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편안하게 맺는 방법을 물었던
첫 번째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불안함을 많이 느끼는 편입니다.
친구나 직장동료뿐 아니라 가족들에 이르기까지,
주변 사람들이 행여나 저를 싫어하거나 저에게 실망하는 게 너무 싫어요.
그래서 무언가를 선택할 때 다른 사람들이 실망할까 봐
제가 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이럴 때마다 자신에게 미안하고, 실망스럽고, 답답한 마음이 듭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조금 편안해질 수 있도록 도움이 될 만한 조언 부탁드립니다.
질문자는 잘난 사람이에요? 못난 사람이에요?
저 스스로는 많이 못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잘났다는 거예요? 못났다는 거예요? (청중 웃음) 잘났다는 거네요.
그런데 부처님보다는 잘났어요? 못났어요?
못났습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당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을까요? 안 받았을까요?
받으셨을 것 같아요.
예수님보다는 잘났어요? 못났어요?
못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받으셨습니다.
받은 정도가 아니에요.
그렇게 훌륭하신 분도 혹세무민한다는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질문자가 뭐 얼마나 잘났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 주겠다고 해요?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하면 안 돼요.
법륜 스님을 비난하는 사람도 많아요.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그들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생각과 느낌을 규제할 권리가 없어요.
‘너는 나보고 항상 칭찬만 해라’ 이러는 건 독재예요.
그러면 북한처럼 돼요. 99퍼센트 다들 칭찬만 하잖아요.
그렇다고 북한 가서 살고 싶지는 않잖아요.
사람은 다섯 가지만 잘 살피면 됩니다.
첫째, 남을 해치면 안 됩니다. 내가 남을 때리거나 죽이는 것이 여기 해당됩니다.
둘째, 남을 손해 끼치는 건 안 됩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것이 여기 해당됩니다.
셋째, 남을 괴롭히는 것은 안 됩니다. 즉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하는 것은 안 됩니다.
넷째, 말로도 남을 괴롭히거나 손해 끼치는 건 안 됩니다.
거짓말하거나 욕설하는 게 여기 들어가요.
다섯째, 술 마시는 것까진 괜찮지만 술을 마시고 취해서 주정하거나 행패를 부리면 안 돼요.
술 마시고 남을 괴롭히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이 다섯 가지를 제외하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됩니다.
또 남이 어떻게 살든 내가 간섭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기 때문이에요.
질문자가 만약 학교 선생님이라면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조는 것은
이 다섯 가지에 안 들어가니까 야단치면 안 돼요.
공부를 못해서 이번 시험에 성적이 떨어진 것도 다섯 가지에 안 들어가니 야단치면 안 돼요.
야단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칭찬해줘야 해요.
다른 아이 성적을 올려줘서 남에게 이익을 줬잖아요. (청중 웃음)
그런데 지금 선생님이나 부모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잘못했다고 야단을 치기 때문에
우리 교육이 문제예요.
수업 시간에 떠드는 건 이 다섯 가지 안에 들어가니까 이야기해야 해요.
‘수업 시간에 떠들지 마라.
네가 말할 자유는 있지만 남의 공부를 방해할 자유는 없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때려야 할까요?
방금 전 1번에서 때리지 말라고 했으니 선생이라 해도 다른 사람을 때리면 안 돼요.
4번에서 이야기했으니 욕해도 안 돼요.
‘계속 이야기하려면 운동장에 나가 놀아라’ 이래야 해요. (청중 웃음)
그런데 수업시간에 조는 것은 남에게 손해 끼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일입니다.
남에게 손해 끼치는 것은 나쁜 행동이에요.
자기가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동은 나쁜 행동은 아니지만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야단치는 게 아니라 깨우쳐줘야, 즉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래서 조는 아이는 깨워줘야 합니다.
깨울 때 야단치거나 짜증내거나 성질내며 깨우면 안 됩니다. 나쁜 짓이 아니니까요.
깨워도 깨워도 못 일어나면 담요 덮어주면서 더 자라고 둬야 합니다. (청중 웃음)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 합니다.
세 살짜리가 이웃집에 가서 놀다가 친구의 장난감을 빼앗으면 세 살짜리라 해도 야단쳐야 해요.
세 살짜리라도 다른 아이를 밀쳐서 넘어뜨리면 야단쳐야 해요.
그럴 때 성질을 내면 안 돼요. 잘못된 행동이라고 확실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여러분들은 자녀를 키울 때 잘못하지 않은 것은 야단치고
잘못한 것은 야단을 안 치기 때문에 교육의 가장 핵심인 가정교육이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와서도 제멋대로들 하는데, 학교 교육으로 이걸 되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학교 교육도 무너지고 사회적 질서도 무너지고 있어요.
청소년 폭력, 학교 폭력이라는 게 살펴보면 다 위에서 말한 것들이에요.
다른 아이 때리는 것, 물건 빼앗는 것, 성추행하는 것, 욕설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니 질문자는 위에서 말한 이 다섯 가지가 아니면 남의 눈치 볼 것도 없고
남한테 간섭할 것도 없이 당당하게 살면 돼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그 사람의 자유예요.
오늘 강연만 해도 그래요.
‘스님 법문 듣고 감동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부처님 이야기 들으러 왔더니 스님이 2시간 내내 부처님 이야기는 안 하고
애 키우는 이야기며 부부 관계 이야기만 하더라’ 하고 실망해서 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걸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그건 그 사람의 자유예요.
사람마다 요구며 취향이며 취미며 기대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어릴 때 유치원에 같이 다녔던 친구가 생각나요.
초등학교도 같은 반에 들어갔는데 이 친구가 왕따를 당하는 걸 제가 봤어요.
그때 같이 놀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혹시 그런 상황에 내가 빠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걸 요즘 의학적인 용어로 ‘트라우마’라 해요.
어릴 때 상처받은 기억이 다 커서 어른이 된 지금까지 지배를 하는 거예요.
그때의 내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몸은 커서 어른이 되었지만 어릴 때의 기억이 뇌리에 남아서 현재의 삶을 두렵게 만들고 있어요.
질문자가 그 아이와 놀아줬다면 좋았겠죠.
그러나 그것도 질문자의 과대망상이에요.
자기가 어른이 되어서야 생각할 수 있는 걸 아이였던 당시의 자신에게 요구하잖아요.
지금 어른인 질문자는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가 그렇게 생각하기란 천 명 중 한 명도 힘들어요.
저도 어릴 때를 돌아보면 아쉬움이 굉장히 많아요.
제가 초등학교 때 구슬치기며 딱지치기를 굉장히 잘 했는데,
산더미같이 딴 게 지금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하나도 없어요.
시합해서 따는 건 좋지만, 다 놀고 집에 돌아갈 때는 돌려줬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어차피 지금은 하나도 남아 있는 게 없는 걸요.
만약 그랬다면 스님을 취재하는 기자가 어릴 적 친구들을 인터뷰하면
‘야, 스님은 어릴 때부터 달랐다.
구슬치기해서 따고도 집에 가기 전에 다시 나눠주더라’ 이렇게 말해줄 텐데요.
그런 걸 돌아보면 저도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요. (청중 웃음)
그런데 그때는 내가 어리기 때문에 그런 지혜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지금 가서 인터뷰하면 제 친구들이 해줄 말이 ‘법륜 스님은 어릴 때 딱지 잘 쳤다.
그래서 우리 딱지 다 따 가버렸어’ 이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게 어릴 때의 나입니다.
그런 나를 너무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의 나는 어린아이니까 어른의 생각을 못 하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언젠가 인도에서 장기간 명상을 할 때의 일입니다.
명상하다가 어떤 생각이 딱 떠올랐어요.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우리 학년 전체가 36명에 불과한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어쨌든 거기에서 제가 공부를 1등 하고 한 친구가 2등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6년 내내 1등이었으니 그 친구는 1등을 한 번도 못 해봤잖아요.
그런데 그 어린 아이가 1등 해보고 싶어 하는 그 간절한 마음이 그 때 떠올라서 마음이 아팠어요.
제가 지금이라면 아마도 친구가 1등 하고 싶다 하면
‘그래, 너도 한번 해라’ 하겠죠. 그거 1등 계속 해서 뭐 하겠어요?
그때 제가 그런 지혜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계속하는 건 과대망상입니다.
자기를 너무 훌륭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면 그런 망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을 할 줄 모르니까 어린애인 겁니다.
질문자가 그럴 때 딱 나서서 왕따 당하는 친구를 감싸주고,
때로는 대신 맞아가면서도 보살피고 놀아줬다면 질문자는 예수님의 반열에 올랐을 거예요. (청중 웃음)
그래서 제가 질문자더러 부처님이며 예수님보다 낫냐고 물어보잖아요.
그때 못해준 게 미안한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어려서, 어리석어서 그런 거예요.
어리다는 건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 어리석음을 깨우쳐야 해요.
내가 그때 딱지나 구슬을 못 돌려줬다고 늘 후회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그때의 나, 어린 나의 모습입니다.
다만 이 경험을 갖고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그 구슬이나 딱지 같은 게 뭘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여든이 되어 또 지금을 돌아보면 어린 시절의 딱지며
구슬 같이 지금의 내가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 보일 겁니다.
과거의 경험을 후회할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서 지금 나에게 그 구슬 같은 것이 없는지 살펴야 해요.
‘지금 내 생각에는 굉장히 중요하다 싶지만 내가 죽을 때 되돌아보면
아무 필요 없는 것을 혹시 움켜쥐고 있는 건 없을까?’ 하고요.
예를 들어 제가 스님이랍시고 목에 힘주고 다닌다면 죽을 때 돌아보면서 좀 부끄러울 거예요.
목에 힘 빼라고 스님이 됐는데 스님이라고 힘줄 게 뭐 있어요?
이렇게 자기 잘났다고 목에 힘주고 다니는 걸 ‘아상(我相)’이라고 해요.
아상을 버리겠노라며 머리 깎고 스님이 되는데, 스님이 되면 아상보다 더 센 ‘중상’이 생깁니다.
절에 가면 여러분도 은연 중에 스님들에게서 권위주의적인 것을 느끼잖아요. (청중 웃음)
후회는 반성이 아닙니다.
후회는 ‘내가 잘났다’ 하는 것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나처럼 잘난 인간이 어떻게 바보처럼 그때 그걸 못 했을까?’ 이게 후회예요.
그때 그런 수준이 나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요.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다 커서도 반복하지 않으려면
지금 나에게 그때의 구슬 같고 딱지 같은 게 무엇일지를 늘 살피면서
나중에 또 20년쯤 세월이 지나 돌아봤을 때 후회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지요.
이게 과거의 실패가 현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이제 다 컸으니 지금 우리 가족이나
내 주변에 혹시 왕따 당하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고 보살펴주세요.
예를 들어 친정에서 올케 언니를 누가 구박한다면 내가 편이 되어 주고,
시댁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있으면 또 편이 되어줄 수 있어요.
과거 나의 어리석었던 행동을 반성한다면 지금 그것이 교훈이 될 때 의미가 있지,
후회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질문자는 지금 자기 잘났다는 생각을 못 버려서 아직도 후회하고 있는 거에요. (청중 박수)
왜 그런 걸 물어서 제 과거 치부를 다 드러내게 만들어요. 하하. (스님 웃음)
후회는 내가 잘난 맛에 생긴 거예요.
부모가 죽으면 불효자가 더 많이 울고 후회한다고들 하죠. 후회는 참회가 아닙니다.
교회 표현을 빌리자면 회개가 아니에요.
‘잘난 내가 왜 그때 바보같이 그랬을까?’
이렇게 ‘잘난 나’라는 게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후회를 하는 거예요.
남을 용서 못하는 게 미움이라면 자기를 용서 못하는 게 후회입니다.
후회를 반성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후회는 또 다른 집착입니다.
정말 반성을 했다면 ‘아, 그때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깨달았을 때
앞으로 다시는 그런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야 해요.
넘어지면 앉아서 울지 않고 다시 벌떡 일어나서
‘다시는 넘어지지 말아야지’ 하는 걸 참회라고 해요.
육조 혜능대사는 참회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요,
회(悔)란 다시는 허물을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그냥 ‘내가 잘못했구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했구나.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지’까지 가야 참회입니다.
그래도 또 잘못할 수 있어요. 그러면 또 이런 나를 나무라지 말고
‘잘못했구나’ 하고 알아차려서 ‘다음에는 잘못하지 말아야지’ 해야죠.
이렇게 인생은 연습입니다.
명쾌한 답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은 남을 고치려고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상대와 세상을 이해하면서
행복한 마음으로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
요즘 사회적인 문제로 스트레스들을 많이 받는다고 해요.
그런데 스트레스라는 것은 자기 뜻대로 하려고 들기 때문에 받는 거예요.
그게 잘 한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의 입장이 되어서 그 사람들이 내 친구, 내 배우자, 내 자식이라 생각하고
들어보면 다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래서 이해가 중요합니다.
이해가 되면 스트레스를 안 받고 화가 안 납니다. 그게 옳다는 말이 아니에요.
그러나 이해는 되지만 여전히 생각이 다르다면 우리는 자기 생각대로 살 권리가 있고,
자기 생각을 밝힐 권리가 있고, 자기 견해를 주장할 권리도 있습니다.
자기 권리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이해한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라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남을 고치려고는 하지 마세요. 쉽게 안 고쳐집니다.
내 자식도 못 고치는데 어떻게 남을 고치겠어요?
남을 고친다면 제일 쉬운 게 내가 낳아서 내 마음대로 키운 내 자식일 텐데 못 고치잖아요.
그보다 더 쉬운 건 자기 자신이고요.
그런데 다들 자기도 못 고치잖아요. 자기 고치기도 쉽지 않고,
제 자식 고치기는 좀 더 어렵고, 제 배우자부터는 고치기가 정말 어려워요.
남의 자식인데 내가 어떻게 고치겠어요? (청중 웃음)
그러니 너무 그렇게 남을 고치려 들지 말고 세상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냥 안주하라는 게 아니라, 그러면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내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북한이 저렇게 하더라도
위험을 관리하면서 평화통일을 만들어가야 하고,
일본이 저렇게 하더라도 외교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잘 풀어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 사회와 정치의 상황이 이러저러하더라도 이 속에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권리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몫이에요.
화내고 짜증내면 폭력적인 분풀이밖에 안 나옵니다.
화가 나면 폭력적으로 가게 돼요.
이것은 개인적으로도, 수행적인 차원에서도, 민주사회에서도 올바른 방식은 아닙니다.
잘났다는 마음이 후회를 만든다는 게 참 많이 다가왔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