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과거에 교회, 성당에도 다녀보고 지금은 불교에 관심이 생겨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기도할 때는 ‘오늘도, 현재도 살아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주만물을 주관하시고...’ 이렇게 하거든요.
하나님은 살아계시면서 우주만물을 주관하고 계시는데,
그러면 부처님은 2600년 전에 해탈하셔서 지금 어디서, 뭘 하고 계신지요?(모두 박장대소)
다들 궁금하지 않으세요?
부처님께서 살아계셔야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108배를 했을 때 무슨 효험을 기대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점이 기독교와 너무나 큰 차이인 것 같아서요."
"질문자 입장에서는 근본적인 질문이겠지만 수행적 관점에서는 그걸 ‘망상’이라고 합니다.(모두 웃음)
왜 부처님이 어디 가서 무얼 하고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느냐는 거예요.
바로 그게 사고 방식의 차이입니다.
이 컵을 볼 때도 사람들의 관점이 다양해요.
이 컵을 봤을 때 ‘저게 물컵인가? 커피잔인가? 밥그릇인가?’ 이렇게 용도적 측면을 보는 사람이 있고,
‘야, 저건 뭘로 만들었을까?’ 이렇게 소재적 측면에서 보는 사람이 있고,
‘야, 저건 누가 만들었을까?’ 이렇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 중에도 질문자는 ‘저 컵은 누가 만들었을까?’라고 보는 입장인데,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저 컵을 누가 만들었을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현재 기독교의 사고방식이 ‘저 컵은 누가 만들었느냐?
저 컵을 만든 사람은 지금 어디 가있느냐?’고 보는 입장인 거예요.
그러니까 질문자가 말한 것은 사물을 보는 다양한 관점 중 하나일 뿐이에요.
우리는 저 컵을 누가 만들었는지, 그걸 만든 사람이 지금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그 사람이 지금 어디 가있는지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고,
저걸 어디에 쓸까? 물 컵 같긴 한데, 커피를 따라 마셔도 되겠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질문자의 관점이 틀렸다는 게 아니고,
질문자는 기독교에서 그렇게 사물을 보는 관점에 익숙하다보니 습관이 붙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부처님이 어디 가계시든, 우리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왜 부처님이 어디에 가서 계셔야 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요.
부처님이 살아 계셔야 될 이유도 없고, 그분이 지금 어디 가계시든지, 뭘 하든지,
우리는 관심 없고, ‘내가 사는데 그분의 가르침이 어떻게 유용하냐’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
"사실 부처님이 어디 가계신지에 대한 관심보다도 모든 게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걸 생각하면..."
"‘모든 게 공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질문자가 불교에서 들은 소리일 뿐이에요.
모든 게 공(空)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고,
이 컵을 놓고 사람들이 ‘크다’, ‘작다’면서 싸우니까 ‘이 컵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이 컵은 그냥 존재일 뿐이고, 다만 네가 작다거나 크다고 인식하는 것뿐이므로
이 컵을 작다거나 크다고 논쟁할 필요가 없다’고 일러줘서 논쟁을 멈추게 하는 거예요.
그런 것이 공(空), 즉 ‘이 컵은 공하다’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만물은 공으로 돌아간다’는 건 마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처럼
불교의 가르침이 종교화된 거예요.
‘죽어서 극락 간다’, ‘부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건 진리로서의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고,
종교로 변한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종교화된 불교로는 질문자의 질문에 다 대답해 줄 수가 있어요.
‘부처님은 어디 계시느냐? 열반에 들어계신다.’
이렇게요.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것은 성격이 다른 거예요.
예를 들어 제가 질문자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 볼게요.
‘모래로 밥을 하면 몇 시간 만에 됩니까?’ 그럼 질문자는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밥이 안 됩니다."
"몇 시간 만에 됩니까?"
"... 밥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방금 ‘되느냐? 안 되느냐?’고 물었어요? ‘몇 시간 걸리느냐?’고 물었어요?"
(청중들) "몇 시간요."
"만약 질문자가 ‘진짜 몇 시간 만에 될까?’ 하고 제 말을 따라온다면 질문자는 그때부터 헷갈리게 되는 거예요.
‘진짜 몇 시간 만에 될까?’를 생각하게 될 테니까요.
그런 것처럼 ‘이 우주는 누가 만들었습니까?’라고 묻는다고 불교인들이 그 말을 따라가면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이 컵은 누가 만들었느냐? 이 우주를 누가 만들었느냐?’는 건 기독교적 사고방식이지,
불교에서는 그런 사고를 안 한다는 걸 아셔야 해요.
그런 사고를 안 하는 사람한테 ‘누가 만들었느냐?’며 질문하는 건 기독교적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거죠.
예전에 있었던 저의 경험 하나를 들려 드릴게요.
제가 서울역에 있는데 까만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007가방을 든 선교하는 젊은이 둘이 다가와서는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스님’이라고 안 하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말이에요.
‘선생님, 이 우주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누가 만들기는? 원래부터 있었지.’
‘네? 그럼 이 서울역이 본래부터 있었습니까?’
‘아니, 이 서울역은 지었지.’
‘이 작은 서울역도 전등 하나, 계단 하나를 만든 사람이 다 있는데,
어떻게 이 우주를 만든 사람이 없겠습니까?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는 거예요. 그러는 중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구경났다고 우- 몰려들었어요.(모두 웃음)
그 젊은이는 ‘누가 만들었느냐’는 논리로 저한테 자꾸 물었고 주위에서는 다들 재미있다고 구경을 하고 있었어요.가 되물었어요.
‘그럼 젊은이는 이 천하 만물을 만든 사람이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나요?’
‘예.’
‘그럼 본래부터 있었던 건 하나도 없나요?’
‘없습니다.’
‘그럼 제가 물어볼게요. 그럼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
‘하느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분은 본래부터 있었습니다.’
‘아까 젊은이는 본래부터 있었던 건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때부터는 제가 도로 그 젊은이들한테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 누가 만들었어?’라고 묻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 젊은이는 ‘세상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얘기는 내내 들어왔겠지만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누가 만들었느냐?’는 질문을 한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그런 얘기를 저한테 들었을 때 멍했겠죠.
그래서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 젊은이 귀에다 대고 작은 소리로 ‘네가 만들었지?’라고 했어요.
그것이 바로 ‘일체유심조’입니다. 그런 사유, 그런 생각도 다 누가 하는 거라고요?"
(청중들)"내가."
"예, ‘내’가 하는 겁니다. 그런 생각마저도 내가 하는 거예요.
사람은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은 존중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의 생각을 불교에서는 ‘망상’이라고 합니다.
그런 생각을 놓아버려야 진실을 볼 수가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누가 만들었느냐?’는 건 사람의 다양한 생각 중에 하나예요.
‘모래로 밥을 하면 몇 시간 만에 되느냐?’는 걸 어떻게 물어도 우리가 ‘안 된다’고 답하듯이,
‘누가 창조했느냐?’고 물으면 ‘본래부터 있었나, 인연따라 생겨난거다’라고 얘기하시면 됩니다.
질문자의 질문과 서울역에서 젊은이들의 질문은 사유의 문제거든요.
사유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방식만 고집하면 문제가 생기지요.
그러니까 기독교적인 사유로 불교를 보면 이해가 안 되고,
불교적 사유방식으로 기독교를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서로 사물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사물을 보는 관점이 주로 ‘이게 어떤 원리로 작동하느냐?’ 하는 원리적인 측면입니다.
그래서 과학과 비슷합니다.
‘우리들의 고뇌가 어떤 원리에서 일어나고, 또 어떻게 하면 사라지느냐’에 관심이 많은 거예요."
"알겠습니다."
"공부를 해 나가시면서 더 살펴보세요.
그렇다고 제가 ‘정토회에서 하는 게 진짜 불교다’라고 얘기할 수는 없고,
다른 절에서 배울 수 있는 불교와 정토회에서 배울 수 있는 불교가 다르다는 말씀은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건 종교로서의 불교이고, 우리는 진리로서의 불법에 대해서 주로 연구, 학습하거든요.
그렇다고 정토회에는 종교적 성향이 전혀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조금 남아있어요.
왜냐하면 종교는 문화거든요. 문화는 진리와 조금 다릅니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는 불법이 아니고, 인도의 전통문화인데,
그것이 불교로 들어와서 불교문화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창조를 믿듯이 불교에서는 윤회를 믿어야 된다’면 종교로서의 불교에서는 그 말이 맞을지 몰라도,
진리로서의 불법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로서의 불법에서 말하는 윤회란, 우리가 심리적으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과 괴롭다고 느끼는 것,
이 둘은 항상 하지 않고, 금방 괴로웠다가 금방 즐거웠다가를 계속 반복한다는 거예요.
이게 ‘윤회’입니다.
그럼 해탈이라는 건 뭐냐 하면, 고와 락의 반복으로부터 벗어나 버린다는 거예요.
‘반복으로부터 벗어나 버린다’는 건 지속가능한 행복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게 열반이라는 개념입니다.
‘기분이 좋다’는 게 열반이 아니에요.
기분이 좋다는 건 고와 락 중에 ‘락’에 들어가는 거예요.
기분이 좋으면 반드시 기분이 나쁜 걸로 바뀝니다.
그런데 기분이 좋고, 나쁜 것을 떠난 세계, 그것이 열반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후세계,
즉 ‘죽어서 좋은 데 간다’는 걸 믿게 되었는데, 이건 인류가 발명한 굉장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인도사람들은 그보다 더 좋은 걸 발명해 냈어요.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게 바로 그겁니다.
그러니까 ‘죽은 후에 좋은 데 간다’거나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고 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좀 줄어들 것 아니에요?
이런 방식이 종교적인 방식입니다.
불교에서는 두려움이 무지에서 생긴다고 봅니다.
우리가 사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기 때문에 사람한테 제일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잘 살펴보면 우리는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거거든요.
즉 무지가 두려움이에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디 낯선 델 가거나 낯선 사람을 만나면 약간 두렵잖아요.
왜 그럴까요? 모르기 때문에. 또, 모르면 어떤 현상이 생깁니까? 신비하다는 현상이 생깁니다.
우리 심리가 그렇습니다.
만약에 제가 여기에서 ‘옴 마니 반메 훔’을 외면서 공중에 붕 떴다면 여러분들은 신기하다고 하겠지요?"
(청중들) "예."
"그런데 비행기가 붕 뜨는 건 왜 신기하지 않아요?(모두 웃음)
저는 혼자만 붕 떴고, 비행기는 300명이나 태우고 떴는데,
저는 1미터만 붕 떴지만 비행기는 1만 미터를 뜨고, 저는 몇 분 떠있지만 비행기는 몇 시간을 뜨잖아요.
그럼 비행기가 공중에 뜨는 걸 더 신기하게 봐야 되잖아요.
그런데 왜 제가 뜨는 게 신기해요? 사실 비행기가 뜨면 사람들을 원하는 데로 데려다 주기나 하지,
제가 공중에 뜨는 건 별 효용가치도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비행기가 뜨는 원리는 알고, 제가 공중부양 하는 원리는 모르기 때문에 신기하게 여기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무지로부터 일어나는 두 가지 현상이 하나는 두려움, 하나는 신비함인데,
이게 바로 종교의 핵심요소들입니다.
그래서 첫째, 종교는 항상 우리의 두려움을 자극하는 협박을 하지요.
‘지옥 간다’면서요. 둘째, 모든 종교는 신비주의가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성의 기본입니다.
이런 인간의 심리가 기본이 되어서 발생한 게 종교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무지를 깨뜨리셨습니다.
무지를 깨뜨려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두려움과 신비함이 없어져요.
그래서 부처님이 신통이나 신비주의를 배격한 겁니다.
신비주의는 중생의 무지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고, 중생을 현혹하는 것이니까요.
엄격하게 말하면 ‘종교성을 부정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아무래도 ‘깨달음’은 조금 노력이 필요하고,
‘종교성’이라는 것은 조금만 빌고 공짜로 많이 얻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지금은 불교가 많이 종교화 되어서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써, 타 종교와 대동소이합니다.
‘하나님, 부처님’이라는 용어만 다를 뿐, ‘복을 비는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런 불교를 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무지를 깨뜨려서 이 고뇌나 두려움,
신비주의로부터 벗어나서 내가 자유로워지는 길,
내가 주인이 되는 길로 인도하는 것, 그게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불교 속에 그 두 가지가 혼재되어있기 때문에 계속 여러분들이 헷갈리는 거예요.
제일 헷갈리는 사람이 누굴까요? 불교신자입니다.
아마 질문자보다 훨씬 더 헷갈리고 있을 겁니다.
질문자는 ‘아, 불교가 이렇구나’ 하면 되는 데, 불교신자는 ‘불교가 이런 줄 알고 있었는데,
아니라고 하네? 다른 얘기를 하네?’ 이렇게 되니까요.
예를 들어, 윤회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는데 윤회는 힌두교적 개념이라고 하고,
인연과보를 인과응보랑 비슷한 뜻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헷갈리지요.
그러니까 불교신자들이 다른 절에 다니면서 관습적으로 알았던 개념들을
정토회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해석하니까 헷갈리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신자를 데리고 인도성지순례를 가면 제일 헷갈려 해요.
자기네가 알던 부처님은 신과 같은 존재인데,
막상 인도에 가보면 부처님도 한 명의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일들을 겪었다는 걸 보고, 들어서 알게 되거든요.
우리가 살다 보면 사물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고, 경험하는 것도 필요하지요.
종교성, 철학성, 실천성, 이 중에 하나만 갖고는 안 돼요.
그런데 주로 불교를 배우면 어떻게 배우게 됩니까?
이론, 철학적인 요소만 배우니까 불교에 대한 논리만 잘 알지, 믿음이나 실천이 부족해요.
그런 걸 알음알이라 그래요.
그런데 현재 우리 정토불교대학은 지식으로서의 불교철학이 아니고,
그것을 자기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너는 어땠느냐?’는 질문이 항상 되돌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데 와서 자보기도 하고, 불편한 재래식 화장실도 써보고 하는 거예요.
불편하다는 건 화장실의 문제일까요? 각자 업의 문제일까요?"
(청중들) "업의 문제요."
"알기는 잘 아네요.(모두 웃음)
우리가 ‘화장실에 가면 불편하다’고 생각할 때 그건 화장실의 문제라고 생각하잖아요.
또 ‘대수련장에서 잠자면 불편하다’는 건 ‘한 방에서 여러 명이 잔다’는 등 잠자리의 문제 같잖아요.
그런데 실질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릴 때 저처럼 재래식 화장실을 썼던 사람이 처음에 양변기 쓰면 불편할까요, 편할까요?"
(청중들) "불편해요."
"그러니까 그게 화장실 문제일까요? 아니죠. 결국 자기 습의 문제예요.
자기 습과 다르면 불편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김치와 밥에 습이 들어있으면 빵이 불편하고,
빵에 습이 있는 사람은 밥이 불편한 것과 같은 거예요.
그런 건 체험해야 되는 거예요.
이치로는 다 ‘업이다’ 해 놓고는 실제 여기 와서는 화장실 타령하고 잠자리 타령하는 거예요.
화장실에 앉아서 불편을 느낄 때는 처음에 화장실 타령을 하다가
‘오? 내가 이렇게 변을 보지 않던 습관으로 인해서 불편함이 일어나는 구나’라는 걸 알게 되면
거기서 편안하게 변을 볼 수가 있어진다는 겁니다.
지금 방바닥에 앉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여러분들은 방바닥에 앉아있으니까 다리가 아프잖아요.
지금까지는 일상생활을 이렇게 안 했기 때문에 아픈 거잖아요.
그럼 스님은 수행이 잘 되어서 잘 앉아있고,
여러분들은 수행이 안 되어서 조금만 앉아있어도 다리가 아프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스님은 앉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여러분들은 앉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예요."
"감사합니다."
불교신자가 아닌데도 정독하며 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