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 여자로 태어난 자식
- 나에게는 아들 둘, 딸 하나가 있다.
모든 자식들을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중에서도 딸에게 더욱 정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요즘 소위 말하는 ‘딸바보 아빠’가 나인 것 같다. 또한, 나에게 딸은 나에게 있어 더욱 애잔하며 아픈 자식이다.
2010 년 2 월에 처음 세상에서 나와 만난 내 딸은 태어난 모든 아기가 그렇듯 작고 따뜻했다.
아들을 유독 좋아하시고 딸을 이상하게도 싫어하셨던 아버지 덕에 딸은 아내와 내가 전적으로 키우게 되었다.
당연히 부모가 키우는 것이 맞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해서 가정의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졌던 아내와 학업에 매진하고 있었던 나에게 육아는 큰 일 이었다. 한편으로는 첫째 아들의 육아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도와주셨던 부모님 덕에 갓 태어난 둘째에게 전적으로 신경 쓸 수 있었다.
하지만 6개월 정도가 지난 후 육아휴직이 끝나 다시 일터로 돌아간 아내, 그리고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위한 자격증 취득을 위해 공부를 하고 있던 나에게 낮에 아이를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나의 딸은 낮에는 사설 유아돌봄시설에 맡겨졌다. 낮에는 공부를 하고 아내가 퇴근할 무렵에는 아이를 시설에서 데려와 집에 데려다놓고 다시 공부를 하러갔다.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나이인 것 같았지만 그렇게 두고 가는 아빠를 종종 걸음으로 서서 바라보는 딸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렇게 몇 주를 지내던 중 아이의 대변에서 당근이나 채소 덩어리가 나왔고 그 어린 아이는 탈이 났다. 문제는 사설 유아돌봄시설에서 다른 큰 아이들이 씹어먹어야 될 채소들을 이도 나지 않은 내 딸에게 준 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딸을 맡길 시설이 없어 탈이 난 채로 계속 같은 곳에 보내야만 했다. 신경 좀 써달라고 말을 해도 어린 부모에 대한 무시였는지 나아지지 않았다. 너무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었다. 게다가 날씨마저 추워져 딸을 데려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 어린 것이 아프다고 말도 못하고 얼마나 춥고 아프고 힘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아직도 하게 된다.
1.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여느 날과 다르게 몹시 추웠다. 어김없이 딸을 데리러 갔고, 집까지 가는 마을버스정류장을 향했다. 아기 띠를 메고 걷는 동안 아이가 입고있던 바지와 내복이 말려 올라가 종아리가 드러나게 되었다. 찬바람이 아이의 살결을 매섭게 할퀴었다. 걱정이 되어 입고 있던 점퍼를 벗고 아이를 싸서 마을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날따라 버스는 올 줄 몰랐고, 점퍼의 틈새로 찬바람이 파고들어 차갑게 얼어버린 아이의 종아리를 내 손으로 어루만지며 마을버스가 오는 지를 살폈다. 기다리면서 못난 부모 때문에 배탈까지 나고 추운 겨울 거리를 매일같이 다녀야 하는 딸에게 너무 미안해서 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빨리 취업해서 이 고생을 끝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나온 한숨을 툭 뱉고는 문득 아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춥고 배탈로 속이 말이 아닐 텐데 뭐가 좋은지... 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아빠가 뭐가 좋은지... 그렇게 웃고 있었다. 울어서 엉망이 되어버린 내 얼굴을 보고 위로라도 해주고 싶어서였을까, 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웃음에 비례해 더 울었다. 내 자신이 너무 못나서 그대로 서서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나를 보고 웃어주는 이 아이가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그렇게 딸은 점점 자랐고 나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되며 한편으로는 나를 지탱해주는 존재가 되었다. 아내 역시 나를 지탱해주는 큰 존재였으나 여러 일로 인해 이혼을 하게 된 후, 혼자가 된 나에게 딸은 더욱 소중해졌다.
아이 셋을 전적으로 아빠인 내가 부담하는 데에는 큰 부담이 있었다. 전 직장의 경영 악화로 인해 다른 직장을 구하던 도중 이런 사달이 났다. 그 일이 있고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수도 없어 전 직장을 같이 그만두고 취업준비를 하면서 매일 연락하던 동기 형에게 연락했다. 다행히 먼저 취업이 된 형에게 다짜고짜 전화해서 조금 머뭇거리다가 "형, 저 이혼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딴 남자가 생겨서 애들을 내가 키우게 됐어요."라는 말을 하고 옆에서 자고 있던 딸의 숨소리를 듣고는 눈물이 터져나왔다. 형은 처음에 장난치지말라고 이 상황을 장난으로 받아들였지만 눈물로 젖어버린 나의 목소리에 이내 납득했다. 그리고는 나의 우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 얘기는 이쯤에서 접어둬야겠다. 딸에 대한 이야기가 이혼얘기로 퇴색 될 것 같다. 그렇게 졸지에 애 셋 딸린 이혼남이 되어 취업준비를 하게 되었다. 맘이 뒤숭숭해서 뭐든 손에 안잡혔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두 달 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운이 좋게도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을 구하게 되었다. 신이 있다면 이렇게라도 힘든 나를 돕는 게 맞다. 나를 사지로 몰려면 충분히 몰았다. 아이들을 이 세상에 놔두고 저 세상으로 가고 싶을 만큼...
2. 새로 들어간 회사 연수중에 나의 팀장이 되실 분을 신입사원들의 회식자리에서 처음 뵈었다. 여러 테이블을 전전하다가 팀장님이 계신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본인의 팀에 들어올 신입사원이었던 내가 아이가 세명있고, 결혼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계셨다. 그때 당시에는 이혼은 확정이었지만 서류까지 정리 된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도 물론 모르고 계신다. 그렇게 술잔이 오고가고 몇 마디를 나누던 중 팀장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너는 이제 취업해서 첫월급 타면 가장 하고 싶은게 뭐니?"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놀고 싶습니다.", "여행가고 싶습니다." 등의 무난한 답변을 할 수 있었지만, 문득 그 질문에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 중에서도 연수때문에 같이 있어줄 수 없는 딸이 생각났다. 연수를 위해 집을 나서기 전, 나에게 잘가라고 인사를 하고 색칠공부를 하고 있던 아이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대답했다.
"애들한테 취업준비한다고 못해준게 너무 많습니다. 장난감도 못사주고, 사달라는 과자하나 제대로..."
말을 맺기가 무섭게 또 가슴이 뜨거워져서 울고 말았다. 그 순간 주마등처럼 이혼과 딸과 같이 있어주지 못했던 시간이 지나갔다.
우는 나를 덤덤히 보시던 팀장님께서는 지갑에서 십만원을 꺼내시며 "이번주에 올라가서 애들 사주고 와라." 라고 하셨다.
나는 우는 얼굴을 황급히 정리하고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받으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받았다. 시간이 지나서 말씀하시기를 무척이나 놀라셨다고 했다. 그때 덩달아 옆에 앉아있던 여자 동기도 울었고 지금 회사의 동기중에서 내 상황을 제일 먼저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울어버린 내가 너무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3. 2015년인 작년, 딸아이와 막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재롱잔치를 했다. 반차를 쓰고 늦지않기 위해 서둘렀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모두 다 참석하겠지만 내 아이들에게는 내가 전부니까 늦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저녁 7시에 시작하지만 부모들의 극성 덕분에 내가 도착한 6시 30분에 이미 자리는 모두 차있었다. 재롱잔치 전날 통화하면서 아빠가 꼭 간다고 통화했는데 많은 인파속에서 아빠를 찾지 못할까봐 걱정되었다. 행사는 시작했고 딸의 차례가 왔을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딸이 아빠가 왔음을 알아주기를 바랬지만, 쉽지 않았다. 따로 자리를 잡으신 부모님과 첫째 아들의 모습을 보며 좋아하는 딸이었지만, 아빠가 왔는지 계속 찾는 눈치였다. 그렇게 아빠가 왔는지도 모르는 채 모든 원생 아이들이 나와 합창을 하는 마지막 순서까지 지나왔다. 아빠가 안와서 서운한지 무표정으로 합창하는 딸의 모습에 너무 미안해서 다시 한번 크게 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을 들은 딸은 놀란 얼굴로 나를 찾았고 나와 눈이 마주친 딸은 또,
세상을 다 얻은 듯이 웃는 딸의 모습에서 어렸을 때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울렸던 그 미소가 떠올랐다.
복받쳐오르는 무언가에 또 눈물이 났고 고개를 돌려 눈 주변을 훔쳤다.
[딸]
: 한없이 아프고 아프며, 벅차고 벅차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살아가게 하는 유일무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