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세월은 흘러...
1차대전이 발발하자 병사들의 군장에는 멸균된 붕대가 포함되며 더러운 손으로 부상자
를 만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죠.
p.s:
앙브로아즈 파레는 전장에서 증명된 실력있는 외과의였는데다 진단 - 외과적 조치와 치
료 - 회복 - 예후에 대해 많은 경험과 날카로운 관찰을 겸비했었죠. (보철술 또한 좋았
던지라 오늘날에 근접한 방법으로 골절 환자를 처리했다고도 합니다.)
파레의 Opera Chirurgica중 보철법에 대한 장중 하나. 1594년.
그는 그런 경험들을 라틴어 대신 평이한 프랑스어, 그것도 구어체로 적었죠.
당시의 의사 - 내과의 - 들이 보기엔 무식함을 증명하는 일이었지만 쉽고 익숙한 말로
이야기하듯이 겸손하게 쓰여진 그의 책은 곧 프랑스만 아니라 독일, 영어, 네델란드어
로 번역되어져 퍼져 나가게 되며 외과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외과의가 의사와 기술자(이발사) 사이에서 천시되던 상황에서 외과의를 의사로 또한 확
고한 의학의 영역으로 자리 잡게 만드는데 한몫을 한 셈이랄까요.
p.s:
그나마 미국 남북전쟁후 두개골과 복부 부상에 대한 연구등이 진행됩니다.
특히 복부 부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며 여기에는 마취제와 깨끗한 수술의 공이 클겁
니다.
그러나 20세기초만 해도 지금은 하도 오만병 다써본지라 병에 대해 이골이 난 드라마조
차 안써먹는 맹장염 수술이 저 때는 매우 큰 수술이자 목숨걸고 할 지경이었죠.
아니 1930년대나 1960년대만 해도 위험하다는 소리를 하던 동네도 있었답니다. (우리만
해도 1970년대까지 맹장염이 가벼운 수술 정도로 취급받진 않았습니다.)
p.s:
전쟁이 의학을 발전시키는데 나름 공헌을 합니다.
1차대전은 병사자보다 전사자가 더많아진 첫 전쟁이었으며 각종 수술후 생존율이 비약
적으로 올라갔는데다 무엇보다 이전에는 포기됐을 내장의 손산에 대처하게 됩니다.
수천년간 복막염으로 죽어갔던 병사들을 살리기 시작한 전쟁이었죠.
19세기까지만해도 복부에 총상을 입었고 그래서 복막염으로 번져나갔다면 그건 손쓸 수
가 없었던지라 복부에 부상을 입어 내장이 보이고 속의 내용물이 흘러나온거 같다 이러
면 그저 한켠에 치워두는게 나았다고 판단됐으니.
1차대전때는 아직 믿을만한 항생제는 없었지만 이런 북부 부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게
됩니다.
생리 식염수로 세척하고 봉합을 하는 기술이 적용됐으니.
더불어 의족과 의수, 초보적인 안면 복원술까지 시도된 시기기도 합니다. (안면 복원술
은 이전에 비해 나아진 편이란거지 괜찮은 수준이라 하기는 어려웠죠. 덕분에 프랑스등
에서는 얼굴이 크게 망가진 부상병이 전후에 따로 외진 곳에 모여살았다든지 하는 이야
기를 만듭니다.)
아울러 1차대전은 수혈법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수술에 대한 자신
감은 가스 괴저와 같은 증상에 대해 예방적인 조치 - 넓은 부분에 대해 절제를 하고 식
염수로 세척하는 - 를 가능하게 하죠.
2차대전에서는 흉부에 대한 부상에 대처하게 됩니다.
폐를 다친다는 것은 더이상 살기 힘든 부상이었으나 2차대전에서는 폐의 총상에 대처하
는 방법들과 수술로 처리하는 방법들이 자리를 잡게 되죠.
또한 수혈법은 더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됐으며 소련에서는 수혈용 혈액의 확보
를 위해 군의관이나 간호원, 민간의 자발적인 참여가 애국심의 한 예로 인식될 지경이
되죠.
물론 미국에서는 혈장의 활용으로 많은 부상병을 구해내게 되죠.
한편 이제는 전염성 병자가 발생하면 그건 의료체계가 막장상태라고 평가될 정도가 되
버리죠.
한국전에서는 야전 병원에서 혈관 수술을 진행할 수준이 됐죠.
참고로 1차대전때만해도 야전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드물게 절단 수술을 할 정도
였고 많은 경우 그저 붕대를 감고 지혈하고 쇼크를 막기위해 담요를 둘러준 다음, 들것
으로 부상병을 후방의 침상이 있는 병원까지 이송한다는 것이었죠.
그에 대해 한국전에서는 야전 병원에서 어지간한 조치를 다 취한 다음, 후방으로 후송
보내 나머지 조치와 수복 또는 회복을 기다리는 정도가 됩니다.
월남전에서는 야전 병원에서의 조치에 더해 야전과 야전 병원, 후방의 군의 체계를 신
속한 후송으로 연결하여 이전에는 죽을 수 밖에 없던 부상자도 살려냈다는 평을 듣게
되죠.
지금은 외과적인 조치는 더이상 발전할 부분이 있을까? 라는 소리가 나올 지경인데다
이전에는 어쩔 수 없던 내지는 손쓰기 곤란한 부분들 - 가장 대표적인게 쇼크 - 을 잡
기위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죠.
이런 발전은 미군등의 이야기며 대한민국 군의료 체계는 예외로 칩시다.
p.s:
지금도 이전보다는 아주 양호해졌지만 감염되거나 혹은 의료 자원이 형편없는 상태에서
감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연쇄상구균(streptococcus), 혐기성 파포형성 간균이자
가스괴저, 산욕열, 파상풍등을 일으키는 clostridium, 녹농균(Pseudomonas), 살모넬라(
salmonella), 병원성은 없지만 대장균(Escherichia coli), 결핵균류(mycobacterium
tuberculosis), 폐구균, 신장 계통 감염으로 가는 비운동성 비아포성 neisseria 균속등
등이 감염을 일으키죠.
p.s:
간균에 의한 괴저는 한 때 전장에서 매우 유명해진 때가 있었죠.
프랑스와 플랑드르의 비옥한 흙은 농사짓기 좋았고 당연히 농부들은 더많은 소출을 위
해 거름을 줬으며 그 거름은 말과 소의 똥을 주로 사용하죠.
문제는 저 말과 같은 동물의 소화기에는 간균들이 득실댔다는 점이고 이게 배설물과 함
께 흙에 있다 누군가 다치면 그 상처속으로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물론 평상시 농사짓는 입장에서야 이런 일이 아주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아닙니다만 저
기서 전투가 벌어지자 이야기가 달라져 버리죠.
부상자의 상처를 통해 간균이 들어갔고 거기서 이 혐기성 세균은 번식하며 저 당시 한
군의관이 표현한 대로의 증상을 나타냅니다.
'48시간이 지나면서 상처 부위가 부어오른다.
그리고 상처가 벌어지며 상처의 표면 절반은 젤리같으며 나머지는 마른 괴상한 형태가
된다.
곧 부상당한 부위가 더욱더 부어오르며 회색에서 푸르스름한 색으로 변하게 된다.
이 때 부어오른 환부에 손을 대보면 거품이 끓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처음 가스 괴저가 관찰됐을 때는 이미 상처 소독 과정이 일상화됐으니 곧 나을거라고
생각하고 나뒀답니다.
그러나 상처 부위에서 갈색의 악취나는 고름이 나오면서 상처에 공기가 찬듯한 느낌이
들고 병사가 섬망과 오한등을 호소할 때면 살아 남는 부상자가 없을 지경이라 곧 양쪽
모두의 군의 체계에서 난리가 나게 됩니다.
그러다 프랑스의 한 의사가 과격하게 보일 수 있는 예방적인 수술법을 개발하죠.
상처난 부위를 예방적으로 도려내버리며 특히 괴저가 난다 싶으면 더욱더 확실하고 단
호하게 해당 부위를 제거해버렸답니다.
가령 엉덩이에 파편 하나가 박히고 거기를 통해 흙이 들어갔다면 볼거 없이 엉덩이 살
거의를 도려내는 경우도 있었다죠.
그런 다음 수술 부위를 식염수로 세척해대는거였죠.
영국군 기준으로 1차대전중 개방 골절의 6%, 부상의 1%정도가 가스 괴저로 발전했고 이
로 인해 공포의 존재가 됩니다만 그 후 전쟁에서는 더 나아진 조건과 응급 의료 체계로
인해 발생 확률이 줄어듭니다.
미군의 경우 2차대전중 0.7%였고 한국전 중에는 0.2%, 월남전 중에는 더욱 빨라진 후송
(헬기 포함)과 응급조치, 야전 의료 체계의 발전으로 0.002%가 발생했으며 포클랜드 이
후로는 서방측 군대치고 한건이라도 발생한 경우가 없게 됩니다.
걸프전의 경우가 대표적으로 아예 발생조차 한 적이 없다고 하죠.
단, 그렇다고 이 가스 괴저가 아예 사라진건 아닙니다.
평시에 모르고 넘어가다 어, 이상한데 하다가 팔다리 자르는 일로까지 커질 수 있죠.
이건 군인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충분히 걸리고 난리날 수 있는 일이므로 작은 상처라도
만만하게 보고 넘어가면 안될 겁니다.
p.s:
Re-enter OTHELLO
Not poppy, nor mandragora,
Nor all the drowsy syrups of the world,
Shall ever medicine thee to that sweet sleep
Which thou owedst yesterday.
양귀비도 맨드라고라도
이 세상 잠오게 하는 어떤 약도
어제까지의 단 잠을 그들에게 주지 못하리
--- 오델로 3장 3막, 책꽂이에서 찾아도 안보여서 때려맞춤. 아놔.
저기서 만드라고라는 mandrake로도 불리는 식물.
걍 뽑으면 비명 질러대고 그거 들으면 죽으니 개로 뽑는다거나 헤리 포터와 비밀의 방(
맞아요?)에 나온 것도 아니고 모 게임에 나오는 것도 아닌 걍 현생 식물입니다.
이런거 아녀요.
이전부터 약초로 사용된 물건이자 그 기록이 이집트나 성경에도 나오죠.
이건 이집트 벽화에 묘사된 레몬과 만드라고라 뿌리를 가져오는 여인네들.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
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 하였더라
--- 창세기 30:16, 합환채가 바로 맨드레이크
오래전에 이미 몇가지 수면 또는 진통 효과가 있는 식물이나 약물이 알려졌죠.
저 만드라고라도 거기 속한 식물입니다.
불면증이나 불안등에 곧잘 처방됐고 환각이 보인다는 소리가 나왔으니 거기서 다시 마
녀의 식물이자 마법의 재료처럼 보이게 된건 놀랄 일도 아닐 겁니다.
교훈 : 얘들 아무 약이나 먹이지 마라.
이미 양귀비, 사리풀(Hyoscyamus niger, 천선자)등이 사용됐으며 특히 이중 아편 - 덜
익은 양귀비 꽃몽오리에 상처를 내고 그 수액(눈물)을 받아 굳힌 - 은 고대에서 이미
잘 알려졌고 레테온(Letheon_이란 단어로 지칭되며 중세를 거쳐 근세까지 의학적으로
사용됩니다.
뭐 그러고보니 사리풀이니 이런 식물들 덕분에 가지과(Solanaceae)들이 한때 묘한 시선
을 받기도 했죠.
당장 흰독말풀, 맨드레이크, 벨라도나등의 잘 알려진 유독 식물들이 여기 속했고 이 덕
분에 토마토와 감자가 대접이 팍팍했죠.
담배나 고추속 식물이 환영을 받은 것에 대해서 차별이다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1 데나리우스만큼의 양귀비의 눈물에 몰약, 후추를 각각 2 데나리우스 혼합한 알약은
고통을 덜어주는데 좋다.
(아편)알약들은 그 쓰임새가 다양하며 그냥 먹어도 졸음을 유발한다.
적포도주와 소량을 먹으면 귀앓이가 멎으며 배앓이도 멎는다.
밀랍과 장미기름, 사프란과 혼합하면 외음부의 염증 치료에 좋다.'
--- 셀수스(Aulus Cornelius Celsus, ca. 25 BC ~ ca. 50)
* 데나리우스 Denarius, 로마의 은화.
4.5그램 정도의 무게. 그러나 후대로 가면서 은 함량이 점점 낮아져 3.9그램에서 3.6
그램대까지 낮아지기도...
물론 알코올도 사용됩니다.
이미 히포크라테스가 의료 행위를 하던 그 시절에 결석 수술등을 하기 전에 독한 술을
권하라는 소리가 나오던 판이었으니.
'I will not cut for stone, even for patients in whom the disease is manifest;
I will leave this operation to be performed by practitioners, specialists in
this art.'
---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원문.
저기서 I will not cut for stone 이 결석 수술 내 맘대로 안하겠다는 소리입니다.
회음부를 절개해서 방광을 거쳐 결석 제거하는 짓을 저 때 했고 당연하게도 환자는
고통의 비명과 수술후 사망은 드물지 않았고 다행이 살아남아도 자칫하다간 여생을
지린네 풍기며 살 수 밖에 없었다고 하죠. (수술한 곳으로 줄줄 세는 일도 생길테
니...)
물론 돈이 되니 저런 무작스런 수술하자고 덤빈 의사의 주머니는 묵직해질테고 이
게 과연 윤리적이며 좋은 의사냐에 대해 비판이 가해질 법도 한겁니다.
즉, 저 구절을 현대적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겠죠.
'돈 때문에 환자 몸에 니 맘대로 칼질 하지 말고 아무거나 처방하지 마라.'
자, 이런터라 생각보다 저런 마취약 또는 수면제에 대한 묘사가 세익스피어같은데서도
등장하는 겁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만 해도 왠지 마취약을 묘사한듯한 설명이 나오죠.
줄리엣에게 로렌스 신부가 오래전에 아는 방법인디, 약을 만들어 먹으면 죽을줄 안다
라고 하는 4장 1막을 본다면 뭐. (씨댕, 찾으려고 하니 마비노기가 왜 나오나?)
물론 불행하게도 머리에 피도 안마른 두 커플은 오해로 진짜로 죽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발전 가능성은 중세를 거치며 묻힙니다.
아니 아편제나 이런건 남아서 약으로 사용됐지만 수술이나 산고를 덜어주는데는 적극적
으로 활용된건 아닙니다.
수술이야 19세기전만 해도 굉장히 위험도가 큰 처방이었으니 그러려니 해도.
더욱 흔히 사용된 편인 알코올은 마취가 되기까지 적당한 양을 잡기가 쉽지도 않았으며
고통을 줄인다는데 효과가 좋았던 것도 아닙니다.
적게 먹이면 오히려 흥분제처럼 작용해 환자에게 더 큰 고통을 주기도 했고 그러하고
많이 먹이면 술많이 먹였을 때 벌어지는 모든 짜증스러운 일들이 줄줄이 발생하게 됐으
니.
18세기를 거쳐 꿈과 희망(?)의 19세기로 오며 몇가지 발견이 이뤄집니다.
그런데 이런 발견이 항상 정방향으로 간건 아닙니다.
죠셉 프리스틀리는 1772년, 아산화질소를 발견했고 - 치과등에서 홉입 마취제로 사용되
죠 - 험프리 데이비는 마취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했죠.
또한 그 자신이 사랑니를 뽑으면서 생긴 잇몸 염증의 고통을 아산화질소를 마심으로 해
소할 수 있다는걸 체험하기도 합니다.
* 프리스틀리나 데이비 둘 모두 화학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죠.
만약 데이비의 실험에 누군가 진지하게 주목을 했었다면 18세기에 아산화질소가 홉입
마취제로 사용됐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누구도 이걸 잡아내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 가능성을 연 프리스틀리나 데이비조차도... (의사가 아니었으니 별 수 없었
겠지만서도)
웃기는건 이 시기, 저 아산화질소는 소기(laughing gas)란 이름으로 마취제가 아닌 파
티의 분위기 띄우기에 사용됩니다.
한편 이 때쯤되면 에테르들이 합성되기 시작합니다.
이미 16세기경 황산과 독한 포도주 추출물(알코올)의 혼합물을 증류하면 향기로운 황산
(바로 에테르, 디에틸에테르)이 나온다는 것이 알려졌지만 묻혔다가 18세기 말쯤 되면
다시 합성되기 시작합니다.
저 때 '유황 에테르'(sulfuric ether)라 불린 잘 휘발되는 액체도 아산화질소와 비슷한
효과를 가진다는게 알려졌고 이젠 놀랍지도 않게 그저 여흥용 약품으로 사용될 뿐이었
죠.
그러다 19세기 들어서 미국에서 에테르와 아산화질소를 마취제로 사용하는 시도가 이뤄
지며 1840년대가 되면 더 새로운 마취제인 클로로포름이 등장합니다.
이런 배경 덕분에 남북전쟁중 군의관들은 부상병의 코에 클로로포름을 적신 가제를 1분
정도 덮어뒀다 반항못하는(?) 환자의 팔과 다리를 잘라낼 수 있었죠.
아울러 이런 미국에서의 마취제 시도는 거기 참여한 4명 모두에게 크나큰 상처를 안겨
주게 되죠.
누가 먼저 마취제를 사용했는가? 를 두고 치고 박았으니 말입니다.
그 4명.
- Crawford Williamson Long (1815.11.15 ~ 1878.06.16)
- Horace Wells (1815.01.21 ~ 1848.01.24)
- William Thomas Green Morton (1819.08.09 ~1868.07.15)
- Charles Thomas Jackson (1805.06.21 ~ 1880.08.28)
아마도 저중 크로포드 롱이 제일 나은 삶을 살았을 겁니다.
적어도 죽기 전까지 의사일을 한데다 - 아이를 받다 뇌졸중으로 죽게되는데 산모와 아
이부터 돌봐라고 하며 쓰러진 후 죽었다죠 - 죽은 후, 미 국회의사당의 National Stat-
uary Hall에 그의 전신상이 서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19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마취제들은 곧 유럽에서 빠르게 받
아들여졌고 의사들과 화학자, 약학자들은 재빨리 다른 마취효과가 있는 약물들을 찾아
내기 시작하죠.
물론 이 덕분에 수술은 이전보다 덜 부담스러운 일이 됐고 외과의(Surgeon)의 이미지도
달라지게 되죠.
뭐 리스터가 소독법을 정착시키기 전에 감염으로 사람 여럿 잡으셨던건 별 수 없었지만
서도.
--- 프랑스 잡지 Le Charivari에 실린 에테르의 혁신적인(?) 사용법(?) 1847년경
p.s:
손을 깨끗하게 씼는 것만으로도 환자를 덜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리스터 이전에도 알아
낸 사람이 있었죠.
산욕열(puerperal fever)에 대한 것은 히포크라테스 시절에도 나왔던 이야기입니다만
이게 본격적으로 표면에 떠올라 문제를 일으킨건 19세기 들어서입니다.
이전처럼 집에서 얘를 낳는게 아니라 병원에서 얘를 낳게 되면서 더욱.
이에 대해 미국의 올리버 웬델 훔즈(Oliver Wendell Holmes, 1809.08.29 ~ 1894.10.07)
가 1843년에 산욕열 환자를 진찰하고 손을 안씼은 의사는 산욕열 진찰을 하면 안된다와
옷도 갈아입어라는 주장을 했다가 무시 당합니다.
의사 자신이 죽음의 원인이 됐다는걸 인정하긴 어려운 문제였으니.
한편, 헝가리 출신(오스트리아)의 이그나츠 필립 젬멜바이스(Ignaz Philipp Semmelweis
1818.07.01 ~ 1865.08.13)는 당시로선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빈의 산과 병동에서 근무
하게 됐고 여기서 묘한 현상을 발견합니다.
의대생의 실습 과정을 지원하던 1병동과 조산부 교육 과정을 지원하던 2병동에서 각기
다른 산욕열 감염 결과가 나왔으니.
1병동
1841년 (사망 237 / 출산 3,036) * 100 = 7.8%
1842년 (사망 518 / 출산 3,287) * 100 = 15.8%
1843년 (사망 274 / 출산 3,060) * 100 = 9.0%
1844년 (사망 260 / 출산 3,157) * 100 = 8.2%
1845년 (사망 241 / 출산 3,492) * 100 = 6.9%
1846년 (사망 459 / 출산 4,010) * 100 = 11.4%
2병동
1841년 (사망 86 / 출산 2,442) * 100 = 3.5%
1842년 (사망 202 / 출산 2,659) * 100 = 7.6%
1843년 (사망 164 / 출산 2,739) * 100 = 6.0%
1844년 (사망 68 / 출산 2,956) * 100 = 2.3%
1845년 (사망 66 / 출산 3,241) * 100 = 2.0%
1846년 (사망 105 / 출산 3,754) * 100 = 2.8%
이 놈들이 무슨 짓을 한지 모르지만 의대생이 손댄 1병동의 사망율이 더 높게 나온
겁니다.
그리고 이 원인을 찾아보니...
1. 해부 하다가 그 손 고대로 안씼고 가서 진찰
2. 산욕열 걸린 환자 주무르던 손 안씼고 다른 환자 진료
3. 기타 하여튼 손 안씼음
1947년 3월 13일, 젬멜바이스의 절친 콜레츠카(Jakob Kolletschka)가 사망합니다.
병리학자이자 의사였던 그는 부검중 의대생의 실수로 칼에 찔리게 되고 그 때 입은
상처로 사망하게 되죠.
친구의 사체 부검을 보던 젬멜바이스, 친구가 죽은게 산욕열과 동일했다는걸 알고 그가
가진 의문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누구든 손에서 시취가 나는 사람은 진료하지 마라와 염화칼슘 용액으로 손을 씼
어라는 규칙을 만듭니다.
그 결과는 산욕열로 인한 사망율을 절반 이상 확 줄여 1%정도까지 내려보내게 되죠.
좋은 발견을 하게 됐으면 발표를 하는건 당연지사, 그런데 그 당시의 의사들이 보이던
태도를 꺽는데 실패합니다.
아니 되려 젬멜바이스만 또라이 취급을 받게 되고 그가 쓴 논문은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았고 의사로서의 길도 전혀 순탄하지 못하게 흘러갔죠.
결국 앞선 그리고 그닥 어렵지 않는 해결법을 생각한 선구자 젬멜바이스는 47세에 정신
병원에서 쓸쓸히 죽어갑니다. (그가 막으려 했던 산욕열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 이에 대해 알츠하이머중 조로성 치매로 죽었다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50 유로 동전에 세겨진 젬멜바이스
p.s:
조셉 리스터의 아버지 조셉 잭슨 리스터(Joseph Jackson Lister)는 퀘이커 교도이자 성
공한 주류 상인이자 아마추어 과학자로 색수차가 없는 현미경 렌즈를 개발하여 19세기
현미경의 발전에 큰 획을 그었으며 같은 퀘이커 교도인 호지킨(Thomas Hodgkin)과 함께
현미경을 사용하여 혈액, 특히 적혈구를 연구하죠. (호지킨은 그의 이름을 딴 악성 림
프종 Hodgkin's disease에 이름을 빌려주죠.)
이런 아버지 덕분이었는지 리스터 역시도 현미경을 사용한 혈액 연구를 시작했으며 역
시 현미경으로 시작한 파스퇴르의 연구를 수월하게 받아들이게 되죠.
한편 리스터는 또 다른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바로 장선(catgut)의 사용과 고무로된 배액관의 사용이죠.
이중 몸속에서 녹는 장선은 이전 시대에도 사용했으리라 보는 방법입니다.
서기 100년경의 갈레누스(Claudius Galenus)도 사용했다고 보니.
그러나 혈관을 묶어서 지혈하는 방법 자체가 시대에 따라 사용됐다 안됐다 하던터라 크
게 흔적을 남기지는 못한거죠. (앙브로아즈 파레가 혈관을 묶어서 지혈하는 방법을 알
아냈다라고 합니다만 파레 역시도 다른 외과의가 알아낸 방법을 검토하고 사용하며 기
록으로 남겼다고 보죠.)
여튼 18 ~ 19세기, 봉합사라면 대부분 비단실이나 은과 같은 금속, 말총등을 사용합니
다만 이들은 비홉수성이며 나중에 상처가 아물면 뽑아내야 하는 부담이 있었죠.
그나마 상처가 곪아 뽑기 쉬운 상황이면 괜찮지만 그러다 묶어둔 혈관이 풀리기라도 하
는 날에는 자칫하면 출혈 과다로 죽는 경우가 생겼으니.
리스터는 라켓이나 바이올린등에 사용되던 장선을 사용하며 일주일만에 몸속에서 홉수
된다는 것과 크롬산으로 처리하면 홉수 속도가 느려진다는걸 알아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합성 재료로 만든 봉합사가 나오는 와중에서도 간혹 리스터가 쓴 것과
비슷한 장선을 쓰는 경우가 있죠.
그러고보면 상표명에도 리스터의 이름을 사용한게 있긴 합니다.
바로 양치액인 리스테린(Listerine)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건 총에 맞지 않고 맞을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