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태양을 쏘아 맞힌 자
어제 뜬 태양을 떨어뜨린 자.
떠오르는 태양을 쏘아 맞힌 자
내일 새로운 태양을 뜨게 하는 자.
-제 5주
오후의 작열하는 태양은 하늘 높이 솟아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모래바다는 보는 이로 하여금 대자연의 위대함에 연발감탄사를 동반시켜 무릎꿇리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지루하기 짝이없는 동료의 뒤만 바라보고 걷던 금발머리의 여인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붉은 가죽옷은 사막여행에 그리 어울리지 않게 보였는데, 스스로도 그 점을 깨달았는지 짙고 어두운 빛깔의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다만 그 위에 등 전체를 덮고도 남을 만한 커다랗고 둥근 방패와 자기 키보다 약간 더 길어보이는 큰 창, 그리고 상대적으로 약간 작은 투창 수십개가 들어있는 통을 메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게 독특한 점이었다. 왼팔에 끼고 있는 골무는 들고 있는 활과 거의 달라붙어 있다시피 했고, 빈 오른손은 언제라도 허리에 걸쳐맨 화살통에서 화살을 뽑을 수 있도록 여유롭게 내버려 둔 상태였다. 비록 식량자루나 물통, 혹은 여행에 필요한 다른 여러가지 물품이 든 가방따위는 단 하나도 들고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전쟁이라도 나갈 것처럼 온갖 무기를 있는대로 짊어지고 있는 가녀린 금발머리 여인의 모습은 사막에서 찾아보기 힘든 광경임에 틀림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나름대로 씩씩한 표정을 유지하던 그녀는 모래언덕 너머로 가까스레 드러나는 사해(모래바다)의 드넓은 모습을 발견하며 결코 감탄이라 할 수 없는 한숨과 함께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 앞에서 걷고 있던 백발의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 쭉쭉 발을 내딛어 갔기 때문에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그 뒤를 다시 바짝 쫓아갔다.
"에, 저기 말이죠. 괜찮다면 루트 골레인이 언제쯤 나오는 건지는 말해주실 수 있으세요?"
"......"
앞장 서 가고 있는 백발의 사나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금발머리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를 만난 뒤로 한두번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사실, 거의 매번)별로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말이죠, 사막이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거든요."
"......"
"정말이지 이렇게 많은 모래를 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르겠다니깐요, 아무튼..."
"시끄럽다."
......
실쭉해진 금발머리 여인은 토라진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빨리 마을로 가야지, 이 넓은 사막에서 도대체 어떻게 하겠단 소리야, 쳇쳇쳇..."
궁시렁궁시렁, 어쩌구저쩌구, 이러쿵저러쿵, 따따부따, 따따부따, 째깍찌깍째깍찌깍...
"닥쳐."
......
"마을 따윈 가고 싶은 생각 없으니 바라지도 마라."
백발 머리의 남자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럼 어디를 왜 가겠다는 거에요, 어디를, 왜, 왜, 왜."
금발머리 여인의 따져묻는 말투에 백발머리 사나이는 조용히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눈빛을 받은 쪽은 마치 훔친 돈으로 군것질 하려다 들킨 아이처럼 바싹 쫄아들었고, 사나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오른손 집게 손가락으로 멀리 보이는 모래언덕을 가리켰다.
"저기 저 높은 언덕이 보이나."
"흐음...아, 저거."
"거길 넘어간다."
사나이는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냐는 듯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았고, 금발머리 여인은 다부진 눈빛으로 다시 한번 따져물음으로서 백발 남자의 바램을 가볍게 짓밟음과 동시에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닥쳐."
......
언덕 위에서는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던 지형이었지만, 사내가 가리킨 '그' 모래언덕까지 가는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중간까지 갔다 싶을 때 벌써 해가 뉘엇뉘엇 모래속으로 잠기기 시작했고, 사나이는 해가 질듯 말듯하면서도 충분한 밝음이 남아있는 적당한 시점에서 휴식을 허락했다.
"야-호! 드디어 쉰다-앗!"
환호를 지르던 금발머리 여인은 곧 자신에게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다음 순간 본능적으로 울려퍼진 신체의 비명과 함께 '생존위협에 대한 인간적 동정을 호소하는' 표정을 지어 보임으로서 백발 사나이를 다시 한번 미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댓가는 입고 있던 로브와 밤새 불침번을 설 수 있는 특권(?)이었고, 사막의 기후에 무지했던 그녀는 아무런 고민없이 그녀의 유일한 보온도구와 달콤한 수면시간을 한 자루의 건조식량과 한 통의 물과 바꾸었다. 이윽고 태양이 지며 찾아온 사막의 조소띈 추위에 덜덜 떨던 그녀는, 옆에서 로브로 온몸을 둘둘 말고 편안히 잠들어 있는 사나이의 악랄함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 사나이에게 들리지 않게 이어지던, 그의 치졸함에 대한 저주와 욕설마저도 목구멍속으로 잦아듬을 느낄 때 즈음, 여인은 입으로 손가락을 쭉쭉 빨며 사나이가 차지하고 있는 로브를 두 눈 가득한 눈물과 함께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더욱 비참해졌다.)
"추워요..."
오들오들 떨리는, 눈물 섞인 목소리가 차가운 사막의 밤 사이로 흘러나왔다.
"추워요...훌쩍..."
그녀는 원망섞인 눈길로 사나이를 바라보았다. 저 로브를 가지고 있다면...저 로브를 입을 수 있다면...저 로브를...저 로브를 뺏을 수 있다면...!
그러나 그녀는 엇갈리는 생각속에서도 스르르 감기는 두 눈을 막을 수 없었다.
따뜻함.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따뜻한 손길을 느꼈다. 몽롱한 의식속에서 황홀하게 다가오는 그 따뜻함...기가 막히게 행복한 이 느낌. 그러나 손길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싸늘하고 매서운 그 손길에 담긴 것은 동정이라기 보단 차라리 경멸에 가까웠지만, 그녀는 숨 막히는 그 따스함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눈을 떴다.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나 푸른 사막의 밤은 그녀의 곁에 조용히 가라 앉은 것처럼 보였다. 그 때, 풀어놓은 병기외에 손에 와 닿는 어떤 것이 있었다.
로브였다. 언제 피워져 있었는지 작은 모닥불이 발치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 불꽃을 응시했다. 어지럽게 피어오르는 모닥불은 따닥따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그리고 그 불꽃을 따라 옮겨진 그녀의 시선의 끝에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뭇가지를 집어 넣고 있는 백발 사나이가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자라."
"깼어요." 여인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저, 이것들은..."
"노예를 얼려죽이는 주인이 될 수는 없지."
"노예라뇨?"
"노예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 평생동안 몸과 마음을 다해 돕겠다고 했죠."
"그러니까, 노예지."
"아뇨, 친구지요."
"친구? 그건 아냐."
"왜 아니에요? 맞아요."
"...젠장, 집어치우고, 자라."
잠깐동안 정적이 흘렀다. 사나이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로브속으로 오그라든 여인이 느끼는 견딜 수 없는 침묵만이 계속됐다.
"저, 오늘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침묵은 깨졌다.
"......"
"정말...죽는 줄만 알았는데...친구도 잃고...정말, 고마워요."
"자."
"자지 않을 거에요. 나 지금, 몹시 외로우니까...내 말을 들어줘요."
"...해. 젠장..."
"어, 정말로요?"
사나이는 죽일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뜨끔하는 표정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는 여인의 머릿속에는 오늘 새벽 이맘때쯤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아악!"
악몽이었다. 이건 악몽이 분명했다. 금발머리 여인은 자기 눈 앞에서 죽어가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믿었다. 단지, 길을 걷다 만났을 뿐이었다. 그냥,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두 여인은 사막을 걷던 중 모닥불을 피워 놓고 야영하던 두 남자를 만났고, 땅 속에서 울려퍼진 끔찍한 괴성과 함께 두 남자들 중 로브를 뒤짚어 쓰고 있던 남자가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됐다.
-인간으로서 건너지 못할 강을 건너려 했느냐...
로브를 뒤짚어 쓴 사나이는 끔찍한 목소리로 말하며 두 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진홍색 열기에 휩싸인 갈색머리 여인의 몸은 경련하며 사나이의 손을 따라 들어올려졌다. 푸른 어둠이 걷힌 사막의 한복판은 진홍색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커허억!"
묵직한 신음을 토한 갈색머리 여인은 더욱 심하게 경련했다. 잔인한 미소를 짓고 있던 사나이의 옆에는 머리를 땅에 박고 울부짖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금발머리 여인은 도저히 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활을 지켜들고는 화살을 한 대 끌어당긴 채로 귀에 거슬릴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로 협박아닌 협박을 했다.
"내, 내 친구를 내려놔!"
사나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공중에서 뒤틀리던 여인의 몸은 더욱 심하게 흔들렸고, 여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신음은 하늘을 찢어 놓는 것 같았다.
"그, 그만 둬!"
그녀는 공포의 힘이 그녀를 사로잡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화살이 허공을 갈랐지만 그건 쏘아진 것이 아니라 놓친 것이었다. 그나마 그것은 제대로 날아가지도 못하고 땅에 처박혔다.
그 때, 사나이가 두 손을 쫙 폈다. 그리고 갈색머리 여인의 몸이 다시 한번 뒤틀렸다. 그제서야 금발머리 여인은 지금 눈 앞에서 사나이가 벌이고 있는 이 끔찍한 행위가 단순히 자신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기 위해 질질 끌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공포...
-아하핫핫하!
사나이가 활짝 편 손을 꽉 움켜쥐는 순간, 진홍색 열기에 휩싸인 채 뒤틀리던 갈색머리 여인의 몸뚱이는 형편없이 짜부라지며 그녀가 토해내는 고통의 신음마저도 삼켜버렸다.
잠시 후, 사막은 다시 푸른 밤으로 돌아갔다.
툭!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갈색머리 여인의 시신이 모래바닥에 박혔다.
얼이 빠져버린 금발머리 여인은 로브 사나이가 사악한 미소와 함께 이번에는 그녀를 향한 진홍빛 열기를 뿜어내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진홍색 열기가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그녀에게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뻥!
고요한 밤 공기를 짓찣는 폭음과 함께 시체파편과 열풍, 그리고 거기에 뒤섞인 엄청난 모래가 휘날렸다. 로브 사나이와 울부짖던 노인을 완전히 뒤덮어 버린 모래는 새로운 언덕을 만들어 버렸고, 쓰러져 있는 금발머리 여인의 곁으로 백발을 휘날리는 사나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뒤덮인 모래속에서 검은 두 형체가 날아오르듯 빠져나와 달이 지는 방향을 쫓아 사라져 갔다. 조용히 그 모습을 주시하던 사나이는 이를 득득 갈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금발머리 여인은 선망하는 눈길로 백발 사나이에게 즉석에서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앞으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몸과 마음을 다해 그를 돕겠노라고...
"우린 무작정 섬에서 빠져 나온 거 였는데, 친구가 그렇게 죽어버릴 줄은 몰랐어요...아아, 너무 한심한 거 있죠."
묵묵히 듣고 있던 사나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한심해요, 그렇죠?"
"그래, 네 년은 정말 한심해. 됐나?"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도대체, 어떤 말을 해주길 바라는 거냐."
"아, 내가 무슨 말을 원하는게 중요해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되잖아요?"
"난 네가 들어달라고 해서 들어주고 있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따라서, 없다."
"그래두..."
금발머리 여인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토라졌다. 침묵이 다시 밤을 휘어잡았고, 다시 견디지 못한 여인이 입을 먼저 열었다.
"난 아버지가 없어요."
"......"
"난 아마존이지만, 아버지가 있어도 되는데."
"......"
"다른 아이들은 다 있는데, 유독 우리 아버지만 없어요. 아무도 말해주지 않죠."
"......"
"대답 좀 해봐요."
"해주길 바라나."
"그럼요."
"했다."
"...고마워요."
짧게나마, 그녀는 이 사나이의 독특한 태도가 마음에 든다고 느꼈다. 사나이를 만난 후 처음으로 느끼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는 맹목적인 추종으로 따랐었고, 어쩔 수 없이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툴리-훌리아. 툴리아라고 불러줘요. 만나서 반가워요."
"......"
대답은 없었지만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마주 잡는 손은 없었지만 그녀는 혼자서 흥겹게 흔들고 손을 거두었다.
"......"
"이름이 뭐에요? 그걸 아직 안 물어 봤네."
"가르쳐 줘야 할 이유는 없지."
"그럼 뭐라고 부르라구요? 이름을 말해줘요."
"......"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닥쳐라, 빌어먹을."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데이먼, 데이먼, 데이먼, 데이먼이다! 데이먼이라고 불러라!"
...의외라는 표정으로 데이먼을 바라보던 툴리아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데이먼."
역시 의외로 손을 들어올린 데이먼은 툴리아의 손바닥을 툭 치워 버리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만나서 반갑다, 툴리아...젠장..."
"방금 그건 파트너로 인정하는 하이 파이브로 받아들이겠어요." 툴리아는 연신 싱글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 자 두는 게 좋을 거다..." 데이먼이 말했다. 툴리아가 바로 물어왔다. "참, 우린 어디로 가는 거죠?" "말해주지 않을 거다." "아, 난 파트너에요." "받아들인 적 없어."
다시 토라진 툴리아에게 데이먼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자두는 게 좋을거다. 해가 뜨는 대로 다시 출발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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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다음 디아블로 멀티플레이 카페의 laycouts님 개인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