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는 오합지졸이고 당나라 군대의 전형으로 비춰지는 남베트남군이지만, 그래도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이 북베트남군에게 함락되기 직전까지 남베트남을 위해 목숨걸고 싸운 정예 부대가 있었으니, 바로 남베트남 레인저(Bi ệt Ð ộng Quân)입니다.
베트남에서 특수부대 양성이 시작된 것은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창인 1951년 프랑스군이 나트랑에 코만도 훈련코스를 세우면서입니다. 당시 월맹군과 싸우던 프랑스군은 베트남인 현지 병력을 양성하면서 많은 수의 현지인들과 고산지대 부족들을 공수부대나 외인부대 등 정예부대에 징집했고, 월맹군의 후방에 침투할 목적의 현지인 게릴라부대를 양성하기 시작했지만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하면서 이 계획은 어그러집니다.
프랑스군의 자리를 대신한 미군 군사원조고문단(Military Assistance Advisory Group)은 1956년에 이 시설을 레인저 훈련학교로 바꾸고, 베트남전이 열기를 더하기 시작한 1960년에 첫 레인저부대가 배출됩니다. 미군 특수부대로부터 고된 훈련을 받고 미군 군사고문이 대대별로 배속된 레인저부대는 과감한 공중강습작전과 후방침투, 대게릴라작전을 펼치면서 미군 군사고문단으로부터 '남베트남군 가운데 유일하게 적군의 위협에 적절하게 대처할 능력을 가진 부대'라는 호평을 얻게 되죠.
남베트남군 레인저부대는 거듭되는 전투 속에서 그 규모 역시 증대되어 후방 특수작전뿐만 아니라 경보병으로서의 정규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정도의 규모로 성장합니다. 1968년의 구정 공세와 후에 전투, 1971년 '람손 719' 작전, 1972년 쾅트리와 안록 전투 등 남베트남군이 겪은 주요 격전에는 레인저부대가 항상 참전했고, 남베트남군의 각 군단별 책임지역에 미군 고문과 함께 배속되어 다낭, 플레이쿠, 다낭 등에 주둔하며 농촌 전역에서 준동하는 게릴라들을 진압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1973년경 되면 총 22개 레인저 대대로 불어나는데, 이때 파리 평화회담이 성사되고 미군 철수가 시작되면서 남베트남 국경 지대를 방어하는 CIDG나 몽타냐드 민병대, 마이크 포스 등 이전에는 미군 특수부대의 지휘 하에 있던 고산족 병력들이 모두 레인저 휘하로 편입되어 총 병력이 54개 대대에 14,000명 이상으로 2배 이상 늘어나지요.
남베트남군 레인저 부대는 악평을 받은 남베트남군 가운데서도 최정예였고, 장거리 정찰이나 후방 작전에서 정규전 등 다양한 환경에서 작전 수행 능력이 있었고, 사기와 훈련 정도도 일반 병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특히 레인저부대 가운데 1966년에 설립된 제 81레인저부대는 남베트남 육군 특수부대 LLDB 지휘 하에 있는 부대였고, 미군 특수부대와 종종 합동 침투작전을 벌이고 남베트남군 정보부의 직속 휘하 부대로 필수 불가결한 적군 정보를 수집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곤 했지요.
1975년 북베트남군의 대공세로 베트남 중부전선과 사이공이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 레인저는 공수부대, 해병대, LLDB, 해군 특수부대, 그리고 남베트남군 육군 사관생도들과 함께 최후까지 저항합니다. 4월 30일 당시 남베트남 대통령인 두옹반민이 공식적으로 항복하고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 소식을 전국으로 전달한 후에야 그들은 총을 내려놓죠. 많은 레인저부대 장교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위험 분자'로 몰려 오랜 시간 동안 노동교화소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남베트남군의 정예부대들의 투혼은 최후까지 불탔지만, 정권과 군부의 수뇌들이 모두 부패하거나 자기 몸 사리기만 바쁘고 나라가 뿌리까지 썩은 상황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역사의 파도와 맞설 순 없었습니다.
남베트남군 레인저는 월계수로 둘러싸인 화살 장식을 단 머룬 베레모를 프랑스식으로 착용했고, OG107 전투복이나 특유의 좁게 재단한 리프패턴 위장복을 착용했습니다. 위장이 칠해진 M1철모에 검은 표범이 그려진 철모는 레인저부대만의 상징이었죠. 사진을 보면 레인저부대에 군단 혹은 그룹별로 배속된 미군 고문관 역시 이들과 동일한 복장을 착용했지만 'US ARMY' 명찰과 원래 소속 부대, 그리고 계급장은 모두 미국식으로 착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