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주
확실히 그건 무리가 있는 계획으로 보였다. '보이지 않는 눈의 신봉자들'의 자매들은 대부분 오랜 투쟁으로 지쳐 있었고, 그나마 모두 심하게 다쳐 있었다. 그런 그들을 이끌고 괴물들이 들끓는 평원을 가로질러 캐타콤으로 진격, 전투 그리고 성지의 탈환을 성공시키고야 말겠다는 성기사의 자랑스런 계획은 자매들의 리더였던 장님 여사제 '아카라'에겐 그저 개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아, 거. 왜 자꾸 안 된다는 거요? 승산이 있다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지에서 파견나온 성기사(Paladin) '자카룸의 손'은 계속해서 그녀를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그는 한낮에 여장을 풀고 그들을 만난 후 부터 그의 장황한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북쪽으로 지는 해가 붉은 미소를 입안 가득 띄울 때까지, 그는 한번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또 했다. 그리고 그에 맞서 아카라는 그동안 하고 하고 또 했던 대답을 말투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말했다.
"안됩니다."
그녀의 쌀쌀맞은 얼굴을 바라보던 성기사는 마침내 분통을 터뜨렸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전신갑옷을 온몸에 걸치고, 교황의 손길이 닿은 영광된 투구를 쓴 채로, 빈쩍이는 방패와 영롱함이 감도는 신의 철퇴를 손에 들었으며, 참고로 사람들에게 우스개 삼아 '자카룸의 손, 그 왼쪽 두번째 손가락' 이라고 불리우는 팔라딘, '아론 맥클레인.' 그의 얼굴에는 고된 훈련의 세월에 그을린 갈색 피부가 노을 빛을 받아 그의 두 눈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나를 못 믿는 겁니까? 몇번이나 설명했잖소."
"몇번이나 말씀드렸지요. 당신이 끌고 가려는 자매들은 우리의 전력입니다. 팔라딘님께서는 단 한번의 전력탐색전을 위하여 우리들의 씨를 말려버릴 생각이십니까?"
아론은 피식 웃었다.
"전력탐색전이라니? 그런 것은 필요없소."
아카라는 머리를 짚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필요없다뇨."
"나는 북방의 야만인과의 전투로 단련되고 신의 손길로 다듬어진 몸이오. 길거리에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괴물들 따위가 팔라딘이 이끄는 부대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아론의 얼굴에 정말로 순수한, 승리에 대한 믿음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카라는 그것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의 당당한 목소리에 자만과 오만이 결여되어 있음을 믿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려 애쓰며 말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저 밖에 있는 괴물들은 그동안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어오던 몬스터들과는 확실히 다르답니다. 오죽하면 우리들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후퇴해 왔겠어요? 팔라딘님께는 신의 축복이 함께하고 교황의 영광이 뒤따르지만 당신은 오늘 낮에 이곳에 오셨고 지금은 같은 날 저녁입니다. 하루쯤은 푹 쉬시면서 노독을 푸시고, 내일부터 차차 생각해 보시지요. 저희는 집을 잃었습니다. 마음이 바빠야 할 사람은 우리이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는 지쳐 있습니다. 처음에 달아오르던 기세는 죽었답니다. 이끄시는 손길을 뒤따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우리에겐 남겨진 힘이 없습니다. 우리는 쉬어야 합니다."
아론은 말없이 턱을 쓰다듬었다. 잠깐-아주 잠깐-고뇌하던 그가 대단히 진지한 표정으로 아카라에게 물었다.
"...이곳에도 굴뚝이 있소?"
아카라는 혹시 이것이 성기사들이 사용한다는 성스러운 한기를 뿜어내는 오오라인지 의심해 보았다.
"......"
"농담이오."
오오라는 없었다. 아카라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을 만끽하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흠...앞뒤 안가리고 뛰어들려 했던 것에 대해서는 사과 하지요. 내가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질 않았군. 미안하게 됐소."
"괜찮습니다."
"그렇다면...잠깐 정신이 없어서 말을 못했는데,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당신네 로그들을 괴롭히는 악의 세력이 신탁이 이야기하는 '거대한 악'과 관련되어 있을 지 모른다고 추측했기 때문이오."
거대한 악?
아카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카룸의 손'들이 포교나 종교재판보다도 더욱 크게 여길 수 있는 '거대한 악의 퇴치'에 걸맞는 내용은 역시 그것 외에는 없어보였다.
"악...마 말이십니까?"
아카라는 깊은 생각끝에 이야기했고 아론은 가볍게 그녀를 짓밟았다.
"그건 살짝 돌아버린 놈들이나 하는 말이고. 그냥 알 수 없는 적, 거-대한 악이오."
"그러니까, 그냥 거대한...악?"
아론은 고개를 '꺼떡꺼떡' 이며 '바로 그거요, 그거.'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할 수 없군요, 서 아론."
"음? '서' 라는 경칭을 붙여준 건 처음이오?"
"그러니까 교황청에서는 자카룸의 손, 그 두번째 손가락을 보내시어 우리를 공격한 악의 정체를 밝혀내려 하시는 겁니까?"
'서'라는 호칭에 만족해하던 아론은 더욱 흡족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소."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거야, 그거라구. 정확한데!' 라고 말하는 듯 했고 아카라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장님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여기서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팔라딘 부대가 이곳으로 그들의 폭풍같은 진격을 계속할지 그렇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 결정은 최대한 빠를 수록 좋으며, 나는 시일을 오래끄는 것을 원하지 않소."
거기까지 들은 아카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론도 더 보채지 않고 얌전히 기다렸고, 얼마 후 아카라는 손뼉을 쳐서 막사 밖에 서 있던 카샤를 불러들이게 했다. 어깨까지 풀어해쳐진 산발의 붉은머리에 검은 머리끈을 이마에 꽉 둘러맨 억센 로그가 들어왔다. 로그들의 전장을 지휘하는 자, 카샤. 그녀의 직위는 요 몇 주의 참극 동안에 이미 수 도없이 바뀌어 있었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물었다.
"출진합니까?"
카샤의 목소리는 이미 격앙되어 있었다. 아카라는 그녀를 조용히 가라앉힌 후 자리를 권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없습니다. 여기 일단 앉아요. 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으니."
"네크로맨서?" 아론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네크로맨서라니, 늪지에 틀어박힌 죽음의 마법사가 이곳에 왔단 말이오!"
"정확히, 지금으로부터 3주전 입니다." 아카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의 차가운 한 마디가 얼어붙은 채로 있었던 것이다. '신을 믿는가, 악마를 믿는가.'
아론은 흥분해서 외쳤다. "믿을 수가 없군! 그래, 그 자는 지금 어디에 있소?"
카샤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 자는 곧 떠나버렸습니다.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요. 필요한 것만 얻어내고 알아낸 후 그대로 이곳을 떠나 '로그들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로그들의 길!" 아론은 신음하듯 외쳤다. "혼자서 갔단 말이오? 혼자서?"
"그렇습니다."
"......"
아론은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제길!' '빌어먹을...!' 따위의 말이 흘러나왔고, 아카라는 카샤에게 말했다.
"그 일에 대해서 말해 드리세요, 카샤."
"...'그 일'...?"
아론의 말꼬리가 올라갔다. 카샤는 잠깐 밖으로 나갔고 돌아올 때는 작은 상자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건 뭐요?"
"유골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시체파편."
카샤가 우울하게 대답했다.
"시체파편..."
아론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네크로맨서들의 마법중에 시체를 폭파시키는 것도 있다는 걸 아십니까?"
"시체를 폭파시킨다? 그런...그건 죽은 자의 영혼마저도 무시하는 처사요!"
아론은 격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카샤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도착한 첫주에 이미 스토니 필드를 돌파했습니다. 곳곳에서 요소를 지키고 있던 로그들에게서 연락이 왔지요. 그리고 둘째 주에는 다크 우드마저도 벗어났고...셋째 주에는, 캐타콤에 다다른 모양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넷째 주이지요." 아카라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단 말이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그렇습니다."
아론은 그가 로그 캠프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고요하고 오랜' 사색을 시작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카샤는 시체가 담겼다는 뚜껑을 열었다. 도저히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추잡한 살점덩어리가 이리저리 뒤섞여 있었고, 뒤엉키고 꼬여 반죽이 된 내장조각은 곧 현기증과 구토를 동반했다.
"이 시체는 콜드 플레인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지키던 한 로그 자매의 것입니다. 함께 있던 동료가 이걸 모아 가지고 왔지요. 캠프에 간신히 도착했을 때 그녀는 완전히 패닉 상태였습니다. 피에 젖은 손으로 활을 쥔 채, 눈물조차 매마른 얼굴로 네크로맨서가 사라져간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지요."
아론은 말없이 그 상자를 바라보았다.
"......"
그의 얼굴은 잠깐 동안 살벌한 분노와 지독한 공포에 휩싸였다.
잠시 후 그는 철장갑을 낀 왼손을 들어올려서,
시체가 담긴 뚜껑을 닫았다.
그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쫓아가겠소."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힘겹게 입 밖으로 삐져 나왔다.
"예?" 아카라가 물었다.
"쫓아가겠다고. 로그들은 필요없겠군. 나는 이 자를 추적하겠소. 자카룸 교회에서 독촉이 들어오면 왼손 두번째 손가락은 거대한 악을 쫓아갔다고 해주십시오."
새벽녘에 비치는 태양은 쑥쓰러움을 몰랐다. 아직도 마을 밖에는 동이 터오고 있는 중이라 푸른 여명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자카룸의 팔라딘은 차가운 새벽공기 사이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캠프 입구에 서 있었다.
"정말 혼자서 가시는 거요?" 쪼그리고 앉아 있던 와리브가 물었다.
"물론이오."
"흐음, 흐으음, 음, 으음음."
노래를 부르는 듯한 와리브의 신음소리에 아론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뭐 문제라도?"
"아니, 별게 아니라. 그...당신이 쫓아간다는 네크로맨서 있지?"
"있지요. 저 평원을 넘어 갔소."
"에, 내가 그에게 받은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뭐지요?"
"아, 별것 아니오. 물건을 팔고 값으로 받았지. 근데, 이 친구가 값을 너무 많이 줬어. 아는 친구에게 물어 봤더니 '로그들의 길'을 독점할만한 거대한 상업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라더군."
"그래서 어쨌다구."
"응, 상인은 이익만 보면 그만이지만 아무래도 꺼림칙하니까. 난 내 식대로 벌어서 살겠어. 이렇게 많은 것은 필요없네. 그러니까 이건 그냥 그 친구를 만나면 돌려줘요. 물론, 가다가 노자가 필요하면 성기사님께서 쓰시구."
아론은 와리브가 내미는 가죽주머니를 조심스럽게 받아 열어보았다. 눈을 찌르는 다이아몬드의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는 기겁을 하며 주머니를 닫았다. "그 자식은 도대체 뭐야!"
이윽고 카샤가 남아있는 이삼십명의 로그들을 데리고 그를 마중하러 왔다. 아론은 카샤의 옆에서 다소곳히 서 있는 아카라를 보았다.
"가시는 겁니까?" 카샤가 물었다.
"음, 말한대로요. 그가 로그들의 길을 선택했다면 아마 당신들의 영지를 돌파했겠지? 그럼 그 곳에 어떤 일이 벌어져 있을 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아마도 괜찮지 않을까? 혹시 놈은 중간도 못가 죽어 있을 지도 모를 일이요."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다음?"
"그를 확인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로그들의 길을 선택했다면 다음 패스는 당연히 사막이겠지. 나도 아라녹 대사막을 건너갈 것이오."
"그렇다면, 이제 다시는 못 보겠군요."
"그렇소."
"가시는 길, 평안하길 기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눈이 함께 하시기를."
카샤가 모든 이들을 대표해서 배웅했다. 아론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여러분들도."
그 때, 지금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던 아카라가 문득 아론에게 물었다.
"서 아론?"
"음? 뭐요?"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악마를 믿습니까?"
"뭐...요?"
"당신은 자카룸의 손, 그 왼쪽 두번째 손가락이지요. 그래서 신을 믿습니까?"
"......?"
"아니면, 악마의 존재도 부정하지는 않는 건가요?"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신과, 악마. 당신은 어떤 것을 믿지요?"
"......"
차가운 새벽공기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긴장과 고요함이 맴돌고, 자카룸의 손, 영광의 팔라딘은 대답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떠오르는 새벽의 태양과 함께, 아론 맥클레인은 여명의 그림자속으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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