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욕심을 내려놓았더니 마음은 편안해졌는데
의욕을 잃고 멍청해지는 것 같아 고민인
중년 여성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중년의 아줌마입니다.
어렸을 때는 의욕도 많고 잘 웃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사회에 나와서 열심히 살다가
나이 50이 되어 다시 제 얼굴을 봤는데
사납고 욕심도 많고 피곤에 지쳐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그 모습이 갑자기 너무 싫어져서 방향을 바꿔보자고 생각을 했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하고
다시 보니 웃음도 생기고 편안해진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있는 반면에 어느 순간에는 의욕을 다 잃어버리고 멍청하게 앉아 있고,
그냥 창밖만 바라보고 있고,
누가 불러도 잘 안나가는,
그런 내가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욕심만 내려놓자고 했는데 내가 하고자 하는 것까지 내려놓아져 있더라구요.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갈팡질팡 하고 있습니다.
지금 질문자의 앞뒤 말에는 모순이 있어요.
바깥에서 불러도 잘 나가지도 않고 멍청하게 천장만 쳐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얼굴에 웃음끼가 생길 수 있어요? 말이 안맞는 것 같네요.
생각을 많이 놓아버리니까 그 웃음이 행복한 웃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건 멍청한 것이지요. 전에는 쫓겨다니다가 지금은 멍청해진 것이지요.
오십보 백보네요.
아직 지평선 위로는 못올라오고 밑에서만 놀고 있는 거예요.
한번은 쫓겨서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한번은 쫓겨다니지 말아야지 하고 멍하게 앉아있는 겁니다.
밥 먹고 싶다는 것은 욕심이 아니예요.
배고프면 밥 먹으면 되는 되죠.
중생 세계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욕구에는 세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는 생존적 욕구입니다.
배고프면 먹으려고 하고 졸리면 자려고 하고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고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는,
이런 것을 생존적 욕구라고 해요.
이것을 사회적 용어로 표현하면 ‘기본적 욕구’라고 해요.
기본적 욕구는 충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충족이 안되면 인간에게는 고통이 오는데 이것은 생존에 따르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이런 기본적 욕구는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상대적 욕구가 있어요.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남보다 더 많이 갖고 싶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싶다, 더 좋은 옷 입고 싶다,
더 편하고 싶다, 이것은 상대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대적인 욕구는 끝이 없어요.
비교에 의해서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에 어느 선까지라고 정해질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10만불을 가졌을 때 주위가 다 1만불 밖에 안가지고 있으면 만족을 해요.
그런데 주위가 다 100만불을 갖고 있으면 내가 굉장히 가난한 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100만불을 갖는다고 해도
다시 주위가 1000만불을 갖고 있으면 나는 역시 빈곤한 것이 됩니다.
GDP가 4만불이 되고 10만불이 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예요.
이것은 항상 비교에 의해서 일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행복도를 높이는 방법은 두 가지예요.
첫째는 사회제도적으로는 빈부격차가 적은 것이고,
둘째는 개인의 기대치가 적으면 만족도가 높아집니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 중에서도 행복도가 아주 높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인 욕구는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해요.
이것은 끝까지 따라 가봐야 영원히 이뤄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선에서 스스로 절제할 줄 알아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제도적인 보완장치를 해줘야 합니다.
세 번째 욕구는 과욕입니다.
만약 과식을 했다면 입은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몸에는 나쁘잖아요?
과음을 했다, 과로를 했다, 이것은 다 과욕이고 자기를 헤치는 겁니다.
개인은 과욕을 버려야 하는 것이고,
제도적으로는 과욕을 부리지 못하도록 규제를 해야 합니다.
이 과욕을 세상에서는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상대적 욕구는 ‘욕망’이라고 부릅니다.
생존적 욕구는 ‘기본 권리’ 라고 부릅니다.
‘기본 권리’는 보장해야 하고 ‘욕망’은 절제를 해야 하고 ‘탐욕’은 규제를 해야 돼요.
그런 기준에서 질문자가 탐욕을 부렸다면 버려야 하고,
욕망을 쫓았으면 끝간데 없이 가니까 절제를 할 줄 알아야 하고,
기본적 욕구의 문제라면 그것은 기본 권리이기 때문에 오히려 보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질문자가 욕망을 쫓다가 그걸 버리니까 무기력해졌다 하는 것은
과욕이나 욕망을 쫓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쫓고 있는데 현실은 채워지지 않아 지쳐서 멈추니까
뒤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어떻게 해야 되나 망설여지는 거예요.
담배를 피울 때는 어느 담배가 더 맛있느냐,
술을 마실 때는 어느 술이 더 좋으냐 하면서 그걸 갖고 신분이 높다는 것을 과시했지만,
술이 나쁘고 담배가 나쁘다는 것을 알았다면 딱 끊어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걸 끊어도 과거의 습관이나 가치관을 못 버리면
다른 사람이 좋은 담배를 피거나 좋은 술을 먹을 때
나만 세상에 뒤쳐진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이것은 아직 가치관의 전환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술을 먹어도 안 먹는 것보다 못하고
아무리 좋은 담배를 피워도 안 피우는 것보다 못합니다.
이렇게 가치관의 정립이 딱 안되면 그걸 안해도
아직도 중독성이 남아 있으니까 버리기가 너무 아까운 겁니다.
그래서 허전해지고 방황하는 겁니다.
몸은 멈추었을지라도 아직 가치관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좋으면 다시 일어나서 따라가고 앉아서 부러워하지 마세요.
저는 큰 집에 가면 스윽 둘러보고 ‘아이고, 청소하기 힘들겠다’ 하거든요.
큰 것이 좋은 게 아니예요.
그러나 큰 것이 좋다는 생각을 못버리면 계속 소비를 증폭하게 돼요.
그래서 지구환경까지 오염시켜서 같이 지구멸망의 구렁텅이로 나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런 소비 중독은 마약보다 더 무서운 겁니다.
현대 문명은 소비 중독입니다.
이 소비주의가 그 어떤 것보다 인류를 위협하는 첫 번째 사안입니다.
소비에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스트레스 받으면 신발을 열 켤레를 사야 마음이 가라앉고,
계속 차를 바꾸거나, 집을 넓히거나, 이래야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는 겁니다.
골프를 치러 외국으로 가야 된다든지, 명품 브랜드 가방을 사야 된다든지,
그래야 만족이 되지 안 그러면 뭔가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가방은 물건만 담기면 되지 어떤 상표가 붙는지가 뭐 그리 중요해요?
이런 식으로 과소비로 계속 흘러가면 폐기물이 엄청나게 많아 환경오염이 심각해지죠.
그런데 이것은 멈춰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의 최대위기는 소비 중독입니다.
과연 누가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느냐.
이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희망이예요.
그런데 아직 소비주의를 이기는 사상을 못봤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이미 완전히 소비주의에 중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님이 아니고 돈이 주님입니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돈으로 표시되지 않습니까.
교회가 크고 신자가 많고 수입이 많은 것이 성공의 징표가 되었어요.
또 여러분이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는 것도 다 돈으로 표현되잖아요.
그런데 돈이 주어져도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
그게 가능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흙탕물 속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을 때 극복했다고 말하지
멀리 떨어져서 경험을 못해봐서 지켜지는 것이라면 극복한 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물들지 않는 건 좋은 일인데
그러나 그것은 현대 문명을 구제할 새로운 대안은 아직 되기가 어렵습니다.
이건 우리들 전체가 다 안고 있는 문제예요.
이 소비주의에 중독되어 우리들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뒤처지면 나혼자만 낙오자가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죠.
이렇게 소비주의가 질주하고 있는 현상태에서
자신이 거기에 따라갈려니 지치고 헐떡거리고 악쓰게 되고,
그러지 않으려고 멈추니까 낙오자 같은 이런 심리예요.
이건 별다른 처방책이 없어요.
이렇게 생각하면 도움이 돼요.
이렇게 질주를 하면 맨 마지막은 뭘까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경쟁하면서 달리다보면 맨 끝은 뭘까요? 낭떠러지입니다.
빨리 갈수록 빨리 죽는 거예요.
끝이 낭떠러지인줄 알면 빨리 가는 게 별로 부럽지가 않아요.
그런데 질문자는 끝이 낭떠러지인줄 지금 모르고 끝이 천국인줄 알기 때문에
따라가려니 헐떡거리고 가만히 있으려니까 뒤처지는 것 같고,
그래서 생긴 고민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빨리 가봤자 낭떠러지다’ 이것을 늘 생각하세요.
스님은 그 끝이 낭떠러지인줄 알기 때문에 빨리 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별로 안 부러워요.
때로는 불쌍하게 느낄때도 있어요.
그러나 자기가 좋아서 가는 거니까 어쩌겠어요.
고맙습니다.
10명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으로 스님께서는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정리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꼭 명심해야 하는 것은 첫째,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항상 아침에 눈을 뜨면 ‘아이고 오늘도 살았네.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낼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이해없는 사랑은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보고 싶다,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욕망입니다.
좋아한다는 데는 반드시 요구가 있습니다.
내가 너 좋아하니까 너도 나 좋아한다고 해라 이렇게 요구가 따라다녀요.
이 요구를 버려야 합니다.
최고의 사랑은 나와 다른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당신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네’ 이렇게 이해하는 겁니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에 준하고 부처님의 자비에 준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대가 높으면 실망이 커지고 기대가 낮으면 만족이 커집니다.
내가 기대가 높으면 불행해지기가 쉽고 기대를 낮추면 행복도가 높아지는 거예요.
기대를 낮춰서 행복도를 높이는 일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의 목표를 지나치게 높게 설정합니다.
자기를 과대평가 합니다.
그래서 자기 부족함에 늘 헐떡거리는 겁니다.
자신이 힘들 때는 자신을 다람쥐와 한번 비교해 보세요.
‘이럴 때 다람쥐는 어떨까’ 헤아려보고
‘내가 다람쥐보다 못하네’ 하면 정신을 좀 차려야 됩니다.
남편이 죽었든 자식이 죽었든 병이 났든 지금 살아있는 것은 행복이예요.
그런 마음으로 지금보다는 더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