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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장강명, 표백 (5) 2014/07/08 PM 04:39

도전 정신이 그렇게 좋은 거라면 젋은이고 나이 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다 가져야지, 왜 청년들한테만 가지라고 하나요?




26p








저는요, 젊은이들더러 도전하라는 말이 젊은 세대를 착취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뭣 모르고 잘 속는 어린애들한테 이것저것 시켜봐서 되는지 안 되는지 알아보고 되는 분야에는 기성세대들도 뛰어들겠다는 거 아닌가요?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라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면서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도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 하는 거잖아요.




27p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한 번도 스스로 내리지 못했어. 모든 걸 부모나 사회가 원하는 대로 했지. 고등학생 때에는 대학을 가지 않고 시를 쓰거나 영화감독이 되는 걸 꿈꾸기도 했지. 그런데 실천하지는 못했어. 대단한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가난 때문에 고생한 적도 없지. 중간고사 성적이 떨어지는 것 따위 외에 진짜 위기라는 걸 내가 겪어본 적이 있을까? 아버지 사업이 망한 적도 없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지도 않았지. 공부도 잘했고 심지어 부모님도 좋은 분이야. 그렇게 여기까지 왔어. 돌이켜보면 모든 게 합리적인 결정이었지만, 너무 쉬운 길로만 걸어왔다는 데에 죄책감을 느껴.




35p









...그런데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어떤 아이디어를 내더라도 이미 그보다 더 위대한 사상이 전에 나온 적이 있고, 어떤 문제점을 지적해도 그에 대한 답이 이미 있는, 그런 끝없이 흰 그림이야. 그런 세상에서 큰 틀의 획기적인 진보는 더 이상 없어. 그러니 우리도 세상의 획기적인 발전에 보탤 수 있는 게 없지. 누군가 밑그림을 그린 설계도를 따라 개선될 일은 많겠지만 그런 건 행동 대장들이 할 일이지. 참 완벽하고 시시한 세상이지 않니?

나는 그런 세상을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라고 불러.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에서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위대한 좌절에 휩싸이게 되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고 불러.



77p









…불과 20대 초반의 나이에 아무런 야심도, 통찰력도 없이 그저 부모가 시키는 것을 해내거나 남들보다 먼저 어떤 시험을 합격하는 것으로 충만해지는 아이들…




115p









나를 포함해 이런 싹수 노란 녀석들이 정말로 시험에 합격해 대한민국 중앙과 지방 정부를 이끌어가는 공무원이 될 것을 생각하니 나라의 장래가 근심스러웠다.




138p









"왜 이기지도 못할 거면서 매일 싸움을 하고 다녀?"




잠자리에 눕기 전에 추가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그 녀석들이 먼저 내 자존심을 깔아뭉갰어. 내 자존심을 깔아뭉갰다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180p









1978년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유지·보수자의 운명을 띠고 세상에 났다. 이 사회에서 새로 뭔가를 설계하거나 건설할 일 없이 이미 만들어진 사회를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게 이들의 임무라는 뜻이다. 이들은 부품으로 태어나 노예로 죽을 팔자다.




186p









완성된 사회에도 근본적인 불의와 부조리는 있으나, 완성된 사회는 한 가지 답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그 부조리를 피해간다.

이 시스템에서는 어떤 모순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지만, 또 어떤 모순도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는 쌓이지 못한다. 고작해야 '선거 혁명' 이다. 즉 오늘날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사이의 논쟁은 적당한 온도의 온수를 놓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관과 차가운 물이 나오는 관 사이에 레버를 어느 위치에 놓느냐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 불과하다.




188p









…다른 서구 국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현 세대와 이전 세대가 처한 환경의 격차가 매우 뚜렷하다. 자신들의 힘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드라마틱하게 그 시대적 사명을 이뤄낸 세대가 우리 세대를 우습게 보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 거나 '분노할 줄 모른다' 고 비아냥거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190p








위대한 일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 세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출세나 개인적인 성공과 같은 보다 작은 성취에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완성된 사회는 개인적인 성공에 대해 사실상 단 하나의 평가기준만 지니고 있다. (중략) '그 사람이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 있는가(독재자나 범죄자가 아닌가)' 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시장 가치를 갖고 있는가' 가 된다.




194p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느냐를 놓고 벌이는 시합에서도 표백 세대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완성된 사회는 가능성이 그만큼 고갈된 사회기 때문에, 부를 창출하는 능력에서도 성숙한 단계에 있다. 닷컴 열품, 부동산 시장 활황과 같은 국지적인 성장은 때때로 가능하지만 산업화 초·중반에 볼 수 있었던 \'경제 전반에 걸친 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완성된 사회의 경제성장률은 이론적으로 0퍼센드에 가까워야 한다.




즉 표백세대들은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하며, 그들에게 열린 가능성은 사회가 완성되기 전 패기 있는 구성원들이 기대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아주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가장 똑똑하다는 젊은이들 조차 앨리트 조직의 끄트머리가 되기 위해 몇 년을 골방에 처박혀야 하고, 그런 노력이 결실을 얻은 뒤에도 조직의 말단에서 다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




표백 세대는 같은 세대뿐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성세대들과도 경쟁해야 하는데, 사회 각 분야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표백 세대들이 가진 자원이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불리한 게임이다. 분배 방식이라는 게임의 규칙조차 기성세대가 정한 것을 따라야 한다.




195p








박탈감과 좌절감은 뿌리 깊이 박혀 있지만 이런 좌절감은 집단적인 분노로 발전하지 못한다. 투쟁은 손해 보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다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선배와 상사, 기성세대를 찢어죽일 것처럼 성토하다가도 면접 시험장에서는 한없이 고분고분해지고 공손해진다.




197p








…밤에 잠자리에 누운 나는 대상을 알 수 없는 강렬한 증오와 분노에 휩싸여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왜 이렇게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오랫동안 생각했다.




2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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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sh@    친구신청

정확하죠.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기성세대들이 젊은세대 피를 빨아먹고 있는 형국이죠.
비슷하게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전형적인 개소리도 혐오스러움.

매지컬트로피카나    친구신청

표백 재밌죠... 아무것도 할 수 없게된 청년들의 소리없는 절규같은 책이었어요
꿀잼

cheshire    친구신청

오올~ 멋지다!!!
난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는걸 글로 저렇게 명확히 표현할 수 있다니 존경스럽다!!!
사서 읽어봐야지!!!

잡았다요놈!    친구신청

이런책이 있네.... 잘보고 가요

*스피노자*    친구신청

통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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