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겁으로 지은 업장, 한 생각에 없어져라. 죄도 없고 마음 없어 그 자리가 비었으니, 빈 마음 그 자리가 진정한 참회일세”

노란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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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글]] 법문 '모든것은 변한다' (0) 2018/02/03 AM 01:40

저녁에는 한국인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법회가 이어졌습니다. 

스님께서는 인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좀 더 행복하고 즐겁게 활동할 수 있도록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그 순간, 그 순간은 다 자기가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좋아서 ‘좋다’ 그러고, 내가 싫어서 ‘싫다’ 그러고, 가고 싶어서 ‘간다’ 그러고, 

오고 싶어서 ‘온다’면서 다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어떤 자극이 오면,

즉 냄새를 맡거나 모양과 빛깔을 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맛을 보거나 감촉이 일어나면, 

자동으로 좋고 싫은 게 반응됩니다. 

자동으로. 그렇게 작동할 때 ‘내가 그렇게 감정을 표현하고, 그렇게 의견을 말한다’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 ‘나’라는 건 없고, 

그렇게 반응하고 작동하는 게 거의 자동화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종의 알고리즘(algorithm, 문제해결을 위한 공식, 절차, 방법) 같은 거라서 자동으로 그렇게 반응하는 거예요. 

그걸 ‘까르마’라고 합니다. 일종의 프로그램 같은 거예요.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다 자동으로 소화하고, 에너지로 전환하고, 이런 게 프로그램처럼 되어 있잖아요.

유전자, 유전정보에 의해서 그렇게 자동으로 움직이는 거지요.

그런 것처럼 우리들의 정신작용도 일종의 알고리즘처럼 반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있으니까 거기에 반응만 할뿐 변할 수가 없죠. 

그래서 옛날부터 ‘운명이 정해져 있다’, 

‘타고 났다. 천성이다.’ 이런 표현이 있는 거예요. 인도 말로 그것을 까르마라고 합니다. 

그럼 그건 어떻게 정해진 것일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이론이 조금씩 달라요.

전생으로부터 전해졌다는 전생론, 생년월일시가 그것을 정한다는 사주팔자론, 

하나님이 그것을 정해준다는 창조설,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이론은 서로 표현은 달라도 결론은 같습니다.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핏 사람을 관찰해 보면 그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게 맞는 말 같아요. 

왜냐하면 사람의 성격이나 하는 행동은 나이가 들어도 크게 바뀌는 게 없거든요. 

조금 바뀌는 것 같다가도 나중에 늙어서 보면 거의 비슷해요. 

콩을 심어서 싹이 트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을 때까지는 콩의 씨랑은 전혀 다른 모습인데 

나중에 열매 맺은 걸 까보면 심었던 씨앗이랑 똑 같잖아요.

그런 것과 같아요. 우리가 젊을 때 하는 걸 보면 영 부모와 다른 것 같았는데,

늙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고 보면 내가 하는 게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나 아버지, 어머니랑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거든요. 

생긴 것만 비슷한 게 아니라 하는 것도 비슷한 거예요. 

우리가 그것을 다 못 보니까 모룰 뿐이지요.

그래서 옛날부터 ‘가족 사이에도 내력이 있다’는 말이 있는 거예요. 

한 사람의 삶이 그 내력의 큰 테두리를 못 벗어난다는 거지요. 

조금씩 다를지라도 원형은 거의 유지가 되지요. 

그래서 천성이니, 운명이니 하는 말도 있고, 애쓴다고 해 봐야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깊이 연구를 하셨지요. 

대개 잘 변하질 않으니까 운명이나 천성이라고 할 만하지요. 

그러나 부처님께서 더 깊이 들여다보신 결과, 

그런 프로그램은 본래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끊임없이 형성되어져 가는 것임을 알게 되신 거예요. 

‘형성되어져 간다’는 것은 원래 있던 것이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또 조금씩 변화가 보태진다는 뜻이잖아요.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리로 정리한 게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형성되어진 것이다, 형성되어져 가는 것이다’, 즉 ‘고정불변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하지 않는 것이다’와 ‘변하는 것이다’는 정반대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은 거의 비슷합니다. 

현실은. 왜 그럴까요?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라고 묻는다면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는 게 붓다의 가르침인데, 쉽게 변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 변화는 굉장히 더디고, 어렵거든요. 

그래서 짧게 관찰하거나 얼핏 보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옛날사람들이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할 만하지요. 

우리가 바위를 보면서 ‘저 바위는 천년, 만년 그대로다.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요. 

인간의 수명이 짧으니까 그 바위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우리가 수 억 년의 기간을 두고 관찰해 보면 그 바위도 반드시 변합니다. 

부서지고, 가루가 되고, 다시 뭉쳐서 굳어져서 바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한 정진’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결정론, 운명론에 반해서 붓다는 ‘변한다’고 하셨습니다. 

변하니까 우리는 뭐든 바꿀 수가 있는 거예요. 

괴로움이 있다면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갈 수가 있고, 

화를 잘 낸다면 화를 안 내는 경지로 갈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어렵긴 합니다. 

천성처럼 프로그램된 것, 이미 형성되어진 것은 변화하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걸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꾸준히 해야 합니다. 즉, 길게 보고 해야 합니다. 

조급하게 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지속적으로 자극을 줘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물방울이 10년 떨어지고, 100년 떨어져도 바위는 잘 안 뚫려요. 

그렇다고 안 뚫리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요. 뚫립니다. 금방 안 뚫릴 뿐이에요. 

그리고 천년, 만년 시간만 보낸다고 되는 게 아니고, 한 군데에 지속적으로 떨어져야 합니다. 

한 군데에. 그런데 우리는 아예 안 하고 포기하거나 조금 하다가 안 되니까 말아버리지요.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마치 운명 지어진 것처럼 ‘천성’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자신의 어떤 기질을 변화시키려 한다면 쉽게 포기해도 안 되고, 쉽게 고치려고 해도 안 됩니다.

고치려면 첫째, ‘아, 나한테 이런 성질이 있구나.’하고 자신의 기질을 잘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이대로 살아도 되겠냐?’고 질문하고 ‘이렇게 살아도 된다.’고 하면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화를 잘 내면 화를 잘 내는 과보를 받아야 합니다. 

즉 손실을 감내해야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것도 감수해야 되고, 무시당하는 것도 감수해야 되고, 

신뢰를 못 얻는 것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 크니까 개선을 좀 해야 되겠다 싶으면 굉장히 집요하게, 

꾸준히 지속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옵니다.

그럴 때 ‘각오’하고 ‘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스스로 ‘아, 내가 이게 문제다.’ 이런 자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변화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자각입니다, 

자각. 그냥 막연하게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는 건 욕심이고, 

스스로 살펴봤을 때 ‘아, 내가 어떤 순간에 부딪치면 너무 성질을 잘 낸다. 

같이 사는 사람이 참 불편하겠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하면 신뢰를 잃겠다.’는 

그런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다고 해도 스스로 그런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변화의 시작은 ‘자각’입니다.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 어느 날 개과천선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건 그 사람이 자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각했을 때만 기적이 일어나거든요. 

그런데 아주 훌륭한 사람인데도 몇 가지 문제가 안 고쳐지는 것은 그 사람이 그걸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삶은 자각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남으로부터 지적받고 그러니까 자기도 욕심을 내서 ‘고쳐야지!’ 

이러지만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뭐, 나만 그러냐? 성질 안 내는 사람이 누가 있어? 

욕심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 이렇게 반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결심하고, 결심해도 변화가 안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아, 이건 좀 문제다’라는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우울증이나 조울증이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약간 우울증이 있구나’, ‘내가 감정기복이 심하구나.’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가만히 살펴서 ‘내가 감정기복이 심해서 굉장히 히스테리컬 하니까 주위사람들이 좀 힘들겠다.’ 

이런 자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각을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자각을 못해서 신경질을 내면서도 남 탓하고, 또 때로는 그런 자기를 자기가 용납을 못해서, 

신경질을 낸 자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사람들도 만나기 싫고, 

그래서 방밖으로 나가지도 않으면서 후회를 심하게 하는 일종의 자학증상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게 왔다 갔다 해요. 막 성질을 내놓고는 자책하고, 또 성질을 막 내놓고 또 자책하고, 이걸 반복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결심해서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각을 해야 합니다. ‘나는 감정기복이 좀 심한 사람이다. 나는 우울증이 좀 있다.’ 

이렇게 자각을 하면 감정기복이 막 일어날 때 ‘아, 이건 내 문제다.’ 하게 되는 거예요. 

지금 일어나는 이 순간은 저 사람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럴 때 자기가 그런 우울증이 있는 사람, 

즉 감정기복이 심한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알면 ‘아, 이건 내 까르마다. 

내 까르마가 또 난동을 부리는구나’ 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막 마음에서 들뜸이 일어나는 자기를 볼 수 있는 거예요. 

‘아, 또 우울증이 시작되는구나. 또 감정이 들뜨는구나.’ 그러면 그게 금방은 안 없어져도, 

바깥으로 표출되어서 히스테리컬 하게 난동을 피우지는 않게 됩니다.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난동을 피워놓고도 금방 ‘내가 관점을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가볍게 참회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남 탓하며 성질을 내놓고는 그걸 나중에 자기가 알게 되면 또 처박혀가지고 

안 나타나려고 그러고, 확 가라앉아서 며칠을 헤매고, 

그러다 일주일이나 열흘이 지나서 회복이 되면 또 멀쩡하게 지내다가 

또 어느 순간 한 번 확 뒤집어지고 또 확 가라앉고 그러지요. 

그러면 같이 사는 사람들은 힘든 거예요. 갈수록 신뢰도 잃게 되고요. 

그래서 자기 상태를 자각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화를 잘 내는 사람이면 내가 화를 잘 낸다는 걸 자각해야 되지요.

그런데 이게 금방 고쳐지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프로그램화 되어있기 때문에. 

‘나는 안 그러고 싶다’고 해서 안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안 그러고 싶어도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첫째, 이때 이런 상태, ‘내 까르마가 이렇다’는 걸 알고 있으면 

이것이 작동할 때 자기가 알아차리기 때문에 덜 흥분하고 덜 광분한다는 거예요. 

또, 광분을 해 놓고 ‘내가 문제다’ 하면서 침잠하지 않고 ‘내가 놓쳤구나’ 하고 

다른 사람한테 금방 밝게 웃으면서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놓쳤네요.’ 이럴 수도 있습니다. 

회복속도가 아주 빨라진다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자기 상태를 스스로 딱 점검해서, 

내가 키가 작으면 높은 곳에 있는 건 키 큰 사람한테 부탁하든지, 

아니면 의자를 갖다놓고 올라가든지, 아니면 기계를 발명해서 대처하든지, 이렇게 연구를 해야 됩니다.

첫째, ‘나한테 약간 우울증이 있으니까 내가 혹시 뒤집어져서 난동을 피우더라도

그 순간에 나한테 딱 지적을 해 주신다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럴 때는 나도 제 정신이 아니니까 너무 나를 탓하지 말고 조금 놔두고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나한테 얘기 좀 해 주세요. 

제가 미쳐서 날 뛸 때는 눈치를 봐서 좀 놔뒀다가 좀 가라앉거든 미친놈이라고 쳐내지 말고, 

얘기 좀 해 주세요.’ 이렇게 자기 상태를 인정하고 도반들에게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이 있고요.

두 번째, 의사선생님께 우울증 약이나 진정제를 처방받아서 항상 지니고 다니다가 

심리가 막 흥분되면 약을 먹으면 됩니다. 

사람이 흥분되면 세상 사람이 다 나쁜 놈들 같거든요. 

한 사람만 미운 게 아니라 이 사람이 미운데 이 사람을 저 사람이 편드니까 저 사람도 밉고, 또 

말리는 사람도 밉고, 이렇게 되면 벌써 병이 도진 거예요. 

그러면 약을 먹어야 돼요. 

또 죽고 싶고, 사람들 꼴도 보기 싫고, 아무 것도 하기 싫다면 이것도 병이에요. 

그러면 약을 먹어야 돼요. 

그러면 금방 괜찮아져요. 이게 자기 컨트롤이에요. 

각오하고 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럴 때는 약물의 도움을 조금 받아야 합니다.

무조건 이를 악다물고 참는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거예요. 

감기몸살 기운이 있으면 한 일주일 쉬면 좋지만 여기는 그렇게 쉴 형편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약을 먹든지, 병원에 가서 주사를 한 대 맞는 게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 상태를 잘 알아서 점검해야 돼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자기 상태를 잘 모르는 거예요. 

그럴 땐 또 옆 사람한테 얘기해 보세요. 

여기서 나누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우리 중에 누가 약간 우울증이다. 아이고, 또 시작이다. 저렇게 또 성질 한번 내면 며칠 간다. 

그러고 또 방구석에 처박히면 또 며칠 간다.’ 

이런 거 다 알잖아요? 남에 대해서는 다 알아요, 말을 안 해서 그렇지요. 며칠 겪어보면 ‘또 시작이다.’ 

이렇게 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도반들에게 조금 도움을 얻든지, 아니면 스스로 관찰해서 ‘나한테 이런 까르마가 있구나.’ 

그렇게 알게 되면 거기에 맞춰서 조정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알아차려서 그 흥분에 안 넘어가든지, 넘어갔다면 빨리 알아차려서 참회를 하든지, 

아니면 도반들한테 미리 얘기해서 양해를 구하든지, 대책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거예요. 

현명한 사람은 돈이 없을 때 조금 어렵더라도 참고 살든지, 

약간 빌려서 위급상황에 대처하든지,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대책을 세우겠지요. 

자기 성질에 대해서도 그런 것과 같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성질이 좀 있고 문제가 있어도 도반들끼리는 서로 신뢰할 수 있단 말이에요. 

‘저 분은 잘 안 고쳐진다. 그러나 자기가 알고 있다. 그러니 저렇더라도 서로 이해하고 살아가자.’ 고 합니다.

그런데 ‘저 인간은 왜 저러냐?’ 이렇게 서로 불신하는 경우도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다 여기에 수행자라고 와있지만 각자 까르마를 갖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 까르마가 쉽게 고쳐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첫째,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알고, 스스로 조절해야 됩니다. 

두 번째, 우리에게 도반에 대한 사랑이 있다면 상대의 까르마를 너무 탓하지 말라는 거예요. 

‘또 지랄한다’고 할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또 병이 났구나. 

그러니 조금 기다려줘야 되겠다. 조금 받아줘야 되겠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이해하면서 수용한다면 생활하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는 거예요.

우리가 한국에서 여기까지 이렇게 수행자로, 봉사자로 왔는데, 

막상 와보면 날씨도 덥고 말도 안 통하니까 한국에서 보다 여기서 까르마가 더 발동합니다. 

그렇다고 성질이 올라오는 대로 다 표현하고 살면 자기 스스로도 여기 와서 사는 의미가 없다 싶으니까

자꾸 자책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이 어려운 데에 와서 사는 게 다들 힘드니까 또 도반들끼리 부딪치게 되는 거고요. 

즉, 도반을 더 힘들게 만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스님이 항상 얘기했잖아요. ‘우리는 다 부족한 존재다.’ 

아직 우리는 해탈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부족한 줄 알고 살면 됩니다. ‘내가 부족하다.’ 

이걸 알고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부족한 사람은 일을 안 해야 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에요.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도 세상에 조금 도움 되는 일을 하겠다. 내가 성질은 좀 있지만 밥이라도 한 끼 잘 하겠다’, 

‘내가 성질은 좀 있지만 심부름이라도 좀 잘하겠다.’ 

이렇게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되 좌절하지도 말고, 

또 욕심내지도 말고, 그래도 내가 없는 거 보단 있는 게 나으니까 

이런 역할을 하고 있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아간다면, 

이런 자세가 된다면 부족한 우리들끼리 이렇게 한 집에서 살아도 서로를 신뢰하며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여기 한 명이라도 없어 봐요, 얼마나 아쉬워요? 성질이 날 때는 ‘저런 인간은 없는 게 낫겠다’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나 우리가 일을 생각해 보면 어때요? 그 사람이라도 있어서 시장이라도 봐오고, 

그 사람이라도 있어서 회계라도 봐주고, 

그 사람들이 있어서 밥이라도 해 주니까 우리가 지금 이 일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된다며 다 빼버리면 같이 할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볼 때는 여러분들 한 명, 한 명이 굉장히 소중합니다. 

여러분들 한 명, 한 명이 없다면 인도 수자타 아카데미의 이 큰 일을 할 사람이 없잖아요.

부족한 것 같아도 여러분들이 계셔서 이 일이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 성질을 들여다보면서 ‘저런 인간이 여기 있으면 뭐 하냐?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 

이럴 때도 있단 말이에요. 

그러나 그런 관점으로는 여기서 살기가 힘들어요. 항상 자기 성질을 보고 자기의 한계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한계를 알아 차린다’는 게 잘못하면 자학증세가 되기가 쉬우니까 잘 살펴보시고요. 

우리가 도반이 소중하다는 것도 알아야 되지만 자기 자신도 소중하다는 걸 알아야 돼요.

좀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래도 내가 여기서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지 않느냐?’ 

이런 자기 긍지가 있어야 합니다.”

 

 

 
 

 

인도에 봉사하러 왔지만, 

우리가 가진 성질 때문에 스스로 자책하거나 상대를 비난하지 말고 잘 챙겨서 

함께 나아가도록 격려도 해주시고 자긍심도 가질 수 있도록 말씀해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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