이군요.”
“…… 리타, 꼭 그것만은 아닐 거예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리타를 내버려두고 칼은 이야기를 진행했다. 그는 멀리서 해산하고 있는 궁성 수비 대원들을 가리켰다.
“저들이 왜 나왔는지 아십니까?”
“어떤 귀중한 손님들을 호위하기 위해서라더군요. 그래서 나도 나무 뒤에 숨었죠. 내가 시종도 동행하지 않고 나무를 손보면 시끄러워지거든요.”
리타는 닐시언이 말했던 ‘임펠리아에 꽃을 피어나게 할 정도로 재주가 좋은 여동생.’의 뜻을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길시언이 술 한 잔 들 때면 어김없이 곁들이던 귀여운 여동생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 귀엽고 재주 좋은 여동생에게 칼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귀중한 손님들이 바로 우리올시다. 이거 황송스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군요.”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데미 공주에게 칼은 자신을 가리켰다.
“우릴 보십시오.”
“예?”
“우리가 어디 귀중한 손님처럼 보입니까?”
데미 공주의 시선이 일행을 죽 훑었다. 리타에게서 잠시 머물렀던 시선은 이내 칼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깔끔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전혀.”
“40명이나 되는 궁성 수비 대원이 호위에 나설 인물로 보입니까?”
“그렇지 않군요.”
“그러니까 더 좋죠. 우리는 시골구석에서 올라왔습니다. 운이 좋아서 공주님의 오빠에게 우리나라와 자이펀과의 전쟁에서 크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조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공주님의 오빠도 기뻐하더군요.”
“고마운 일이군요. 그런데요?”
칼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온유한 그에게는 낯선 표정이지만, 생각 외로 잘 어울렸다.
“음유 시인들의 노래거리가 됩니다. 전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만, 공주님의 오빠는 했나 봅니다. 황야에 숨어 있던 은자가 표표히 나타나서 국왕을 도와 대륙을 질타한다는 식의 이야기 말입니다. 대마법사 핸드레이크도 그랬지요. 루트에리노 대왕은 핸드레이크를 만나서 비로소 바이서서를 건국할 수 있었고, 핸드레이크는 루트에리노 대왕을 만났기에 비로소 그 웅대한 위력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 않습니까?”
“그럼, 국왕 전하는 당신을 숨겨진 은자로 만들 생각이란 말인가요?”
“실제로 촌구석에서 방금 올라왔으니까, 그리고는…… 아마 이렇게 되겠지요.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저의 진면목을 오로지 공주님의 오빠만이 알아보고는 저에게 과분한 은혜를 내리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놀라지만, 제가 드린 조언에 따라 전쟁을 승리할 경우에는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아! 우리의 국왕만이 그를 알아보았구나! 루트에리노 대왕과 핸드레이크의 만남의 재현이로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게 싫으십니까?”
“싫습니다. 이게 뭡니까? 광대를 만드는 겁니까? 저렇게 번쩍번쩍하는 병사들로 호위시켜서 가공의 천재 전략가를 만들어내어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공주님의 오빠는 처음엔 우릴 제대로 맞이하지도 않았습니다. 공주님의 오빠는 잠깐 시간 내어 서재에서 우릴 만나고 쫓아버릴 계획이었죠. 그런 무례한 경우를 당했지만 그래도 전 꾹 참고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계획을 말씀드리자마자 번쩍거려서 쳐다볼 수도 없는 40명의 궁성 수비 대원을 보내어 절 가공의 은자로 만들어 자기 위엄까지 높이려 드는군요. 치사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칼의 말은 내용을 떠나 어투만으로도 충분히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데미 공주는 칼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고 그의 말에만 집중했다. 당장 저놈의 목을 치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요. 그래서 당신을 가공의 은자로 만들려는 그 계획에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요?”
“절 제대로 대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복수의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건 거짓이기 때문에 따를 수 없습니다.”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예?”
“황야에 숨어 있던 지혜로운 은자가 홀연히 나타나 국왕을 돕는다면, 백성들은 안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 지혜로운 은자도 아닐 뿐더러, 이 이상의 조언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능력도 없지만 서도. 제가 공주님의 오빠에게 말한 전략도 제 생각이 아닙니다. 제가 여행길에서 만난 어떤 지혜롭고 선량한 젊은이의 생각이었습니다. 차라리 그 젊은이에게 그 역할을 주면 어울리겠군요. 어쨌든 거짓은 금방 들통 날 것입니다. 백성들이 기만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왕가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떨어지겠습니까?”
“하하하!”
칼과 데미 공주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그들의 눈에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커다란 키의 여성이 들어왔다. 그녀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유쾌하게 웃었다.
“스마인타그양?”
감히 공주 앞에서 웃는다는 무례는 지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무례라면 자신이 더 범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리타는 숨을 토해내는 것처럼 웃은 다음 겨우 멈췄다.
“아하하. 칼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네요.”
“어떤 의미입니까?”
리타는 호흡을 고르며 말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가치를 과하게 해석하더니 나중에는 자신의 가치를 마구 낮추는 군요. 자의식이 심해요.”
“……”
리타는 가슴 아래로 교차한 팔을 풀어 웃느라 내려온 머리를 정리했다. 그녀는 아직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로 칼을 바라보았다.
“국왕전하가 칼을 핸드레이크로 만들고 싶어 했을지는 모르죠. 하지만 자기가 루트에리노가 되고 싶은 생각을 했을까요?”
건국왕의 이름을 그들의 후손 앞에서 마구 부르는 것은 어느 정도 범죄에 해당하는 걸까? 후치의 머리에서는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저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 되는군요.”
“생각은 되는 게 아니라 하는 거예요. 정황 상 그렇게 생각이 떠오른다는 식의 말은 하지 마시죠. 그건 칼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반대로 생각해보죠. 우리가 가져온 정보의 가치는 앞으로의 전황을 크게 좌지우지할 정도로 커다랍니다.”
“……”
“여기서 정확히 해야죠. 큰 것은 정보입니다. 그것을 말한 칼이 아니에요. 어쨌든 자, 그럼 국왕의…… 국왕전하의 입장에서는 그 정보 제공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이제까지 무시했으니까 계속 무시한다? 기사도의 나라에서 주인을 자처하는 자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호사가들에게 상당히 재미있는 안주거리를 제공하게 되겠지요."
“단순히 호의로 생각하기엔 너무 화려합니다. 그 이면에 다른 목적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리타는 허리에 손을 척 올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는 데미 공주를 바라보았다.
“먼저 공주님께 사과드리겠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그리고 그녀는 칼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런 궁성에 갇혀서 사는 왕이 밖의 시선을 어느 정도 알까요? 우리 같은 평민들이야 궁성 수비 대원을 보면 감탄을 하겠죠. 하지만 국왕전하는 같은 수준으로 감탄을 하진 않을 겁니다. 국왕 전하의 입장에서는 믿을만하고 쉽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이들에게 저희의 보호를 부탁했겠지요. 궁성 수비 대원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잘 모르면서요. 어쩌면 영광으로 생각하란 의미일 수도 있겠군요.”
그러자 데미 공주가 살풋 웃음을 지었다.
“풋. 국왕 전하라면 그럴 만 하네요. 예전부터 마음이 꽂히면 그것에 극성이었지요.”
후치는 궁성에 머물러 달라고 리타에게 요청하던 닐시언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납득이 간다.
“국왕전하는 자신의 입장에서 취할 수 있는 예의를 갖춰서 명령을 내렸을 겁니다. 물론 저도 그 명령 자체는 상당히 껄끄럽습니다. 저렇게 번쩍거리는 기사들을 시종으로 부리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생각이 편협한지 보여주는 거겠죠. 아, 공주님. 죄송합니다. 흠흠. 어쨌든 저들로 저희를 지키라는 명령은 싫지만, 그것을 지시한 국왕전하의 호의는 곡해하고 싶지 않네요.”
리타는 테라스에서 밖에 모인 병사들을 보며 불쾌감을 표했다. 그건 닐시언의 불순한 의도를 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호의가 정도를 지나쳐서 부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은 생각을 바꿀 의향이 없는 모양이었다.
“저희를 대우해 주겠다는 의도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일스 대공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바로 이해하시는 전하의 총명함을 보고 나니, 호의의 이면이 없다고는 생각하기 힘들군요.”
똑똑한 만큼 상황을 읽는 능력이 뛰어날 것이다. 거기다 국왕이란 자리는 그저 가만히 있다고 해서 지켜지는 게 아니다. 길시언이 태자위에서 폐위되고 닐시언이 국왕에 오른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그동안 국왕으로서 쌓은 경험은 상당하며 시국을 판단하는 능력도 함양됐을 것이다.
그런 이가 흑심 없이 이렇게 화려한 선물을 보냈다고 보기엔 여러모로 마음에 걸리는 점이 많았다.
리타는 칼의 눈을 바라보다가 볼을 긁적였다.
“칼의 말이 맞을 수도 있어요. 저는 인간의 속마음을 읽어내는 데는 아무래도 칼보다 둔하니까요.”
“아닙니다. 스마인타그 양의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편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느껴졌습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나 봅니다.”
“후후. 그리고 솔직히 칼의 말 대로 국왕전하가 그런 의도를 품고 있었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안합니다.”
“그건 어째서입니까?”
리타가 피식 웃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나요? 칼은 스스로의 가치를 제멋대로 평가해요. 예전부터 지켜본 칼이라면 충분히 현자 취급을 받을 만 하죠.”
리타의 말에는 후치나 샌슨도 동의하는 바였다. 펠레일도 말했지 않은가? 칼은 단순히 전령 노릇이나 할 사람이 아니라고. 그는 충분히 핸드레이크의 역할을 해도 될 것 같다.
본인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만.
칼은 고개를 저었다.
“한낱 촌부가 책으로 쌓은 지식으로 뭘 알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그럴 뜻이 없습니다.”
한때 품었던 청운의 꿈은 청춘과 함께 과거에 묻었다. 지금 와서 다시 그것을 꺼내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칼의 얼굴은 쓴 것을 삼킨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타는 무표정하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공주님?”
데미 공주가 눈을 빛내며 리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란하게 궁성 수비 대원이 출동한 이유가 있었네요.”
“네?”
데미 공주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싱글벙글거리며 웃었다.
“국왕전하는 말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요?”
“아니에요. 쿡쿡.”
고개를 갸웃거리는 리타에게 데미 공주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리타는 그녀가 갑자기 그러는 이유를 알지 못해서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다른 남자들은 모두 짐작하는 모양이다.
데미 공주는 짐짓 아무것도 아닌 척하며 말했다.
“키가 몹시 크시네요. 저도 큰 편이지만 저보다 더 큰 여성분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여성에게 키가 크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다. 적당히 큰 경우에 한해서 칭찬이 될 수 있지만, 리타처럼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큰 경우에는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다.
리타는 평소에 워낙 자주 듣던 이야기였기에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공주처럼 키가 큰 사람이 하는 말은 대체적으로 동병상련의 감정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그보다도 그녀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곱고 순진한 얼굴을 가진 어린 아이였다. 디트리히는 리타에게 이렇게 키 큰 여성은 두 번째로 본다고 했었다. 어째서 두 번째였는지 이제 알았다. 할슈타일 후작가에다 드래곤라자라면 공주를 볼 기회가 충분했을 테니까.
리타는 마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 길시언과 같이 여행할 때, 길시언이 술만 마시면 여동생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자기 집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엽고 예쁜 여동생이 있다고요.”
과거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게 보기에 무리가 있었다. 예쁘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귀엽다는 형용사를 붙이기에 그녀의 키가 너무 컸으니까. 하지만 여성의 귀여움을 외모로만 단정 짓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데미 공주는 리타의 말에 볼에 홍조를 띄웠다. 덤덤한 척 하고 있지만 꽤나 쑥스러운 모양이다.
“어머. 큰 오빠를 아시나요?”
“과거에 잠깐 동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도 마주쳤었지요.”
“오빠는 잘 있던가요? 건강해 보였어요?”
물어보는 데미 공주는 영락없는 여동생의 모습이었다. 리타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건강하게는 보였습니다만 잘 있다고는……”
“어헛, 어, 기, 길시언은…… 아, 아니 왕자님. 아니지, 그, 어…… 어쨌든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후치가 리타의 말을 끊으며 허둥지둥 말했다. 사실대로 리타가 말했다가는 괜히 걱정만 끼칠 뿐더러, 그건 닐시언의 말대로 중대한 사안에 해당한다. 공주라고는 해도 들려주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칼의 눈이 후치를 물끄러미 주시했지만, 그는 나서지 않았다. 데미 공주는 후치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미소 지었다.
“그랬군요. 다행이네요.”
이루릴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후치의 거짓말을 정정해 줬을 것이다. 다행이 이루릴은 이곳에 없었고, 이루릴과 비슷하다고는 하나 인간에 속하는 리타는 후치의 거짓말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는 길시언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길시언은 자신이 인생에서 딱 세 번 후회를 한다고 하더군요.”
“오빠가요?”
“첫 번째는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말하기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가출할 때 프림블레이드를 들고 나온 것이라고 했지요. 그리고 세 번째는 여동생에게 도색서적을 들켰을 때라고 했습니다.”
“……”
지금 이 여자가 공주님 앞에서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후치는 데미 공주 앞에서 리타에게 달려들어 입을 틀어막는 행동과 이대로 리타의 입을 방치해두는 행동 중에 어떤 게 덜 실례되는 일일까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리타는 토끼처럼 크게 눈 뜨고 있는 데미 공주에게 평온하게 이야기했다.
“동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눈에서 자신이 오빠로서의 위치가 발밑으로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고 하더군요. 경멸하는 눈으로 보다가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가던 장면을 떠올리면 지금도 참담하기 그지없다고 했지요.”
“…… 오빠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하도 어이가 없어 데미 공주가 허탈하게 말했다.
“데미 공주님을 보니 갑자기 길시언이 했던 말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면서도 데미 공주님을 끔찍이 생각하더군요. 데미 공주님이 만약 결혼할 때가 되면, 가장 먼저 길시언의 검부터 꺾어야 할 거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남동생을 말로 이길 정도는 되어야 동생을 줄 수 있다고요.”
“……”
후치는 제발 이제 그만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술을 마시고 데미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길시언의 모습이 떠올랐다. 흉흉한 눈빛을 빛내며 프림블레이드를 붙잡고 으름장을 놓는 모습이 선하다.
데미 공주는 벙 쪄서 리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칼은 왕족 세 명을 모두 말로 농락하는 리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게 리타의 특기라지만, 국왕과 국왕의 형, 그리고 국왕의 여동생까지 당황하게 만들 줄이야. 자신더러 대단하다고 하지만 그가 보기엔 리타가 더 대단하다.
그때였다. 멀리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궁내부장, 리핏 트왈리전이다. 그는 몇 명의 하인들과 함께 황급하게, 그러나 품위를 잃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일행에게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인해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여러분이 응접실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찾았습니다.”
일행은 헤매긴 했지만 응접실 같은 곳으로 돌아간 적은 없었다. 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의아해하고 있을 때, 리핏 트왈리전은 데미 공주를 발견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 데밀레노스 전하도 여기 계셨군요. 이분들과 환담을 나누셨습니까?”
당황에서 회복한 데미 공주가 생글거리며 미소 지었다.
“예. 몹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리핏 트왈리전은 그 재미있는 이야기가 뭘까 궁금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데미 공주가 저렇게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입장 상 감히 질문하지 않았다.
“좋은 이야기 잘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데미 공주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영광의 창공에 한 줄 섬광이 되어.”
칼이 싱긋 웃으며 능숙하게 인사를 받았다.
“그 날개에 뿌려진 햇살처럼 정의롭게.”
그리고 데미 공주는 다시 정원수로 걸어가 버렸다. 리핏 트왈리전은 시종도 없이 돌아다니는 공주를 모셔야 할지, 아니면 마찬가지로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궁성을 돌아다니는 손님을 모셔야 할지 고민했다. 결국 그는 일행을 안내하기로 했다. 어디서나 손님이 우선인데다 이 나라는 기사도의 나라, 바이서스니까.
일행은 그의 안내를 받아 궁성을 나갔다. 입구에는 다른 궁내부원이 말을 데리고 와 있었다. 일행은 그에게서 고삐를 넘겨받으며 결코 예에 어긋나지 않는 범주 내에서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궁성을 빠져나갔다.
“헉헉, 목숨이 10년은 짧아졌을 거야.”
“헉헉, 난 20년은 짧아졌을 거야.”
“…… 아무래도 내 목숨이 30년은 짧아진 것 같은데?”
“…… 안녕, 이제 죽나 봐.”
“…… 커험, 흠. 죽을 뻔하게 만들어 미안하구만, 친구들.”
“…… 미안.”
*
“그럼 스마인타그 양은 바로 일을 보시러 가시는 겁니까?”
“예. 이번에는 늦지 않도록 주의할게요.”
“험. 아무쪼록 조심하십시오.”
리타는 칼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과 갈라졌다. 이라무스 시에서 화려한 전적이 있기에 일행의 걱정을 받자 리타는 민망해졌다. 후치가 같이 가줄까 물어봤지만, 이건 자신의 일이라며 거절했다.
이번에도 혼자 움직이는 것이지만, 지금은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위험하게 발전할 수도 있는 일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깨달은 게 많은 지금은 일부러 위험을 감수하진 않는다.
“갈까?”
대답 없는 아스화리탈에게 말하며 리타는 걸음을 옮겼다. 아스화리탈 위에 당당하게 타고 있는 그녀에게로 수많은 시선이 쏟아졌다.
리타는 그 시선을 무시하며 태연하게 걸었다. 그녀는 말에 탄 채로 왼손에 껴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세밀하게 음각된 드래곤 문양이 느껴진다.
그녀가 지금 하려는 일이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부터 옳고 그른 일이 아니다.
그녀에게 좋을지…… 혹여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변화할지…… 자신이 없었다.
변화는 두려운 것이다. 뱀파이어가 가장 두려운 존재인 것은 그들의 변신 능력에 있다. 하물며 위태위태하게 스스로를 지탱하고 있는 그녀 같은 사람에게야 변화는 한 없이 무서웠다.
하지만 인간은 변화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변화해야 하는 걸까?
리타는 머리를 흔들었다. 괜히 생각이 깊어진다.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아스화리탈 앞으로 튀어나오는 아이를 발견했다.
“워! 멈춰!”
느리게 걷고 있었기 때문에 아스화리탈음 금방 멈췄다. 리타는 안도하며 앞에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멍하게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단 이 경우에는 조심해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무서운 일을 당한 아이에게 그녀의 얼굴로 말하면 울어버릴 텐데.
그때,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달려왔다.
그녀는 멍하게 있는 아이를 잡아당기며 리타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애가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그저 잠깐 멈춰 섰을 뿐이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의 머리를 잡고 계속 리타에게 사과했다. 리타는 어색하게 사과를 받으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디트리히 보다도 더 어려 보였는데, 그저 멍하게 리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입에 물고 있었다.
리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려고 애쓰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재빨리 어머니의 뒤로 숨어 버렸고, 리타의 어깨가 조금 쳐지는 결과를 낳았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저기 혹시 괜찮다면 이거라도 드시겠습니까?”
아이의 어머니는 들고 있던 바구니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꺼냈다. 보아하니 간단한 간식이나 먹거리를 파는 모양이다.
리타는 거절하려고 하다가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니 리타는 그녀의 성의를 무시하지 않고 받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그녀는 공손히 샌드위치를 리타에게 건네어주고 허리를 깊숙이 접어 인사한 다음,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리타는 머쓱하게 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아스화리탈을 걷게 했다. 그리고 손에 든 샌드위치를 우물거렸다.
바이서스 임펠의 길은 대체적으로 넓고 쾌적하게 닦여 있다. 말과 사람이 같이 통행해도 지장이 없을 정도다. 리타는 느긋하게 그 길을 걸었다. 깊었던 생각은 아이 때문에 사라져 버려서 더 이상 그녀의 머리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고팠던 배도 샌드위치가 적당히 달래 주었다.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리타는 걸었다. 전시라는 것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바이서스 임펠의 거리엔 사람이 북적거렸다. 웃고 떠드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투정 소리나 손님을 모으는 소리. 온갖 소리가 어우러져 거리는 활기를 띄었다.
과거에는 안 이랬는데. 지난번에 왔을 때는 이렇게 활기차지 않았다. 지금이 트윈문의 축제기간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때는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기에 그랬던 걸까?
“여긴가?”
리타는 한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택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안은 넓은 정원이 펼쳐져있었고, 그 가운데는 웅장하게 서 있는 3층 저택이 있었다.
가만히 서서 저택을 구경하고 있으니 문지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누구십니까?”
리타는 볼을 긁적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어, 음…… 리타 스마인타그입니다.”
“어떤 용무가 있습니까?”
문지기는 정중하게 물었다. 리타는 궁성을 나오며 시녀 치마를 벗어던진 상태였다. 평소의 그녀처럼 타이즈팬츠에 셔츠차림을 하고 망토를 둘렀다. 날카로운 인상에 대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데다 훌륭한 말까지 타고 있으니 문지기로서는 편하게 대하기 어려웠다.
리타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후작님을 뵙고 싶습니다.”
“약속을 잡고 오셨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용무로 뵙고자 하는지 자세히 말해 주십시오. 약속을 잡지 않았다면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고선 들여보낼 수 없다는 점을 미리 알아주십시오.”
“……”
“급한 용무라면 안에 말씀드려서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리타는 잠시 머뭇거렸다. 목적은 그녀의 말대로 정말 단순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다. 어떤 이야기…… 어떤 용무 인지는 그녀 스스로도 잘 모른다.
그렇다면 똑바로 이야기해야겠지. 그녀는 왼손을 내밀었다. 문지기의 시선이 그녀의 반지에 머물렀다.
“이, 이건!”
“율리아나 할슈타일의 딸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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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타트가 600장을 돌파했습니다. 책으로 치자면 깔끔하게 4권 분량을 채웠네요.
본편에 추가되는 게 많아서 분량이 더 불어난듯 합니다.
오리지널 파트에서는 빨리빨리 진행해야지.
그럼,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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