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겁으로 지은 업장, 한 생각에 없어져라. 죄도 없고 마음 없어 그 자리가 비었으니, 빈 마음 그 자리가 진정한 참회일세”

노란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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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 [글]] 즉문즉설 '좋은 관계 맺는법 (과테말라에서)' (1) 2014/11/26 PM 01:16
일부만 퍼왔습니다.


▲ 인사말씀을 해주시는 박정식 요셉 신부님




늘 과테말라시티 강연에는 총 230여명이 참가해 높은 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오늘 강연이 있기까지 도움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강연을 시작하셨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먼저 이런 좋은 성당을 우리들의 대화 장소로 제공해 주신

과테말라 한인성당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말씀 드립니다.

인사말씀 해주신 박정식 요셉 신부님께도 감사 말씀 드립니다.

자원봉사를 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인회 관계자 여러분들이 적극적으로 후원을 해주셨는데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작은 모임도 이렇게 많은 분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있어서 이런 인연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밥을 먹을때 이런 기도를 합니다.

‘물 한방울 속에도 천지의 은혜가 깃들어 있고 밥 한톨 속에도 만인의 노고가 깃들어 있고,

한 올의 실타래 속에도 베짜는 여인의 피땀이 서려있습니다.

그러니 이 물을 마시고, 이 음식을 먹고,

이 옷을 입고 부지런히 수행정진하여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이웃과 세상에 잘 쓰이겠습니다” 라고요.

그런데 세상을 살다보면 이런 은혜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도와준 사람을 미워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런 얘기도 있죠.

밥 한톨 속에도 만인의 노고가 있음을 안다면 나와 같이 살아가는 아내와 남편,

자식은 더 바랄 것도 없는 큰 은혜를 입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태산 같이 크고 내 마음에 안드는 것은 사실 티끌 같이 작은 것인데,

그 티끌 같은 작은 일에 집착을 해서 태산 같은 은혜는 잊고 미워하거나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한 것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다 후회를 하게 됩니다.

미워하면 살아있을 때도 괴롭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게 되니까 그것 또한 괴로움이 됩니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되면 미움과 원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남을 사랑해야 된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불을 밝히면 어둠이 저절로 사라지듯이,

진실을 알게 되면, 미움과 원망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늘 이 강연은 여러분과 저의 대화입니다. 대화의 주제는 제한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뇌가 있다면 그 고뇌를 갖고 대화를 해도 되고,

또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고난을 겪다보면 도대체 인생이 뭔지 이런 의문을 품게 됩니다.

이런 의문을 갖고 대화를 해도 좋습니다. 불교니 기독교니 한국 사람이니

과테말라 사람이니 하는 칸막이를 다 걷어버리고

그냥 살아있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뇌를 가지고 대화를 해보면 좋겠습니다.

손을 드시면 됩니다. 자, 시작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17살입니다. 제가 2년 있으면 대학에 가게 되는데 한국으로 갈 생각이에요.

가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할 텐데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질문자는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질문자와 구분이 안 되는데,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요?








나쁜 것부터 구분해야 되지 않을까요?








어떤 게 나쁜 건데요?








음...








그럼 제가 하나 물어보죠. 여기가 성당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30년 넘게 성당에 참 착실하게 다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불교나 개신교로 바꿨다고 합시다.

그러면 성당에 있는 식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나쁘게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개신교나 불교 식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제 정신 차렸다고 난리겠죠.

그럼 이럴 때 어느 걸 좋다,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질문자가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만나기로 했는데,

그 사람은 영원히 혼자 살까요? 아니면 다른 여자와 또 사귈까요?








다른 사람이랑 사귀겠죠.








내가 버리면 다른 사람이 주워가요. (청중들 웃음)

다른 남자가 자기가 별로라고 하면서 버려도, 또 다른 남자가 자기를 주워가요.









이럴 때 어느 걸 나쁘고 어느 걸 좋다고 할까요?

남편이 열심히 돈을 벌어서 저축을 하고 노후를 대비해 놓으니까

부인이 절이나 교회에 열심히 다니다가 성전 짓는다,

절 짓는다 하는 곳에 남편 몰래 10만 달러를 보시해 버렸어요.

그러면 절이나 교회에서는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해요? 아니라고 해요?

훌륭하다고 난리지요.

가족들은 뭐라고 할까요? 미쳤다고 하겠지요.

그래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렇게 섣불리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은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본래 없고,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에게 인식될 때 좋은 사람으로 인식될 때도 있고,

나쁜 사람으로 인식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것을 좋다고 할까요?









보는 시점에 따라 다르겠죠.








그래요. 그럼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실래요?








제 관점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자기 관점으로 보는 게 옳을까요? 그를까요?








항상 옳지는 않지만 제가 좋다고 생각하니까 일단 저는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좋아하면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그를 나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는 나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 자체는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에요.

그냥 그 사람이에요.

질문자가 지금 나쁜 사람,

좋은 사람을 구분하려는 것은 자기 인식 상의 문제를 객관화시키려는,

즉 착각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스님, 인식 상의 오류를 어떻게 극복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 아니고,

“스님, 저는 인식 상의 오류를 범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청중들 웃음)









이 ‘붉다’, ‘푸르다’하는 것은 나의 안경 색깔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이 안경 색깔을 ‘업식’이라고 합니다.

인도말로는 ‘카르마’라고 하고,

우리의 일상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사물을 인식하는 습관,

’사물을 인식하는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나는 인식하는 틀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달라요.

기독교인과 불교인은 사물을 인식하는 틀이 달라요. 바탕화면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은 인식하는 틀이 달라요.

한국 사람은 안중근을 어떻게 인식합니까, 독립운동가, 애국자로 인식하죠.

그런데 똑같은 사건을 일본 사람의 안경으로 보면 테러리스트로 보이는 것입니다.

아내 입장에서 남편을 보면 진짜 말이 안 되는 행동을 하는데 남자는 “내가 뭘 했는데?” 해요.

“아니, 너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나?” 하면 “내가 뭘 어쨌는데?” 합니다.

남자가 부인을 볼 때에는 너무 잔소리가 많다고 느끼고,

여자가 남자를 볼 때에는 아무리 얘기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습니다.

한 쪽에서는 “아니, 그 빨간 것을 빨갛다고 딱 보면 알지, 그게 파랗다니 말이 되나?” 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저게 미쳤나, 왜 이걸 빨갛다고 하지?’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안경을 벗어버리면 “아, 빨간 게 아니네?”, “아, 파란 게 아니네?”하고 금방 해결되어버려요.

“아니네” 하면 금방 해결이 됩니다.

“아니네”하는 것이 “제상이 비상이네” 하는 것입니다.

“제상이 비상이네” 하는 것이 즉 부처의 길이고 깨달음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안경을 다 벗어야 될까요? 아닙니다. 껴도 괜찮아요.

하얗게 보여야 할까요? 아니에요. 빨갛게 보여도 괜찮습니다.

내가 빨갛게 보일 때 ‘빨갛다’고 하지 말고 ‘내 눈에 빨갛게 보인다’ 라고 알면 돼요.

“어, 그래? 내 눈에는 파랗게 보인다” 하면 “어떻게 된거야?” 하고 연구가 됩니다.

그래서 견해가 달라도 갈등이 될 수 없어요. 그러면 안경을 바꿔서 껴본다던지 하면

‘어, 그래, 네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다’,

‘아, 남편 입장에서는 저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

‘아, 우리 남편은 어릴 때 저렇게 자라서 저렇게 생각을 하는구나’ 하게 되죠.

‘아, 저 사람은 습관이 저렇구나, 생각이 저렇구나, 믿음이 저렇구나’ 하는 이해를 해야 합니다.

즉,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고,

두 번째로 '저 사람 입장에서는 저렇게 볼 수도 있구나,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이해를 하는 것이 평화로 가는 지름길이에요.

이 세상은 이해 없이 평화를 위한 전쟁을 얼마나 합니까?

또 사랑을 위한 미움을 얼마나 합니까? 그래서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이에요.

성추행이라는 게 이해 없는 사랑입니다.

딱 보고 너무 너무 좋아서 꽉 껴안고 입맞춰 버리면 성추행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억울해 해요.

“이게 왜 성추행이야? 너가 예뻐서 그랬어,

너 좋아한 것밖에 없는데 이게 뭐가 잘못 됐어?

내가 널 때렸니? 물건을 뺏었니? 널 사랑해 준 것밖에 없잖아” 합니다.

그래서 이해 없는 사랑은 폭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전부 폭력적이죠.

자기식 대로 자기가 좋으면 막 잘해주다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그 날로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사람 사귈 때 조심해야 돼요.

완전히 천사 같다가 조금 자기 눈에 안 들면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딱 구분을 하면 안 돼요.

그냥 그런 사람들인데, 내 마음에 딱 들어도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내 카르마에 파란 색으로 보이듯이 좋게 비춰지는 사람,

저 사람은 내 카르마에 나쁘게 비춰지는 사람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이렇게 보면 실수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많은 사람을 사귈 수 있어요. 좋고 싫고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 흰 벽으로 봐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늘 빨갛게도 보이고 파랗게도 보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이렇게 작동하기 때문이죠.

이렇게 작동하지 않도록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보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그것은 업식이 다 소멸되어야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업보중생이라 업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엄마가 아이가 어릴 적 아이를 키울 때 주의하라고 수도 없이 얘기하잖아요.

이 세 살 때까지 자아가 형성되는데,

이 때 형성된 안경, 이 업식은 죽을 때까지 소멸이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자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옛날부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고, '천성은 못 고친다',

그런데 천성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됐구나'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청중들 웃음)









여러분들에게 성질이라는 게 있잖아요,

'아, 저 인간 성질 더럽다'고 하잖아요. 성질은 고치기 어렵습니다.

이건 오랫동안 습관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좋고 싫고 하는 마음은 주로 습관화된 것으로부터 일어난 것이예요,

이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의식은 굉장히 이성적으로 작용하고 무의식은 굉장히 감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용하는 자기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기분이 나쁠 때, ’저 사람 나쁘다‘고 보지 말고 ’내 카르마의 반응이 나쁘게 작용을 하는구나‘,

’내 카르마에 좋게 작용하는구나‘ 해야 합니다.

’저게 빨갛구나‘가 아니라 ’내 눈에 빨갛게 보이는구나‘ 해야 해요.

그렇게 하면 세상 온갖 사람들을 다 사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누군가와 절대 원수가 안 됩니다.

내 카르마에서는 좋게 만났는데 나중에 나쁘게 인식하면 원수가 되거든요.

그래서 좋게 보였다가 나쁘게 보였다가 합니다.

여기에 자꾸 좌우되게 되면,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이치를 알아도 또 똑같이 작용을 합니다.

무의식의 바탕이 그대로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착각에서 자꾸 벗어나야 합니다.

질문자는 여기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국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국에서 살던 사람과 조금 다를 거예요.

한국 사람이라서 다 비슷한데 또 지역에 따라서

전라도, 경상도가 조금 다르고, 집안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국에 간다고 좋아서 가지만,

조금 있으면 ‘아, 이해 못하겠다, 이 인간들 왜 이러지’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럴 때 이런 것을 알면, ‘아, 저 사람 눈에는 저렇게 보이네’ 하고 사람을 이해하게 되죠.

‘나쁘다’가 아니라 ‘저런 습성이 있네’하고 이해해 들어가면

인간에 대한 폭넓은 관계가 맺어집니다.

결과적으로 좋은 관계가 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중들 박수)








질문한 고등학생은 스님 답변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청중들도 큰 박수를 보내줍니다.









마지막으로 스님께서는 마음의 원리를 알아가는 것이 수행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닫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하세요.

도움 받으려 하지 말고 도움을 주세요.

이해 받으려 하지 말고 이해 하세요.

이것은 남을 위해서 하라는 것이 아니예요.

그렇게 할 때 누가 평화스러워 지나요? 내가 평화스러워집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내가 괴롭다는 거예요.

그를 이해하면 미움이 사라지죠. 미운 놈인데 미워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예요.

참으니까 세 번 참다가 터지고, 네 번 참다가 터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랬구나’ 이해하라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가 해나가면 안고쳐져도 부작용이 적고, 시간이 지나면 고쳐져요.

그래서 누구나 다 자기 삶을 지금보다는 훨씬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어요.

교회 다니면서 그렇게 해도 되고, 절에 다니면서 그렇게 해도 되고,

종교 없이 그렇게 해도 됩니다.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종교가 뭐든 관계 없이

우리들의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원리를 알아서 수행을 해나가면 누구나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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