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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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디씨 매드맥스 리뷰(스포) (1) 2015/05/18 PM 01:54

출처는 디시인사이드 영화갤러리 글쓴이는 .날아라.

PC링크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movie2&no=3850454&page=1&recommend=1
모바일링크 : http://m.dcinside.com/view.php?id=movie2&no=3850454&page=1&recommen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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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시타델은 임모탄 조와 그 친인척 등으로 이루어진 최상위 계층 - 눅스를 비롯한 워보이 - 그 외 노동자들 - 맥스가 맡게 되는 피주머니 등의 최하위 계층으로, 그 권력 구조가 공고화되어 있는 사회이다. 여기서 여성들은 줄곧 젖을 짜내거나 임모탄 조의 아기를 낳는 역할을 도맡으며 성적으로도 철저히 착취되고 있다.


이런 사회 하에서 퓨리오사는 여성인데다 타지에서 납치당해 시타델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이라는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자신을 둘러싼 권력 관계를 자력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극복해낸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좀 더 큰 차원에서 남녀 간의 권력 관계를 무너뜨리고자 'We are not things.'라는 구호와 함께 임모탄 조의 여성들을 '전투 트럭(war rig)'에 실어 시타델을 나선다. 그렇다. 이것은 전투이자 투쟁이다.


영화는 퓨리오사가 전투트럭을 타고 시타델을 나서는 순간부터 액션 씬들을 쏟아내며 질주하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까지는 기존의 권력 관계가 유지된다. 아직 영문을 모르는 일부 워보이들이 퓨리오사의 명령에 따르고, 워보이 눅스는 임모탄 조를 여전히 신격화하며, 피주머니 맥스는 눅스의 차에 매달려 있다. 그러나 모래폭풍이 불어닥치면서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폭풍은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가 아마 가장 대표적인 예일 테지만) 기존의 사회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암시하는 대표적 상징 중 하나였다. 폭풍이 지나고 난 뒤, 아마도 기존의 경우였다면 사령관(퓨리오사)-워보이(눅스)-피주머니(맥스)로 이어졌을 관계가 뒤엉키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맥스가 퓨리오사를 비롯해 여성들을 처음 만나는 씬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필 맥스가 처음 그들을 만날 때 카메라는 맥스의 시선을 따라 정조대를 분리해 내며 물로 몸을 씻는 여성들의 신체를 훑는다. 완벽한 타자화의 시선이다. 그리고 뒤이어 맥스와 눅스는 육체적 완력과 총 등을 이용해 여성들을 제압한다. 모래폭풍이 지나자 기존의 권력 관계에서 사회적 계층에선 더 아래 계층에 속했던 남성들이 육체와 무기를 수단 삼아 여성들에게 성별에 기반한 권력 관계를 재정립하려 드는 것이다. 시타델에서 여성에게 이루어지던 이중적 착취 중 남성들은 자신에게 더 유리한 한 가지를 선택한 셈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남성들의 시도는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한다. 전투트럭의 운전 및 액션의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은 퓨리오사이며, 남성들은 조금씩 변두리로 밀려나 있다. 늪지 저격 장면의 경우를 보아도, 맥스가 두 번의 저격에 실패한 반면, 퓨리오사는 그 총을 받아들어 맥스의 어깨를 보조 지지대로 이용하기까지 하며 단발에 상대를 맞혀 버린다. 이어 맥스가 활약할 장면이 등장하긴 하나, 카메라는 맥스가 홀홀단신으로 중간 보스격 인물을 박살내는 과정을 굳이 보여주지도 않는다. 대신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맥스가 피를 묻힌 채 돌아와 '어머니의 우유'로 피를 닦아내는 모습이다.


사령관 퓨리오사와 워보이 눅스는 임모탄 조에 반기를 들고, 피주머니 맥스는 다시 자신의 상층에 복종하지 않고자 하며, 여성들도 남성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시타델에서의 모든 질서들이 무너진 이 여정을 통해 그들이 마침내 이른 공간은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부발리니 전사들의 공동체이다. 이곳에 도착한 퓨리오사는 자신의 대모와 어머니의 이름을 말하며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그가 자신들의 일원임을 확인한 공동체원들은 그녀의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오며 그녀를 반긴다. 아버지의 존재는 철저히 지워져 있다. 또한 이 전사 부족이 파 두는 함정은 '남성이 위기의 빠진 연약한 여성을 구한다'는 가부장적인 관념을 그대로 역이용한 방식이기도 하다. 가부장적 질서를 거부한 여성들의 연대는 시타델-가스타운-무기농장 연합공동체에서 보이는 남성들 간의 가부장적 연대와 정반대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시타델-가스타운-무기농장은 모두 남성 지도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정점에는 시타델의 임모탄 조가 서 있다. 그리고 임모탄 조의 자식들은 모두 아들들이며, 스플렌디드가 숨이 끊어져 갈 때도 임모탄은 그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면서까지 아이가 아들인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존의 공동체인 시타델을 벗어나 광야에서 기존 질서를 전복시켜 가며 여성들만의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과연 퓨리오사의 투쟁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인가? 퓨리오사는 여성들을 자신의 고향인 '많은 어머니들이 계신 초록색 땅(The green place of many mothers)'으로 데려가려 한다. 우리는 '물건'이 아니라며 그 땅을 탈출해 '어머니'를 이상향으로 둔 채 향해 간다면, 그것은 단지 노골적인 타자화에서 조금 덜 노골적인 타자화의 영역으로 옮겨가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더불어 '초록색 땅(The green place)'은 이미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비롯해 수많은 문학 작품들에서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시하는 일시적 이상향에 불과하다. 그 작품들 속 인물들은 숲이나 섬 등 초록의 땅에서 기존 권력 관계를 전복시키지만, 정작 그들이 떠나온 문명 사회는 이 전복의 시도로부터 안전하고, 초록의 땅으로 탈출해 왔던 인물들이 일련의 사건들을 거쳐 다시 문명의 사회로 편입해 들어가는 순간, 기존의 사회 질서 및 권력 관계는 더욱더 공고해지는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함정을 그대로 꿰뚫어보고 있다. 퓨리오사 일행이 그토록 염원하던 'green place'는 이미 황폐화되어 존재하지 않는 곳이 되었음이 밝혀진다. 여기서 그들은 이제 부발리니 전사들과 규합, 시타델로 돌아가 그곳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로 결정한다. 수 세기 전 초록빛 이상향이라는 문학적 모티브가 기능하던 방식과는 달리, 그들은 그 초록빛 타지, 피안의 세계에서 치유받은 뒤 다시 이전의 질서로 편입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초록빛 피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기존의 질서를 직접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 이 귀환의 목적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액션 시퀀스가 바로 이 귀환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 마지막 액션 시퀀스는 여성 캐릭터들의 액션의 전면에 나서고 퓨리오사가 액션을 전체적으로 주도해 가는 한 편, 맥스와 눅스가 이를 보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맥스는 영화의 제목에도 명시된 주인공답지 않게 클라이맥스에서 늘 어딘가 매달려 낑낑대거나 잔챙이들과 맞서는 정도의 활약만 할 뿐이다. 그나마 제일 큰 활약을 하는 것이 피플이터를 죽이는 것인데 이조차도 그가 직접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맥스를 노린 임모탄 조의 총알을 피플이터가 맞고 죽게 되는 식으로 처리된다. 맥스는 영화 내내 단 한 번도 직접 권력의 정점인 임모탄 조와 맞서지 않고 늘 2인자인 가스타운과 무기농장의 지도자들과 맞선다. 그런데 이조차도 앞서 말한 것처럼 카메라에 등장하지 않거나 간접적인 방식으로 처리되는 것은 상당히 독특하다 할 것이다. 반면, 퓨리오사는 여성 캐릭터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임모탄 조와 대면해 그를 죽인다.


시타델-가스타운-무기농장의 남성 지도자들은 모두 허무하리만큼 쉽게 죽음을 맞이한다. 임모탄 조가 이미 병든 몸에 근육질 형상을 새긴 방어구를 입고 마스크를 낀 뒤 보조를 받아 일어나는 모습, 눈이 멀어버리는 무기농장의 지도자, 흉하게 발이 붓고 우스꽝스러운 가슴 피어싱을 한 피플이터의 모습 등에서 이미 그들이 대단한 존재들이 아님은 드러난 바 있다. 또한 그들의 허망한 최후가 그들이 누렸던 권력의 실체를 파악하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세 지도자가 한꺼번에 죽어버린 상태에서, 임모탄 조의 두 아들 중 하나는 죽고, 다른 하나는 심한 기형을 앓고 있으며, 그나마 '모든 면에서 완벽한' 셋째 아들은 임모탄에게 반기를 든 스플렌디드와 함께 죽어버렸기에, 임모탄 조의 부계 세습 가능성은 사실상 차단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눅스의 자기 희생으로 그나마 전투 전력으로 활용될 수 있는 워보이들이 모두 죽거나 시타델로 올 수 있는 길이 차단되어 버렸기에 시타델에 남은 남성들은 모두 병든자들 뿐이다.


한 편, 맥스의 경우 수혈을 통해 퓨리오사를 살린 뒤 자신은 시타델을 떠난다. 그 수혈은 기존에 피주머니의 수혈이 가지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맥스 스스로 퓨리오사를 새로운 지도자로 인정한다는 표시인 동시에, 이 영화의 타이틀 롤, 주인공 역할은 맥스 자신에게서 퓨리오사에게 넘겨주는 듯한 의미로까지 볼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조지 밀러 감독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와 퓨리오사를 주인공으로 한 속편 <매드 맥스: 퓨리오사>를 동시 제작하려 했으나 제작 상의 문제로 후자를 나중에 제작하기로 계획을 변경한 바 있다.


이처럼 마지막 액션 시퀀스와 뒤이은 수혈 장면을 통해 시타델에서 기존의 남성 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인 질서를 존속시킬 수 있는 남성 지도자의 가능성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버렸다. 이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퓨리오사와 부발리니 전사들, 임모탄에게서 탈출한 여성들로 이루어진 여성 연대이다. 또한 그 연대에는 대물림의 가능성이 열려 있기도 하다. 시타델로 돌아오기 전의 한 장면에서, 임모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금발 여성이 자신의 뱃속아이를 'Warlord Junior'라 부르며 '보나마나 못생겼을 것'이라 말하자, 한 부발리니 전사가 그녀에게 '혹시 딸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묻고, 이에 금발은 그저 물끄러미 그 전사를 바라본다. 그때 부발리니 전사는 자신이 모아오던 씨앗을 금발 여성에게 보여준다. 마지막 액션 시퀀스에서 그 부발리니 전사가 죽었을 때, 그녀의 품에서 그 씨앗을 받아든 것은 그 금발 여성이다. '아들'이었던 뱃속아이는 이미 죽었지만 '딸'일지 모르는 뱃속아이는 아직 살아있고, 그 잉태자는 가부장제에 투쟁해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던 전사로부터 씨앗을 전달받는다. 시타델에서 새로운 질서가 움트리라는 직접적인 은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 퓨리오사를 모두가 환영하는 와중에, 수동적으로 젖을 짜야 했던 또 다른 여성 피착취자들은 이제 자발적으로 (임모탄 조의 독재의 핵심적 수단이었던) 물을 전면 개방한다. 기존의 주인공 맥스는 이를 지켜보곤 인파 속으로 사라지며, 새로운 지도자와 여성의 연대가 병들고 주린 자들의 손을 잡고 함께 도시의 상층부로 향해 가는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는 이 모든 것을 결코 구차하게 떠들어대지 않는다. 액션의 연쇄로 이루어진 이 영화 구성상 이러한 요소들이 구구절절 대사로 추가되거나 액션과 동떨어진 별개의 장면들로 삽입된다면, 이는 상당히 구태의연한 텍스트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액션 시퀀스들의 연쇄, 그 안의 인물들의 동선을 통해서 매우 효율적으로, 그러면서도 매우 탁월하게 이 모든 것들을 녹여내는 것이다. 서사와 액션 시퀀스들을 딱딱 맞추어가는 그 섬세한 한 땀 한 땀이, 이 영화를 결코 단순히 머리 비우고 보는 영화라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게 한다(물론 액션의 연출조차 수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니 머리 비우고 보아도 충분히 대단하지만.). 이 영화의 서사가 단조롭다고 비판하는 이들은, 감히 짐작하건대, 이 영화의 껍데기만 보았거나, 혹은 이렇게 간단하면서 밀도 있게 서사를 쌓아가는 것이 훨씬 어려운 작업임을 쉬이 잊는 이들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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