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성기는 엄청 작았다고 한다.
호르몬 비정상으로 발육이 나빴던 듯, 사후에 그를 검시한 의사가「여자야?」라고 착각했을 정도.
루이 16세는 성기가 매우 작았고 중증의 진성 포경으로 섹스에 문제가 있었다. 마리 앙투와네트가 그토록
사치를 부린 것도, 부부생활에 대한 욕구 불만 탓이라는 설도 있다.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결혼 전, 신전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남자에게 처녀를 바쳐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상대를 구하지 못한 경우에는 몇 년씩이나 신전 앞에서 기다려야 했다.
일반적으로는 별로 알려지지 않지만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대만, 실론섬에 이르는 광대한 왕국이 존재했다.
그 이름은 슈리비쟈야 왕국 그러나 너무 문헌이 적어, 거대한 교역국가였다는 것 이외는 거의 불명확하다.
불교에 있어서의 악마는 힌두교의 락샤샤이며 그 근거지는 남쪽의 랑카섬(실론섬)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당시 실론섬에 살던 사람을 악마로 본 것 같다.
그 다음 불교에서 수라로 여겨지는 아수라는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의 북쪽을 근거지로 한다.
그런데 고대에는 수메르 문명이 존재했고 그 북쪽에는 앗시리아가 있었다.
앗시리아의 주신은 안샤르 라는 이름의 신이다.
수미산은 산스크리스트어로 수메이르 라고 하며 이것과 연관지어
수미산=수메르
아수라=안샤르
라고 하여, 고대신앙의 자취가 아닐까 하고 보는 관점도 있다. 역사의 로망.
예수 그리스도가 골고다에서 처형되었을 때, 동시에 또 다른 예수 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처형되었다.
여러 망상을 할 수 있어서 좋아하는 에피소드.
필리핀은 그 정도 규모도 있고, 대륙에서도 멀지 않으며 예전부터 대륙과 교역을 실시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이 오기 전까지의 역사는 문헌이 너무나 적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바로 그 근처의 보루네오 섬이나 대만의 경우 적더라도 분명 그 나름의 사료가 남아있다)
고대 수메르인
교역으로 인해 자주 역사에 흔적을 남겨 지중해 역사를 언급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민족이지만
침략 당하거나 학살 당한 기록을 딱히 찾아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멸망했다.
왠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민족에게 대한 자부심을 잃어 버렸던 것이 원인인 것 같다.
아프리카 마리 제국의 황제 만사 무사는 이슬람 교도로,
메카 순례를 위해 이집트를 지났을 때, 2톤에 이르는 거대한 금을 싣고 다니며 사치를 부려
이집트의 금 시세를 장기간 걸쳐 하락시켰다.
당시의 마리 제국은 금의 주요 산출국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메카 순례를 위한 여행에서 여비를 거의 다 써버려 돌아가는 길은 가난한 여행이었다고.
러시아 이반 4세의 어릴 적 취미는 크레물린 궁전의 탑에서 개나 고양이를 떨어뜨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황제가 된 이후에는 처형이나 고문에 스스로 나섰을 정도.
또 대성당을 만들었을 때, 그 대성당의 아름다움에 감격, 그 대성당 이상의 아름다운 것을
만들지 못하게 설계자의 두 눈을 망가뜨렸다고 한다.
또 후계자인 아들과 사소한 말다툼을 벌였을 때 지팡이로 아들을 구타, 쓰러진 아들에게 돌아가
껴안지만 이미 아들은 사망. 그 죽음을 한탄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유명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사실 영국 측이 붙인 호칭이다.
야유를 담은 표현으로,
「무적함댘ㅋㅋ」
같은 느낌.
마젤란이 태평양의 한 섬에 기항했을 때의 일
배의 물자를 원주민 도둑에게 도둑질 당했다
마젤란은 분개해 그 섬 사람들을 도둑이라고 비난했지만...
사실 마젤란 일행은 태평양에서 조난에 가까운 상황으로,
식료품이 부족하자 그 섬에서 약탈을 실시하고 있던 중이었다.
자고 있던 나폴레옹의 얼굴에 하인이 카망베르 치즈를 들고 나타나자, 나폴레옹이 한마디
「죠세핀, 오늘 밤은 좀 봐줘」
죠세핀이 액취증이 있었던듯.
사실 서로마 제국은 멸망 직전 증기 기관의 발명에 성공했었다.
그 후 수십년만이라도 서로마 제국이 지속되었다면 실용화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으며
그 결과 인류의 역사는 10세기 이상 빨리 진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명 나라 말기 민란지도자 장헌충은 중국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살인광 중 하나.
어느 날 갑자기 화가 나 자신의 아들과 처첩을 모조리 몰살시켜 버렸다.
그 것을 잊고 아들과 처첩을 불렀지만 나타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항해 시대, 예수회는 중국에서 포교를 하고 있었지만
어느 선교사가 중국에 이미 크리스트교도가 존재한다고 하는 소문을 우연히 들었다.
선교사가 흥미를 느껴 중국의 두메 산골에 들어가자 그가 본 것은 크리스챤이 아니라 무려 유태인이었다.
이 유태인은 북송 시대에 실크로드 교역 당시 와서 정착한 듯 했다.
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유태인 사회는 선교사가 발견했을 무렵 이미 해상 무역에 밀려 쇠퇴, 고립되고 있었다.
그들은 근대까지 존속했지만 현대에 들어와 소멸했다고.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하던 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 제국에 멸망당한 직후,
페르시아 난민들이 잇달아 인도로 피했다.
그러나 인도의 지방영주는 너희들에게 줄 땅은 없다 라면서 난민의 수락을 거부했다.
그러자 난민 대표가 퍼포먼스를 시연했다.
우선 컵에 우유를 가득 따르고 그 안에 스푼 가득 설탕을 넣었지만 우유는 넘치지 않았다.
게다가「우리는 우유에 녹아든 설탕처럼 이 지역에 녹아들어가 더욱 달콤하게 만들 것 입니다」
라고 한 마디.
그것에 감명 받은 지방 영주는 조로아스터 교를 포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정착을 허가했다.
그들은 훗날 영국의 식민지 경영 때 다른 민족보다 높은 지위를 맡아,
현 시대에 와서는 타타 재벌 등의 산업을 일으켜 인도에 공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