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라는 장르의 소재가 거의 한계에 달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창작자가 그러한 고민을 안고 있죠. 오랫동안 금자탑을 쌓아왔던 호러 장르는 엄청난 분량의 관습을 축적했습니다. 소재와 이야기의 고갈은 진부함을 품은 채 평범하고 익숙한 호러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죠. 그러나 가능성은 언제나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가능성은 때로는 새로운 장르나 기법으로 등장하기도 하며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비틀린 결과를 내기도 합니다. <팔로우>는 호러 장르에서도 여전히 신선한 소재가 남아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작품입니다.
저주가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지는 행동을 통해 전이되는 형식의 호러 작품은 많습니다. <링>의 저주받은 테이프가 대표적이죠. VHS 라는 시대에 맞는 소재를 통해 링은 공포를 전이시켰습니다. <팔로우> 역시 저주가 사람과 사람 사이로 전이되는 이야기입니다. <링>과 마찬가지로 이 저주가 무서운 것은 목표가 불특정다수로 개인에 의한 원한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한 <주온>처럼 일정한 공간에서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정해진 시간 이후에는 반드시 대상을 따라옵니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네트워크에는 팔로우라는 기능이 있습니다. 팔로우한 대상의 트윗이나 사진을 받아볼 수 있죠.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소셜네트워크와 이 팔로우라는 기능과 죽음의 저주가 10대 주인공 일행을 팔로우하는 것은 미묘한 상징성을 가지기도 합니다. 다소 과한 해석이긴 하지만 분명 비슷한 유추는 가능하죠. 그리고 전염의 방식이 바로 섹스라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죠.
10대 청소년들에게는 섹스는 일종의 터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금기의 영역을 가볍게 넘어서고는 하죠. 일반적으로 10대를 소재로 한 하이틴 호러 영화에서는 섹스를 하는 행동은 죽음을 부르는 행동입니다. 웨스 크라이븐의 <스크림>의 법칙에서도 죽음을 부르는 공식으로 분류하죠. 섹스를 하면 죽는다는 것은 사실 권선징악적인 클리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관습적 소재를 저주를 전이시킨다는 방법론으로 매우 신선하게 변주하고 있습니다. 클리셰를 제대로 비튼 것이죠. 단순히 10대가 섹스하면 죽는다가 아니라 섹스를 하게 되면 일정한 시간 후 죽음이 따라오는 저주가 상대방에게 이동된다는 것으로 변형된 것입니다.
단순히 10대의 성문화를 비판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진 않습니다. 해결방법이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해서 넘겨주는 방법 밖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또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해야 합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결국 부덕한 행동을 이어가야 합니다. 꽤나 아이러니한 설정이죠. 사랑하는 남녀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과의 성적 관계는 배신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이행해야하죠. 영화의 섬세한 설정은 감독의 고민을 느껴지게 합니다. 이 저주는 저주를 다른 이에게 전이시켰어도 그 사람이 죽으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따라서 섹스를 했던 사람과 반의무적으로 관계를 유지해야하며 상황을 지켜봐야 합니다. 무거운 책임이 점점 번져나가죠.
영화는 상당히 리얼리즘에 근거하여 높은 디테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황에 대한 대처나 연출은 현실적이며 저주의 주체인 유령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습니다. 때로는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하기도 하며 투명한 상태에서도 실체가 있으며 접촉도 가능하죠. 연출에 있어서도 고어에 의존하지도 않고 심리묘사에 중점을 두는 점이나 미장센이나 아트에도 신경을 쓴 것이 느껴집니다. 수영장 씬의 화려한 트랜지션이나 미장센은 아름답게 까지 느껴지죠.
이 영화가 아주 새로운 것을 발굴해 낸 것은 아닙니다. 기존의 것들을 잘 배합하고 전혀 다른 방법으로 구현해냄으로서 신선한 소재를 만들어 낸 것이죠. 그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연출에도 충실하고요. 이 영화는 소름끼치게 무서운 영화는 아닙니다. 호러 영화로서의 미덕을 완전히 다한 것은 아니죠. 그러나 영화의 몰입감은 어느 호러 영화보다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또한 정체되어 있던 호러 장르의 발전 가능성을 보았고요.
단평: 아직도 호러는 가능성과 신선함을 가질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