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장 29절의 내용은 이러하다.
'그러자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셨다."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즉,경험론에 의존하여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무의식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종교나 믿음은 자연과학의 영역 밖에 있는 개념이다. 그래서 종교나 믿음의 대상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밝히려는 노력은 무모한 일이 되기 쉽다. 한 마디로 비(非)존재를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답이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가끔씩 나는 저 성경 구절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왜냐하면, 종교적 '믿음(신앙)'은 이유있는 믿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귀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두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들에게 '귀신은 밤에만 나타난다'는 한 가지 명제를 주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 보면 일반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의 경우엔 "귀신은 밤에 나타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귀신을 믿는 사람의 경우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 "귀신이 활동하기 좋은 영적 에너지가 충만한 시간이 밤이기 때문에 귀신은 밤에 움직인다." 혹은 " 귀신은 태양을 싫어한다." 는 등의 이유로 귀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에 대해 마치 그것을 경험한 것처럼 설명해야 한다.
종교나 민간신앙의 대상들은 예를 든 것과 같이 대상에 대한 경험론적인 고찰과 존재 이유에 대한 약간의 논증, 그리고 다양한 상징 등으로 가시적 효과를 강조한다. 게다가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종교는 강조한 말과는 모순적으로 교리나 경전을 가지고 믿음을 설파한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의 문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하며 언어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그 역시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현실의 한계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결국 현실 종교는 실제로 겪지 못한 것을 자신이 겪은 것처럼 남에게 전달하는 과정-예를 들어 개신교의 간증이나 카톨릭의 성령안수 및 퇴마-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닐까?
[인간은 본디 종교적인 존재]
종교적인 존재라고 적으니 뭔가 잘못 읽힐 것 같아 부연해봅니다.
인간은 거대한 무언가 혹은 감내할 수 없는 현상에 놀람과 두려움 그리고 신비를 느끼며 그것 앞에서 겸허해지는 감정을 갖는 것이 공통된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구석기 시대의 조상이 그러했고, 철기시대의 인간이 그러했고, 현대의 인간 또한 여전히 그러하지요.
그런 일종의 방향성-종교적인 방향성은 본능적으로 기저에 존재한다 봅니다. 다만 애니미즘처럼 그 방향성의 끝에 자연에 대한 경외를 놓을 지, 혹은 크리스트교처럼 예수나 신과 같은 인격신을 놓을지, 혹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들처럼 자연의 법칙을 놓을 지가 문제란 생각이 들더군요.
여하간 사람들은 종교적인 방향성을 갖고 있다 보이고, 현대의 기독교 등의 종교는 분명 박복하고 갑갑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하루하루를 견딜 안정제와 같다고, 그래서 그런 부분에선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긴 듭니다.
허나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견딜 힘을 주는 것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조종하여 이익을 갈취하는 짓을 저지르는 한국의 거대교회를 보고 있으면, 면죄부를 팔던 그 시절의 카톨릭과 비슷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