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스님의 강연에서 ‘남을 위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하는 일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생활을 하다보면 그게 진실인지 의문이 들곤 합니다.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스님께서 설명을 해주시면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싶은 저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질문을 드립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여기에 꽃이 한 송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 꽃을 보고 ‘이야, 이 꽃 예쁘다’라고 하면 꽃이 좋아요, 내가 좋아요?”
“제가 좋습니다.”
“꽃이 좋아야지 왜 자기가 좋아요? 꽃이 예쁘다고 칭찬을 해주면 꽃이 좋아야 하잖아요?”
“...”
“반대로 ‘이 꽃은 뭐 이렇게 생겼어?’하면 꽃에게 나빠요, 나에게 나빠요?”
“제게 나쁩니다.”
“그러니 ‘그 사람 참 착실하더라, 그 사람 참 좋더라’ 하고 남을 잘 봐주면 누구한테 이익이에요?”
“저한테요.”
“남을 잘 봐주면 나에게 좋고, ‘그 사람 뭐 그래?’하면 자기 마음이 불편해요.
그러니 남을 좋아하면 그 사람이 좋아요, 내가 좋아요?”
“제가 좋아요.”
“남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 좋아요, 내가 좋아요?”
“제가 좋아요.”
“그런데 우리는 흔히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것에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어요.
문제는 사랑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미움이 생기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도 나를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있는데 정작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미움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 미움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이 남편을 미워하는 것은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예요, 내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서예요?”
“...”
“내가 사랑하지 않아서 미운 거예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사랑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청중 웃음)
미움이라는 심리 현상은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데에는 부작용이 없어요.
사랑받으려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움이 생기고 슬픔이 생기고 미움이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이 산이나 바다를 좋아할 때는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너도 나를 좋아해라’는 대가성 요구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산을 좋아하고 바다를 좋아해도 거기에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너를 좋아하니까 너도 나를 좋아해야 되지 않느냐’며 거래를 하려고 해요.
쉽게 말하면 장사를 하려는 마음이에요.
장사를 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 나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미움이 생기는 거예요. 이 ‘손해’, ‘적자’라는 생각은 받으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움이 생기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미움의 씨앗’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실제 심리현상은 그렇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지는 게 아니라, 사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미움이 생기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대개 자기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상대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을 했다 하면 사랑이 돌아오지 않을 때 부작용이 큽니다.
사랑을 하지 않을 때도 상대로부터 받으려는 마음이 있는데, 이제는 사랑하기까지 했으니까 더 돌려받으려는 거예요.
그런데 상대로부터 돌아오지 않으면 손해봤다는 생각이 더 들어서 크게 밑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저한테 좋다고 하면 덜컥 겁부터 나요. (청중 웃음)
그 마음에는 대개 부작용이 따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누가 좋다고 하면 우선 도망부터 가요. (청중 웃음)
왜냐면 좋다는 마음이 클수록 나중에 그만큼 요구가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대개 사랑을 하려고 해요, 받으려고 해요?”
“(청중) 받으려고 해요.”
“그러니까 계속 괴로운 거예요.
사람들이 예수님, 부처님, 관세음보살님을 찾아가서는 대개 그분들한테 뭔가를 달라고 해요, 그분들한테 베풀려고 해요?”
“(청중) 달라고 해요.”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분들은 어디를 가든 자기들한테 뭘 달라는 사람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그분들은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성경이나 불경에서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사람들이 자꾸 뭘 해달라고 해서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 보셨어요? (청중 웃음)
베풀려는 마음만 내면 거기에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베풀지도 않고 자꾸 바라는 건 범부중생이에요.
이런 사람은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을 바라니까 평생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베풀고 베푼만큼 받으려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에요.
이 현인은 범부중생에 비해서 베푼 다음에 받으려고 하니까 그래도 이치에는 맞는 거예요.
그런데 여전히 바라는 마음이 있고 게다가 자기가 베풀기까지 했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을 때의 부작용은 오히려 범부중생보다 큽니다.
반면 성인은 베풀되 받으려는 생각이 없고, 사랑하되 사랑받으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들은 괴로움이 없고 미움이 없는 거예요.
그건 받으려는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눈에 성인은 대개 바보같이 보입니다.
가족 중에도 성인이 있으면 대개 가족들은 성인을 보고 바보라고 불러요.
세속적인 기준으로 따지면 성인은 바보예요.
그렇지만 바라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결국 성인은 괴로움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베푸는 것이 곧 나에게 좋은 거예요.
중생의 모든 괴로움은 얻으려는 마음 때문에 생깁니다.
질문자가 베풂을 통해서 명예를 얻겠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장사를 하는 거예요.
사회에도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속내를 보면 장사꾼들이 많아요.
베풀지도 않고 받으려고 하거나,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을 받으려는 것은 도둑놈 심보이지만,
베풀고 그만큼 돌려받으려는 것은 장사꾼 심보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실제로 그 밑에는 받으려는 마음이 많아요.
부부가 왜 싸우겠어요? 결혼하기 전에 인물, 가족관계, 학교, 직장 등 온갖 것을 다 따집니다.
왜 그렇게 따질까요? 나한테 얼마나 이득이 되는지 계산을 하느라 인물과 능력을 보는 거예요.
그렇게 온갖 것을 다 따진 다음에 결혼을 하는데, 막상 같이 살아보면 나한테 그리 큰 이득이 안 돼요.
이득이 별로 없으니 ‘괜히 결혼했다’는 마음이 생기고,
오히려 나한테 손해가 되는 것 같으면 ‘헤어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금 다 계산을 하는 거예요.
그게 무슨 사랑이에요, 이건 장사잖아요?
이런 상담을 많이 하면서 ‘그게 무슨 사랑이냐, 사람을 두고 장사를 하지 말라.
사랑을 하려고 하면 장사를 하지 말고,
장사를 하려고 하면 때론 밑지는 것도 각오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모아서 책도 나왔어요.
장사를 하는데 투자를 잘못하면 손해가 나기도 하잖아요?
결혼에서는 인물이나 능력에 투자를 했는데 투자가 잘 못 되어서 그에 따른 손해도 감수해야 하는 거예요.
장사를 해놓고는 사랑을 했다고 하면 안 되고,
장사를 했으면 내가 어디에 투자를 했는데 그게 이익이 되었는지 손해가 생겼는지를 제대로 계산해야 하는 거예요.
이런 내용을 모아서 책 제목으로 ‘사랑 좋아하시네’라고 지었어요. (청중 웃음)
그런데 출판사에서 그런 제목은 안 된다며 ‘스님의 주례사’로 바꿔서 낸 거예요.
하지만 그 내용을 요약하면 결국 ‘사랑 좋아하시네’예요. (청중 웃음)
속마음은 장사를 하면서 사랑이라고 포장하면 안 돼요.
그렇게 포장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운 거예요.
처음부터 장사라고 인정을 하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어요.
장사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 면밀하게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적자가 생겨도 투자에 대한 책임지는 자세를 갖고 상대를 대하니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동차 주식이 오를 거라고 투자를 했는데 주식이 내려가면 자동차를 미워하해야 해요,
내가 거기서 투자를 포기해야 해요? (청중 웃음)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가 투자해놓고 적자가 생겼다며 상대한테 책임을 묻는 것과 같은데, 그건 올바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혼 생활에 적용해보면 부처님은 같이 살아라, 같이 살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같이 살든, 같이 살지 않든 그것은 네 자유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상대를 미워하지는 말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를 미워하는 것은 내가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자세에서 생기는 거예요.
결혼은 인물을 보고 하지만,
막상 살아보면 옷을 아무데나 벗어놓고 음식도 안 맞는 등의 생활 습관으로 부딪히는 일이 많아요.
실제 생활에서는 서로의 생활 습관으로 다툼이 생기지 인물로 다투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결혼하기에 앞서서 이 사람의 생활 습관이 어떠한지,
동거인으로서 어떠한지를 따져봐야 해요.
무슨 이야기만 하려고 하면 버럭 화를 내는 성격적인 차이도 같이 살기가 힘듭니다.
인물은 연애할 때의 기준이 될 수는 있지만 동거의 기준은 아니에요.
연애에는 좋은 감정이 핵심입니다.
거기에는 나이도 그리 중요하지 않고, 외국인인지 한국인인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좋은 감정만 있으면 돼요.
물론 그 감정이 식으면 헤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연애는 우선 별거하면서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생활 습관이 부딪힐 일이 많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같이 있어야 성격도 부딪히는데,
하루에 한 두 시간 만나서는 성격이 부딪힐 일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애와 결혼은 많이 다릅니다.
물론 좋은 감정도 있고, 생활 습관까지 잘 맞으면 금상첨화예요.
그런데 둘 다 좋은 경우는 드물어요.
둘 중 하나를 선택 해야 한다면 연애는 비교적 감정에 치중하고, 결혼은 생활 습관이 더 중요합니다.
친구들과 같이 지낼 때도 무거운 짐이 있으면 그걸 들고 가는지,
캠핑을 갔을 때 고기를 구워서 잘라주는지 이런 걸 봐야 해요. (청중 웃음)
그런 태도가 결혼을 한 다음 부엌일을 도와주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이런 걸 한참 같이 산 다음에 이러쿵 저러쿵 말을 해요.
말 몇 마디만 들어도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부가 저를 찾아와서 ‘스님, 저희들은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을까요?’
하고 물으면 저는 단번에 ‘원수지간이었겠지’ 그래요.
그러면 ‘그걸 어떻게 알아요?’하고 되묻는데, 저한테 와서 전생에 대해 묻는다는 건 지금 사이가 좋다는 거예요,
안 좋다는 거예요? (청중 웃음)
사이가 안 좋으니까 와서 묻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잖아요. 누가 찾아와서 ‘스님, 우리 남편은 매일 술먹고 참 문제예요’
이렇게 말하면 저는 바로 ‘아, 남편에게는 장점이 많겠구나’하고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면 남편에게 단점만 있으면 벌써 헤어졌지, 같이 살지 말지를 고민하며 저한테 물으러 오지 않습니다. (청중 웃음)
술 먹고 행패부리는 단점이 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장점이 있기 때문에 헤어질지 말지를 고민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넌지시 ‘그럼 헤어져라’라고 말해봅니다.
그러면 단번에 ‘그러면 아이는 어떡해요?’하고 다시 물어요.
그러면 ‘그럼 같이 살아야지’하고 말아요.
저한테 신통력이 있어서 아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질문을 할 때 저한테 답을 다 알려줍니다. (청중 웃음)
저는 그냥 그 이야기에 비위를 맞춰주는 것뿐이에요.
헤어지고 싶다고 하면 ‘그래, 헤어져라’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로 헤어지면 그건 저한테 묻기 전에 이미 헤어지기로 각오를 하고 왔다는 거예요.
남이 헤어져라 한마디 한다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속으로 헤어질 각오를 거의 다 해놓고는 스님한테 책임을 나누려고 물어보는 거예요. (청중 웃음)
그래서 ‘헤어져라’라고 할 때 ‘알겠습니다’하면 그건 이미 속으로 어느 정도 결정을 하고 온 거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반면 헤어지라고 하는데 아이는 어떡하냐고 물으면 그건 아직 결심이 덜 선 경우예요.
그러면 저는 ‘아직 이익 볼 게 조금 남았구나’하고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청중 웃음)
이런 걸 통찰력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 사물의 한 면만 보고 판단을 내리는데,
사물에는 앞과 뒤, 좌와 우, 위와 아래 등 다양한 면이 있습니다.
그 전체를 다 볼 줄 알아야 해요.
위와 아래를 다 봐야 하는데, 위만 보고 결정을 하면 나중에 후회를 하게 돼요.
조금만 분석을 해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나를 싫어합니다.
그러니 장기적으로는 장사를 잘못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어느 정도 이익을 줘야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곧 나에게 장기적으로 이로운 거예요.”
“감사합니다.” (청중 박수)
“입에 단 약은 몸에 나쁘고, 입에 쓴 약은 몸에 좋습니다.
그러니 지금 좋은 것이 나중에 나에게 나쁠 가능성이 높아요.
그런데 입에 단 것처럼 우리는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늘 장기적으로는 손실을 보게 됩니다.
타인을 위하는 마음을 내라는 것도 윤리 도덕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결국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에요.
다시 말해서 조금 더 현명하게, 단기 투자하지 말고 장기 투자하라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