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머리는 곱슬입니다.
일정 수준 이하까지는 펌을 안해도 자연스럽게 꼬불거리며 이쁜 모양을 보여주지만,
가지치기를 오래하지 않으면 길게 자란 머리가 생명력이라도 얻는 모양인지 꼬불거림을 넘어서
내가 말고자하는 반대 방향으로 말려올라가며 머리를 혼돈의 세계로 초대하고야 맙니다.
그 주기는 대략 3-4주. 3주부터 지저분하다 싶어지다가 4주가 넘어가면 드라이기로도 반나절을 버티지 못하는 공포의 꼬불머리가 되곤 했지요.
그런 것이 싫어서 대략 5-6년간은 참 편한 [흉노족] 머리를 하고 다녔었습니다.
양 옆을 과감히 하얗게 쳐내고 약간의 머리숱만 남긴채, 개성있고 강해보인다고 좋아하고 다녔죠.
그러나 와이프 될 사람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첫만남 전에 사진을 보고 '머리가... 참..' 이라고 생각했고
첫만남 때도 '다 괜찮은데 머리가...' 라고 생각했다고 해요.
그리고 두번째 만남 전 저와 연애를 결심하고 고백을 받아내겠다 마음먹으면서
'머리는 고치고야 말겠다' 라고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저는 흉노 머리를 버리고 평범한 내린 머리를 하고 다니게 되면서 다시금 드라이기와 사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한동안 문제는 없었습니다.
5-6년간 제 머리를 눈감고도 해주셨던 담당 미용사님이 계셨으니 한달에 한 번 그 분을 찾아가 부탁하면 되는 일이었거든요.
(물론, 담당미용사님은 스타일을 바꾼다고 하자 '히잉' 하고 정말 아쉬워 하셨습니다. 너무 익숙해져서 아쉽다고요)
그러나 담당 미용사님이 이직하시고.... 와이프 될 사람이 기가막힌 골 결정력에 당해... 라온이를 품게 된 날 곧바로 짐을 싸고 부천으로 올라온 이후 저에겐 문제가 하나 생기고야 말았습니다.
결혼을 결심하고 이런 저런 일을 추진한지 한달.
곱슬머리는 어느새 생명력을 얻어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2주 후면 스튜디오 촬영이 있습니다.
며칠 후에는 상견례였죠.
이런 머리로 중요한 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하여 저는 머리위의 괴물이 봉인을 풀고 깨어나기 전에 처단해야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머리 하나 하자고 수원까지 내려가는건 너무나 큰 낭비였습니다.
아무리 수원의 그 미용실이 남성커트 1만원에 10% 현금 적립을 해준다고 해도 그거 하나 보자고 내려가는건 너무나 귀찮은 일이었죠.
거기다가 커트는 예약도 받지 않으니 주말에는 헛걸음을 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고로 부천에서 처리해야합니다.
하지만 싸면서 잘 하는 집은 찾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산책을 하면서 아파트 근처 마트를 보며 달걀과 대파 가격을 보는 중에 마트 옆의 한 미용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성커트 7천원]
홀린듯 들어갔습니다.
어차피 엄청난 기술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단정히 숱만 쳐주면 될 일이라 살짝만 손봐주면 되는 일이니까
아무대서나 하면 될거였거든요.
그런데 7천원이랍니다.
이 얼마나 저렴합니까?
저는 앉아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당당히 말합니다.
"단정하게 정리만 해주세요. 얼마 후에 신랑 웨딩 촬영이라서요."
신랑 웨딩촬영이라고 덧붙였으니 얼마나 중요한지 아줌마는 아실겁니다.
신경 많이써달라는 마법의 주문이었죠.
그리고........... 그 주문이 저주가 되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합니다.
"그럼 깔끔해야겠네."
가위가 아닌 바리깡을 들고 옆머리를 올려치십니다.
ㅇ....으줌므......................
머리를 하고 온 저에게 와이프가 웃으며 말합니다.
"2주 후에 자라지?"
ㅠ.ㅠ
제 머리의 강인한 생명력에 기대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ㅠ.ㅠ
야... 야한 상상.. 상상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