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보고 별로 놀란다거나 겁내질 않는 편인데
본래 그렇다기보단
아버지보다 무서웠던 존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무섭고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정말 피하고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당당함이 너무 지나치셔서 안하무인이고
기품이 지나치셔서 봉건시대 귀족같이 딱딱하고
아들딸 작은 실수도 용납 못하시는 그런 이미지.
아주 어릴때는 아버지를 정말 잘 따랐는데
사춘기가 지나서는 아버지랑 마주하는것도 싫어질 정도로
아버지를 피했다.
가정생활 못하는 것도 싫었고
너무 혼자 잘난척하시는 것도 싫었고
여성에게 친절하지 않으신것도 싫었고
가끔 철없이 구시는 것도 못마땅했다.
그래서
누구한테든 친절하고
누가 처음 날 보더라도
불편하지 않은 그런
편한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고 살았다.
여성들한테는 친절하고
철든 사람처럼 굴었다.
그게 가면이든 내 본성이든
남들에게 그리 보였다면
그건 필시 아버지 덕(?)이리라.
그런데 서른 넘어가고
나도 나이 조금 먹은 후에는
아버지랑 잘 지낸다.
밉고 싫던 면도 잘 보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배울 점이 있기도 하다.
그런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영감님이 외로워보인다는게
제일 큰 것같다.
이제는 그렇게 예전처럼
호방뇌락하지도 못하시고
적당히 세상일 타협도 할 줄 아시고
기세가 영 꺾이셨다.
오늘 집에서 혼자 드라마 '정도전'을 보는데
정몽주가 그러더라.
부모가 못나다고 부모를 버리면 어찌 자식이라 할 수 있냐고
못하니까 오히려 더 신경이 쓰이고 연민이 생긴다고.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머리 굵고 내가 집안 가장노릇하는거
아버지 아시느냐 모르느냐 대들던 나도
벌써 서른이 넘어
이제는 고기 구워 같이 소주도 한 잔하고
그냥 이런저런 얘기 두런두런 나누게 된 거 보면
사람이 잘 안 변한다지만
또 시간 지나면 달라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내일 다시 서울간다니
아쉬워하시는 모습을
애써 덤덤한 척
다시 내려오겠다 말하고 돌아서니
뭔가 미묘하게 목이 메는것은 십수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