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왜 108배를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소유의 의미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의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보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가 스님 말씀을 듣다 보니 108배를 하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왜 108배를 하는지에 대해서 기초 상식이 없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108배가 형식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육체적인 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왜 내가 절을 해야 되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 두 명이 누워서 서로 얘기를 나누다가 다투면 계속 누워서 다툴까요?
벌떡 일어나 앉을까요? 일어나 앉겠지요.
앉아서 얘기하다가 또 다투면 계속 앉아서 얘기할까요?
서서 얘기할까요? 서겠죠.
서서 얘기하면서 성질이 나면 고개를 숙이고 얘기할까요?
고개를 쳐들고 얘기할까요? 고개를 쳐들겠죠.
눈을 감고 얘기해요? 눈을 부릅뜨고 얘기해요? 눈을 부릅뜹니다.
어깨에 힘을 주고 고개를 쳐들고 눈을 부릅뜨고 얘기합니다.
이것이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가장 강할 때 몸이 나타내는 동작입니다.
화가 났다는 것은 누가 옳다는 것입니까? 내가 옳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가면 동그랗게 치뜬 눈이 내리깔리고
쳐들었던 고개가 약간 숙여집니다. 그러면서 ‘아이고, 미안해요’ 이렇게 됩니다.
그러다가 더 잘못했다 싶으면 ‘죄송합니다’ 그럽니다.
진짜 내가 죽을 죄를 지었다 싶으면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 그럽니다.
진짜 내가 더 죽을 죄를 지었다 싶으면 이마를 땅에 댑니다.
이것이 마음에 따른 인간의 표현이에요.
그래서 내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댄다는 것은 ‘내가 옳다’는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았을 때입니다.
그래서 절을 하는 의미는 ‘내가 옳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입니다.
절의 효과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전 과정에서 전신 운동이 됩니다.
어떤 운동보다도 전신 운동에 효과가 좋습니다.
같은 20분 안에 어떤 운동을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으냐? 절이 가장 좋습니다.
둘째, 다른 운동은 육체적으로만 효과가 좋은데,
절은 심리적으로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해소됩니다.
스트레스는 ‘내가 옳다’고 고집할 때 받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할 때는 스트레스가 없어져요.
현대인들은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에
절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셋째, 여기에 자기 암시문을 가지고 하면 더 좋아요.
자신의 무의식 세계에 영향을 주는 암시문을 ‘수행문’ 또는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내 심리가 불안해서 ‘하나님 내 마음 편안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하는 것은 도와달라는 얘기잖아요.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절을 하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마음이 편안합니다’
이렇게 자기 암시를 주어야 해요.
108배를 하면서 기도를 하면 108번 자기한테 암시를 주는 것이 됩니다.
남편과 갈등이 심할 때는 남편에게 ‘당신이 옳습니다. 제가 부족합니다’ 이렇게 절을 하는 겁니다.
상대가 어떤 주장을 할 때 ‘저건 틀렸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는데,
이렇게 계속 자기 암시를 주면, 남편이 얘기할 때 남편 얘기를 그냥 그대로 들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절을 하는 것입니다.
100배 절을 하든 103배 절을 하든 110배 절을 하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108 번뇌’라고 불러 왔잖아요.
그래서 ‘108 번뇌’를 없앤다는 뜻에서 108배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한테 절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참회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부족함을 참회하는 절이기 때문에
제가 볼 때는 기독교 교리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103배를 하면 됩니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을 때 순교해서 성인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 103명이 복위가 되었잖아요.
그분들 한분 한분께 절을 하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천배나 만배는 굉장히 힘이 듭니다. 이것은 약간의 극기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 정도 하려면 너무 힘들기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게 돼요.
절을 하는 과정에서 힘이 들면 여러 생각이 많이 일어납니다.
처음에 남편한테 참회기도 하다가 힘들면,
‘내가 뭐 잘못했는데, 니가 더 잘못했지’ 이런 분노도 일어나고,
또 그러다가 ‘아이고, 내가 잘못했다’ 싶기도 하고, 마음이 열두번도 더 바뀝니다.
이렇게 마음이 바뀌어 가면서 절을 계속 하면 ‘내가 옳다’ 하는 생각이 이 과정에서 조금 놓여집니다.
‘아이고, 남편이 그래서 그랬구나’, ‘아이고, 아내가 그래서 그랬구나’
이렇게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절을 하면서 상대가 이해되면 스트레스가 풀리거든요.
예를 들어 ‘니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 하면 목소리도 커지고 마음이 답답하잖아요.
모르겠다는 이 무지가 스트레스의 원인입니다.
그런데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렇게 상대를 이해하게 되면 스트레스가 풀리잖아요.
그래서 이해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해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마음을 내면 스트레스가 해소가 돼요.
그래서 절을 하는 겁니다.
땀이 뻘뻘 나고 하기 싫은 마음이 일어나는데도 계속 절을 한다는 것은,
성질을 고쳐보겠다는 각오가 굉장히 굳건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을 계속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108배를 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절을 108배 하는 것은 종교와 아무런 관계없이 심리 치료에 굉장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하면, 첫째, 그냥 절만 해도 육체 운동에 아주 좋다.
둘째, 절을 하면 자기 아상이 좀 허물어진다.
셋째, 기도문을 가지고 절을 하면 무의식 세계에 변화가 오면서 스트레스 해소에 굉장히 도움이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스님께서 절을 하는 의미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를 해주시니 질문자도 참 좋아했습니다.
그러자 앞서 질문한 이 분은 궁금한 것이 또 있다며 질문을 한가지 더 하였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가 무척 마음에 닿는 반면에
또 한편으로는 무소유로 살면 세상에 아무런 발전이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유튜브란 문명이 있었기 때문에 저도 이렇게 스님과 인연이 닿았는데,
무소유와 발전의 개념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무소유라는 것은 존재 자체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발전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불만족을 느껴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만족스러워서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요. 불편한 사람이 편리를 찾을 때 무엇을 만듭니다.
불만족스러워 불평하는 것은 주로 파괴의 에너지이지 창조의 에너지가 안 됩니다.”
“조금 더 앞으로 가고자 하는 욕심이 있을 때만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무언가를 만들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죠.”
“배고플 때 밥 먹고 싶다, 졸릴 때 잠자고 싶다, 이런 것들은 욕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 욕구라고 합니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는 오히려 보장해 줘야 합니다.
이것은 기본 권리에 속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데도 욕심을 내는 것이 있습니다.
100만원 있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데도 상대가 1,000만원을 가지면
그때부터 빈곤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잘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욕구를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욕망은 긍정적인 요소도 있고 부정적인 요소도 있고 두 가지 다 작용합니다.
욕망의 성격은 끝나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욕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옛날에 GDP가 100불일 때도 살았는데, 지금 2만 6천불이거든요.
그러면 앞으로 26만불이 되면 물질적인 욕구가 끝이 날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옆 사람이 어떤가의 문제이거든요. 그래서 상대적인 것은 끝이 안 납니다.
일정한 수준에서 멈추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절제’라고 하죠.
기본적인 욕구는 충족이 되어야 하고, 상대적인 욕구는 절제를 해줘야 해요. 그래야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어요.
그리고 ‘탐욕’이라고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과다한 욕구는 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술을 더 마시고 싶다고 해서 과음하게 되면 건강을 헤치지 않습니까.
과식을 해도 건강을 헤치죠. 이런 것은 오히려 멈추어 줘야 합니다.
혓바닥 조절을 못해서 과체중인 경우가 많잖아요. 혓바닥의 집착이 건강을 헤칩니다.
그래서 비만은 영양실조보다 훨씬 치유가 어렵습니다.
영양실조는 음식만 있으면 치유가 되기 때문에 값이 얼마 안 들어요.
그런데 비만은 치유하는데 돈이 엄청나게 듭니다.
아마 100명의 영양실조를 치료하는 것보다 1명의 비만을 치료하는 것에 돈이 더 들 거예요.
제일 간단한 치료법은 안 먹으면 되는 것인데,
문제는 혓바닥이 중독되어 있기 때문에 안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죠.
즉, 자기 통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에서 도와줘야 하는데
이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런 것은 다 과욕에 해당합니다.
욕구는 기본적 욕구, 상대적 욕구, 과한 욕구 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과한 욕구는 버려야 하고,
기본적 욕구는 기본 권리로서 충족시켜야 되고, 상대적 욕구는 절제가 필요하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무소유라는 것은 실재가 어떠냐 하는 것에 대한 얘기이지 발전이다, 발전 아니다,
욕구다, 욕망이다, 이런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공기가 누구의 것입니까?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이 소유욕입니다.
이건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럼 니 것이냐? 니것도 아니예요. 그럼 우리 것이냐?
우리 것도 아니에요. 그럼 하나님 것이냐? 하나님 것도 아니에요. 자연의 것이냐?
자연의 것도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 보면 누구의 것이 아니에요.
그냥 존재할 뿐이예요. 천하만물은 그냥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 것이다’ 하는 의식을 일으킨 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인식을 할 때는 무엇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인식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작아요’ 할 때는 그 사람은 머리 속에서 이것보다 큰 것을 연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커요’ 라고 할 때는 이것보다 작은 것을 연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다, 작다, 새것이다, 헌것이다 말하지만 그것은 다 상대적인 개념이예요.
존재 자체인 이것 하나만 놓고 보면 크다고도 할 수 없고 작다고도 할 수 없어요.
이것을 선불교의 용어로 말하면 ‘다만 그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크다 작다, 새것이다 헌것이다, 옳다 그르다, 맞고 틀리고가 아니고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대승불교의 용어로는 ‘공(空)’이라고 그래요.
존재는 그냥 공(空)이에요. 다만 그것일 뿐이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을 할 때 크다고 인식하기도 하고 작다고 인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다 소리를 듣기도 하고, 작다 소리를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본래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기에 또 다른 측면에서는 크다고 인식할 수도 있고
작다고 인식할 수도 있는 겁니다.
무소유의 뜻은 ‘존재 자체는 그 누구의 소유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을 할 때는 ‘내꺼다’, ‘니꺼다’ 이렇게 인식을 하죠.
무소유는 본질의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니꺼’ ‘내꺼’ 하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일시적인 인식의 문제이지 본질에는 ‘니꺼’ ‘내꺼’ 하는 건 없습니다.
이 본질을 꿰뚫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컵은 그 무엇도 아닙니다.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공(空)이라고 인식을 할 때는 물 담으면 물컵이 되고, 커피를 담으면 커피 잔이 되고,
주스 담으면 주스 잔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잔이 되고,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 담으면 국그릇이 되고, 오줌을 누면 요강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커피잔이라고만 딱 상을 지어서 인식을 하면 이 잔은 커피 먹을 때 밖에 못 씁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소유’라는 상을 짓기 때문에 풍요 속에 빈곤이 있는 것입니다.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사용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면 우리는 문제를 훨씬 더 원활하게 풀 수가 있습니다.
본래의 존재는 더럽고 깨끗함을 넘어서 있습니다. 그것을 탁 깨치면 자유로워집니다.
언어는 어떤 상황을 설명하는 도구입니다. 언어를 절대화하면 안됩니다.
무소유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만물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누구의 것도 될 수가 있습니다.
본질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고 현상은 그 누구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건에 대해 집착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집착을 함으로해서 온갖 고뇌가 생기고 불평등이 생깁니다.
무소유를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돼요.
무소유는 내가 아무것도 안 가지고 있다 이런 뜻이 아니라,
내가 어떤 것을 쓰고 있어도 본래 내것이 아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쓸 때는 소중하게 쓰고,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도록 항상 돌려줘야 합니다.
그래서 무소유의 정신이 있어야 천하 만물을 공평하게 공유할 수가 있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이것이 굉장히 깊은 철학에 들어가지만 불교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기본에 해당합니다.
무소유는 존재 그 자체의 진실상을 말하는 것이고,
소유는 우리의 인식 상의 오류를 범한 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궁금함이 풀렸는지 “잘 알았습니다” 하고 웃으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깊은 내용을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해주시니 스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께서는 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마음의 행복을 위해서도
매일 조금씩 투자를 하라고 당부하시면서 이렇게 정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성인의 말씀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마다 한번씩 성당에 가서 예배를 하는 것도 자기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몸을 위해서만 밥을 먹이지 마시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도 늘 소중한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매일 아침 일어나서 1시간씩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감사 기도를 해보세요.
그래야 여러분들의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미국에 왔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결혼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늙는다고 행복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행복과 직접 관계가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행복하게 할거냐 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것만 여러분들이 알면, 혼자 살아도 행복하고, 둘이 살아도 행복하고,
미국에 와도 행복하고, 한국에 돌아가도 행복하게 됩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