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뭐냐."
"이거, 모래가 깊어서 발이 푹푹 빠질 것 같은데요."
"여긴 사막이다."
백골로 치장된 검은 옷의 사나이, 데이먼의 말은 금발머리 아마존 툴리아에게 지독한 짜증을 불러 일으켰다. 누가 사막인 줄 몰라요? 했다가는 그렇다면 알고 있지 않은가, 같은 대답을 듣게 될 것이 뻔했으므로 그녀는 한숨만 내쉴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데이먼과 툴리아는 만난 지 이틀 뒤에 바싹 마른 드라이 힐의 꼭대기에 설 수 있었다. 툴리아는 약간 높은 지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사막의 거대함에 다시 한번 압도 당했고, 언덕을 넘어 시작되는 본격적인 사막의 열기에 또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 후 그들이 아라녹 대사막의 본격적인 사막으로 들어서게 되자 마침내 툴리아는 더 못 걷겠다고 주저 앉았고, 데이먼은 그런 그녀를 아주 조용히 무시하고 지나감으로서 그녀를 맥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파-오아시스에 진입한 지 반나절만에 펼쳐진 사구(모래언덕)지대에서, 툴리아는 발이 푹푹 빠진다는 이유로 데이먼에게 다시 제동을 걸었다.
"일어서. 걸어라."
"아아악! 이젠 정말 더 이상 못 걷겠어요!"
"그럼, 앉아 있어."
데이먼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속에 내뿜어진 콧김이 툴리아의 얼굴을 데웠다.
"이봐요!"
툴리아는 이번에야말로 단단히 버릇을 고쳐놓겠다는 듯한 단호한 태도로 소리쳤다.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데이먼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고 툴리아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이에요? 마을도 안 들리고 끝도 없는 대사막을 걸어서 건넌다니! 물도 이젠 다 떨어져 가는데 도대체 어떻게 할 거에요? 아니, 그건 상관없고, 나 피곤해요! 좀 쉬자구요! 하루종일 걸었잖아요!"
데이먼은 대답할 기회를 잡지 못했고 결국 귓속에 처박히는 그녀의 외침을 반대쪽 귀로 깨끗히 흘려 보내버렸다.
"쉬고 싶으면 쉬어."
"저, 정말이죠?"
"그래."
툴리아는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낮의 태양에 뜨겁게 달궈진 모래 바닥이었지만 그녀가 걸치고 있는 두터운 여행자용 로브는 모래의 뜨거움을 충분히 막아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휴식의 기쁨을 누린 것도 잠시, 툴리아는 침착하게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데이먼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몸을 일으켜야 했다.
"해골인간, 좀비할배 같으니라구!"
"시끄러워."
"더대체, 왜, 그럭케, 서드르는, 그에요?"
다시 한참 후, 제풀에 지쳐버린 툴리아가 헥헥 거리며 간신히 이야기했다. 데이먼은 그녀의 혀가 꼬이기 시작할 때부터 알아듣기를 포기했고, 설사 알아들으려 노력을 했다해도 결과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관심한 그의 태도에 툴리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왜, 안, 안, 안 시어요?"
"......"
"왜, 왜, 왜 안 쉬, 쉬어요?"
노력 끝에 툴리아는 데이먼이 그녀의 말을 알아듣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물이 떨어져 가니까."
"엥?"
아, 그렇지! 순간 머리속을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사막에서는, 물이 다 떨어지면, 죽는 거지요? 그런데, 이곳은 아마도, 오아시스가 없으므로..."
"반은 틀렸고, 반만 맞았다."
툴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맞으면 맞은 거고 틀리면 틀린 거죠. 반만 맞았다뇨."
"오아시스가 있기는 있다. 다만, 물이 없다는 거지."
"엥?"
"여기 물은 못 쓴다. 그러니 이곳을 빨리 통과하는게 상책이지."
"아아, 그렇구나.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감으로."
"아항? 그거 믿을만 한데요. 감이라. 이봐요, 그거 알아요? 우리 이렇게 가다보면 탈 라샤의 무덤에 도착할 거예요. 어떻게 아냐고요? 그냥 감으로! 하!"
......
'어라...?'
그녀가 전혀 의도한 바 아니었던 무거운 침묵의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뭐야, 왜 이렇게 심각해 진거지? 툴리아가 '감'을 못잡고 당황하고 있을 때, 데이먼이 입을 열었다.
"...감은 정확했다."
"에에?"
툴리아의 머릿속에 또 다시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그것이 맞겠는가 틀리겠는가에 앞서 부디 자기 생각이 잘못되었기를 바랬다.
!!!
툴리아는 입을 딱 벌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부터는 사막의 열기도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못했다.
"거, 거긴 왜요?"
"별다른 목적은 없다. 다만, 관전을 위해서다."
"과, 관전이라고요?"
"그래. 몇 백년 묵은 악마와 마법사의...응?"
툴리아는 거품을 약간 물고 진짜 쓰러져 버렸다. 데이먼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퍼석퍼석한 모래에서 골렘을 소환해 그녀를 들쳐업게 하고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제 6주
"끄으윽."
툴리아는 괴상한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꽤 오래 잠든 것 같았다. 아니, 설마 약간 놀랬다고 내가 기절까지 했겠어? 그녀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그나마 대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데이먼?"
"뭐냐."
"어디 있는 거예요?"
"네 앞에."
"아, 그렇겠...으아아악!"
어두운 밤중에 푸른 영기를 얼굴에 비추며 나타난 데이먼의 창백한 얼굴은 툴리아를 놀라게 만들었다. 아니 정말로, 거의 기절할 정도로 놀란 툴리아는 가슴을 어루만지며 데이먼을 쏘아보았다.
"뭐, 뭐에요!"
"깨어날 때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요?"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왜요?"
툴리아는 그들의 대화가 점점 유치해져가고 있다고 믿었다.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럼 물어요...어라? 이 말투는 데이먼의 것인데?"
......
다시 정적이 흘렀고 툴리아는 언제나처럼 쫄아들고 말았다. 데이먼은 잠시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진지했지만, 그가 말을 꺼내려고 준비하는 모습은 툴리아에게 거의 폭풍전야에 가까운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우선 네가 오늘 기절한 것 말인데, 아마도 낯선 사막의 기후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와 피로가 한번에 겹친 것 같군. 아, 아마도 정신적 충격도 있었을지 모르지."
"...그, 그런가요?"
"......"
그녀는 데이먼이 질문하기를 기다렸다.
"...?"
"......"
질문은 없었다.
"...뭐, 뭐에요?"
"뭐가."
"물어볼게 있다고, 했잖아요?"
"...그랬던가. 잊어라. 다음에 하지."
툴리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별로, 신경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드는 것은 오직 망각. 잊고 싶은 것,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분. 왜 그런 걸까?
왜, 아무것도 신경쓰고 싶지 않지.
어제, 그리고 오늘. 그저께...? 생각보다, 많은 일이 생겼다. 사막을 걸었지? 그래,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를 만났지? 꺼먼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 내 친구는 죽었지? 그렇지만 나는, 살아남았지. 누군가 나를 구했어...데이먼.
툴리아는 문득 데이먼을 바라보았다. 어둠속에서 손에 푸르스름한 기운을 담은 채로 얼굴을 비추며 뭔가를 뒤적거리고 있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말라빠진 좀비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일은 어디까지 가요?"
"알 필요 없지 않은가."
"알고 싶은데요?"
"말해주기 싫군."
"아아, 말해줘요, 말해줘요, 말해줘요..."
"...호라드림 자식들이 만들어 놓은, 웨이 포인트로 간다."
"엥? 그게 뭐죠?"
"순간 이동장치 같은 거지."
"아니, 그러니까 호라드림."
"...동방 마법사집단."
"...그, 그래요?"
그건 확실히 툴리아가 바라던 설명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웨이 포인트로 간 다음에는?"
"......"
"아, 말해줘요, 말해줘..."
"로스트 시티(Lost City:잃어버린도시)!"
"아, 그렇군요? 헤헤."
"......"
잠깐, 아주 잠깐동안 두 사람사이에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이대로 이 밤이 평화롭게 지나갔으면 했던 데이먼의 바램을 무시하고, 툴리아의 입이 또 다시 열렸다.
"저, 데이먼?"
"...뭐냐."
"저기, 전 말이죠."
"......"
"아이 참, 들어줘요."
"...또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가."
"네."
"그럼 날 괴롭히지 말고 저기 있는 저 녀석한테나 말해."
그러면서 데이먼은 한쪽 손을 들어 곁에 조용히 서 있는 클레이 골렘을 가리켰다. 잠시, 할 말을 잃었던 툴리아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반격했다.
"아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에요?"
"글쎄. 모르겠지만 난 말했던 것 같은데."
"말도 안돼 말도 안돼! 골렘이 어떻게 내 말을 알아들어요?"
...그러자 데이먼은 푸른 기운을 꺼뜨렸다. 곧바로 찾아온 어둠. 그리고 차가운 적막이 뒤따랐다.
"...알아 듣는 사람이 필요한가."
잠시 후 그가 무겁게 물어왔다.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툴리아가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렇잖으면?
"그저, 말하고 싶은 것 아니냐. 들어 주는 사람이 알아 듣거나 말거나."
툴리아는 당황했다. 내가 그런가? 정말로?
"아, 아니에요! 난, 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 거에요!"
"그렇지 않아."
"그래요!"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
데이먼이 다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아니...그런건가? 그렇지 않아...아니야. 그래.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분명했다. 툴리아는 무의식적으로 그에 동의하는 자신을 욕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렇지 않아요!"
"......"
"난, 그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야. 난, 내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내 말을 누군가 들어주면 좋겠어. 나와 함께...있어주면 좋겠어! 날 혼자 내버려 두지 말아요! 사막에 홀로 남겨지고 싶지 않아. 외로워요!"
주위는 아직도 어두웠다. 모닥불도 없는 쌀쌀한 사막. 툴리아는 어둠의 저편에서 들려오는 데이먼의 목소리를 들었다.
"들어라, 툴리아."
"......"
"날 바꾸려 들지 마라."
"...?"
"난 바뀌지 않는다. 다른 인간들은 스스로를 바꾸지만 나는 바꾸지 않아.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들고, 산 자를 안식으로 돌려보내는 나이지만, 결코 나 스스로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은...없어요. 모두, 스스로를 바꿔요."
"난 바뀌지 않아."
"거짓말이야." 툴리아가 말했다. "거짓말이야. 바뀌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 없어요. 세상의 사람들은 어울려 살아. 그리고 상대방을 위해 스스로를 바꿔요. 우리는 서로를 바꾸고 바꿔서 서로 가까워져요. 가만히 혼자 있을 수...없어요."
"있어." 데이먼이 대답했다. "그리고 난, 그렇다. 누구에 의해서도 바뀌지 않아. 나는 나, 세상이란 이름속에 속해 있지 않은, 나는 그저 나대로 나다. 어떤 것에도 속해 있지 않아. 그 어떤 복수도 나를 지칭하지 못한다. 나는 오직 나, 나라는 단수로만 존재해."
"...그런..."
툴리아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무릎에 얼굴을 파 묻고, 풍성한 금발머리를 얼굴 위로 가득 덮은 채로. 눈 조차 돌리지 않고 있던 데이먼은 다시 말했다.
"너는?"
"...?"
"너는, 어떻느냐."
"어...어떻냐뇨."
"너는, 스스로를 바꾸는가?"
"...물론이죠. 난...모두에게 다가서려고 노력해요. 혼자 있는 건 싫어, 남겨지는 것은, 견딜 수 없어요."
"그래서, 너는 모두에게 다가서고 있는가? 자기자신을 바꾸면서?"
"...그건..."
"남을 너에게 맞출려고 하지 않는가. 너를 깎으면서 남에게 다가서려고 해 본적이, 정말로 있어?"
"...몰라요." 툴리아는 투정 부리듯이 말했다.
"넌 어리다." 데이먼이 말한다. 툴리아는 그녀의 마음 속을 헤멘다. 어리다. 난 어려. 내 마음은, 어릴 적 내 모습으로 남아있어. 난 항상 홀로. 스스로 서지 못해. 남이 내게 다가오기를 애타게 원할 뿐. 남에게 다가서는 내가 되지는 못해.
"그러니까...바꿀 수도 없는 나를 바꾸려 하지 말고, 다가설 수 있는 네 자신을 만드는게 어떤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상관없다. 내 말에 신경쓸 필요도, 없다. 나는 타인을 바꾸는 자가 아니니."
데이먼의 목소리를 끝으로, 사막의 공기는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간간히 불어닥치는 모래바람이 주위를 스쳐가는 소리가 요란할 뿐. 새벽이 찾아오는 밤의 끄트머리에서, 툴리아는 지난 날의 밤을 회상했다. 그동안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던, 그 공포스런 기억의 실마리를 잡고. 나는 스스로 서지 못했지. 툴리아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비명과 함께 죽어가는 친구의 모습과 잔인하게 웃는 사나이의 얼굴. 그리고 터져버리는 시체, 망연자실, 모래언덕. 데이먼...
기억 하고 있다.
밀어내려던 기억, 잊으려고 노력하던 것들. 모두 기억하고 있어. 나는...기억하고 있어. 기억해야 하는 것들인데. 잊어서는 안되야 하는 것인데.
내가 바뀌는게 무서워서, 남에게 다가가는 것이 무서워서. 잊을려고만...하고 있었어.
미안해. 그녀는 용기를 내어서 사과했다. 죽은 친구에게. 잊을려고 했던 과거에게. 용기를 낸 댓가, 그동안 잊었던 슬픔과 설움이 마음 밑바닥에서 부터 복받쳐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었다. 사막의 밤이 지나갈 때까지. 선선한 모래바람과 뒤섞여 오는 밤의 끝자락, 그리고 사라져간 전사의 뒷모습이 눈물에 찬 눈동자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때까지.
그리고 다시 해가 떠올랐다.
정신없는 회상속에서 잠들었던 툴리아의 눈은 떠오르는 눈꺼풀과 함께 뜨여진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본다.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그는 말한다.
"일어서라. 오늘 내로 이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힘들테니까."
"......"
데이먼.
"뭐하냐."
나를 이끄는 손길에 의해, 내 몸안의 피 한방울마져도 다 마를 때까지. 내 정신의 한조각마저도 다 깨질 때까지.
"...일어서라니까."
내 몸과 마음을 바쳐, 당신을 돕겠습니다.
"...지겹군. 일어나지 못해."
내 이름은 훌리-툴리아. 필리오스 섬의 아마존.
"...내버려두고 간다."
당신은, 내 친구입니다. 나는 긴 여정이 끝나는 순간까지.
내 친구와 함께 합니다.
툴리아는 일어서 걸었다.
남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받으며.
"어이, 좀비 할아버지! 같이 가요!"
"...제발 닥쳐!"
두 사람은 반짝이는 모래사막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돌판이 나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