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겁으로 지은 업장, 한 생각에 없어져라. 죄도 없고 마음 없어 그 자리가 비었으니, 빈 마음 그 자리가 진정한 참회일세”

노란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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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 [글]] 즉문즉설 ' 북한을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할 것인가? (텍사스에서)' (0) 2014/10/23 PM 05:34





오늘 영어 강연은 앤드류 나치오스 교수님께서 소장으로 계시는

스카우크로프트 국제학 연구소(Scowcroft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에서

공동주관하여 “How Do We Understand and Approach North Korea? :

From an Engaged Buddhist Point of View

(참여불교적인 관점에서, 북한을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할 것인가?)” 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연구소에서는 세계 종교지도자들을 초청해 강연을 듣고 있는데,

몇 주 전에는 이슬람계 인사가 와서 이슬람과 정치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고 합니다.

12시 30분에 해외지부 사무국에서 제작한 스님의 영문 소개 영상으로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나치오스 교수님이 스님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 인연을 학생들에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1996년 북경에서 스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정확히 알려져 있진 않았지만,

그 당시 스님과 저는 북한에 큰 기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북한 민중들을 많이 알고 계셨고 저는 그 당시 월드비젼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1998년 11월, 스님은 두만강 건너 북한땅이 보이는 국경변으로 저를 데려가셨습니다.

거기서 굶주림을 벗어나기 위해 중국으로 넘어온 북한 사람들을 수십 명을 만나 인터뷰를 했고

그것을 기초로 제 책 The Great North Korean Famine(북한 대기근)을 썼습니다.

스님께서는 북한 민중들의 생활에 대해 매우 잘 알고 계시고 제 생각으로는

서구의 어떤 학자들이나 분석가들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직관력을 갖고 계십니다.”








교수님의 스님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큰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먼저 교수님과 스님께서 30분 정도 대담 형식으로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스님은 54개 도시에서 강연을 하셨지만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으시다” 면서

질문을 시작하셨습니다.









나치오스 교수님은 스님께 4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각각의 질문에 대해 스님께서는 간명하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다음은 교수님의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 내용입니다.








Q. 스님께서는 북한의 대기근으로 인해 NGO를 만들게 되셨는데요.

NGO를 만들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95년도에 국경 지대 백두산에 관광을 갔을 때 중국에서 아는 사람이

북한에서 사람들이 굶어죽는다고 얘기했습니다.

저는 북한 같은 나라에서 어떻게 사람이 굶어죽느냐 하고 믿지 않았고 그 땐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96년도에 다시 갔을 때, 그 당시 구호활동을 하고 있던 인도 불가촉천민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북한 아이들은 이보다 더 심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믿지 않으니까 저를 압록강으로 데려가서 배를 타고 강가를 쭉 보여주었습니다.

10미터 떨어져 있는 북한 땅에 있는 아이들을 봤는데 정말 인도 아이들 같았습니다.

인도 아이들 같았으면 구걸을 할 텐데, 이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들지 않았습니다.

왜 고개를 숙이고 있냐고 물었더니 안내하는 사람이

”북한 아이들은 구걸할 자유도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배에 있는 음식을 주려고 했더니 국경이라서 안 된다고, 중국 법에 어긋난다고 했습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는 자유롭게 강을 건너 날아와서 음식을 먹고 가는데,

사람은 여기 음식이 있는데도 왜 주지 못하는가.

국경이란 게 뭔가, 국가라는 게 뭔가. 국가, 국경이 왜 굶주리는 사람을 돕는 것을 방해하는가?’

이런 의문이 크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 북한 기아 소식을 알리고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남북 간 긴장이 고조되어 적십자 지원까지도 중지되어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분쟁으로 그 아이들의 굶주림을 해결했느냐?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이 분쟁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 아이들을 지원하는 것을 멈춰야 하느냐?

이 굶주림이 해결되기 전에는 활동을 멈춰선 안 된다.’

그래서 그런 가운데서도 계속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당시 한국사회 안에서는 저항을 많이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2~3년 하면 적어도 굶어 죽는다는 비극은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 후 18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해결이 안 되네요.”








Q. 북한 기근으로 얼마나 많은 북한 사람들이 사망했습니까?








“저희 통계로는 약 300만명 정도 사망한 것으로 봅니다. 두 가지를 조사했습니다.

중국에 도망 나온 북한 사람 1800여명을 인터뷰해서 고난의 행군 기간에 가족 중에 누가 사망했고

사망원인이 무엇인지 조사했고, 또 자기가 속한 인민반(20가구 정도)에서

몇 명 사망하고 원인이 무엇인지 따로 통계를 냈습니다.

그 사람들의 직업, 거주지, 나이를 조사해 직업과 거주지에 따라 그에 맞는 집단에

그 비율을 적용해서 계산을 했습니다.

제 경험이나 여러 정보를 종합해 볼 때 300만 정도 사망한 것 같습니다.

이는 당시 인구의 약 15%에 가까운 비율입니다.

큰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관심 있는 사람만 알지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조용한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한국전쟁 3년 동안 300만 정도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와 같은 수의 사망자가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조용합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죽는 자가 말을 하지 못하고 죽었다,

바깥세상에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깥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그들의 아우성을 바깥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거기에 나치오스 교수님이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교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세계에 알리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저는 조사는 할 수 있었지만 세상에 알리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교수님은 이 분야의 전문가십니다.

저와 만났을 때 하루 종일 이야기를 했고 많은 질문을 하신 뒤에

이것은 기아가 맞다고 판단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미국 여러 곳에 소개를 해주셨고 이것이 국제적인 문제가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스님께서 나치오스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 전하자 청중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곧바로 교수님도 어떻게 스님의 호소가 미국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는지

그 때의 상황을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그 때 여러 NGO들이 함께 설득해도 미국의 정치인들과 정책 입안자들은

북한에서 기아가 발생하고 있다고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정보기관이 제공하는 정보에 근거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한 번은 이례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정부 정보 담당자들을 모아놓고 스님의 북한 동향 보고회를 열었습니다.

북한 외부의 누구보다도 북한 민중들의 상황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계셨기 때문에

참 흥미로운 광경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차분하시고 위협적이지 않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그들이 스님을 분쟁의 어느 한 편이라고 생각하게 되기보다는 신뢰를 하게 됩니다.

스님이 이 사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으므로

비교적 객관적인 정보를 갖고 판단을 하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스님이 몇 시간 동안 발표하신 후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정보기관들이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정치인들은 원조에 반대를 할지언정 북한에서 기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치오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교수님이 얼마나 스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담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Q. 당시 북한 기근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요?








“동유럽 붕괴와 미국의 경제제재 등 외부요인으로 인해 외환부족으로

에너지 공급이 중단되면서 공장 가동이 중단되었고, 비료 등 농자재 공급이 중단되자

식량생산량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또 농업정책 등의 내적요인으로 농민들에게 식량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 되자

농민들의 노동의욕마저 떨어져 식량생산량은 더욱 급속히 감소하여 배급 제도가

갑자기 중단되면서 대량아사로 이어졌습니다.

배급이 끊기니까 갑자기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망했습니다.

지역적으로는 함경도 쪽에서 먼저 사망자 발생하고 서쪽으로 가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계층적으로는 노동자 계급이 먼저 타격을 받았고 농민들까지 이어졌습니다.

95~98년 사이에 아사자가 가장 많이 발생했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듯이 사람이 죽어갔다고 비유를 할 정도였습니다.

아직도 식량이 부족하고 영양실조와 아사자도 있지만 지금은 대량아사는 아닙니다.

지금 보면 그 당시에는 대량아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배급 시스템으로 공급되던 식량이 갑작스럽게 중단되니 일반 사람들은

산이나 들에 가서 풀뿌리를 캐먹는 것 밖에는 다른 대응 방안이 없었습니다.”








Q. 북한 주민들의 현재 상황은 어떤지요?








“98년 들어오면서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99년에는 대량아사는 겨우 면하여

사람들이 제각기 살 길을 찾기 시작했지만 식량생산량이 높아지는 조건은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집단 농장의 소규모화, 생산물 일부의 개인화 등 농업정책에서의 변화는 일어나고 있긴 하지만,

올해 봄에 심한 가뭄이 있은 이후 작황이 나빠져 다시 아사자가 발생한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대부분 주민의 생활은 아직 개선된 것이 없지만

평양은 물자도 많고 활기도 있고 좀 더 자유로워진 것 같습니다.

평양과 지방 사이의 간격이 더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는 비교적 안정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체제 불안은 남아있을 것입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변화를 기대했는데 3년이 지나도 기대한 만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더 큰 불만으로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나치오스 교수님과의 대담을 마무리하고 이어서 객석에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시간 관계상 짧게 세 개의 질문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북한의 무역정책은 어떤지, 북한 핵무기 실험에 대해 많이 듣는데 거기에

얼마나 자원을 투자하고 있으며 그것이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묻는 분,

홍콩 시위 때문에 스님께서 노란 리본을 달고 계신 것 같은데

혹시 홍콩 시위에 대해서 해 주실 말씀이 있는지 묻는 분 등

각각의 질문에 대해 제이슨 림의 유창하고 빠른 통역을 통해 핵심적인 내용만 짚어서

간결하게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특히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고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진상규명을 위해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달고 있습니다” 라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이 중에서 세 번째 질문에 대해 스님의 답변을 자세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특히 제이슨 림은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끝나기 전에

벌써 발빠르게 통역이 이어나갔는데 마이크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통역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외국인들이 스님의 답변을 들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장기적으로 대량아사가 북한주민들의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십니까?”

(What are long lasting effects of the famine you noticed

in the population in North Korea in terms of their psychological health?)








“첫째, 마음의 상처가 굉장히 큽니다.

특히 ‘자기 자식이 죽는데도 자기가 아무 것도 못했다’,

‘부모가 죽는데도 자기가 아무 것도 못했다’ 이런 자괴감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둘째, 분노가 있습니다.

‘국가와 당에 충성을 했는데 내 자식이나 부모가 죽을 때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에 충성심이 없어졌습니다.

통제로 유지되는 것이지 자발적 충성심은 없어졌습니다. 도덕성이 많이 붕괴가 되었습니다.

악착같이 나쁜 짓을 해서라도 노력한 사람은 살았지만 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훔치든지 뺏든지 어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살 수 있지

정상적인 룰을 갖고는 살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에 정부나 남의 말을 잘 안 믿는 습성이 생겼습니다.

그 말을 믿었다가 손해만 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20년 가까이 제대로 된 일거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실성이 많이 감소되었습니다.

한국에 북한사람들이 약 3만명 들어와 있는데요.

한국 사회에서는 그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만 생각하지 심리적인 상처는 치료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들어와서 절반 이상이 제대로 적응을 못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심리적인 상처와 믿음의 붕괴가 아주 심합니다.”








강연을 마치고 Don Bailey 연구소 부소장님과 나치오스 교수님의 연구 조교로 일하면서

국제 원조 프로젝트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원들과 약 40분간 차담을 가지셨습니다.









참석자들은 먼저 앞서 열렸던 A&M 대학에서의 스님의 훌륭한 강연에 감사를 표한 후,

몇가지 궁금한 점을 스님께 질문했습니다.

북한의 무역제재를 완화하고 경제를 개방하는 것이 북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북한 사회가 개방되어 주민들이 외부 상황을 알게 되고 자유로운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을

북한 정부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6자 회담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지 등 다양한 질문이 나왔는데,

스님께서는 답변을 하시면서 남북관계와 동북아 상황 전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먼저 남북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남북관계를 개선하려면,

한국의 보수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북한과 대화를 하고 껴안아줘야 합니다.

그런데 북한과 대화 자체를 못하니까 진전이 안됩니다.

진보세력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북한 문제를 보수가 동의하는 만큼만 풀고

국내정치에는 이용하지 않고 성과를 같이 나눠가져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양쪽 다 이렇게 안되다 보니 계속 답보 상태인 것 같습니다.

독일 같은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통일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국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안이 있고 지도자가 결정해야 할 사안이 있는데

이 두 가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인도적 지원이나 통일, 외교, 안보적 사안, 환경적 사안은 국내의 여러가지 사안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모든 것을 여론만을 바탕으로 결정하기 보다는

지도자가 미래를 보고 결정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민주국가는 점점 더 일시적 인기로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그래서 오랫동안 훈련 받는 중국의 리더십보다 약한 것 같습니다.

중국은 대신에 부정부패가 문제지만 우리는 포퓰리즘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시간이 늦어지면 다음 강연 장소인 오스틴 시내에서 퇴근길 교통 정체를 만날 수 있어

스님께서는 “시간관계상 질문을 충분히 못 받아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2시 30분쯤 차담을 마무리 하셨습니다. 연구원들은

“준비해 온 8개의 질문에 스님께서 이미 다 대답하셨다”면서 감사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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