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멘데스의 2번째 007입니다. 감독의 전작 <007: 스카이폴>은 매우 은유와 상징을 잘 녹아낸 시적인 작품이었죠. <스카이폴> 전반에서 드러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추락’의 이미지는 감독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수사법을 많이 사용했는지 알수가 있습니다. 007은 오래된 시리즈고 많이 낡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제임스 본드가 되면서 시리즈는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옷을 입었죠. 바로 후발주자인 <본> 시리즈를 벤치마킹한 것입니다. <007:카지노 로열>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007: 퀀텀 오브 솔라스>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3번째 작품. 앞의 두 감독과 달리 필모그래피가 예사롭지 않은 샘 멘데스는 007과 영국이라는 이미지와 007이 가진 변화에 주목했습니다.
역사가 오래되었으나 낡은 이미지가 있는 영국이라는 장소와 다니엘 크레이그로 전혀 다른 변화를 거친 007이라는 클래식, 당시 개봉 기준으로 한물간 느낌이 강했던 스파이 물에 고전시리즈의 모습을 되찾아주기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낡고 추락하는 이미지에 현대화의 이미지를 대비시키게 되죠. M과 Q의 모습이 바로 과거와 미래인 것이고 그 접점이 본드인 것이죠. 젊은 모습의 Q가 옛 007시리즈의 향수가 절로 일어나는 첨단 무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참 인상적이기도 했습니다. 클라이맥스 씬에 등장하는 클래식 카는 과거의 클래식 007과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의 조화를 보여줍니다.
<007: 스펙터>는 전작이 가진 메시지의 연장선입니다. <스펙터>에서도 여전히 많은 것들이 추락합니다. 본드는 시작부터 무너지는 건물에서 추락하며 적은 헬기나 기차에서 떨어집니다. 본드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건물에서 뛰어내리며 헬기조차도 추락합니다. 영화 내에서는 MI6과 더블오 스파이는 낡은 취급을 받고 ‘정보’를 통한 감시 시스템이 새롭게 그들을 대체하려 합니다. 007는 C에게 대항하는 MI6의 마지막 보루죠. 과거로의 희귀를 시작한 <스펙터>는 본드 걸의 비중이 없다시피 한 전작과 달리 본드 걸의 비중이 매우 큽니다. 007은 첨단무기의 도움을 받고 마지막에는 클래식카를 타고 본드걸과 떠납니다.
오프닝 시퀀스는 참 매력적입니다. 헬기에서 싸우는 액션씬은 엄청나며 샘 스미스의 주제가와 함께 이어지는 모션그래픽 오프닝 타이틀 영상은 전작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장면들은 <스카이폴>처럼 꽉꽉 차있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전개는 평범하고 플롯도 다소 심심한 편입니다. 초반에는 지루하게 느껴지더군요. 전개가 예상범주 내로 과거 시리즈에서 흔히 보이던 클리셰가 느껴지더군요.
사실 007답기는 하지만 요 근래 경쟁 작들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스파이물의 제2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마블의 샘 멘데스 본인의 <스카이폴>도 그러했지만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스파이>, <미션임파서블: 로그네이션> 등등. 최근 너무 좋은 스파이 영화가 많았어요. 게다가 <로그네이션>의 경우는 <스펙터>와 이야기가 상당히 흡사합니다. 그런데 <로그네이션>은 매우 좋은 영화였거든요. <스펙터>가 심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군요. 그렇게 나쁜 영화도 아닌데 말이죠. 본드 걸 역의 레아 세두도 <로그네이션>의 레베카 퍼거슨보다 매력을 못 느끼겠더군요. 배우의 매력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심심해요.
개인적으로 감독의 전작 중 <로드 투 퍼티션>을 상당히 좋아했습니다. 그 영화의 수려했던 영상미는 <스카이폴>에 이르러서는 탐미주의의 모습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스카이폴>의 마카오에서 상하이로 이어지는 중국 로케 장면들과 마지막 클라이맥스 씬은 매우 인상적이었죠. 유감스럽게도 <스펙터>는 배경의 전경을 보여주는 이스타블리징 쇼트를 제외하고는 딱히 인상적인 미장센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군요. 다만, 거대 건물을 크게 폭발시키는 장면이 2번이나 있는 데 꽤나 속 시원합니다.
이야기가 전형적이다 보니 크리스토퍼 왈츠와 앤드류 스캇의 악역 캐릭터도 매력을 보이지 못합니다. 크리스토퍼 왈츠는 오스카를 빛낸 배우고 앤드류 스캇도 영드 <셜록>의 모리아티 역으로 매우 인상적인 연기를 보인 배우입니다. 이런 배우를 데려다 놓고 이렇게 심심한 캐릭터를 연기하게 한 것은 감독의 직무유기죠.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호연을 펼쳤던 랄프 파인즈가 물려받은 M도 심심합니다. <로그네이션>의 알렉 볼드윈이 얼마나 인상적이었습니까? 하물며 전작들의 매즈 미켈슨이나 하비에르 바르뎀이 워낙 좋기도 했죠.
그러나 다행히도 007이 가진 기본적인 매력들은 여전히 숨 쉬고 있습니다. 탁월한 오프닝 시퀀스뿐만 아니라 액션 장면은 전반적으로 좋고 카 체이서 시퀀스도 좋습니다. 이제 <본> 시리즈의 영향을 벗어난 것 같네요. (액션 부분도 <로그네이션>보다는 못한 것 같지만요.) WWE 프로레슬러 출신인 데이브 바티스타가 행동대장 격으로 나오는 데 외모에서 보여주는 범상치 않은 모습과 파워풀한 액션 장면은 제임스 본드를 마치 언더 독처럼 보이게 합니다. 바티스타 본인에게는 연기력을 보여줄 찬스가 없는 것이 아쉽겠네요. <가디언즈 오브 더 갤럭시>의 연기가 좋았기 때문에 2연타를 날릴 수 있었을 텐데 배역이 너무 정형적인 대사 없는 악역이었습니다.
불평을 다소 토해냈지만 <스카이폴>이 워낙 좋은 영화였기 때문에 <스펙터>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것도 사실이며 <스펙터>가 007 영화로서 나쁜 것도 아닙니다. 007 작품 중 손에 꼽히는 수작은 아니더라도 괜찮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전작에서 이루어낸 클래식의 전통과 현대의 트렌드의 조화는 충분히 이어집니다. 본드가 마지막에 타는 클래식 카가 그것을 상징하니까요.
한줄평: 돌아온 007. 전작의 위상에 근접하지는 못하지만 현대에 클래식의 맛을 잘 버무렸다.
3/5
킹스맨에서 발렌타인이 해리한테 총 쏘면서 옛날 스파이 무비
주인공처럼 탈출할 수는 없을 거라고 했는데 거기서 말한
옛날 스파이 무비 주인공이 2015년에 나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