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푯말을 들고
종교를 강요하는 분들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지지요.
교회에 안 나가면 폭삭 망할 것처럼 협박하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면 정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실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을 가고, 안 믿으면 정말 지옥으로 가는 걸까요?
어제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 100회 강연에서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기독교인이 “예수천국 불신지옥” 에 대해 회의가 든다며 질문을 던졌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도 물었는데요.
법륜스님이 이야기하는 성경 이야기가 정말 흥미롭고 감동적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은 술과 악연이 많아서 부모님 두 분 다 술 때문에 일찍 돌아가셨어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어린 나이에 죽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고,
그 해답을 신앙에서 찾았어요.
주위에 교회 다니는 분도 없었지만 그런 해답을 찾기 위해
초등 2학년 때부터 제 발로 걸어들어가서 교회에 다녔어요.
주일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교회 다니면 천국 가고 안 다니면 지옥 간다'는 목사님 말씀을 철썩 같이 믿어 왔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는 엄청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였거든요.
중학생이 되어 교회 다니는 것이 귀찮아서 늦잠 자서 안 나갈 때도
항상 “교회 안 나가면 지옥 간다”는 말을 들어왔어요.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니까 예수천국 불신지옥' 그런 가르침들이 너무나 혐오스러워요.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제가 어떻게 사랑해야 될까요?
"기독교인이라는 것의 정의가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희생하심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죠.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기도가 끝날 때에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요.
이 말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자각했다는 뜻이예요.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자각했는데 세상에 겁날 것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나가서 진리를 설파했어요.
그런데 진리를 설파하는 내용이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의 가르침과 달랐어요.
그래서 갈등이 생긴 거예요.
그 중에 한 가지 예를 들면 유대교는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다. 그래서 구원은 유대인만 받을 수 있어요.
유대인 아닌 사람은 구원을 못 받아요. 구원의 기준이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것이였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대인 아닌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 당시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그래서 난리가 났어요.
도대체 니가 누군데 그런 엄청난 얘기를 하느냐는 거죠.
지금 보면 상식적인 얘기이지만 그 당시에는 하늘이 무너지고 혹세무민하는 얘기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셨어요.
“여러분 여기 중환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못하는 버려진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율법주의 학자들이나 바리새 교인들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그 환자를 보고 잘 돌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누가 더 좋아 보였겠습니까?"
그러니까 거기 앉아 있던 대중이 전부 다
“사마리아인요.”
이랬어요.
이게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얘기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이 구원을 받는 소식이에요.
구원의 기준이 유대교는 민족인데,
예수님께서는 인종적으로 민족적으로 구원이 되는 게 아니라 여기 작은 자 하나를 보고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 이것이 구원의 기준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것은 뒤에 가면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 이렇게 나옵니다.
왕께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다 일으켜 세워서 양떼와 이리떼를 나누듯이 다 나누고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지옥에 갈지언정...”,
“왜 우리가 지옥에 가야됩니까?”,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걸 주지 않았고,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걸 주지 않았고,
내가 목 마를 때 마실 걸 주지 않았고, 내가 나그네 됐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보러 안 왔다”
이랬습니다.
“주가 언제 그런 적이 있고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니라"
하셨어요,
이게 구원의 기준이에요.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된 거예요. 뭐 태양이 지구를 돈다 이런 얘기는 예수님의 말에 없어요.
구약에는 있는지 몰라도요.
이것을 그대로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여기 환자가 하나 있는데 신부님과 목사님은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스님이 지나가다 그를 돌봤다.
하나님 보시기에 누가 좋아 보이시겠느냐?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간다면
구원이 교회 안에 있다 하는 것은 유대교적 논리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마치 불교가 사람이 죽어 소 됐다가 개 됐다가 돼지 됐다가 하는 것은
힌두교의 논리이지 불교 논리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인들은 그것이 마치 불교인냥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질문자도 지금 상황에서는 예수님의 본래 가르침으로 즉 십자가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였느냐? 혹세무민 한다고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고 못 박았을 때,
저 같으면 어떻게 말했겠어요?
“주여, 내가 참고 참았지만 저 두 인간은 지옥에다 집어 넣어주세요.”
그랬겠죠. (대중웃음)
그게 솔직한 심정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주여, 저들을 용서 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
그랬어요.
지금 우리가 흉내 내려 해도 안 돼요.
예수의 육신은 십자가에 매달고 죽일 수 있었어도 그의 영혼은 아무 상처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몸은 죽어도 그 마음은 죽일 수 없는... 뭐 몸둥이가 3일 만에 살아나고
어쩌고 그런 건 제가 볼 때는 핵심이 아니에요.
그러니 그것을 다른 종교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기독교 속에 이미
세상에 열린 자세를 갖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본래 가르침대로 돌아가시면 돼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금요 예배를 갈까 여길 올까 고민을 하다가 여기를 왔는데
하나님께서 제 생각을 스님을 통해서 열어 주신 것 같아요.
스님과 예수님께서 항상 동행 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대중들 큰 웃음)
네. 맞는 말씀입니다.
기독교 방식으로 얘기해도 아무 모순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기독교 방식으로 말하면 이 세상의 천하 만물은 다 창조주의 피조물 아닙니까?
그럼 스님도 피조물이죠.
창조주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통해 역사를 하고 자기 뜻을 관철시킵니다.
그러니까 스님을 통해서 역사를 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맞는 얘기에요.
그러니 스님을 통해서도 은혜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대중 웃음과 박수)
제가 볼 때는 성경 속에 이미 수행적 관점이 광장히 많습니다.
우리 불교에 이런 말이 있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돼라.
이것을 '수처작주' 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성경의 말을 빌리면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줘라.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벗어줘라 이 말입니다.
누가 5리를 가자 그러면 억지로 끌려가잖아요.
내가 종속적인 존재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10리 가 줄께 이러면 그 상황에서 주인은 내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 분의 육신은 죽어도 그 분의 마음에는 아무런 걸림이 없었어요.
우리는 몸이 아프면 마음이 따라 움직여서 괴로워하지요.
그런데 몸을 죽였는데도 그 영혼이 거기에 구애를 안 받았잖아요.
그들을 용서하라는 마음을 냈잖아요.
이것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해탈과 열반이에요.
몸은 죽여도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지잖아요.
그러니까 꼭 불교라 안 해도 기독교 신자가 남편이 바람을 폈다고
"이 놈이!’ 하다가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자신을 죽여도 용서했는데 바람 정도 피웠다고 용서 못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이죠. (대중웃음)
그러니 불교다, 기독교다 이런 얘기는 그리 중요한 거 아니에요.
그렇다고 똑같다는 얘기도 아니에요.
각각의 묘미가 있고 맛이 있는 거예요.
한 단계 넘어서서 진리를 봐야 합니다. 어리석은 생각이 일어나서
그것을 지금까지 움켜쥐고 있었을 뿐이지 그것을 탁 내려놔 버리면 바로 해방되는 거예요.
문제는 이 깨달음의 길을 갈 것이냐 아니면 어리석은 생각을 움켜쥐고 괴로움의 세계로 갈 것이냐
갈림길에서 자기 선택인 겁니다.
마지막에 질문자가
“금요 예배 갈까 고민하다가 이곳에 왔는데...”
하는 순간 청중들 모두가 빵 터졌습니다.
종교를 넘어서서도 막힘없이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유쾌했네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과 부처님이 함께 동시대에 사셨다면
정말로 절친한 친구처럼 지내지 않았을까 상상해 봤습니다.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성경의 이 구절을 듣는 순간 불교든 기독교든 종교를 넘어서서
근본은 함께 통하는구나를 깊이 느꼈습니다.
글은 퍼왔습니다.
저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비종교인이 용서하지 못할 것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종교가 인간에게 끼치는 좋은 영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