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앉아 있는 딸에게 마이크 한번 줘봐요.
스님하고 얘기하면 재미있어요.
학생은 뭐가 엄마한테 불만이에요? 그냥 얘기해봐요.
(지금부터는 딸과 스님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불만 없어요.
미인이지요? (청중들 “네” 하면서 웃음) 제가 얘기했잖아요.
잘 생긴 사람이 성형한다구요. 스님같이 못생긴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할 여가도 없어요.
학생은 지금 뭐가 힘들어요?
힘든 것 없고요. 그냥...
그런데 왜 엄마가 힘들다고 그래요?
(울음)
힘든 것 없는데 왜 울어요?
그냥 눈물이 막 나요.
엄마 눈물 닮았구나. 엄마 딸 아니라 그럴까 싶어서 그래요. (청중들 웃음)
공부하는 것이 힘들어요?
공부하는 게 힘든 게 아니고, 그냥 저보면 한심해요. 그냥 제가 싫어요.
그냥 다 불만이 많아요. 얼굴도 그렇고 그냥 다요. 그냥 못 생겼어요.
(청중들 “어머, 매력적으로 생겼는데…”)
그냥 못 생겼어요?
영화배우들을 너무 쳐다보다가 저래 생겨놓으니 그래요. (청중들 웃음)
영화배우보다 못 생긴 것은 맞아요. 못 생겼어요. (청중들 웃음)
자, 여기 스님 책상 앞을 봐요.
여기 마이크 스탠드가 있고 여기 물병이 있고, 여기 물잔이 있어요.
자, 여기 물병을 들고 마이크 스탠드하고 비교하면 물병은 커요? 작아요?
작아요
물잔하고 비교하면 커요? 작아요?
커요.
그러면 이 물병 하나만 딱 놓고 보면 커요? 작아요?
모르겠어요.
지금 본인이 한 번은 크다고 그러고 한번은 작다고 그랬는데 비교해서 얘기했잖아요.
그러면 비교하지 말고 물병 하나만 딱 놓고 보면 커요? 작아요? 물병 이것 자체는요?
몰라요.
그러니까 이 물병은 이 스탠드하고 비교하면 작다.
이 물잔하고 비교하면 크다가 돼잖아요.
그러면 크다 작다라고 하는 것은 이 물병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인식 상에 있어요.
즉 스탠드하고 비교해서 인식할 때는 작다고 머리가 인식을 하고,
물잔하고 비교해서 인식할 때는 크다고 머리가 인식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 물병은 크다고 할 수도 없고, 작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런데 이 물병이 나한테 인식이 될 때 어떤 때는 크다고 인식이 되고,
어떤 때는 작다고 인식이 된다 이말이에요.
그러니까 큰 것하고 비교하면 작다고 인식이 되고,
작은 것하고 비교하면 크다고 인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물병 자체를 두고 크냐 작냐고 물으면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지요.
그래서 크냐 작냐고 묻는 그 용어를 빌려서 대답을 하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스님이 묻기를 ‘크냐? 작냐’고 하면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가 되고요.
스님이 묻기를 ‘무거우냐? 가벼우냐?’고 하면
‘가벼운 것도 아니고 무거운 것도 아니다’가 되고요.
‘새것이냐? 헌것이냐?’ 라고 물으면
‘새것도 아니고 헌것도 아니다’가 되고요.
‘긴가? 짧은가?’ 라고 물으면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다’가 됩니다.
즉 존재 그 자체는 존재 그 자체일뿐이지, 이것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에요.
이것을 한문으로 고쳐서 말하면,
‘비대비소’,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이것을 선적이 언어로 표현하면 ‘다만 그것이다’,
‘다만 그것일 뿐이다’.
이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공이다” 그래요.
그러면 여기서 자네는 지금 이 물병을 가지고 작다고 얘기해요.
작다고 얘기할 때는 스탠드하고 비교할 때 작다고 했는데,
지금 본인이 못생겼다 라고 하는 말은
지금 본인이 영화배우하고 본인의 얼굴을 비교해서 못생겼다 이렇게 생각한다 이말이에요.
그러면 본인은 죽을 때까지 못생겨요.
이 물명을 계속 스탠드하고만 비교하면 나는 영원히 작아요.
그래서 내 존재 자체가 작은 줄 아는데 원래는 작은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비교를 스탠드하고 하기 때문에 작다고 인식되는 거예요.
이 물컵하고 비교를 하면 크다고 인식이 돼요.
자네가 2m 키의 사람과 비교를 하면 늘 작아요.
그런데 150cm 키의 사람과 비교하면 늘 커요.
그러면 자네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못 생긴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추한 것도 아니고,
착한 사람도 아니고 악한 사람도 아니고,
공부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공부 못하는 사함도 아니고,
‘나는 그냥 나다’ 이거예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과 반 편성을 하면 자네는 꼴찌를 해요.
그런데 본인보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과 반 편성을 하면 본인은 일등을 해요.
그러면 비교해서 일등하고 비교해서 꼴찌를 하는 것이지,
일등한다고 공부 잘 한다, 꼴찌한다고 공부 못 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 소중하다,
있는 그대로 완전하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는 본인보고 못 생겼다느니,
잘 생겼다느니 하지 말고,
본인이 못 생겼다 해도 본인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고,
본인이 잘 생겼다 하고 우월감을 가져도 본인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본인은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못 생긴 것도 아니고,
키가 큰 것도 아니고 키가 작은 것도 아니고, 잘난 것도 아니고 못난 것도 아니고,
공부 잘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착한 아이도 아니고 악한 아이도 아니고, 나는 다만 나다.
그것은 다만 그것일 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 다
존엄하다. 소중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차별해서는 안 된다.
피부 빛깔이 검다고 희다고 차별해도 안 되고,
남자 여자라고 해서 차별해도 안 되고,
신체 장애 유무를 가지고 차별해도 안 되고,
성적 지향을 가지고 차별해도 안 되고,
태어남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을 가지고 차별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이것이 불교 철학의 가장 핵심이에요.
그러면 지금 본인은 잘 생겼어요? 못 생겼어요?
못 생긴 것도 아니고 잘 생긴 것도 아니에요. (청중들 박수)
그래요. 그럼 본인은 공부 잘 해요? 못 해요?
못하는 것도 아니고 잘하는 것도 아니에요. (청중들 박수)
나는 나다, 아시겠어요?
지금 자네 실력을 가지고 전국에서 꼴찌하는 학생들 모아놓고
그 반에 자네가 들어가면 일등을 하겠지요.
전국에서 일등하는 아이들만 모아놓은 자리에 자네가 들어가면 꼴찌 하겠지요.
그러니 꼴찌했다고 공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일등했다고 공부 잘하는 것도 아니에요.
이번 시험에 성적이 올라갔다고 내 실력이 좋아진 것도 아니고,
낮아졌다고 나빠진 것도 아니에요.
내가 공부 안하고 놀아도 다른 친구가 내보다 더 놀아버리면 내 성적이 올라가고,
내가 죽어라고 공부해 갔는데 다른 애들이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버리면 성적이 못 나오고 그러는 것이지요.
시험은 다만 상대적 평가를 할 뿐이에요.
그러니 본인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지,
본인을 못났다든지,
열등의식을 가져도 안 되고 거꾸로 잘났다 하는 우월의식을 가져도 안돼요.
알았지요?
네, 감사합니다. (청중들 박수)
그래요. 딸이 엄마보다 훨씬 낫네요. (청중들 웃음)
딸은 말귀를 알아듣는데 엄마는 도대체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청중들 웃음)
한국말이 서툴다고 못난 여자도 아니고,
본인은 뭘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나는 나일 뿐이다’
그런 자신감을 가져야 애들이 좋은데
엄마가 저렇게 자신감이 없으니까 아이들도 영향을 받는 거예요. 알았지요?
그러니까 앞으로 자꾸 나는 못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돼요.
그렇다고 나는 잘났다 이래도 안되고요.
잘못했으면 ‘죄송합니다’ 이러면 되고,
틀리면 ‘아이고 틀렸네요, 고치겠습니다’ 하고,
모르면 물어서 알면 되고요.
그런것을 가지고 우리가 위축될 필요가 없어요.
스님이 지금 말을 쉽게 해도 이것은 굉장한 철학이에요.
이것이 전부 반야심경, 금강경 교리의 요점이에요.
우리가 지금 믿고 있는 종교는
성인의 말씀은 성인의 말씀으로 따로 하고,
생활은 생활대로 따로 하고 그래서 지금 문제예요.
그래서 절에 다니고 교회에 다녀봐야 삶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것은
그것은 하늘의 얘기 따로 두고 땅의 얘기 따로 두고
이렇게 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땅과 하늘이 둘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있는 그대로 다 존엄하다. 소중하다
이 부분에서 감동이 막 ㅎㅎ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해서 다시 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