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활동이 정지되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생물의 상태로서 생(生)의 종말을 말한다.
- 삶의 사전에서 제일 처음 얘기하게 될 단어가 '죽음'이 될 줄은 몰랐다. 어떤 단어를 시작으로 내 삶을 정리해 나가야 할까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보통은 어떤 일의 서두를 장식하거나, 시작하기 위한 단어로 오히려 '삶' 혹은 '탄생'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법하지만 나는 이것보다 '죽음'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일반적으로 정의된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현상이며, 어느 누구도 이것에 대해 확실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가장 부정확한 개념이다. 저 사전적 의미조차 맞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오히려 정해진 틀에 갇히지 않고 내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 가수 신해철 씨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나면서 세상을 향해 독설을 내뱉던 그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다. 나도 그 중 한사람이었으며, 그가 라디오를 진행할 때 말했던 멘트가 문득 떠올랐다. 한 해가 시작될 때, 자신은 유서를 적는다고 했었다.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다며 익살스러운 말투로 말했고, 이내 진지해진 말투로 왜 자신이 유서를 남기는지에 대해 말했다. 자신이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서였을까 그렇게 갑작스럽게 떠났다. 신해철 씨 스스로 세상을 떠나면서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많은 걱정이 있었겠지만, 그렇게 새해마다 써내려갔던 유서가 그에게는 안도할 수 있는 한 부분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 뒤에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한 나의 감정들과 생각을 정리했었던 것 같다.
'삶'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개념,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이 고차원적인 것들에 대해서 단순하게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삶'이라는 것은 삼십년이라는 짧은 삶을 통해 정의하는 것은 섣부르기도 하고,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것이며, 나중에는 좀 더 나이가 든 뒤에는 적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삶'이라는 것을 정의하는 순간은 나에게 '죽음'이라는 놈이 나를 엄습할 때가 가까워졌을 때가 될 것 같다.
죽음이라는 상태가 마치 텔레비전의 전원이 나간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나라는 자아만 존재하는 상태인지, 종교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지옥이라는 어떤 차원으로 보내지는 것인지, 아예 자아조차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인지 모른다. 천국에 다녀온 소년 (Heaven Is for Real, 2014)이라는 영화는 사후세계를 경험한 한 아이에 대한 실화를 다루고 있다. 나는 사후세계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편이다. 죽음이라는 상태에 이른 후, 그대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으며 무언가 새롭게 시작될 것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할 뿐이다.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한 사이클이 아니라, 더 큰 개념의 삶이 존재하고 그 순환의 일부일 수도 있고... 이렇듯 나는 죽음이라는 현상에 대해 정의할 수 없다, 이것이 나의 한계이며 현실이다.
죽음은 검은색이나 어두운 배경, 혹은 무서운 이미지로 보통 표현된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는 죽는다는게 무서운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커가면서 그 이미지가 조금 달라졌다. 누군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겪은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친하지도 않고 말도 해본적없는 아이였지만, 그 애의 친한 친구가 우리반에 있어 거의 매일 놀러오곤해서 남같지는 않았다. 그 아이는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자율학습을 하기 위해 등교하던 중 갑작스럽게 교문앞에서 쓰러졌고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방학이 끝나고 그 소식을 들은 나는 친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을 받았다. 공부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 아이가 갑작스럽게 떠났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안쓰러웠으며, 답답했다. 그와 동시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
모르겠다, 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는지. 가끔 너무 힘이 드는 순간이 왔을 때, 문득 그렇게 자신의 삶을 꽃피우지 못한 그 아이를 생각하며 마음을 바로잡았다. 나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나를 일으켜세우는 '삶'으로 다가왔다. 누군가의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된다면 그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살면서 겪을 많은 죽음 속에서 누군가를 잃었다는 상실감으로 슬프고 괴롭겠지만, 그 누군가와의 아름다운 추억속에서 웃을 수 있도록 '죽음'보다도 어쩌면 더 지독하고 괴팍한 '삶'이라는 녀석과 잘 지내야겠다. 또한, 앞서 얘기했던 신해철 씨처럼 죽음을 맞이할 최소한의 준비도 필요할 것 같다.
계속 쓰다 보니 무슨 말을 어떻게 끝내고,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음에 대한 정의보다도 나의 단편적인 생각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조금씩 고쳐나갈 단어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