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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소설 (Novel)] (자작소설) 마이라(Myra) - (7) (0) 2026/03/05 AM 12:49

안녕하세요.


열심히 쓰고 있답니다.


시간내서 엔딩도 생각해두었고, 방향성도 다시 잡아봤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진하겠습니다.








(7)



깊은 심연.

알 수 없는 깊은 암흑.

언제의 일인지 모를 시간대. 적어도 이 기억은 현재와는 동떨어진 먼 과거의 기억. 기억 속에 어느 여자는 잠을 청한 채, 누워 쉬고 있었다.

여자의 두 눈은 먼 지 오래. 그래서 시각을 포기한 채 청각과 후각에 의지하지만 그렇게 상황이 좋지는 않다. 시각이 멀면 가장 먼저 발달하는 것은 청각과 후각. 그녀가 있는 장소는 깔끔하도록 조용하여 청각이 도리어 예민해졌고, 후각은 마치 이상이 있는 것처럼 그럴듯한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하지만 여기서 생각을 바꿔보자.

반대로 이곳은 냄새가 나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다거나, 외관은 그리 좋지 않지만 특이하게 냄새가 안나는 것 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애초에 이 곳은 어디일까?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 의지할 것은 있는지 없는지 조차 모르겠다.

여자는 잠에서 깨어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목소리를 낸다. 목소리는 이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쉬어버린 목소리였다. 아마도 공기가 좋지 못한 곳에서 오랫동안 있었던 탓에 자연스럽게 변해버린 듯하다.

"퀠로(Qelo)? 어딨니?"

무언가의 이름. 퀠로라는 이름을 듣고 투박한 걸음걸이로 무언가가 그녀에게 다가온다. 이 정체모를 그림자가 퀠로라고 하는 것인가? 퀠로는 자신을 부른 여성의 손을 붙잡고 살살 흔든다. 그제서야 여성은 안도했다.

"그래. 여기있었구나. 이제 여기가 어딘지 이야기 해줄 수 있니?"

퀠로는 여성의 말을 헷갈려하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어리둥절했다. 마치 그의 말을 몇 부분은 알아맞추었지만 세세한 부분은 이해하지 못해 그런 행동으로 보였다. 하지만 마치 글이라도 배운 듯, 여성의 손에 글씨를 쓰는 듯 했다. 여자는 얼굴이 찡그려졌다.

"내가 그동안 언어를 가르쳐줘도 아직 제대로 못쓰는 구나. 그래도 이정도면 장족의 발전이지. 그래. 어디...... 중요한...... 브... 방?"

퀠로는 싱글벙글해지며 여자의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가르친 긍정의 뜻이었다. 두 눈이 멀쩡하다면 긍정하는 모습을 직접 봤겠지만 실명한 이상, 이렇게라도 알려줘서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런 곳에 왜 나를 데려온거니? 게다가 혼자 남겨놓고 가버리기를 여러번하고, 이제 자는 것도 지쳤단다."

퀠로는 손을 흔들었다. 긍정의 표시였다. 그리고 여자의 손바닥에 다시 글씨를 썼다. 투박하지만 노력하는 눈빛과 손짓이 퀠로의 성실함과 의지가 느껴졌다. 촉각만으로 퀠로의 의지를 느끼던 여자는 흐뭇했는지 미소를 보였다.

"같이... 왔다...? 내 이야길 하는 것 같진... 않고... 그럼 혹시, 너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다른 아이를 데려왔다는 거니?"
"......응!"
"오!"

여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퀠로가 입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짧은 답변이었지만  닫혀있던 목구멍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은 퀠로 말고도 여럿이 존재했지만 다들 학습능력이 부족했다. 퀠로는 그야말로 돌연변이 중의 돌연변이였다. 행동에 파괴와 폭력만이 난무하는 특징적인 모습만 존재했던 그들 중에도 생각이 있는 존재가 있던 것이었다. 그것이 첫번째 발견인 퀠로였으며 드디어 말을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다음이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운 여자였다.

"드디어...... 목소리를 내는 구나...! 장하구나. 앞으로 자신의 이름도 말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오길 바라지만, 지금 발전 속도라면 조만간이겠구나. 그런데 데려온 친구들은 어딨니?"






그러자 주변의 공간이 메워질 정도로 웅성웅성 거림이 시작되었다. 너무나 많았다. 그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고,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과는 행동방식이 전혀 다른 개체들이 발견되었고, 퀠로를 기준으로 수많이 모여든 것임을, 여자는 알 수 있었다.

"오오...! 이리도 많다니. 다들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미안하구나. 나는 지금 보이지가 않아서 하나하나 헤아릴 수가 없구나. 게다가 나는 이제 힘도 없어."

여자는 이들의 영역에 접어든 뒤로 자신의 능력을 무엇하나 사용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종의 이유로 힘이 외부와 완전하게 단절되었다고 봐야 맞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가장 유력한 이유는, 힘의 자격을 잃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아쉬웠다. 그러자 퀠로가 그녀의 곁에서 주춤거리며 무언가 하기 시작했다.

"뭐하니? 지금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 탄다라... 설마......"

퀠로는 가지고 온 나무를 있는 힘껏 마찰을 가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오... 부, 불을 다룰 줄 알게되었다니... 굉장해. 굉장하구나, 퀠로...!"
"기히히히...!"

여자는 대견스러운 퀠로를 쓰다듬었고, 퀠로는 그런 따스한 손길을 기쁘게 맞이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퀠로의 무리들은 둘을 사이에 두고 우우우! 기쁨이 느껴지는 듯한 포효를 내질렀다. 그들이 있는 공간은 단순히 새까맣고 공허한 장소가 아니라, 불이 있고,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둔 하나의 장소가 되었다.

여자는 더이상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환희에 찼고, 그들을 잘 가르치고, 사람답게 살게 하고 싶었다. 퀠로의 환한 웃음에 모두가 기쁘고, 깜깜한 어둠에도 불이 밝혔으니, 이것이 그들의 미래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러니까... 그들은 마물이라고 부르며, 회생가치가 없는 무뇌 수준의 돌격만을 고집하는 병사들... 이라고 보면 됩니까?"

볼프로드의 의미심장한 추궁과 결과에 아일렌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예. 적어도 제가 살아온 경험으론, 그들은 오직 파괴와 살육의 본능에 사로잡힌 족속들...... 입니다."

볼프로드는 아일렌의 이야기를 곰곰이 듣고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친 기운. 거친 눈동자. 하지만 그 눈빛에 거짓은 없었다. 아일렌이 이방인이라는 것과 인간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말도 안되는 정령이라는 힘. 모든 것이 수수께끼라서 이 사람을 믿어야 하는지 감이 오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마물에게 몰살당할 뻔한 마을을 지켜준 은인이라는 것.

"......그래도 의심은 붙잡지 않으면 안되겠지."
"와, 왕자님......"

고민에 빠진 볼프로드의 표정을 바라본 칼리라가 걱정스럽게 입을 열자, 볼프로드는 손을 흔들며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뭐, 그래도 당신은 마을의 은인이오. 그건 부정 못하는 사실이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은인을 버린다는 것은 나로선 있을 수 없군. 그래, 이건 인간으로서의 인정이자 의리이오. 안 그래도 나는 당신의 이야기로 어느정도 확신을 갖게 된 것이 있으니, 우리는 좋은 파트너가 될 것 같군."
"왕자님...!"
"걱정마시오. 우리 관계는 이 정도면 동맹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판단되니, 은인에게 과격하게 가진 않겠소. 게다가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으니... 사실, 지금 이야기가 우리가 회진한 이유와 얼추 통하는 것이 있기도 하고..."

아일렌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이유... 라면?"

볼프로드는 영 좋지 않은 광경을 본 듯,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전쟁통에 당신이 이야기한, 땅에서 갑자기 출몰한 무리들이 있었소. 피부는 시체같고, 사람같지만 기괴한 얼굴, 체형에, 그 거대한 거인. 그들은 당신 말대로 였소. 당신이 우리에게 표현해 보인 마물처럼."

아일렌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그래서 어땠습니까?"
"일단 그들의 피부는 남달랐소. 매우 단단했지. 덕분에 초기 진압 담당조는 둘을 제외하고 전멸......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로는 날이 서기만 해선 안되니 무기에 톱날같이 이를 떼어냈다고 하오. 그리고 그제서야 베어진다고 하더군. 피부가 질기고 단단해서 웬만한 일반적인 무기는 통하지도 않더군."

칼리라의 입이 저절로 열렸다.

"그, 그렇다는 것은..."
"그래서 임기응변으로 무기를 어느정도 개량은 했소. 개량도 나름 성공을 해서 일반적인 마물들을 잡는데는 용이해 졌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물량전이 되었고, 이쪽도 피해가 극심했으니 문제가 점점 커졌소. 하필 정복전쟁중에 그런 놈들을 마주하니 우리와 전쟁하던 상대 진영은 철천지 원수였지만 결국 하나의 적을 맞서게 되더군. 문제는 토벌이 어느정도 가능한 상황이 되기 시작하자, 그놈이 나타났소."

아일렌은 신경이 곤두섰다. 뿌리계에서도 상당히 애먹은 거대한 개체. 그들은 세계에 잘 없는 격급(激級) 정령사에게는 손가락 튕기는 것처럼 간단했지만, 그 힘을 쓰는 대가는 막대하여 최후의,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될 수준이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여러 개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생기게 되는 날은, 다들 죽기 바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었다.

"그... 렇군요. 서둘러 이쪽에도 뿌리계의 원군을 불러야겠습니다."

아일렌의 의도를 슬슬 엿보던 볼프로드는 그에게 마물에 대한 확실한 적의가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고 손을 들어 그를 물렀다.

"아직은 괜찮을 것 같소. 일단은 전사들이 마물들과의 전투로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쌓였고, 왕의 명령으로 정복전쟁은 사실상 종전을 선언했고... 게다가 우리가 집중해야 할 적이 한 가지로 명확해진 이상, 무기와 방어수단을 연구 개발하고 개량해야 하오. 또다시 그 큰 녀석이 나타나기 전에 우리도 개발에 착수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오."

칼리라가 갑작스러운 종전 소식에 놀라 그에게 물었다.

"종전이요?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그렇소, 칼리라. 아마 이 마을을 지났을 텐데... 최전방으로 가는 글로리오스의 부대를 보지 못했소?"
"봐, 봤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 몰랐기에, 분명히 전장으로 갔을거라 생각했습니다만."
"그렇군. 그대가 모르는 것도 이해는 가오. 어쩔 수 없이 은퇴했으니까 군의 정보를 알리가 없었겠지."

아일렌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퇴?'

볼프로드는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글로리오스는 종전 선언의 메신저였소. 사태를 파악한 에레모스(Eremos), 갈론드(Galond), 두 수뇌부와 왕은 회의를 통해 영토를 '일단' 합리적으로 나누고 힘을 합치기로. 게다가 이 사태가 비단, 짧은 문제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소. 이제는 더 이상 정복전쟁 전장 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으니까."

아일렌은 그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아 덧붙였다.

"역시... 전 세계에 나타난 것입니까?"

볼프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만 그럴 것이 아니오. 에레모스(Eremos), 갈론드(Galond)를 통틀어 크고 작은 나라들의 영토에도 등장했다고 하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소. 한시가 급한, 전 인류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오. 인류끼리 영토 분쟁일 시간이 없다는 것이 수뇌부의 판단이오. 그래서 모든 부대는 지금 최전선에서 빠져 본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소."
"그, 그랬군요......"

볼프로드는 혀를 차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보좌하던 수행원도 따라 나섰고, 칼리라와 아일렌, 베르드까지 놀라서 일어났다.

"일단 이야기는 여기까지. 나는 당분간 이곳에 머물 생각이오. 무언가 의견이 있으면 내 방으로 오시오. 문은 열어두겠소. 그리고 칼리라. 시간이 된다면 나중에 봅시다. 그대의 은퇴이야기 말인데, 아직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되지 않소. 그러니 허심탄회하게 정리 좀 합시다."
"와, 왕자님. 제가 어찌......"

볼프로드는 그녀의 어깨에 천천히 손을 올렸다.

"아직 그대의 은퇴는 이르오. 사직서는 받아뒀지만 당신의 저력이 아깝기도 하고. 지금 나이가 얼마인데. 그대의 이유는 잘 알겠지만, 양친이 그대의 발목을 붙잡아선 안되오. 이런 곳에 그대의 재능을 썩히긴 너무 아깝소."
"그, 그렇지만......"

아일렌이 잠시 흥미가 있었는지 귀를 기울였다.

'양친? 발목? 아깝다고?'

볼프로드는 아일렌이 칼리라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낌새를 느꼈고, 서둘러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고 느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긴밀히 하도록 합시다. 그럼."
"와, 왕자님!"

볼프로드와 수행원은 자리를 나섰고, 밖으로 나간 왕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일렌에 대한 처분에 대해 공표했다. 아일렌은 마을의 은인이자, 앞으로의 사태에 중심인물이 될지도 모르니 왕국에서 특별 지시령을 내려 앞으로 지상계에 나타날 뿌리계의 인물에 대한 경계심을 풀 것을 당부했다.

아일렌은 한숨 쉬면서 의자에 앉자, 옆에 있던 베르드도 그제서야 웃으면서 따라 앉았다.

"정말 굉장한 사람이군요. 왕자라면 왕국의 적장자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최전방에서 직접 전투를 하는 것도 모자라 주변 정세를 둘러볼 줄 아는 정치가라니요. 보통 내기가 아니군요."

칼리라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볼프로드 제 1 왕자님은 제 인생의 롤모델이에요. 그래서 저는 검을 들고 기사단이 되었죠. 그를 따르려구요. 그런데 저는 지금 은퇴했어요. 어쩔 수 없었죠. 제 집안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뒷처리를 해야했어요."

쓸쓸한 칼리라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베르드가 이걸 보고 얼른 다가가 칼리라를 안았다. 칼리라는 잠시 우울했지만 베르드의 부드러운 품에 그만 얼굴을 파묻었다.

"우으아~!"
"후후. 너도 좋니?"
"응!"

칼리라는 베르드가 가져다 준 보드라운 포옹을 만끽하면서 즐겼다. 베르드는 간지러운 듯 밀어내기를 시도했지만 상대는 전직 왕국 기사였다. 어린 아이 장난에 밀려날 힘이 아니었다. 그렇게 둘이 서로 노는 사이 아일렌은 미소지으며 칼리라의 정신건강과 베르드와의 상관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음... 누나를 보는 기분이야. 나도 저랬나?'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고 분위기가 차분해지자 칼리라는 아일렌을 보고 마주 앉아서 나머지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한 손에는 차를 홀짝 마신 뒤 컵을 테이블에 올렸고, 다른 한 손은 턱을 괴었다.

"왕자님의 이야기에 대충 예상했겠지만, 제 양친께서 얼마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곧바로 발 벗고 달려와보니 정말 도적들의 습격이 있었죠. 놈들의 본거가 멀지 않았어요. 가끔 위험할 것 같으니 왕자님께 근방을 부탁드렸을 정도로 신경쓰고 있었는데 잠시 한 눈 파는 사이 일이 벌어졌죠."
"아... 갑자기는... 대처하기 어려웠겠네요."
"네. 안 그래도 전쟁으로 정신도 없는데 마침 근위대가 없는 틈을 타 일어난 습격이었어요. 망할 놈들. 씹어죽여도 시원찮을 판이었죠. 그래서 은퇴했어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저는 부모님께 받은 은혜가 워낙 두터웠어요. 고아였던 저를 거둬주신 양부모님 이셨거든요."

아일렌은 그녀의 집안의 이야기에 조금 놀랐다.

'그녀도 거둬진 건가...... 나만 그런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세상은 어수선하구나. 그래도 부모를 잘 만난 것은 다행이야. 나와 스승님처럼......'

아일렌이 컵의 차를 호록 마시니 칼리라도 왠지 따라 맞춰서 차를 마셨다. 그리고 옆에 앉은 베르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양친께서는 작은 방직 가게를 하면서 제가 기사가 될 수 있게 힘을 쏟아주셨어요. 그래서 결국 전 에레모스 왕국 말단 병사가 되었고, 전쟁에서 여러 공을 세워 왕자님의 가신으로 최속으로 다가갔어요. 최연소랬던가? 그리고나서 전쟁 중에 습격이 일어났고, 부모님의 장례를 치룬 뒤 가게로 돌아왔어요. 해서, 가게를 그대로 두기 뭐하고, 은퇴한 김에 제가 이어받는게 나을 것 같았지요. 저도 나름 기술은 어릴 때부터 배웠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칼리라는 자신이 입은 옷을 촤악 펼치며 자랑하듯 뽐냈다.

"이게 그 결과물이에요. 어때요? 지금 다시보니 괜찮지 않나요?"

아일렌은 커다랗게 상처입었을 그녀의 커다란 담력에 경이로움을 넘어 감탄하고 있었다. 자신이 누나를 잃었을 때는 정말 절망이 따로 없었는데, 그에 반해 칼리라는 강철 멘탈인지, 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활기차고 단단해 보였다.

'굉장하군. 나는 다시 힘을 얻는데 3년이나 걸렸는데 이 아가씨는 뭔가 달라...... 누나도... 이랬던가......?'

그때 때마침 베르드가 칼리라에게 물었다.

"그럼 언니. 그 도적단은 어디있어?"
"응? 아, 그걸 이야기 안 했구나. 이제 없어."

아일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왕국에서 움직여 줬군요? 역시 기사였던 칼리라씨의 상황을 알아주고---"






칼리라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렇지 않게, 표정의 변화도 없이 이야기했다.

"아뇨? 제가 몰살시켰어요."
.
.
.
.
.
.
.
.
.
"......예?"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똑똑똑.

"아, 들어오시오."

끼이익.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선 것은 아일렌이었다. 적갈색 더벅 장발을 수줍게 보이며 들어간 방은 왕자, 볼프로드의 방이었다. 볼프로드는 칠흑의 갑옷을 벗은 상태였고 평상복으로 글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커피의 연기가 천장에 스며들 때, 코 끝으로 그 향을 맡던 볼프로드의 표정이 제법 볼만했다. 아일렌은 그의 여유로운 표정에 더욱 긴장이 된 나머지 입꼬리가 턱으로 떨어졌다.

"하하! 재밌는 걸 본 것 같은 표정이군."
"아... 하하... 그게... 너무 거침이 없으셔서."
"그래서 이야기했잖소? 나는 그다지 딱딱한 분위기는 별로라고. 자, 앉아서 일단 이야기나 해봅시다. 물론 정보교환이 우선이오."

아일렌은 워낙에 중대한 자리라 긴장에 긴장이 덧씌워져 눈 둘 곳을 찾아다녔고, 볼프로드가 웃으며 친히 그를 의자에 앉혀 어깨를 두드렸다.

"긴장하면 할 말이 나오지 않소. 그렇군. 긴장이나 풀겸 술, 어떻소? 아, 그러고보니 뿌리계였나? 그곳에서도 술을 마시오?"
"그, 그렇죠. 저는 이제 갓 스물이라 술을 많이 접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볼프로드는 턱에 자박자박 난 수염을 손으로 슥슥 문대며 무언가 생각하다가 옆에 놓인 적색 음료가 든 병을 가져와 보였다.

"이게 내 고향인 라티오스(Ratios)의 명물, 적색주(赤色酒)라고 하오. 원료는 레드로즈 베리. 말 그대로 빨간 술인데, 투명한 와인잔에 이렇게 부으면..."

병에서 적색주가 병목을 타고 그대로 와인잔의 곡선을 따라 떨어졌다. 그러자 서서히 술이 빙글빙글 돌면서 황금빛 반짝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 이, 이건 마치..."
"후후. 신기하지 않소?"

적색주가 차오르면서 마치 비단같이 반짝이며 뽐내듯 찰랑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농도가 풍부해서 그런지 살짝 점성이 있는 모습에 찰랑거려도 그 아름다운 자태가 마치 벌들을 유혹하는 장미와도 같았다.

볼프로드는 나머지 한 잔을 채우고 아일렌에게 건내 향을 맡아보라 권했다. 아일렌은 와인잔에 가득찬 적색주의 향을 맡았다. 그것은 마치 달콤하면서도 상큼함을 잃지 않은 레드로즈 베리의 과즙을 농축한 것 같은 황홀감에 사로잡히기 충분했다. 볼프로드는 아일렌의 표정에 만족 가득한 미소를 지었고, 이윽고 두 잔을 마주치게 해 짜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방안 가득히 울려퍼지는 잔의 소리는 황홀함에 짜릿함을 더했다.

아일렌은 여지껏 유희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뿌리계는 워낙에 어수선했고, 술을 권할 만한 분위기조차 아니었기에 이런 호사스러움에 너무 쉽게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이런 상황은 너무나 사치스러웠다. 볼프로드는 적색주를 마시려하던 찰나, 아일렌의 표정을 보았고 잠시 묵묵히 바라 본 뒤에 홀짝 마시고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것 참... 분위기 띄워볼라고 했지만 당신, 그 표정을 보니 내가 잘못을 저지른 느낌이군."
"예, 예? 아, 아니 그게......"

볼프로드는 자신의 손님에게 무례했던 것을 느낀 나머지 사과를 했다.

"미안하오. 명색이 왕자인데 내가 너무 들떴었소. 게다가 당신의 그 표정... 내가 아는 사람과 많이 비슷하군."
"아, 미안합니다. 분위기를 망쳤나보군요."

볼프로드는 아일렌의 사과를 정중히 받지 않았다.

"아니오. 당신이 아까 이야기하지 않았소? 뿌리계는 십 몇년 전부터 난리통이었다고. 당연히 쉴틈이 없을 정도였으니 우리같은 유희를 즐길 여유는 없었겠지요. 게다가 자신만 이렇게 올라와서 이렇게 호사를 누리게 되었으니, 뿌리계가 생각났을 것이오. 어떻소? 내 말이 맞지 않소? 당신의 표정은 딱 그거였소. 미안함과 망설임이 둘다 공존하는, 애매모호한 표정."

아일렌의 표정에서 과거, 자신의 표정을 읽어낸 볼프로드는 씁쓸함이 남아 입꼬리가 살짝 떨렸다. 그러나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자신은 그렇게 극복해냈지만, 아일렌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낀 볼프로드의 쐐기같은 일침이었다.

아일렌은 볼프로드의 이야기에 벙쪘다. 너무나 정확하고 날카로운 추리. 단순히 표정만 보고서 상황을 파악하고 심리를 읽는 것은 보통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경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볼프로드는 겉으로 보기에도 아직은 젊었다. 스승 엘로니아보다도 젊었다. 게다가 스승은 이정도로 냉철하고 분석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열정적인 탐구가였고 볼프로드는 남의 시선을 바라보며 판단하고 분석하는 정치가의 면모가 너무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였다. 이제 막 스물이 된 아일렌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뿌리계로부터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볼프로드는 잔의 적색주를 반 정도를 마시고 큰 한숨을 뿜었다.

"하... 어릴 때부터 진득히 배운게 눈치와 상황 파악이오. 그러지 않았으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라 그렇지요. 게다가 난 전쟁까지 손수 뛰고 있고. 나는 앞장서는 리더쉽과 더불어 현장에서의 내 힘을 명분 삼기 위해서 직접 뛴다오. 그래서 전장에서는 직접 부대를 설립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현장에 그들을 투입하지요. 그리고 원치않은 죽음도 겪고 분노도 느낀다오. 전장은 그런 곳이었지. 당신도 잘 알지 않소? 뿌리계의 마물은 그 숫자와 공격방식이 지상과는 다르게 어마어마했다고 말했지요. 나는 당신의 심연의 깊이를 잘 모르지만, 나는 나의 깊이가 두렵소. 나 자신을 잃어버릴까 두렵소."

그리고 다시 와인잔을 들고 적색주를 비워냈다.

"이래야...... 살 것 같군. 모든 것을 잊어 버리는 시간. 이 시간이야 말로 나만의 잊을 시간......"

볼프로드는 천장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가웰, 리디푸스, 달리아, 알몬트, 베오르도, 살리파. 모두 아끼는 동생들이었는데......"

볼프로드의 푸념은 아일렌도 알 것 같았다. 아일렌 역시 마물들과의 싸움에서 잃은 것은 비단 엘르웬 뿐은 아니었다. 엘르웬은 정령사로서의 계기였고, 아르바, 시노, 티벨, 라이올. 그 밖에 다른 이름 모를 요정들도 아일렌에게는 고통이었고 이유였다. 단지 쉴 시간이 없었다는 것 말고는 잊어낼 기간은 없다시피 했다.

"......"
"......후후. 이러려고 모이자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잠시 기억하니 그립기도 하고, 나름 추모도 된 것 같군요."
"역시, 왕자님은 대단합니다. 칼리라도 그렇구요. 주변사람들이 눈 앞에서 사라지면 쉽게 무너질 만한데, 이토록 단단하다니요. 저는 한 3년은 허송세월을 보낸 것 같습니다만..."

아일렌의 힘없는 이야기를 듣자니 볼프로드는 그의 말에는 의미가 없지 않음을 새겨주고 싶었다.

"하하! 지나간 시간은 그저 지나간 세월이오. 지나간 것이오. 의미가 없든, 있든 중요치 않소. 결국 길든 짧든, 어찌 되었든 간에 그 시간을 보내고 결국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의미이오. 결코 의미없는 시간은 없소. 내가 장담하겠소. 당신도 결국 이룬 것이 있지 않겠소? 시간은 쉽게 배신하지 않는다오."

아일렌은 순간 멈칫했다. 결국 자신은 이뤄야 할 것을 이루긴 했다. 일급(佚級)정령의 증명. 엘르웬의 복수. 시간이 오래걸리긴 했어도 결국 이룬 것은 있었다. 그것을 깨닫는 데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아일렌은 그제서야 얼굴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그렇긴 하군요. 없진 않았어...... 그래... 없진... 않았었어."

아일렌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 해방된 느낌을 진하게 받았고, 그 모습을 본 볼프로드는 비어진 잔에 적색주를 따르고 아일렌을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이 잔은 당신을 위한 것이오. 아, 그리고 이젠 말투도 좀 가볍게 바꾸지요. 그놈의 늙은이들 기세 좀 죽이... 아니, 정치질하려고 배운 말투인데 지금은 그것도 필요없고, 좀 편하게 말하겠소. 아, 물론 우리는 아직 그정도로 친하지는 않으니 선은 지키지요. 나도 나름 나이는 젊은 편인데 털복숭이 아저씨 흉내나 내는 것도 피곤하고. 자!"
"네, 네!"

아일렌도 잔을 고쳐잡았고 볼프로드가 쥔 잔에 부딪혀 맑은 소리를 방안 가득 채웠다. 그리고 적색주를 단숨에 비운 아일렌은 생전 처음 느끼는 향과 맛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붉은 비단같은 아름다운 물결이 와인잔에 찰랑거렸다. 그것을 목으로 넘기니 이어서 터져 나오는 과즙의 풍미와 은근한 고소함, 알코올 특유의 쓴 맛이 아주 살짝 뒤섞인 맛과 장미 향의 자극이 굉장했다. 뿌리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황홀감이 아일렌을 휘감았고 그제서야 어깨에 놓인 짐이 거둬진 느낌이었다.


사치여도 좋다.


아일렌은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해방감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자신을 옥죄이던 순간 순간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아일렌은 누구보다도 활짝 핀 표정을 보였다. 볼프로드는 그런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고는 잔을 천천히 비웠다.

"그나저나, 모든 요정들은 모두 그렇게 장발 더벅입니까? 안 불편합니까?"
"왕자님이야말로 장발 아닙니까?"
"나야 장발은 맞지만서도......"

볼프로드도 흑발의 장발이었다. 전장에서 지냈다곤 해도 아일렌의 머리와는 결이 달랐다. 볼프로드가 꺼낸 주제는 단순히 관리 차원의 질문이었다.

"나는 관리를 합니다. 이렇게 보시면..."
"아... 그, 그거라면......"

볼프로드가 자신의 머리를 슬쩍 손으로 찰랑거리자 윤기가 흘렀다. 아일렌은 그렇구나 싶어서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자리에 일어났다. 그리고 무언가 불러내려는 듯, 물을 떠올렸다.

"Diem dos Rodeus elem. De Neme Yusir."
 다이엠 도스 로데우스 엘렘. 데 네메 유시르.

따로 컵에 담아둔 물이 요동치며 천천히 떠올랐고, 아일렌의 주변으로 실처럼 얇게 꼬아져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겉돌던 물이 하나로 모여 아일렌의 앞에서 작은 사람같은 형상으로 유시르가 나타났다. 볼프로드는 그 진귀한 모습을 보고는 너무나 감탄스러워 입이 절로 벌어졌다.

"오... 이, 이것이 말로만 듣던 정령인가.....!"

볼프로드의 감탄과 함께 유시르는 눈을 떴고, 눈 앞의 아일렌을 마주했다.

# 오! 요정 소년 아닌가? 저번에 아주 잠깐 보긴 했다만 이렇게 마주하니 감회가 다르구나. 혹시 유시르의 힘이 필요한 것이니? #

아일렌은 잠시 주춤했지만 억눌리려는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미, 미안해요, 유시르."

유시르는 미소지으며 물었다.

# 무엇이 말이니? #

"저, 전부요. 유시르를 피해다녀서 미안해요. 당신을 마주하기 힘든 건... 사실이에요. 엘르웬 누나가 그리되고 처음으로 힘을 각성해서 내 앞에 나타난 당신이었는데, 모든 것이 힘들고 지쳐서 그만 당신을 저버렸어요. 게다가 당신은 내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정령의 시선이 너무 강렬하다보니 유시르가 무서웠어요. 발가벗지도 않았는데 알몸이 되어버린 느낌이라 익숙지 않아서... 그래서 그때부터 유시르를 의도적으로 피했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유시르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 없이 아일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일렌의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문득 더벅머리에 지저분한 머릿결이 눈에 띄었다.

# Wato Cleeria. #
와토 클레리아.

유시르는 고어를 읊더니 갑자기 컵 안의 물이 모조리 나와서 아일렌의 머리를 감싸고 헹구듯 요동쳤다. 그리고 슬슬 그 행동이 끝이 났는지 머리를 헹구던 물을 모조리 유시르 자신의 앞으로 가져와 모았다. 각종 더러운 이물질과 머리카락이 뒤섞여 매우 기괴했지만 웃으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 Cleeria. #
클레리아.

순식간에 그 더러운 물은 정화되어 깨끗하게 돌아갔다. 엉겨 붙던 이물질도 순식간에 분해되어 사라졌고 물은 다시 컵으로 돌아갔다. 유시르는 의미심장한 웃음과 함께 아일렌에게 말했다.

# 후후. 지금의 '이건' 원래 하면 안 된단다. 가벼운 금기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물의 권능을 이용해 너에게 자비를 베푼거지. 대신에 아량은 아량이니, 저 물을 마시거라. 내가 직접 정화한 물이니 문제없단다. #

"윽. 유, 유시르!?"

방금 막 눈 앞에서 생생하게 정화되는 것을 본 물이었다. 너무나 맑고 투명한 물이었다. 하지만 한 번 박혔던 이미지는 손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유시르의 이미지가 그랬고, 아일렌의 행동 역시 굳을 명분이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 유시르는 그의 사과를 받았고, 장난 아닌 장난을 그에게 걸고 넘어질 뿐이었다.

# 후후. 안 마실거면 놔두거라. 마침 저기에 화분이 있으니-- #





"아, 아니에요! 마, 마실게요!! 금기를 어기셨으니 책임은 마땅히 저에게 있어요!!"
"호오...?"

# 후후. #

아일렌은 물컵을 집어들었고, 그 안에 맑은 물을 보고는 식은 땀이 흘렀다. 투명하고 맑은 물을 보고도 식은 땀을 흘리는 것은 생각보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때 아일렌은 결국 눈을 꾹 감고 물을 들이켰다.

"푸하!! 마, 마셨어요!"

유시르는 여전히 미소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좋구나. 이제 너는 자유다. 그리고 고작 머리 감으려고 나를 부르다니, 너무하구나. #

"유시르, 여태 말도 안했는데......"

# 후후. 너무 속이 보였나? #

아일렌의 진심이 유시르를 통해 전해져버리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것을 본 볼프로드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유시르에게 말을 걸었다.

"굉장하군. 정령은 사람의 모든 것을 꿰뚫어본다고 하던데, 그런식으로 사람의 속을 꿰면 덮어질 상처도 벌어지겠습니다만?"

유시르의 시선은 아일렌에게서 볼프로드로 이동했다. 천천히 그를 바라보고는 알 수 없는 미소로 다가가며 답했다.




# 인간. 너, 욕심이 과하구나. 요정 소년에게는 별 문제는 되지 않겠지만, 너는 스스로를 과하게 밀어붙이고 있단다. 하지만 막지는 않으마. 나는 너의 마음을 밀어던지지 않을 것이다. #

볼프로드의 표정이 순간 찌그러졌다.

"......"

유시르는 미소짓고 있었다.

볼프로드와 유시르의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아일렌이 외쳤다.

"뭔 이상한 소릴하는 거에요! 어서 돌아가요!"

유시르는 다시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 그렇게 하겠단다. 오늘의 사과는 잘 받았으니 이제 더는 마음에 두지 않겠다. 앞으로 유시르를 자주 이용하거라. 네 주문은 이 유시르에게 언제나 환영하니까. 그리고 인간? #

볼프로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그의 시선은 유시르에게 맺혔고 결코 피함이 없었다.

유시르가 웃으며 말했다.

# 네 성정은 퀴네노스(Quinenos)와 어울리겠구나. #

"......?"



유시르는 마지막까지 미소지으며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아일렌은 방 안에 적막이 찾아오자 그제서야 한숨을 쉬었다.

"후우... 원래 이러려는 게 아니었는데... 미안합니다, 왕자님."

아무렇지 않은 듯, 볼프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하하!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머리가 상당히 깔끔해졌군요. 원래 정령을 이렇게 이용하는 것인가요? 게다가 그녀가 이야기한 가벼운 금기라는 건 뭐지요?"
"그, 그녀? 유시르에게는 그렇게 되는 건가... 흠흠. 일반적으로 정령들은 이런 식으로 간단히 쓰기도 합니다만, 유시르가 말한 가벼운 금기라는 것은 아마 의미없는 '분해'를 말하는 것 일겁니다."
"분해?"

아일렌은 이마에서 흐르는 물을 닦으며 설명했다.

"단순하게 물질을 가장 작은 단위까지 쪼개는 것을 말합니다. 방금 이물질이 사라지는 것을 봤잖습니까? 본래 존재하는 것을 분해하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만드는 것은 정령의 규율에 어긋납니다. 하지만 이번은 아주 미미한 경우라서 가벼운 금기라고 했을 겁니다. 물론 정령과 요정이 적대하는 마물에 한해서는 문제없습니다만. 정령의 용도는 본래 수호가 목적이니까요. 이 이상은 설명이 길어지니 나머지는 나중에 이야기 하시지요."

볼프로드는 손을 턱에 괴고 생각에 잠겼지만 금방 손을 거두었다.

"뭐, 좋습니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군요. 머리가 한결 개운해보이는 것도 보기 좋고. 도대체 얼마나 머리를 안감으신겁니까?"

"하하..."

"그럼 정보교환은 오늘은 어렵겠으니 나중에 일정을 잡도록 합시다. 그러고보니 당신, 칼리라를 뚫어져라 쳐다보던데 혹시 그녀에게 반한 것이오?"

"무, 무슨 말씀을...!?"

"그러지말고 자세히 말해보시지요. 칼리라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법 괜찮지 않습니까? 몸매도 그렇고, 가슴이며 엉덩이며!!"

"아,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 된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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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로드는 아일렌이 방을 나선 뒤 생각에 잠겼다. 유시르의 말이 아직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인간. 너, 욕심이 과하구나.'


쿵!!

유시르의 한 마디가 볼프로드의 주먹을 테이블에 내려치게 만들 정도였다.

"제길... 아일렌이 이야기한 벌거벗은 기분이 이런 것인가... 말 그대로 정령의 질 나쁜 장난이군, 이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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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그들을 이대로 놓진 않을 것이다."

볼프로드는 와인잔의 적색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입가에 적색주가 흘러내렸고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분노와 원망. 그것들이 뒤섞인 왕자는, 자신의 방의 흑색 깃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머니......"








(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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