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다리와 다리 사이에 덜렁거리는 살덩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온 우주로부터 환대받는 존재. (중략) 촉망받는 남성이라면 성범죄자가 되더라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도록 온 인류가 힘써준다. 태어남과 동시에 무료 자동가입 된 남성연대에서 온 힘을 다해 도와주러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은하선, 한겨레(2017)
페미니즘에는 다양한 논리와 주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필자에게 페미니즘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통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저 은하선 작가의 칼럼을 예시로 보여줄 것이다. 이 주장은 “성불평등의 기원이 여성을 억압, 착취하는 구조의 끈끈한 남성연대 때문이다.”라는 페미니즘의 핵심적인 논리가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돼 있다.
관련기사
<한겨레> [ESC] 거시기 사전: 남성(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04446.html)
이를 쉽게 말하자면 남성이 여성을 억누르기 위해 한데 뭉쳤다는 뜻이다. 애석하게도 이 음모론에 가까운 수사를 지지하는 증거는 지구상에 없다. 대신 페미니스트들은 유리천장과 임금격차 등의 몇 가지 사회적 현상을 가져와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이 남성들의 음모 때문이라는 연역적 추론을 유도하는 방식을 택했다. 일리가 아예 없다고 보진 않으나 성불평등 현상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균열을 끌어안기에 ‘남성연대’ 이론은 지나치게 잉여적이다.
사회를 남성들의 거대 음모로 표현한 이러한 분석은 “여성들의 연대와 해방”이라는 페미니즘 운동의 원동력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 원동력은 남성들의 공고한 연대를 부수기 위해서는 여성들도 단결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작동한다.
실제로 메갈리아와 그들을 비호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미러링’이라는 대의명분하에 타깃으로 삼았던 것은 ‘한남충(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메갈리아발 신조어)들의 계몽’보다는 여성들의 자의식을 벗기는 일에 조금 더 가까웠다.
어쨌든 성불평등의 기원을 남성들의 끈끈한 연대로 연관 지으려는 시도는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남성 사회에 대한 이해는 너무 피상적이지 않았나 싶다. 남성과 그들의 사회를 진단하면서 남성의 소모적인 특성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이해조차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워렌 패럴, 우테프 레베르트, 로이 바우마이스터 등 남성성을 연구한 여러 학자가 지적했듯 사회의 주류문화는 남성을 두둔하고 도태되지 않게 힘쓴다는 페미니스트들의 환상과 달리 소모품으로 쓰거나 압박감을 주는 방식에 가깝다. 물론 여성으로 태어난 이상 남성의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남성연대’라는 개념을 정립하려면 최소한 남성에 대해 이해해 보려는 노력 정도는 보여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서점가나 영화계를 보면 여성이기에 당하는 차별과 고통을 담아놓은 작품들은 매우 많다. 최근 베스트셀러 10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82년생 김지영>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남성의 고통을 헤아려주는 문화·예술작품은 거의 없는 편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필자는 <548일 남장체험>이라는 책에 대해 짧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남자들의 연대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고 싶었다. (중략) 나는 남자 노동자들의 대표적인 사교클럽인 볼링팀에 가입했다. (중략) 하지만 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그것은 수컷 특유의 생존 본능이었다.
– 노라 빈센트, <548일 남장체험> 32페이지
<548일 남장체험>은 남성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폭로하기 위해 스스로 남자가 되기를 택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노라 빈센트가 무려 18개월간의 남장체험 기록을 담은 책이다. 그녀는 남성이 누리는 특권을 폭로하겠다는 처음 계획과 달리 특권은커녕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남성 세계의 험난함을 느끼고 다시 여성의 삶으로 돌아왔다.
심지어 그녀는 정작 남자의 입장이나 남성성의 본질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할 여지가 없었던 사회를 통찰하기에 이른다.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이 과감한 도전은 앞서 제시한 페미니즘의 통념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례가 됐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하나 그녀가 남장체험을 하며 겪은 부당한 일들은 남자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거나 대수롭지 않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남자들에겐 이미 일상적인 일이며 심지어 고통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당연시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경찰이나 군대, 기업, 프로축구팀 등 남성들이 만들어낸 조직들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조직에 속한 개인들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교체된 적이 있거나, 언젠가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것이다. 그리고 조직은 각 개인의 자리가 언제라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점을 구성원에게 인지시킨다.
이러한 집단의 종속 방식은 남성들 그들을 끝없는 경쟁으로 몰아넣고 집단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도록 만들어왔다. 여기에서 이 점을 간과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 생기는 부당함이 오로지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로 오해하고 마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적으로 여성들에겐 자신이 조직에 필요한 존재임을 꾸준히 증명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껴볼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주제로 넘어가 보자. 얼마 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여성 징병제’ 국민청원을 기억할 것이다.
해당 청원은 12만명을 넘기며 남녀 공동 징병에 관한 성평등 논의를 다시 수면 위로 떠올렸다. 논의는 여성에게 있어서 군대가 과연 신체적으로 적합한가에 대한 것도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좋지 않은 징병제를 여성에게도 권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여성 징병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결국 징병이 여성들에게 좋지 않으며, 심지어 여성 징병을 찬성하는 청원 참여자들이 해로운 것을 여성들에게도 공유하려는 피해의식에 찌든 찌질한 남성들이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현재의 징병제도는 남성들에게도 분명 좋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그 좋지 않은 것을 남성들이 독박으로 짊어지고 있다. 그런데 왜 이 점에 대해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를 생각하기에 앞서 군대라는 집단의 근본적인 특성을 짚어보자.
군대는 궁극적으로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창설된 집단이고, 전쟁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인명피해를 남겨왔다. 총알은 그 누구에게도 자비롭지 않지만, 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는 사람을 꼽는다면 당연히 사선에 사지로 내몰리는 젊은 남성들이 될 것이다.
혹시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국의 여성들을 총알받이로 썼다는 역사적 근거를 본 적 있는가? 필자는 그런 경우를 찾아보지 못했다. 이미 전쟁에 참가하는 젊은 남성으로 구성된 병사들이 총알받이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은 오늘날 남성의 독박 징병과 그 흐름을 같이 한다.
여기서 필자는 여성에게 징병을 권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의도 좋지만, 남성의 생명이 여성의 생명에 비교해 가치가 낮다고 여겨지거나 소모되는 자원으로 쓰여 왔던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한번 고찰해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다소 극단적인 예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수위를 조금 낮춰보자. 산업재해 피해자의 대다수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산업재해 피해 남성 비율 : 96% (고용노동부, 2015) 그 바탕에는 여성보다 월등히 많은 남성이 위험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현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통계를 보고 단 한번이라도 남성의 문제에 대해 논의가 이뤄진 적이 있던가? 남성들의 높은 자살률이나 산업재해 피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뤄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고, 그마저도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로 인한 것이었다.
필자가 이러한 예시들을 열거하는 이유는 여성만 차별받고 고통받는 것이 아니니 그만 입 다물라는 뜻이 아니다. 또한, 어느 성별로 사는 것이 더 힘든지 한번 견주어보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여성의 문제 이면에는 남성의 문제가 존재하며, 그 관점에서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남성연대’라는 통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말하기 위해서이다.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는 이 말이 다소 황당하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
“너무 이기적인 소리를 하는 것 아니냐. 여자들에겐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피해자만 힘든 게 아니라 가해자도 힘들다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세계 최고라는 남녀 임금 격차를 떠올리고, 남자들의 부담감을 오히려 팔자 좋은 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여성의 문제와 남성의 문제는 동전의 양면이다. 예를 들어 그동안 여성에게 가사노동이 더 전가 되고 있었다는 현실은 남성이 바깥 노동에 더 투자됐다는 이면의 현실과 양립한다. 또한, 여성이 남성보다 공적사회 진출을 보장받고 경쟁할 기회가 적었다는 것은, 반대로 남성에겐 여성이 거주했던 사적 영역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릴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남녀가 전통사회에서 떠맡았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남성의 역사>의 저자 우테프레베르트 박사가 잘 지적하고 있듯 상호 지시적 관계로써 긴밀히 얽혀있는 관계였다. 즉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을 해결하기 위해선 그와 긴밀히 얽혀있는 남성의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인권문제가 주(柱)고 남성인권문제는 부차적이다.”라는 말은 필자의 입장에서는 이런 상호관계를 파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필자 역시 성불평등의 기원이 무엇 때문이라고 확실히 단정 지어서 말할 수 없다. 여성이 열등하고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통설의 오류는 오늘날 거의 밝혀졌다. 하지만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연대’ 이론 또한 성불평등 현상을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잉여나 흠결을 만든다.
이제는 여성과 남성 양쪽 성별 모두의 상호관계를 파악한 새로운 이론이 필요할 때다. 중요한 것은 남녀관계가 쌍무적인 관계인 만큼 굳이 서로 이빨 세우고 싸우지 않아도 타협점을 찾아 해결을 논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남성이 가해자이며 여성은 맹목적인 피해자일 뿐이라는 식의 주장을 끝까지 고집한다면 페미니즘이 남성에게도 좋다거나 성평등을 지향한다는 말은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그렇게 편협하고 이율배반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남녀 모두에게 좋다고 말하는 것은 ‘성평등’을 지향한다기보다는 ‘성평등’이라는 이데올로기 뒤에 숨어버리는 위선에 가깝게 보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류의 기사가 보기 어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