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저장 후정독..
어느정도 읽다가 나중에 읽을 목적으로 마이피에 저장합니다.
이하 페북 포스트 본문입니다.
제 두 번째 중앙일보 칼럼 어제 일요일판에 실렸어요!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이번에는 제 어린 시절 만난 지휘자 두 분한테서 배운 교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면 제한 때문에 결국에 신문에 나간 글은 원본의 3분의 1밖에 안 돼서 원래 글을 여기에 따로 올립니다. 링크도 아래 넣었고요. 제 삶에서 아주 중요한 시절 다루는 거고 옛날부터 쓰고 싶었던 이야기라 줄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고 싶었어요.
재미있게 읽으시기를!
--------------
두 지휘자 이야기
그때는 미래에 대한 희망 가득한 달콤한 시절이자 아이에서 어른으로 거듭나는, 정체성을 알 수 없는 불안하고 힘든 시절이었다.
나는 예중, 예고, 예술 대학교 출신이다. '내 음악의 아버지’라 부르고 싶은 무척 엄격했던 초등학교 시절 클라리넷 선생님을 비롯해 한번의 쓴 소리 없이 항상 작곡가로서의 나의 개성과 음악적인 시각을 존중해준 대학 시절 지도교수까지 다양한 스승을 만났다.
중고등학교 시절, 모든 음악인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지휘자 두 사람을 만나게 됐는데 둘은 서로 정반대라 해도 좋을 정도로 판이하게 달랐다. 첫 지휘자는 경쟁이 치열한 예중에 실기 시험 보러 갔을 때 처음 뵙게 된 오티스(Otis) 선생님으로 이 분은 당시 음악 교육계의 거물이었다. 빠르고 난이도 높은 콩쿠르용 곡을 연주해야 해서 이미 떨고 있었던 데다가 엄격하기로 소문난 오티스 선생님 앞이어서 더욱 떨렸다. 내가 연주하는 동안 시종 정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오티스 선생님은 초등학교 6학년생밖에 안 된 나에게 진지한 말을 건네며 연주를 중단하게 했다.
나는 당연히 낙방한 줄 알았지만 몇 주 뒤에 합격했다는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그 후로 3년 동안 오티스 선생님의 지휘봉 밑에서 음악을 배웠다.
그 3년 동안 우리 학교의 교향악단, 목관악단, 재즈 악단 등은 오티스 선생님의 지도로 지역과 전국적인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휩쓸었고 오티스 선생님 밑에서 많은 선배들이 Juilliard, Manhattan School of Music과 Eastman 등을 비롯한 명문 음대로 진학했다.
오티스 선생님은 한국 사람들이 '미국의 선생님'이라고 하면 널리 갖고 있는 선입견인 '친구 같은 교사'의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는 분이었다. 오티스 선생님의 수업이 있을 때면 수업 전 복도에서 망을 보던 학생이 허겁지겁 교실에 달려 들어와‘오티스 쌤 오신다!’고 했고 그러면 떠들거나 연습했던 아이들은 일시에 멈추고 편하게 앉아 있던 아이들은 얼른 자세를 고쳐 바르게 앉았다. 이렇게 선생님이 들어오기 전부터 준비된 상태로 있으니 바로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고 수업 시간은 1초도 낭비된 적이 없었다.
또한 많은 한국사람들이 미국에서는 무조건 선생님을 이름으로 편하게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오티스 선생님을 이름으로 부르는 걸 시도한 아이는 3년 동안 딱 한 명밖에 보지 못했다. 나는 우연히 다른 학생 서너 명과 선생님 사무실에 앉아 있게 되었는데 그 중 고등학교 선배 한 명이 친해지려고 그랬는지 오티스 선생님을 이름으로 불렀다.
그때 오티스 선생님은 보고 있던 악보에서 천천히 눈을 들어올려 그 학생을 응시하면서 ‘방금 나한테 뭐라고 불렀어?’ 라고 했고 그 학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이름을 불렀다. 어색한 침묵 후에 선생님은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네. 설마 했는데’라고 말했다. 평소에 연습을 소홀히 하는 학생을 불같이 혼내는 선생님이지만 그 아이가 순수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는 절대 그렇게 부르지 마라'고 말하고 보내줬다. 그 학생은 말할 것도 없이 졸업할 때까지 단 한번도 오티스 선생님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오티스 선생님은 덴버 외곽에 있는 학교로 갔고 오티스 선생님의 후임이 새로 왔다. 새로 온 선생님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미국 교사'로 학생과 친구처럼 지내는 친절한 분이었다. 학생들은 이제 마음 편하게 교향악단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돼서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전의 무거운 분위기는 사라졌다.
그러나 대회에서 한결같이 만점만 받아온 우리 학교 교향악단의 평가는 머지 않아 ‘매우 우수함’에서 ‘우수함’으로 떨어졌고 끝내 예고가 아닌 일반 학교 교향악단이 받을 정도인 ‘좋음’ 수준으로 떨어졌다. 수업 시작하기 전부터 스스로 조용히 하고 준비를 하던 우리의 모습은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되었고 그 ‘친절한 선생님’은 연단에 올라가서 한참 동안이나 학생을 조용히 시켜야만 겨우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예 통제 안 되는 날도 많았다.
오티스 선생님은 악단이 연습을 하는 동안 연주가 이상한 부분이 발견되면 즉시 그 자리에서 학생 한 명씩 일으켜 세워 어려운 부분을 즉석에서 연주하게 하고 정확하게 하지 못한 학생을 혼내거나 순위에 따라 앉히는 자리를 바로 바꾸게 했다. 물론 학생들의 긴장감은 컸지만 그러다 보니 연주 실력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람들은 ‘편함’에 안주하기 보다 '우수함'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가끔 살면서 ‘우수함’을 위해서 ‘편함’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어서 그런 점이 나에게는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미국 문화의 영향 때문인지 ‘선생님도 학생의 친구 돼야 된다’, ‘부모도 아이들의 절친 돼야 된다’와 같은 생각이 퍼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거기에 좋은 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도 당연히 ‘친절한 선생님’이 왔을 때 갑자기 연습에 대한 압박에서 풀려나고 선생님한테 친구처럼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전 선생님에 비해서 편하게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게 됐으니까 새로 온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도 많았다. 그때 선생님에 대한 학생 설문 조사가 있었다면 대부분 많이 좋아졌다고 답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한 예고에 들어간 첫 번째 이유는 친구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음악을 만들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편함을 위해서 일시적인 친구 되어주는 것보다 긍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때로는 엄격하고 당당한 지도자가 되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오티스 선생님이 한번이라도 아이에게 체벌은 물론 모욕적으로 대하는 것도 본 적이 없다. 만일 그랬다면 선생님에 대한 모든 존경심은 싹 사라졌을 것이다. 그의 교수법은 무서움이 아니라 한결같이 존경심을 유발하는 건설적인 엄격함에 근거해 있었다.
다르게 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지만 나는 친구가 사귀고 싶다면 부모나 선생님한테 가서 친구가 되어 달라고 할 게 아니라 동기한테 가서 친구로 지내자고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 사회에서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부모나 교사의 모습이 지배적이던 시절의 부작용 때문에 편안하고 친구 같은 선생님을 더욱 환영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부모는 부모답게, 스승은 스승답게 행동하는 것의 중요성까지 왜곡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본다.
이런 면에서 미국을 닮아가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