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의 인랑
1. 개인적으로 인랑 원작 애니메이션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2. 난 봉준호나 박찬욱보다 김지운 감독을 더 좋아한다.
3. 원작은 꽤 스타일있고 영화적인 작품이다. 사실 굳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할 이유가 없는 각본이기도 했다. (감독이 실사는 정말 못 찍긴 하지만) 특히 제작 시기가 일본 애니메이션 중흥기 끝자락에 위치한 만큼 작화는 기가 막힌다. 2D 애니메이션 임에도 초반 특기대 장면이 다양한 구도에서 펼쳐지는 영화적 연출에서의 자연스러움은 애니메이터로서 존경심까지 든다. 지금 생각하면 망할 게 뻔한데 이런 작품이 투자받고 제작된 자체가 기적이다.
4. 하지만 원작은 현학적인 작가주의 작품이라 의외로 액션 장면은 초반과 클라이맥스뿐이다. 그렇다. 애초 원작은 60년대의 대체역사물을 표방한 정치극이다. 생각보다 작은 이야기며 서사적으로 플롯도 짧다. 감독 특유의 선문답이 긴 상영시간을 다 잡아먹었을 뿐이다. 원래 그 당시 일본 극장용 애니들은 다 그랬다. 곤 사토시도 안노히데아키도 다 선문답을 해댔고 오타쿠들은 해석하기 바빴다.
5. 반면, 김지운 영화는 현란한 네온사인의 사이버 펑크 서울(...)의 근미래를 다룬 SF 극이다. 덕분에 인랑 뿐만 아니라 공각기동대나 블레이드 러너의 이미지도 느껴진다. 정치극 요소는 전부 사라지고 감독의 전작 밀정처럼 스파이 장르에 가까워졌다.
6. 아니 애초 정치극으로 그릴 의도가 없어 보인다. 이건 노골적인 상업용 장르 영화다. 당연하지만 설정이 한국에 맞게 남북통일 문제로 바꿨는데 설정의 깊이가 얕다. (물론 원작도 깊다고는 볼 수 없지만) 큰 고민이 없어 보인다. 이 영화는 그냥 원작에서 스타일만 따와서 극대화한 작품이다. 물론 두 감독의 공통점인 밀리터리 덕후 성향 때문인지 총기 활용도는 정말 탁월한데 바로 그 것만이 공유되는 지점이다.
7. 솔직히 원작은 재미없다. 상업적으로 완전히 실패한 작품이고 정치극으로도 그저 그렇다. 일본이 워낙 좋은 정치물이 많은데다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너무나 끔찍하고 극적이라 어떤 정치극 암투를 가져다와도 감흥이 없다. 결국 실제보다 못할 것이다.
8. 또한 원작은 사실 엄연히 러브 스토리'였'다. <색계>같은 영화와도 닮았다. 하지만 영화판은 대놓고 멜로다. 원작은 영화 자체가 거대한 은유이며 남녀주인공의 대화가 거의 선문답이다. 문학적인 방식으로 대화를 진행하는 전형적인 오시이 마모루 스타일이다.공각기동대에서는 이게 꽤 멋지지만, 솔직히 인랑에서는 와닿지 않았던 요소기도 하다. 딱 잘라 말해 별로다. 김지운의 영화판에서는 이런 선문답이 없다는 건 참 좋았다. 근데 문제는 선문답 대신 나누는 노골적인 대화들이 너무 뻔하고 멋이 없다. 원작은 뜬구름 같은 소리나 해대고 영화판은 뻔한 설명이나 해대고.
9. 연상호도 그러더니 의외로 센 감독들이 상업적인 작업할 때는 더 노골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멜로 하는 건 좋다.그런데 하면 잘했어야지, 김지운이 멜로 잘하는 감독은 아니다. 원작은 일본 작품답게 감정 표현이 극한으로 절제되어 있는데 이쪽은 한국 작품답게 뻔한 대사에 표정 하나 못 숨긴다.
10. 게다가 배우들이 강동원, 한효주는 너무 곱다. 사람들이 너무 고와서 그 자체로 빛이 나더라. 아무리 원작의 그림체가 미형이 아니고 삭막한 편이지만 어떻게 실제 사람이 그림보다 배로 이쁠까? 그래 저 외모면 없던 사랑도 생길 법도 하지. 여담으로 왜 정우성 같은 액션 동작의 선이 고운 배우를 원작에서 액션 하나 없던 비중이 적은역할을 시켰을까에 대한 해답은 나오더라.
11. 전작은 늑대라는 상징으로 과도한 국가주의가 벌이는 폭력성을 은유한 작품이었다. 오시이 마모루의 좌익 성향 메시지 전달을 충실히 이행했다. 김지운 감독은 왜 '인랑'을 찍고 싶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김지운은 장르 영화의 대가이며 누구보다 스타일리한 영화를 만든다. 그리고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1 대 다수의 총격은 와 진짜 잘빠졌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참 멋들어진다. 전성기 홍콩 영화도 이 정도로 멋진 장면은 찾기 힘들다. 이 분야에서 김지운보다 이런 액션 연출을 잘할 감독은 전세계에서도 몇 없을 것이다. 영화 판을 보고 애니메이션 판을 보면 심심해보일 정도다. 하지만 너무나 멋진 이미지에 비해 영화는 원작의 페이소스는 조금도 담고 있지 않다. 영화판은 그런 거 없다. 하지만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너무 멋들어진다.
12. 솔직히 김지운 영화 중에서 가장 못 만든 축에 속할 것이다. 특히 전반적인 대사들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많은 부분에서 진심으로 과했다. 특히 3막 이후에서 원작보다 추가된 장면들은 사족이었다. 하지만 굳이 한 번 더 보라면 원작보단 김지운 판을 보겠다. 특히 하수구 터널 액션 씬은 두 번 세 번도 볼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