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면 대게 그 나라의 모든것을 부정하게 마련이다. 새 나라가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선 이전 왕조의 부당함을 강조하는것이 일반적이므로. 고려의 경우엔 불교가 그러해 조선초 억불정책은 상상을 초월했다. 심지어 왕이 불교를 믿음에도 정책적으론 억불정책을 강요할 정도로.
흔히 조선의 기틀을 잡았다는 재상 정도전은 철저한 신권주의자로, 왕은 그저 얼굴마담으로 여기고,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체재를 구상했다. 이러한 그도 '불씨잡변' 이란 책을 써 불교를 깎아내렸는데, 요즘으로 말한다면 '예수씨 이야기' 정도나 될까. 불신(佛神)도 누구누구 씨氏라고 할 정도인데, 풍수지리설 따위야 개 콧방귀 뀌는 헛소리 쯤으로 여겼을 터. 실제로 그는 새 왕조의 도읍을 정하는 일에도 무학대사의 동향설을 '풍수설따위'로 여기며 북악산 아래 남향으로 대궐 터를 잡았다.
선조시기, 훈구와 사림의 싸움이 사림의 승리로 끝나게 되자, 사림 내부에서 권력의 향방을 놓고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다만, 선조 당대에는 성리학의 해석을 놓고 학파에 따라 갈라졌기 때문에 '정치 싸움'이라고 보기엔 좀 그렇고, '학파 다툼' 정도로 보는게 좋다. 뭐 결국엔 정치 싸움으로 흘러가지만. 당시 중앙정계엔 퇴계 이황계열의 동인과 율곡 이이계열의 서인으로 나뉘었는데, 이황은 이기이원론을, 이이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다.
유교중 성리학은 남송시기 주자가 집대성한 학문으로, 주자학이라고도 불렸는데, 간단히하면 세상 만물을 이理와 기氣로 나누어서 본다는 점이다. 이황은 理를 순선(임금)으로, 氣를 유선유악(신하)로 구분하여,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기(신하)가 이(왕)를 섬겨야 한다... 고 주장한 반면, 이이는 이(임금)과 기(신하)는 결국 하나이니 동등한 관계다...라는 이통기국설을 주장했다. 왕의 입장에선 당연 이황의 이기이원론이 마음에 들터, 이황을 사조로 모시는 동인-남인 퇴계학파가 집권하면서 조선의 붕당정치가 시작된다.
불교를 잡학만도 못한 천학으로 여긴지 200년이 지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숲속에 숨어살던 불교인들은 난세를 절호의 찬스로 여기고 왜란에 적극적으로 참전한다. 이른바 호국불교의 시초다. 이들이 강요당하지 않았음에도 -물론 정유전쟁때는 강요받는다. 왜? 임진왜란때 보니까 잘 싸우거든-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계율까지 어겨가며 자발적으로 참전한 이유는 딱 한가지. 처우개선이다.
당시엔 아무나 머리깎는다고 중이 될 수 없었다. 3년에 한번씩 있는 승과시험을 패스해야만 정식 땡중으로 인정 받았는데, 조선초에 있었던 승과시험이 중종연간에 폐지되버리자 중이 될 길이 막혔던 것.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문정왕후가 1550~1565년 승과를 실시하였지만 이 역시 문정왕후 사망이후 없어져 버린다. 이후 30여년간 정식 중이 될 길이 막혔으니 중들도 답답했을것이다. 하지만 임란에 참전했다고 승과는 부활하지 않았고, 그저 사명당이 퇴속 권유를 받았을 뿐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인조의 집권시기부터 크게 변질된다. 스스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 자리를 차지한 인조- 이 인간이 조祖의 묘호를 받을 가치나 있을까- 는 왕권의 정당성, 명분이 매우 빈약했다. 그도 그럴것이 명분이라고 내세운게 폐모살제- 선조의 정비 인목대비와 아들이자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 선조의 아들 14남중 막내다. 참고로 광해군은 선조의 차남. 인조는 선조 5남 정원군의 아들이다.- 인데, 실제론 대북파에 밀려 떨거지 신세가 된 서인들이 공모해 왕을 몰아낸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왕위찬탈을 공모했다지만, 인조는 태종도, 세조도 될 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명분이 없었고 약했다. 또한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스스로의 지위가 불안정해지자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한다. 임금은 무조건 따라야할 군왕이며, 신하와 백성은 복종해야만 한다. 남녀간에도 유별해야하며, 아내와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거부할 수 없다... 심지어는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던 자기 아들조차 믿지못해 제주도로 귀양보낸 뒤 독살- 언제나 독살설은 정설이 될 수 없지만 이경우엔 좀... 자기 손자를 개새끼라고 부르는 할아버지가 어디있나- 시킬정도니.
흔히 탕평책의 시초라 불리는 숙종은 드라마의 깨방정 이미지와는 다른 냉혹한 정치가였다. 정치 고단수로 3대 임금을 섬긴 송시열을 한방에 골로 보냈으며, 스스로 환국을 주도해 그때마다 신하들이 떼죽음시켜 감히 신하들이 왕권을 넘보긴 커녕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웠다. 줄 잘못스면 그냥 훅... 이는 살아생전 존호를 받은걸로 익스큐즈.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아 집권초기 왕권이 약했으나, 80이 넘게 장수하면서 천천히 왕권을 강화시킨다. 집권당은 서인-노론-벽파. 정조의 경우 아버지 세도세자때문에 세손시절 암살위협을 받을정도로 시달렸으나 영조가 확실히 제위계승의지를 밝히며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조시기까지만 해도 붕당은 형태를 유지하며 서로 견제하면서 권력 독점을 금한다. 이는 오늘날 나타난 민주정의 다당제와 흡사한데, 흔히 정치에 관심없는 사람들은 정치인들을 "맨 싸움만 하는 놈들"이라고 폄하하지만, 이들은 원래 당의 노선에 따라 싸우는게 주 임무다. 만약 가치관이 다른 당끼리 손을 잡으면 무슨일이 벌어질까? 바로 국회의원 하루만 되도 월 120만원씩 받는 법이나 만들 것이다. 이런걸 견제하기 위해, 즉 특정계층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것을 막기 위해 있는것이 다당제와 붕당인 것이다.
하지만 정조의 급사후 10살의 순조가 즉위하면서 모든것이 무너지게 되는데... 흔히 알려진 정순왕후 김씨는 3년밖에 수렴청정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정조생전 정조의 충신으로 여겨진 남인-시파계열 김조순의 안동 김씨가 순조때, 헌종은 풍양 조씨들이, 철종은 다시 안동 김씨 이렇게 60여년간 대원군이 즉위하기 전까지 조선팔도를 아작낸다. 이미 붕당은 무너진지 오래고, 한 두 가문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된것이다.
대원군이 권력을 잡으면서 세도가들의 힘이 없어진것이 아니다. 박정희가 사망한지 30년이 넘었지만 그 영향력이 21세기 대한민국에 미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는것처럼, 권력의 대표부분을 빼앗긴 것이지 각 지방에선 아직도 세도가들의 영향력이 강했다. 오죽하면 대원군이 명령한 방곡령도 한낱 지방관 따위가 거부를 할까. 이 상황에서 대원군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아들인 고종의 처를 세도가와는 맺지 않아야 하며, 왕권을 강화시켜 세도가들을 찍어 눌러야만 했다.
하지만 세도가를 누르기 위해 자신이 직접고른 민씨는 여흥 민씨들을 각 관료자리에 등용시켜 또 하나의 세도가를 이루었으며, 고종 또한 친정을 위해 상소문을 빌미로 대원군을 몰아내니 이것이 1873년 대원군 집권 10년차였다. 이 이후 상황이야 뭐...
결론 3줄 요약
1. 조선의 붕당은 원래 성리학의 견해차이에서 시작.
2. 붕당정치는 집권당의 권력 독점을 막기위한 현재의 다당제와 유사.
3. 당파싸움보단 세도정치 60년이 조선을 망친 원흉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