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중후반은 종교적인 내용도 있으니 감안하시고 보세요
오늘 스님은 ‘붓다의 눈으로 본 문명 전환’을 주제로 기조 발표를 맡았습니다.
큰 박수와 함께 스님이 발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역사를 돌아보면, 대부분 과학 기술의 발달이 하부 구조의 변화를 가져와서 사회 시스템을 바꾸었고,
사회 시스템의 변화가 사회를 이해하는 철학이나 가치관을 바꾸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문명 전환의 징후들을 알기 위해서는
그 변화의 바탕이 되는 과학기술의 변화가 현재 어떤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느냐를 살펴봐야 합니다.
과학 기술의 변화 수준을 알면,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가 올 것인지,
그로 인해 인간의 정신적인 고뇌가 어떻게 발생할 것인지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문명 전환의 징후들
1차, 2차, 3차 산업혁명을 거쳐서 지금은 4차 산업혁명의 도래를 말합니다.
무기체인 인공지능이 유기체인 사람보다 더 똑똑해지는 문제가 곧 현실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바둑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기는 모습을 봤지 않습니까.
이런 일들이 광범위하게 일상화될 때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단순히 컴퓨터끼리 연결되는 인터넷이 아니라,
모든 사물이 서로 연결되는 사물인터넷이나 5G 통신기술이 상용화되면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바뀔까요?
블록체인 기술이나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이 나오고,
생명 공학에서는 유전자 조작이 가능해지고,
그래서 생명 연장도 그렇게 어렵지 않은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성 혼자서 아기를 낳을 수 있고,
인공 자궁을 이용해서 공장에서 물건을 주문하듯이 애를 낳을 수도 있게 될 겁니다.
더 나아가서는 몸의 세포를 복제해서 아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도 거의 다 개발이 되었습니다.
도덕적인 문제가 남아있어서 그렇지 기술적인 문제는 지금 거의 다 개발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도대체 자아라는 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겁니다.
지금까지는 사람 한 명 한 명의 자아를 모두 독특한 것으로 이해를 했는데,
복제가 가능한 상황에서 자아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이런 새로운 문제는 지금의 철학, 종교,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해석하거나 이해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사고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
마치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었다가 사실은 지구가 자전하면서 생기는 하나의 환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큼이나 어쩌면 더 큰 충격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아주 특별한 사람만 아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생활로 다가오고 있는 시대가 펼쳐질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종교는 2500년 전에 사람들이 가졌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계속 논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종교가 현대인들에게 계속 받아들여지겠느냐 하는 문제들이 곧 제기될 겁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우리 삶의 토대가 바뀌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철학이나 가치관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해 사회 시스템에 대해서도 새로운 과제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첫째, 노동과 놀이의 구분에서 오는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거냐 하는 문제입니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수많은 직업들이 없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근대 학교 교육의 핵심은 지식과 기술을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지식과 기술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없는 사람에 비해 노동 효율이 월등하게 높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학교에서 지식과 기술을 배워서 나오면 중산층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런 지식과 기술이 전부 인공 지능과 자동화 시스템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단순 노동뿐만이 아니라 법률과 의료 서비스도 전부 인공지능으로 대체가 가능해지면 노동 과잉 현상이 나타날 겁니다.
지금도 벌써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일거리가 없어지게 되니까 실업률이 증가하게 되고, 많은 종류의 직업들이 없어지고,
우리가 생각도 못했던 직업들이 일부 나타나게 됩니다.
전체적으로 직업 자체가 많이 감소되는 상황에 처하면 결국 일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시스템의 변화
과거에는 일주일에 하루 노는 것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일주일에 이틀 노는 것이 일상이 됐습니다.
독일 같은 선진국에서는 이미 주 4일 근무제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주 3일 근무제로 일상화되면 결국 노는 4일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한 사회적 과제가 될 겁니다.
4일이나 3일을 지금처럼 소비하면서 논다면, 많은 사람들이 빚 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적게 들이고 놀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게임입니다.
그래서 게임 산업의 성장 속도가 두 자릿수 이상으로 급속하게 늘어날 겁니다.
그런데 게임의 문제점은 마약처럼 정신적인 중독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어떤 대안을 마련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되니까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는 돈을 쓰면서 놀아야 하니까 소비가 점점 늘어납니다.
소비가 늘어나니까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니까 더 많은 노동을 해야 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지금처럼 노동과 놀이가 구분되어 있는 상황에서 생기는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이제 새로운 과제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프로그래머와 같이 창의력을 가진 사람들은 점점 더 고소득자가 될 것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직업을 잃거나 단순 노동을 해야 하는 저소득층이 되기 때문에 양극화 현상이 빠른 속도로 심해집니다.
불과 얼마 전에 ‘20 대 80’이라고 표현했는데, ‘10 대 90’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1 대 99’라고 표현합니다.
어쩌면 ‘0.1 대 99.9’라고 표현할 정도로 양극화가 심화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사회 복지 제도를 갖고는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게 됩니다.
벌써 스위스에서는 기본 소득제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한 명당 기본 소득을 주는 겁니다.
옛날에는 초등학교 운동회 할 때 1등 하는 아이에게 노트 3권을 주고,
2등 하는 아이에게 2권 주고, 3등 하는 아이에게 1권 주고, 나머지는 노트를 안 주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학생에게 노트 1권은 일단 나눠주고, 그다음에 1등 하는 아이에게 좀 더 주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독과점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는 현상도 일어날 겁니다.
이렇게 과거 시대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현상들이 지금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명의 위기라는 표현은 기존의 질서가 붕괴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내가 세상을 인식하던 그 틀을 갖고는 이 세상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까 혼란스럽습니다.
세상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혼란스러운 적이 없고 늘 그렇게 변해가는 것인데,
내가 과거의 틀로 지금의 세계를 보고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겁니다.
내가 혼란스러운 것을 갖고 ‘세상이 혼란스럽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이 한눈에 이해되도록 하는 새로운 틀이 아직 제시가 안 됐습니다.
기존의 질서는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는 아직 정립이 안 된 이 상태가 혼란으로 느껴지는 것이고,
이것을 위기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명의 위기
이런 변화의 시기에 잘못 대처하면, 핵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고,
기후 변화에 의한 위기를 맞거나, 신종 전염병 같은 위기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생물 종이 지금 소멸해가고 있고, 변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바퀴벌레가 이미 모든 약에 다 적응을 해서 어떤 약도 바퀴벌레를 소멸시킬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등 동물일수록 변이가 빠른 속도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신종 전염병이 어느 순간에 창궐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현상들은 문명의 위기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기회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문명의 발전이라는 것은 결국 욕망의 충족도를 얼마나 높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망의 충족을 통해서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이 방식으로는 이제 한계점에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붓다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왕자의 생활을 하면서 이미 그 한계를 느꼈습니다.
현대인들의 삶은 붓다가 살았던 시대와 비교하면 왕자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인데도
인생의 고뇌가 해결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해탈’과 ‘열반’이 새롭게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붓다의 눈으로 본 문명 전환
붓다의 눈으로 본다고 했을 때 ‘붓다의 눈’은 ‘지혜’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지혜의 눈으로 보면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는 해탈과 열반입니다.
지금 한국 불교는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해탈과 열반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냥 일반 종교처럼 죽어서 극락 가고, 다음 생에 복을 받는 수준의 얘기를 하는 데에 머물러 있어요.
세속적인 욕망이 불교 안으로 들어와서 궁극적인 목표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을 여러분께 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붓다의 손은 ‘자비’와 ‘치유’입니다.
붓다가 살던 당시에도 아주 훌륭한 종교가 있었는데 그게 브라만교입니다.
지금 봐도 손색이 없는 종교였습니다.
그 당시에 이미 지금 봐도 손색이 없는 하나의 철학이 있었는데 그게 우파니샤드 철학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종교와 철학이 현실에 사는 중생의 고통을 해결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너무 권위주의적이고 형식주의적이었고, 철학은 너무 관념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종교와 철학이 가진 한계를 직시하셨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셨는데, 그게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은 실제적이고 생활적이고 구체적이었습니다.
중생이 겪고 있는 고뇌를 바로 소멸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중생을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일부 스님들만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해탈과 열반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 행복인 줄 잘못 알고 있을 뿐이지 모든 사람은 다 자유롭고 행복하고 싶습니다.
다만 욕구의 충족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입니다.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더 이상 종교나 철학이라는 울타리에 가둬놓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첫째, 지금 우리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붓다의 가르침이 어려운 형식이나 용어에서 해방되어 일상적인 용어로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더 나아가 현재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문명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 불교가 이 위기를 막고, 방향을 제시하고, 현실적인 모델을 만드는 역할을 하자는 것입니다.
한국 불교의 역할로 저는 세 가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한국 불교의 역할
첫째, 전쟁을 막아야 합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중동에서는 작은 규모의 전쟁이 일어나지만,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대량 살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한반도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은 곧 세계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됩니다.
한반도의 평화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하는 일을 가장 선결 과제로 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을 유지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이게 첫발입니다.
둘째,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야 됩니다.
남북으로 나뉜 두 개의 나라를 그냥 하나로 통합하는 그런 통일이 아니라,
여러 사회적 과제와 모순들을 극복한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겁니다.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에 그칠 것이 아니라 통일된 나라는 새로운 나라여야 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100년 전에 3.1 독립운동을 할 때 그 취지가 단순히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다면,
대한제국 부흥 운동에 머물렀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임금이 주인인 나라가 아니라 백성이 주인인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는 대한민국 수립 운동이 3.1 운동의 정신이었습니다.
그것처럼 통일이 분단된 나라를 하나로 합치는 것을 넘어서서
이런 제 사회적인 모순들을 극복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더 큰 비전과 구상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구체적인 하나의 사회 모델을 만들어서 세계에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2600년 전 붓다는 상가를 만들어서 하나의 사회 공동체 모델로 제시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승려들 몇 명이 모인 상가를 넘어서서
하나의 국가 공동체 모델을 만들어서 세계에 제시해 보자는 겁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현실 사회에 성립 가능한 새로운 사회 공동체 모델을 하나 만들자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비전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셋째, 불법의 지혜를 세계인들과 공유해야 합니다.
이런 사회 공동체 모델을 만든 경험이 있어야 그 속에서 얻은 지혜를 세계인들과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스마트폰을 세계에 수출하고, 한류 문화를 세계에 수출했는데,
앞으로 우리의 세계적인 수출품은 이런 새로운 공동체 모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한 모델을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운동을 일으켜 봤으면 합니다.
한국 불교의 비전이 불교 안에 뭘 좀 고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는데 비해 불교는 늘 뒷북치는 것 좀 그만하고,
세상이 안고 있는 고민을 앞장서서 해결한다는 비전을 갖고 심기일전해보면 좋겠습니다.”
한반도 평화 문제에 대한 토론이 심화되어 갈 무렵 사회자가 다시 주제를 돌리며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스님이 말씀하시길, 자꾸 기존의 불교를 고치려고 하지 말고, 새로운 모델을 잘 만드는 게 어떠냐고 하셨는데요.
한국 불교에서 조계종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놔두고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게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제가 오늘 붓다의 눈으로 보면 세상에 이런 문제가 있고,
우리는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발표를 했는데요.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오늘 당장 내가 밥 먹고, 자고, 하는 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야지
우주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랬을 때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세계인들이 볼 때는 ‘정말로 붓다가 말한 지혜로 자신의 문제를 풀고 있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한국 불교인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한반도의 평화 문제를 실제로 풀어낼 수 있어야 밖에
가서도 평화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어요.
자기 집은 전쟁이 나도 내버려 두고 밖에 가서 평화 얘기 아무리 하고 돌아다녀봐야 그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불법의 지혜를 세계인들에게 효과적으로 공유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우리의 경험 사례를 하나 만들어서 제시해야 됩니다.
만약 우리가 남북이 지난 70년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다면,
이 경험은 중동 문제를 푸는데도 롤모델이 되고,
인도 파키스탄 문제 등 아시아 각국의 갈등을 푸는데도 엄청난 롤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 문제를 어떻게 풀었나?’ 이렇게 우리에게 자문을 구하는 정도가 되면,
그 설득력은 독일의 통일 사례와는 비교도 안 될 겁니다.
평화 공존만 이뤄져도 전쟁까지 한 나라가 어떻게 평화적으로 공존하게 됐는지
전 세계 학자들이 엄청난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될 겁니다.
더 나아가 원효의 화쟁사상과 불교의 중도 사상이 남북문제를 푸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면,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현실에 실제로 적용된 사례로서 더 큰 파워를 갖게 될 겁니다.
남이 차려놓은 밥상 위에 숟가락만 얹어 놓고
그걸 불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은 아전인수 격으로 결과만 챙기려는 모습으로 비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세계적인 파워를 갖기 어렵습니다.
첫째,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우리의 주장을 검증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로 만들어볼 수 있겠다는 겁니다.
둘째, 우리가 환경 문제도 해결하고, 평화 문제도 해결하고, 지방분권도 이뤄내고,
민주주의 발전도 이룩하고, 양극화 문제도 해결해내는 그런 사회를 새로운 롤모델로 제시해 볼 수 있겠다는 겁니다.
대한민국이 롤모델로 만들기에는 그 규모가 좀 크긴 합니다.
인구가 5백만 정도 되면 한 번 해볼 만 한데 5천만이라서 규모가 너무 크긴 해요.
그러나 만약 통일 한국을 우리가 그런 비전을 갖고 만들어 낸다면,
전 세계인들에게 한국이 새로운 모델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이 가난을 딛고 세계가 주목할 만큼 경제 성장을 이룩해 낸 것은
경제에 있어서 새로운 모델이었습니다.
중국도 사실은 한국의 경제 성장을 보고 성장 방식을 크게 바꾼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이 경제 성장을 한 것은 미국이니까 가능했지’ 하고 아예 모방할 생각을 안 했는데,
한국이 해내는 모습을 보고 ‘한국이 하는데 왜 우리는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저는 한국이 인권이 보장되고 민주주의가 잘 발전된 사회를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미국이 중국에 압력을 넣는 것의 100배 효과가 중국에서 생겨난다고 봅니다.
중국 인민들은 ‘한국 사람도 하는데 왜 우리가 저걸 못하나’라고 생각할 겁니다.
마치 우리가 경제 문제 해결의 모델을 제시한 것처럼,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게 되는 겁니다.
얼마 전 홍콩에서 송환법 반대 시위가 일어났을 때 ‘님을 위한 행진곡’이 불려지는 모습을 보셨을 겁니다.
그만큼 촛불 시위가 주변 나라에 끼친 영향이 굉장히 큽니다.
100년 전 한국의 3.1 운동이 중국의 5.4 운동과 인도의 비폭력 투쟁에 영향을 주었듯이 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막연히 주장만 하지 말고,
우리가 사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천되는 나라로 만들어보자는 겁니다.
그러려면 우리 불교인들이 민주주의 발전에도 앞장서고,
평화 운동에도 앞장서고, 환경 운동에도 앞장서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정치적인 행위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투표를 적극적으로 하는 행위 없이는 사회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불교 신자들을 얼마나 이 운동에 동참시킬 것인가에 너무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현재 불교 신자들이 갖고 있는 요구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설득시켜서
이 운동으로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가면 100퍼센트 실패한다고 봅니다.
지금 대한민국 5천만 국민 중에는 종교를 떠나서 그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들을 대상으로 오히려 이 운동을 펼치고,
그 힘을 모아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를 전혀 내세우지 않는데,
자세히 보니까 중요한 역할은 다 불교인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알게 되는,
이런 꿈을 우리가 한 번 꿔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허황된 꿈일 수도 있지만, ‘이 땅을 정토화하자’ 하는
추상적인 말보다는 훨씬 구체적인 꿈이라고 생각해요.
삼국 시대에도 동쪽에 치우친 작은 신라가 삼한일통을 꿈꾸고 도전을 했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우리의 구체적인 실천 모델로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론적으로만 문명 전환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너희는 무엇을 했냐?’라고 물을 때
‘우리는 이런 나라를 만들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백 번 얘기하는 것보다 BTS 하나가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게 더 큰 효과를 내듯이
문명 전환을 위해서도 하나의 롤모델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롤모델의 규모가 너무 큰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막연한 평화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민족이 흩어졌으니까 통일하자는 얘기도 아니에요.
통일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남한과 북한을 단순히 합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대한민국을 업그레이드시킨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자는 겁니다.
그런 희망을 갖고 우리가 이 일을 해나간다면,
꼭 성공하지 않더라도 결국은 사회적인 리더십을 갖게 될 겁니다.
50년, 100년이 지나서 그런 사회가 언젠가 만들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의 시작을 누가 했느냐?’라고 물을 겁니다.
그때 ‘이런 사람들이 했다’라고 말하게 될 겁니다.
3.1운동은 그 당시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돌아보면,
3.1 운동마저 없었다면 우리의 정체성을 찾기가 얼마나 곤란하겠습니까.
역사에서 보면 3.1 운동은 결코 실패한 게 아닙니다. 당시에는 실패로 여겨졌지만,
긴 역사에서 보면 3.1 운동은 독립으로 나아가는 성공적인 길이었습니다.
우리도 성공적인 길로 나아간다는 방향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활동을 한 번 상상해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