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0분입니다. 영화 10분 만에 많은 이들이 걱정했던 현실이 드러납니다. 바로 잭스나이더 표 연출의 극단성입니다. 이미지가 있는데 텍스트가 없고 서사는 있으나 깊이감이 보이지 않는 특징이 첨예하게 느껴집니다. 의도는 알겠어요. 이미지 프레임 하나하나는 참 미적으로 멋있습니다. 근데 이미지 몽타주라는 것은 멋있으라고 넣는 것이 아니죠. 메타포, 즉 은유라는 것은 사실 상당히 문학적인 의도를 가진 표현 방법이죠. 그런데 뭐랄까 이 영화의 초반 이미지는 그냥 직접적인 시각적 자료의 나열일 뿐입니다.
영화는 흑백 대비가 심하고 채도가 낮고 어둡습니다. 유머는 전혀 찾을 수 없죠. 이런 상황에서 시각적 이미지만 강요한다고 브루스 웨인의 어두움을 간직한 남자가 되는 것이 아니며 슈퍼맨이 세상에 준 존재에 대한 모순점이 철학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놀란의 영화에서 배트맨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세련되게 표현했죠. <배트맨 V 슈퍼맨>에서 표현되는 모습도 시각적으로 멋있습니다. 이미지 스틸로 본다면 훨씬 멋있겠죠. 그러나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파티 장면에서의 다이애나와 브루스 웨인은 마치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셀레나와 브루스 웨인을 연상시킵니다. 좋지 않아요.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얼마나 세련된 영화였는지를 되새기게 될 뿐입니다. 아니 모든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드라마가 전개되는 과정이나 편집, 세세한 연출 모든 부분에서 놀란이 얼마나 대단한 감독인지 새삼 느낍니다.
크리스 테리오의 각본이 나쁘다고 생각되진 않아요. 어차피 이렇게 진행될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전개의 과정과 연결성이죠. 편집은 또 얼마나 아마추어의 느낌이 나는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잭 스나이더는 둘째 치고 편집 권한이 누구에게 있었는지 모르지만 왜 이렇게 편집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아요. 빼야 할 부분은 가득 차있고 빼지 말아야 할 부분은 빠진 것 같습니다. 잭 스나이더의 고질병인 고속촬영을 활용한 액션 시퀀스가 <맨 오브 스틸>부터 많이 줄었죠. 근데 그 대신 드라마 씬이나 회상 씬에서 남용을 합니다. 슬로우 모션으로 브루스 웨인이 걸어가면 멋있기야 하겠죠. 근데 왜라는 의문이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프레임을 낭비할거면 훅훅 지나가는 초반부분 드라마를 더 채웠어야죠. 막상 중요한 상징이 있는 장면들은 너무 빨리 지나가 보지도 못하게 하고 그냥 이미지가 멋있는 장면에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다니요.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너무 빠른 편집으로 사람들을 좀 불편하게 했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얼마나 많은 고민의 흔적이었는지 알 것 같군요. 조스 위던이 다시 보여요. 잭스나이더는 단 3명을 표현하는 것도 힘에 부친 모양입니다. 무엇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기승전결의 호흡 조절에 실패한 느낌이 역력하고요.
무엇보다 연출이 세련되지 못하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배트맨이 처음 등장할 때 벽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뭐랄까요. 실망스럽습니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배트맨의 모습이 얼마나 인상적이었습니까? 다행히 이후 많은 액션 장면에서 그만큼 만회를 합니다. 뭐, 어찌되었던 잭 스나이더가 액션은 참 좋죠. 상당히 멋져요. 잭 스나이더의 장점이 드러납니다. 전작이 너무 과했던 것을 알았는지 그래도 이번에는 액션의 비중이 후반에 과하게 치우쳐져 있지는 않습니다. 액션 비중을 많이 줄였어요. 그런데 그게 또 독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드라마 비중이 커져야 했는데 잭 스나이더는 원작이라는 스토리보드가 없으면 드라마 연출이 제대로 되질 않거든요. 텍스트를 담아내지 못하니까요. 그래도 한 시간 반 정도를 참아내면 역시 배트맨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게임 아캄시리즈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연출은 필 견입니다.
하지만 영화 클라이맥스에서 배트맨 캐릭터에 대한 배려가 좀 없이 느껴지더군요. 디테일도 떨어지고요. 대사나 캐릭터의 연기도 너무 성의가 없습니다. 뭔가 우물쭈물하는 느낌이 강하더군요. 게다가 카체이스 씬이나 비행 씬 장면은 너무 난잡하더군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수준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액션이 약점이라는 놀란 표 연출보다도 못하더군요. 슈퍼맨은 그냥 전작의 답습정도라서 크게 모가 나보이진 않더군요.
그래도 극중에서 감독의 장점이 여럿 보입니다. 바로 캐릭터 빌드 업입니다. 배트맨뿐만이 아니라 렉스 루터가 매우 좋아요. 게다가 제시 아이젠버그는 연기를 참 잘하지 않습니까? 이미 소셜 네트워크에서 겪었던 괴짜 천재 연기에 표독스러움을 더하자 이게 참 기가 막힙니다. 많은 분들이 히스레저 조커랑 비교하시는데 많이 달라요. 조커가 배트맨에게 보인 집착과 광기는 배트맨의 그림자와 같은 부분이었습니다. 투 페이스가 상징하는 동전의 양면성이었어요. 배트맨이 조커를 완성시킨 것이죠. 하지만 렉스 루터가 보여주는 광기는 다릅니다. 그는 슈퍼맨을 타락시키고 인간의 손으로 죽이고 싶어 했습니다. 이는 절대자에 대한 질투에 기반을 둡니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 신과 같은 힘을 가지고 싶어 하죠. 이는 욕심입니다. 이는 조커와 같은 혼돈이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감정이죠. <실낙원>에서 예수를 질투한 루시퍼를 연상시킵니다. 사실 꽤나 전통적인 방법론의 악역에 속합니다. 신에 대한 열등감이 되게 오이디푸스적인 느낌도 들죠. 하지만 클리셰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익숙함 속에 독특함과 잡스나 주거버그를 연상시키는 현실감있는 디테일한 캐릭터 연기를 담아내니 훌륭한 캐릭터가 나온 것이죠.
배트맨과 슈퍼맨이 동료가 되는 과정도 탐탁지 않지만 딱히 그 장면만 특출하게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서 길게 적진 않겠습니다. 사실 저는 원더우먼이 동료가 되는 과정이 더 개연성이 적다고 보거든요.
전반적으로 몇몇 작품을 인용했는지 티가 납니다. 그러나 여러 작품을 뒤섞는 도전은 그렇게 성공적으로 느껴지지 않네요. 이것저것 섞는다고 그게 좋은 작품이 되나요? 마블 스튜디오가 대단한 것이 원작에 구애받지 않고 이야기를 매끈하게 진행한다는 점이거든요. 이것저것 섞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맞게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만들어내죠. 그에 비해 잭 스나이더는 오리지널 이야기를 연출하는 재능은 없는 편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그의 필모그래피는 처참한 수준이죠. 그나마 그의 영화중 수작으로 평가받는 것은 데뷔작인 <새벽의 저주>와 그다음 작품인 <300>인데요. 그런데 하필 이 두 작품은 원작이 있고 그 원작의 카피 수준의 영화였다는 점입니다. <새벽의 저주>는 원작의 내러티브에 좀비가 뛰어다니는 등의 잭 스나이더 특유의 화려한 액션 연출을 더한 영화였죠. <300>의 원작은 영화처럼 표현된 매우 미적으로 뛰어난 만화였어요. 잭 스나이더는 만화책 그대로를 스토리 보드인양 영화로 옮겼어요. <왓치멘>이 영화화 되면서 원작자 앨런 무어가 얼마나 화를 냈습니까? 원작의 깊이가 있는 상징들은 사라지고 이미지만 남지 않았습니까? 감독 판이 나오면서 편집이나 엉망인 호흡의 문제는 덜해졌지만 애초 원작 왓치멘이 가지고 있던 거대한 풍자와 메시지는 실종해버렸죠. 물론 앨런 무어의 작품들은 텍스트는 너무 문학적이라 워낙 영화화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중 <왓치멘>이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요.
감독 판이 나온다고 영화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보지 않아요. 스토리보드 단위에서의 문제가 보입니다. 연출 자체가 세련되게 느껴지지 않아요. 차라리 다크나이트 리턴즈 같은 작품의 줄기를 그대로 따라 갔으면 어땠을까요? <300>과 원작자도 같은 프랭크 밀러이고 말이죠. <저스티스 리그>의 감독에서 하차하라고 하고 싶진 않습니다. 잭 스나이더만큼 액션 연출을 해낼 수 있는 감독이 많지가 않아요. 그는 액션 분야와 이미지에 있어서는 만큼 최고입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마이클 베이를 내려오라고 하지 못하는 것과 이유가 비슷합니다. 하지만 좋은 각본가가 함께해도 안 되는 만큼 아예 스토리보드를 누가 써주거나 공동 감독이라도 붙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솔직히 놀란이 얄밉습니다. 전작들을 너무 잘 찍어 놨어요. 그래놓고 제작자로 들어앉아서 아무런 관여를 안 한 것 같습니다. 놀란은 전권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감독인 잭 스나이더에게 전권을 준 것 같습니다. 모두가 다 당신처럼 잘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죠. 그래도 뭐 그렇게 재미없진 않습니다. 딱 <맨 오브 스틸>과 비슷한 수준의 완성도지만 재미 면에서는 그것보다 낫거든요. 슈퍼맨과 배트맨이 싸우고 악역으로 렉스 루터가 나오니깐요.
단평: 우리가 잭 스나이더에게 걱정했던 일이 현실로 드러나다. 남는 건 익숙한 잭 스나이더 표 액션과 렉스 루터의 캐릭터 뿐. 3/5
솔직히 창문 앞에서 비 내리는 배경으로 실루엣만 보여주면서 등장했어도 멋있었을텐데 이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