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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소설 (Novel)] (자작소설) 마이라(Myra) - (6) (0) 2026/02/21 PM 09:11

안녕하세요


설은 잘 지내셨는지?


정진하겠습니다.








(6)


"......헉!!"

깨어났다. 여긴 어디? 잠에 들어 깨어나보니 아직 까만 세상. 본능적으로 공기의 냄새를 맡아보니 축축함. 싸늘함. 이슬의 냄새. 시간은 새벽이다. 주변에는...

"아..."

은발의 머리가 옆에서 흐트러져 옆에 누워있다. 코... 소리를 내며 곤히 잠들어 있는 모양, 얼굴 표정을 보았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고있는 얼굴 표정에는 천진난만이 깊게 새겨져 그야말로 천생 순수한 아이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옆에 누워있는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 그녀도 잠에 들어 세상모르게 그것을 만끽하고 있었다. 순간 아일렌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끼고 뒷통수를 감싸 쥐었다.

"윽... 머리가......"

붉은 머리칼의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지난 기억. 엘르웬의 마지막 모습. 그것이 스쳐 지나가자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지만, 금방 그 아픔은 사그라들고 현기증만이 남아 눈앞을 새하얗게 그라데이션처럼 가렸다가 탄산의 거품처럼 사르르 사라졌다. 한층 맑아진 정신이 돌아오자 그제서야 지난 날의 기억이 한꺼번에 몰려 들어왔다.

"난 분명 그놈을......"

일급 정령의 힘은 확실하게 닿았다. 그 단단한 피부를 지닌 거구의 마물에게 치명상을 줄 정도로 강했으니 실전 가능성은 확실하게 입증한 것이었다. 발전 가능성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밝힌 최초의 사례가 된 것이었다. 단지 사용하기 까다롭다는 것 말고는 실용성이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마지막에 폭풍우와 함께 가루로 갈려버린 마물의 모습은 그의 가슴속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기나긴 인고의 끝에 복수를 끝마친 것이었다.

복수에 성공한 청년은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금방 팔을 들어 눈을 비비적 비볐다. 아주 조용히. 두 여자는 그가 뒤척여도 움직이지 않고 아주 곤히 잠에 들었다. 당연했다. 그 광경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어수선했을 상황을 정리하느라 애먹었을 듯하다. 그랬으니 몸은 지쳤을 것이고, 휴식을 갈망했을 것이다.

아일렌은 잠자리에서 조심히 일어나 바깥으로 향했다. 자신이 잤던 장소는 익숙한 모습의 집이었다.

"여긴... 첫날의 그 집인가. 그래도 이곳에 있다는 건, 집을 빌려주게 됐다고 이해하면 되려나? ......좋은 일이려나......"

아일렌은 문을 소리가 나지 않게 슬쩍 열고 바깥으로 한걸음을 무겁게 내딛었다. 새벽의 공기가 싸늘하게 그의 얼굴살을 스쳐지나가니 제법 쌀쌀함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르디(Faldy)를 부를까 싶었지만 금방 관뒀다. 새벽 바람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굳이 파르디까지 불러서 이 운치있는 바람의 온도를 높이고 싶지는 않았다.

아일렌은 집 옆의 그루터기 하나를 발견했고, 그 자리를 의자 삼아 앉았다. 그리고 무심코 고개를 들어서 아직 새까만 하늘을 보자 이스밀디르에서는 볼 수 없던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지상으로 나온지 두 달. 하늘에 별의 바다가 있을거라고는 이야기 들었지만, 직접보면 감회가 남다르다니까. 처음 올라오고 저 별의 바다를 봤을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지. 이걸 형들하고 스승님이 봤어야 했는데..."

그러자 아일렌은 무언가 떠오른 듯, 손을 들어 세이라를 소환했다.

이미 불어오는 새벽녘 바람결을 타고 천천히 푸른빛을 띠며 세이라가 천천히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세이라는 두 눈을 뜨자 아일렌을 보고는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반겼다.

# 음. 금방 다시 보는구나. 몸은 좀 나아졌느냐? #

아일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세이라를 챙겨주고 싶다는 마음에 한마디를 건넸다.

"세이라는 별고 없죠?"

세이라는 아일렌의 시선을 마주하면서 두 눈을 차분히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 세이라는 바람이란다. 별고 없다는 것은 당연하단다. 나는 바람의 의지, 그 자체니까. #

"하하... 역시 그렇죠?"

# 그래도 정령에게 걱정이라니, 너 답지 않구나.#

"......그러게요. 하지만 오늘은 꼭 말하고 싶었어요."

세이라는 아일렌의 태도가 의아했지만 의외로 그 말을 듣고는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 라는 것을 느꼈다.

# ......? 고맙구나. 역시 그대는 상냥하구나. 하지만 나에게만 그럴 것이 아니라 유시르에게도 그리해주거라. 한참을 피해 다녔지 않았느냐? 정령도 나름 마음에 푸념 정도는 있단다. 그게 겉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너를 생각하는 마음은 다른 요정들과 다를게 없단다. #

아일렌은 의외로 자신을 질책하는 세이라의 말에 느낀 것이 있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그...... 알겠어요. 조만간 유시르에게도 사과해야겠네요."

# 보기 좋구나. #

아일렌은 정령들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했다. 늘 무미건조하지만 그들은 상냥하고 다정했다. 마음이 있을까 싶은 말투였지만, 다시 한번 그들의 말투 하나하나에서 묻어난 상냥함은 세이라의 말로 인해 사실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마음을 추스린 아일렌은 세이라에게 말했다.

"하나 부탁 좀 할게요."

# 무엇이더냐? #

"일단 지금 제 상황을 뿌리계에 있는 아르셸, 다비다드 형에게 전해줘요. 마물의 등장은 이제 확실하니, 다음 계획을 서둘러야겠어요."

# 그렇구나. 확실히, 인간계에도 마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관측했으니 그들의 지원이 필요하겠구나. #

아일렌은 좀 더 고뇌하다가 그들에게 전달해야 할 사항을 세이라에게 말했다.

"아마 지금 제가 있는 지역에만 마물이 등장한 것은 아닐 거예요. 이곳이 이정도로 난리판이라면 한시가 바쁩니다. 조만간 마물들은 다시 공격해 올 거예요. 저 혼자서는 인간계의 땅을 모두 커버할 수 없습니다. 인간세계 전반적으로 정령사가 필요합니다. 거대 마물까지 나왔다고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아일렌은 잠시 말하기를 머뭇거렸지만 어제의 상황을 떠올렸을 때 바로 알 수 있었다.

# 알겠단다. 네 전달사항과 압실로네(Ahpsilone)의 복수를 했다고 전해주마. #

"......네. 고마워요."

# 그래. 그러면 이것이면 되겠느냐? #

아일렌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고, 세이라는 두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흩어지면서 사라졌다. 아일렌은 다시 새벽녘의 하늘을 천천히 올려다 보았다. 슬슬 새까맣던 하늘이 태양이라도 뜨려는 듯, 서서히 파래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나...... 그나저나 이상하네. 분명히 그 험한 짓을 하고도 몸이 멀쩡히 회복되다니. 게다가......"

문득 아일렌은 한시가 촉박한 상황 속을 뚫고 자신에게 다가온 은발의 소녀의 순간이 떠올랐다.


멈춰버린 시간.

처음 들어본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정령의 목소리.

극심한 내상을 입었는데도 순간적으로 회복된 몸.

갑자기 쓰러져버린 은발의 소녀.


어제의 아일렌에겐 모든 것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턱을 괴고 계속해서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상황에 떠올릴 만한 것은 딱히 없었다. 의심만 할 뿐, '그럴 것이다'라고 단정 짓기도 애매한 구석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머리만 더 아파졌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던 아일렌은 한숨을 짧게 뱉었다.

"후우...... 모르겠다. 일단 아침이 되기 전에 조금만 더 자볼......"
.
.
.
.
"그래서, 당신은 누구에요?"
"......헉!"

순간 아일렌의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아일렌은 뒤를 돌아보았고, 붉은 머리칼을 바람에 휘날리며 다가온 칼리라가 시선에 꽂혔다. 아일렌은 왠지 익숙한 것 같은 착각과 함께 칼리라의 모습을 보고는 또다시 멍해졌다. 그러자 칼리라는 굳어있는 아일렌이 이상해서 그의 시선에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으세요? 왜 나만 보면 이렇게 굳어버린담? 내가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준거에요? 뭐, 머리색은 불꽃같다고들 하지만, 하필 내 얼굴을 보고 굳어버리다니, 숙녀에게 실례가 아닌가요?"
"......아! 죄, 죄송...합니다."

칼리라는 여전히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아일렌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 했다. 겸사겸사해서 그것도 물어볼 겸, 아일렌의 옆자리에 차분히 앉아 같이 새벽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시간의 하늘은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부모님이 둘다 돌아가시고 처음보는 것 같은데......"
"네? 부, 부모님이?"

칼리라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며 두 눈을 잠시 감아 지난 날을 떠올렸다.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에요. 뭐, 지금 그걸 이야기하기엔 우리는 아직 거리가 머니까 적당히 이정도로만 하죠. 좋지도 않은 기억, 또다시 되짚기도 뭐하고......"

칼리라는 괜시리 바람에 휘날리는 자신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았다. 그리고 옆머리를 바람에 맡기며 뒤로 넘긴 채, 아일렌에게 물었다.

"당신, 아일렌이라고 했죠? 당신은 대체 누구에요? 당신이 어제 설명한대로 요정이라는 것은 알겠고, 정령이라는 것을 부리면서 그... 이상한 것들을 잡고... 신기해요. 그런 신비한 힘을 부리는 사람은 이 근방에서는 전혀 본 적이 없어요. 여기에 온 목적이 뭐죠?"

아일렌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 칼리라를 바라보았다.

"저번에는 대충 인간계를 제외한, 우리의 세계를 이야기했었죠?"
"흐음... 고요한 거목이 이스밀디르(Esmildir)라니,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에델바이스(Edelweiss)가 럭스페트라(LuxPetra)라고 불린다니, 대충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닌 세계를 이야기했었죠. 무슨 어디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서 놀랄 틈이 없었죠. 그거 말고는 내가 과연 당신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막상 실제를 눈앞에서 맞이하니까 믿을 수밖에는 없었고...... 대체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네요."

아일렌은 그녀의 이야기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이스밀디르의 세계에서 마물(魔物)이라는 존재가 등장했고 우리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때 정령계에서는 우리 요정족과 또다른 종족인 난쟁이족을 대상으로 정령계약(精靈契約)을 이뤄내 최초 4인의 정령사가 탄생해 마물의 태동을 막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밀디르의 세상에는 '정령사(精靈使)'라는 정령 소환사들이 생겨나 그들을 막고 있었지요."

칼리라에게는 모든 것이 혼돈의 도가니였다. 별별 모르는 용어가 나왔고, 수많은 정보는 귀를 연 채, 뇌를 희롱당하기 딱 좋았다.

".......으으."
"어... 괜찮습니까?"
"......괜... 괜찮아요. 어렵지만 듣다보면 알겠죠. 신경쓰지 마세요."

어제에 이어 또다시 모르는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들어오자 칼리라는 얼굴을 찡그리며 어떻게든 그를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아일렌은 그녀가 안쓰러웠지만 그래도 끝까지 이야기를 들으려하는 그녀의 노력에, 최대한 알기 쉽게 말해보고자 머리를 굴렸다.

"그래서 결국 요점은, 이스밀디르에서만 존재했던 마물의 거취가 인간계까지 뻗어올라온 것을 확인하기 위해 제가 이곳, 아스테랄(Asteral)로 온 것이고 마침 그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 연락하는 중... 이 지금 상황입니다."

칼리라는 아일렌의 마지막 요점 정도는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리 이야기를 듣고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칼리라는 다시 별의 바다가 흐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마치 세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신을 대신해서 우리 세상에 강림한 것 같은 사도? 수호자?"
"하하... 꽤나 과찬이네요."
"아뇨. 그렇게 들려요. 하지만 앞이야기를 듣자하니 당신도 만만찮은 세상에서 태어난 피해자같은데, 피차 같은 신세로 보이기도 하고... 동정되네요. 우리 마을을 지킬 때는 그렇게나 강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실상은 지금의 우리와 비슷하거나 더한 상황의 피해자라니...... 사람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아일렌은 칼리라의 이야기에 입이 다물어졌다...가, 그녀의 이어지는 이야기에 입이 다시 열렸다.

"그래서, 나를 보면 굳어버리는 이유가 뭔가요? 그것도 시선이 마주치면 굳어버리던데 왜 그래요? 혹시... 첫눈에 반했다거나?"
"......네?"

그 모습에 칼리라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아일렌을 반겼다. 장난스럽고 은근하게 다가와 살갑게 대하는 그녀의 태도. 아일렌은 점점 그녀를 엘르웬과 더욱 겹치게 보기 시작했다. 동공은 커지고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지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려 하니 고개가 뻣뻣해지고 코 끝은 찡해져 미간이 살짝 찌그러졌다.

"호오? 반응있는거 봐? 진짜에요?"

아일렌은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그녀를 마주보았다.

"...다. 닮았을 뿐입니다!"
"......엑?"

아일렌은 애써 그녀와 엘르웬과의 이미지에 선을 그었다. 그래. 그저 닮았을 뿐이다. 그저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성격과 외모가 닮았을 뿐이다. 그렇게 선을 그으려 애쓰는 아일렌이었다. 문제는 자신을 동생으로 보던 엘르웬의 시선과 비슷한 나이대의 칼리라의 시선 차이는 신선한 경험이었고. 익숙지 않다는 것이 더욱 아일렌을 조여오는 상황이었다.

아일렌의 이야기에 칼리라는 살짝 뾰루퉁해졌다.

"그래요? 닮기만 한거면 뭐. 그럼 그 사람은 어디있어요? 그, 이스밀... 윽. 그러니까 밑에 있는 거에요? 반응을 보니까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일렌은 착잡했다. 직접 입으로 이야기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차마 그녀가 그랬다는 이야기를 해야하는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아일렌은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음... 그녀는 저보다 나이 많은 누나에요."
"오호라. 연상타입?"
"시간만 잘 버텨준다면 혼인까지 염두에 둔 사이였죠."
"와...... 제법 낭만 있으시네. 그걸 또 기다려주는 언니였으려나?"

"그리고......"

아일렌은 잠시 뜸을 들였다.



"9년 전에 죽었습니다."
"......?"








거대한 정적이 흘렀다.

"어... 어어...... 어...!"
"......"

칼리라는 그 순간 아일렌을 쳐다보지 못했다. 한껏 찌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감추려 한손은 입을 틀어막고 다른 한손은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칼리라는 그를 마주할 자신이 갑자기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당하고 명랑하며 쾌활한 칼리라는 어느덧 조용한 요조숙녀라도 된 듯, 무거운 침묵을 이었다. 바람결을 따라 불타는 듯한 그녀의 머리칼도 진화(鎭火)라도 된 듯 사그러들어 잠잠해졌다.

아일렌은 괜한 이야기를 한것 같아 칼리라와 마찬가지로 숙연해졌다. 그러고는 칼리라를 위로하며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이미 9년이나 지났고, 복수는 어제 막 끝냈고...... 이제 그녀를 보내줘야죠. 언제고 가슴속에 떠안고 살 생각은 없습니다. 당신은 그냥 지나가던 사람, 타인일 뿐입니다. 죄책감 가질 필요없어요. 그렇게 물어볼 심산은 아니었잖습니까? 잊으세요. 저는 이렇게 다 털어버렸습니다."
"......복수라니."

칼리라는 문득 마음에 걸린 단어 하나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숙연했던 칼리라의 시선은 돌연 아일렌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그때 이야기했던 '이날을 기다렸다'는 것은......?"
"어제 수많은 마물들 중에 나타났던, 그 거대한 놈이 원수였습니다. 포효소리, 생김새, 눈빛. 9년이나 지났지만 뇌리에 박힌 그 모습과 놀랄정도로 흡사한 녀석. 게다가 미약하게나마 보았던, 그놈의 특징인 왼쪽 눈두덩이의 비정상적인 혹. 확실합니다. 그놈이 누나를 죽인 장본인입니다."
"우으으으......"

칼리라는 아일렌의 말을 듣고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미안함과 안도감. 그럼에도 자신의 입이 가벼웠다고 생각했는지 쉽사리 감정이 정돈되지 않았다. 그때 칼리라의 뒤에서 따스한 손길이 다가왔다.

"미, 미안해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헉!"

밤하늘의 달빛을 머금고 빛나는 은색 머리칼.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어린 소녀였다. 아일렌은 그녀의 등장에 입을 제대로 닫지 못한 칼리라를 뒤로 한 채 소녀에게 물었다.

"어? 잠에서 깬거니?"

아일렌이 묻자 은발의 소녀는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하며 말했다.

"응. 둘 다 없길래 일어났어. 난 옆에 누가 없으면 잠 못 자."
"그, 그렇구나. 그동안 혼자 지냈을 때는 어떻게 잔거지? 신기하네."
"히힛. 그렇지?"

자랑이라는 듯, 시선을 하늘로 콧대를 세우는 소녀의 시선에는 아직 고개를 숙이기 직전의 달을 보았다. 소녀의 눈빛은 별이 내는 빛처럼 반짝였다.

"와... 아직 달님이 있네. 모우라(Moura)! 모우라!"

아일렌은 소녀의 이야기에 지레 기겁했다. 모우라는 겁급 정령 중에 달이라는 개념을 영체화(靈體化)한 정령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모르니 더더욱 소녀의 정체에 의문을 품는 아일렌이었다.

"넌 대체 모르는게 뭐야? 이름은 뭐고? 하늘에서 떨어졌다기도 하고. 온통 모순 투성이인데 어떻게 요정의 모습을 하고 있는거지?"

소녀는 아일렌의 말에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살짝 물고는 생각을 하듯 눈을 굴렸다.

"음... 그냥 내 기억에 달을 모우라라고 하는 것 같아서! 게다가 머릿속에서 그런 단어가 떠올랐어! 왠지 불러야할 것 같아서! 그런데! 내 이름은 몰라!"
"이상해. 뭐 이리 수수께끼 투성이가 다 있지? 게다가 자신의 정체성도 없다니. 보통 수상쩍기도 아니고 하...... 어? 잠깐...... 이름을... 모른다... 라......"

그때 불현듯, 아일렌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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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룰 엘로니아와 아일렌의 첫 만남.

15년 전, 어느 겨울.

아이룰 엘로니아는 길을 걷다 거적대기를 입고 바닥에 쓰러진 소년을 발견했다. 당시 나이 12살의 엘르웬의 손을 잡고 길을 걷던 엘로니아는 서둘러 소년에게 달려갔다. 소년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소년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따뜻하게 보살펴 주는 것과 이름을 지어주는 것 뿐이었다.

"자. 이제 네 이름은 아일렌이다. 정령 고어로는 '모든 것'이라는 뜻이지. 장래에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거란다. 그리고 성을 지어줘야 하는데...... 엘로니아의 이름을 이어주게 해주고 싶지만, 그것보단 의미있게 새로 짓는 게 낫겠지. 게다가 이 지역의 이름도 마침 비슷하니 괜찮겠지."

"내... 이름......?"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에게 발견되어 거둬졌으니 너는 내 아들과도 다름 없단다. 그런 의미에서 네 이름은 아일렌. 그리고 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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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렌은 과거 스승의 행동이 떠올랐고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풋 하고 소리가 새어나왔고, 미소지었다. 마치 자신의 행동이 스승과 비슷해서 자신도 이럴거라곤 생각치도 못한 터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일렌은 은발의 소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쓰다듬었다. 소녀는 기분이 좋았다.

"히히. 좋아. 기분 좋아."

아일렌은 그렇게 쓰다듬은 뒤, 손을 거두고 턱을 괴면서까지 스승을 흉내내며 이름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은발... 은발이라... 다시보니 눈동자도 은색이네? 완전 은의 소녀...... 은(銀)이라......"

문득 떠오른 한 가지 단어가 아일렌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그 한 가지 단어가 왠지 모를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베르드(Berd)."

아일렌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단어가 은발 소녀의 천진난만한 움직임을 이상하게도 멎게 만들었다. 소녀의 귀는 쫑긋, 눈은 동그랗고 크게 떠졌다.

"베...르드?"

아일렌이 말했다.

"그래. 정령들이 사용하는 옛 언어라고 해서 정령 고어(古語)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은(silver/銀)을 베르드라고 해."

아일렌은 그리 설명하곤 굳어있는 소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자신의 스승과 똑같이 자비로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베르드야."

베르드는 눈망울이 반짝이면서 활짝 웃음꽃이 만개했다.

"와! 와! 이름! 내 이름! 베르드!!"

베르드는 기쁜 나머지, 칼리라에게 다가가 자신의 이름을 외쳤다.

"베르드! 베르드!"
"아... 하하. 축하해, 베르드 양."
"내! 이름!"

칼리라는 갑작스러운 베르드의 애교에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었지만,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다. 베르드는 한참을 빙글빙글 돌면서 좋아하다가 집으로 냉큼 들어가 어수선했던 자취를 감추었다.

그제서야 조용해진 두 사람의 주변 분위기에, 어느덧 서로를 바라보고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슬슬 태양이 비치는 푸른 아침 하늘빛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었다.

그렇게 둘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칼리라였다.

"이런 면도 있었네요?"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요?"
"나는 그렇게 친절하지 못하거든요."
".....그럴리가."
"음... 그러면 그런가봐요."
"무슨 대화가 이래요?"
"의미 없이 오가는 대화는 싫어하지 않아요."
"......하하!"
"후후......!"


그리고 둘은 다시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아일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잠시 여기에 있어도 될까요?"

칼리라는 왠지 모르게 아쉬웠다.

"잠시라는 이야기는, 가까운 미래에는 가야 한다는 이야기에요?"

아일렌도 자신도 모르게 아쉬운 눈치였다.

"지금 인간계의 상황을 세이라를 통해 이야기했다고 해도 언제 지상으로 동료들이 올라올지는 모르는 겁니다. 게다가 여기의 문제는 당장 해결했다고 해도 다른 어느 곳에서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고...... 한시가 급합니다."

칼리라는 아쉬웠다.

"......그런가요."

아일렌은 그녀의 아쉬움 가득한 한마디가 마음속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저려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곳의 안전을 제대로 확보하고 떠날 생각입니다. 적어도 제가 없어도 마물의 위험에서 안전해야 하니까."
"......그렇군요."

말은 쉽지, 아일렌은 왠지 이 마을이, 그녀가 있는 이곳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엘르웬을 아직 잊지 못한 미련이 이상하게 칼리라를 향했다. 얼마 보지 못한 생판 남일 텐데, 왜그리 마음을 두게 된 것인지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칼리라는 그녀가 아니다.

그것이 머릿속에 남고, 마음속에 맺혔다.

"이만 가보시죠. 저는 더 쉬어야겠습니다. 아직 피로하기도 하고. 그... 베르드는 당분간 제가 맡겠습니다."

그의 말에 갑자기 의심에 찬 눈빛으로 칼리라는 아일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눈빛과 마주한 아일렌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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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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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해가 중천이었고, 마을은 어제의 소동에 어수선함이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아일렌은 난처했고 베르드는 그저 상황을 모르는 천진난만, 그 자체였다. 칼리라는 일단 마을사람들에게 잘 설명해보려 하지만, 아일렌과 베르드에게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은 칼리라, 그녀 혼자였기에 어제의 소동을 겪고도 의심은 끊길 줄 몰랐다.

마을에서 내놓은 주제는 아일렌의 정체, 베르드의 정체, 어제의 소동, 그리고 알 수 없는 괴물의 정체와 앞으로의 방향성과 같은 것이 주제가 되었다.

인간계는 정복전쟁이 한창이었다. 이 마을의 상황은 전쟁의 최전방에서도 그나마 후방에 있는 마을이었지만 그래도 영향권에 포함된 상황이라 상당히 위태로운 것임에는 분명했다.

마을 촌장의 모습과 더불어 몰골이 다들 말이 아니었다. 이는 칼리라도 마찬가지였다. 어제는 너무나 정신없이 일들이 쏜살같이 지나간 감이 있어 눈치채지 못했지만, 얼굴에 묻은 흙먼지와 찢어진 옷가지로 보았을 때, 마물 등장 이전의 상황이 격렬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과 더불어 마물의 등장까지 겹쳐 긴장의 고도는 그야말로 최고조였다. 그런 상황에서 아일렌은 구원의 존재일지, 아니면 재앙을 몰고 올 존재로 점찍힐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도저도 못하는 아일렌과 베르드를 변호해주는 것은 칼리라 혼자였다. 매우 분주함이 칼리라의 표정에 그대로 묻어나와서 아일렌과 그 천진난만했던 베르드마저 표정이 굳어버릴 정도였다. 그때, 구원이라도 되는 듯 말이 마을 밖에서 달려오는 말들 소리와 수많은 발자국 소리가 마을의 어수선함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칠흑색 깃발이 보였다.

칼리라가 소리쳤다.

"볼프로드(Bolfroad) 왕자님!?"

칼리라가 부른 한 명의 인물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쳐있는 병사들과 말을 타고 마을로 다가오는 칠흑 장발의 기사. 그는 칼리라를 발견하고는 무리에서 나와 말을 타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는 한 명의 기사도 역시 따라와 곁을 보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볼프로드가 칼리라에게 다가와 말에서 내려 물었다.

"칼리라? 당신, 여기있었소? 여기가 그대의 고향이었소?"
"네. 그런데 왕자께서는 어찌 전쟁 중에 최전방에서 이쪽까지 빠졌습니까? 혹여, '그들'에게 당하고 여기까지 빠지신건...?"

칠흑의 기사는 잠시 난처한 제스쳐와 함께 칼리라의 물음에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아. 그럴 뻔... 했었지. 게다가 기세를 다듬고 달려들어 다 이긴 상황까지 갔는데 말이오. 그런데......"

그때 그의 시선에 꽂힌 것은, 사방에 둘러싸여 죄인이라도 된 듯한 모습의 둘이었다. 아일렌은 머뭇거렸고 베르드는 그의 모습에 눈을 반짝였다. 볼프로드는 칼리라에게 물었다.

"지금 이 상황은 무슨 상황이오? 남자 한 명과 은발 여아 한 명? 이 난리통에 저들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소?"
"아... 안그래도 그들의 무고함을 사람들에게 설명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시잖습니까? 지금은 한창 정복전쟁 중인데 주변에 갑자기 말도 안되는 일들이 겹겹이 쌓이다보면 터지는 오해같은 것 말이죠. 그게 마침 맞물려버린 상황인지라......"

칼리라의 이야기에 볼프로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말도 안되는 일? 마침 우리도 전장에서 말도 안되는 일을 겪긴 했지만. 여기도 뭔가 일이 있었나보군?"
"그쪽... 에서도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일단 우리가 왔으니 다들 자리를 무르고, 우리도 이곳에서 잠시 쉴 겸 이야기나 나눕시다, 칼리라. 무언가 일이 있던 것은 비단 우리만은 아닌 것 같으니."

그때 칼리라는 아일렌을 바라보았고, 아일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볼프로드 왕자의 지시와 병사들의 정리를 따라 자리를 물러 각자의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 회관의 응접실.

차가워 보이는 회색빛 돌바닥과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촛불의 아지랑이를 따라 왠지 모를 긴장감이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의 주변에 가득 흘러나왔다. 베르드도 왠지 모르게 긴장했는지 입을 닫고 조용히 아일렌의 뒤에서 그의 옷자락을 잡고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아일렌은 의외로 조용히 있는 베르드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칼리라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차를 우리고 잔에 따라 왕자와 자리잡은 인물들에게 나눠주고는 자신도 자리를 잡았다.

볼프로드는 잔에 담긴 차 향을 맡고 음미한 뒤, 입을 열었다.

"그래.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둘은 이방인이고, 심지어 인간이 아니다?"

칼리라가 긍정했다.

"네. 그는 갑자기 인간이 아닌 존재들로부터 우리 마을을 지켜준 은인입니다."
"은인인데도 어째 마을 사람들은 박정해보이던데, 대충 짐작이 가는군. 안그래도 전쟁 때문에 어수선한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방인이 왔다. 게다가 갑자기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와서 마을을 습격했는데, 이 둘이 그 원인이 아닐까 라는 의심을 사는 몇몇의 의견이 나와서 칼리라가 중재 중이었다......라고 보는게 일단 정석인거 같은데, 맞소?"
"네. 여전하시군요. 전하의 추리는."
"너무 치켜세우지 마시오. 보통이라오."

왕자는 으쓱해했고 칼리라는 왠지모르게 질색하는 표정을 보였다. 아주 미세하게 말이다. 볼프로드 왕자는 이방인 둘을 쳐다보았고 아이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으니 자연스럽게 아일렌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일렌은 긴장에 절었는지 식은 땀이 아닌 땀을 살살 흘리고 있었다. 왕자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아일렌의 모습을 보고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는 그의 긴장을 풀어주려 다정히 입을 열었다.

"그리 긴장 안하셔도 됩니다. 나는 이런 분위기 별로 안좋아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더이다. 긴장감없는 풋내기 왕자라고. 하지만 나는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싫지는 않소. 게다가 긴장감은 정말 중요한 자리가 아니면 필요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일단 당신은 우리 세계의 이방인이니 우리 쪽과의 정보를 교환코자 하는데 괜찮겠소?"

칼리라는 아일렌을 바라보았고, 아일렌은 고개를 끄덕여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그리고 한발 앞으로 나와 왕자와의 첫 마디를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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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하, 뿌리계의 요정. 아일렌이라고 합니다."








(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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