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에서 술을 취급하는 고교생의 행위는 불법이다.
그 행위를 볼때 법치국가 혹은 강력한 미성년자 보호 프로그램을 주장하는 이들이라면
해당업소의 불법 행위를 규탄하고 업주에게 강력한 법의 응징(심지어는 도덕적인 응징까지도)이 이루어지길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업주와 고교생에게 처벌이 불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될 수 있다. 비록 주류를 취급하지만 업주의 철저한 관리 감독하에 미성년자의 음주를 봉쇄할 수 있을지도 모르며(애초에 종업원이 업무중 음주를 한다는 자체가 넌센스이기도 하다) 미성년자의 음주를 제한하는 것은 부당한 인권침해라는 주장도, 미성년자를 규정하는 연령이 너무 권위적이고 주관적인 판단하에 결정 되었다며 그것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존재할 수 있다.
실증법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부터 철저한 법치의 우산까지.
미성년자의 인권, 권리와 보호에 대한 상반되거나 일치하는 주장까지.
흔히 벌어지는 주변의 작은 일상조차 수많은 정의가 존재하고 그것들 각자의 방향을 향해 뻗어 나간다. 그 수많은 선택지 중 무엇이 절대적인 정의라 주장하기는 힘들다.
극단적인 예로 현대 사회에서 살인은 오랜시간 사회격리를 강요당하는 매우 중한 범죄이다.
하지만 전시라면 살인은 그를 영웅으로 만든다.
조금 덜 극단적인, 살인 용의자를 추격하다 그를 사살한 경찰 또한 영웅은 아니더라도 '적법한' 절차를 수행하였다면 사회에서의 격리를 요구받지 않는다.
정의의 절대(NEVER)를 부정하는 사례는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나 어린 아이를 위해 도둑질을 한 엄마등 많은 곳에서 발견된다. 구태여 전쟁같은 비극적이고 희소한 상황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말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수많은 정의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것들의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이 주장하는 정의가 절대적 정의라 주장하긴 힘들것이다.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도 부정 당하고 있다!)
다양한 정의로움이 사회에 넘치더라도 그것들을 인정하고 포용한다면, 타인의 정의를 수용할 수 있다면 나의 정의 역시 수용될 수 있을것이다.
절대적인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정의의 공간에서 타인에게 나의 정의를 강요하지말자.
그때의 기억은 훗날 그대의 볼을 첫사랑에 빠진 소녀의 볼마냥 붉게 타오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